역사속 도시이야기66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창원 진해와의 통합으로 마산은 곧 단독 시로서의 이름을 잃게됩니다. 아쉬움과 함께 이 도시의 변천과정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도시는 형성과 변환이라는 두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생성해온 유기적 생명체입니다. 도시에는 그 곳에 존재했던 인간의 모든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의 변천과정은 곧 인류의 역사이자 기록이고, 도시의 형태는 인간의 구체적인 문화실체입니다. 도시(city)와 문명(civilization)이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인간의 성격과 행동양식이 선․후천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듯이 도시도 선천적 요인으로서의 자연조건과 후천적 요인인 역사적 과정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상황과 문제를 이해하고 미래 도시의 올바른 발전.. 2010. 4. 8. 오래된 사진 두 장 ‘삼광청주의 일제기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마산에는 근대산업유산들이 제법 남아 있다. 유산이라 말할 정도가 아니라도 옛 사진에 나타난 과거의 모습과 현재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사라져버린 지난 시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알려진 자료이긴 하지만 아직 못 본 분들을 위해 마산의 옛 사진 두 장을 소개한다. 첫째 자료는 1910년 경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의 어느 시기 마산 전경사진이다. 이 사진을 두고 개항기 마산사진이라고 소개한 곳도 있으나 잘못된 해석으로 보인다. 이유는 사진에 나타난 시가지 형태다. 일본인들이 스스로 지칭한 소위 신마산이 이미 형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도로의 개설 상태가 개항기를 훨씬 지난 1910년-1920년대 초반 경 어느 시기 임을 .. 2009. 12. 8. 마산도시의 발원지 「마산창(馬山倉)」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에 참여, 세 번째 도시 탐방에 나섰다. 낯익은 사람, 낯선 사람 모두 30여 명이었다. 평안안과 건너 편 창동 입구에서 걷기 시작해 처음 머문 곳이 마산창, 시간은 250년 전 영조 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시대 이전, 마산포는 고려시대 조창이었던 석두창과 고려 말 몽고군의 일본정벌 시도로 북적인 적도 했으나 조선시대 중기에는 조용한 포구였다. 마산포에 다시 사람이 모인 것은 대동미의 수납과 운반을 위한 조창, 즉 마산창(馬山倉) 때문이었다. 조용했던 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정기시장이 섰고, 전국의 다양한 상품들이 몰려왔다. 조창과 관련있는 관원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도 마산포를 찾았다. 그리고 이들과 마산포 인근주민들의 왕래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민가가 들어섰다. 동성·중성·.. 2009. 11. 23. ‘마산’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정립된 주장은 없다. 지금까지 제기된 주장들을 모았다. 일본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은 1926년에 간행한『마산항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창원 소재 오산진(현 산호동 용마고 부근)에도 매일 시체가 산을 이루어 50구, 30구 혹은 20구의 시체가 동시에 묻히는 등 참혹한 상황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 지역의 고로(古老)들이 서로 상의하여 유명한 풍수사에게 그 연유와 대책을 묻자 오산(午山)의 오(午)자에 문제가 많아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오(午)자 대신 같은 의미인 마(馬)자를 사용하라고 하여 오산(午山)을 마산(馬山)이라 개명하게 되고 이때부터 마산이란 지명이 생겼.. 2009. 11. 9. 술과 꽃의 도시 《유장근교수의「도시탐방대」에 참여해, 한 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마산의 술 공장과 벚꽃 휘날렸던 창원천을 둘러보니 일제기 ‘술과 꽃의 도시’로 명성이 높았던 ‘그 옛날 마산’이 생각나 이 글을 포스팅한다》 특정한 도시를 한두 가지 단어로 정확히 규정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도시건 그 도시 특유의 자연조건과 문화조건을 이용해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한다. 부산하면 항구, 진해하면 벚꽃, 춘천하면 호수 등과 같은 의미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경의 마산은 ‘술과 꽃의 도시’였다. - 술의 도시 마산 - 개항 직후인 1904년 최초로 아즈마(東)양조장이 설립된 이후 꾸준히 성장했던 마산의 양조산업은 1928년에 부산을 제치고 이윽고 국내 지역별 주조생산량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2009. 11. 2. 마산의 해안선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마산 해안선의 변화는 마산의 도시역사이다. 마산의 해안은 마산항 개항(1899년)으로 마산만, 즉 해안선을 기준으로 시가지가 구성되어져왔다. 특정목적을 위한 해안의 매립에는 도시의 근간을 바꾸는 것. 그래서 앞으로도 마산은 개항이후의 지난 110년을 거울삼아 앞으로의 100년을 내다보아야 함은 마땅하다. 얼마전 국립환경과학원에서 경기해안에서 전남 땅끝마을에 이르는 서해안 지역에 대한 자연경관의 특성과 형성 및 변화과정을 연구한 결과 서해안선의 총 길이가 20세기 초에 비해 약 1,400km(약 40%)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산시의 해안선은 (=시가지의 변화)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이 변화에 대해 박형규(마산 건축사)의 연구(해방이후 마산시 도시공간구조의 변천과 변화요인에 관한 연구)에.. 2009. 9. 7. 철도를 통해 본 마산의 도시사 〈경부선과 같은 해 개통된 철도 마산선〉 1899년 마산은 열강에 의해 개항되었다. 개항장 마산은 러시아와 일본의 야욕이 노골화 되었던 치욕적인 역사 현장이었다. 이들 두 제국은, 서로 먼저 대한해협의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해 마산을 무대로 갈등을 빚었다. 러일전쟁 종전으로 세력 다툼이 끝나자 이 도시의 운명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었다. 마산에 철도가 처음 개통된 것은 바로 그 즈음, 1905년 5월 25일이었다. 경부선 개통과 같은 해였으며 ‘마산선’이라 불렀다. 원래 마산선은 1904년 1월에 영남지선철도회사가 착공한 마산포와 삼랑진 간 철도였다. 영남지선철도회사는 한국정부의 외부참사를 지낸 바 있는 부산 태생의 박기종이 황족인 완순군 이재완을 앞세워 1902년 6월 한국정부 농상공부 대신으로부터.. 2009. 8. 7. 이전 1 ··· 20 21 22 2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