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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4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3 / 1954년 4월 16일 (금)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3

 

산협의 좁은 비렁(‘벼랑’의 방언)을 얼마쯤 나가니, 간데 마다 산은 백구질을 하여 황토만 노출(露出)한 독산인데 이 산 중복(中腹)쯤 되는 곳에 선생의 백골(白骨)이 묻혀있는 허물어진 분묘가 눈에 뜨이고 조금 아래 양지쪽에 두 봉(封)의 묘소가 있는데 이곳은 선생의 선친 선영이다.

노(老) 미망인은 여기서 시부모와 부군을 추억하는 듯 몇 개의 풀을 뽑고 있었다.

선생의 봉분 아래는 산이 급각도로 수직하며 묘소 정면은 협소하여 성묘하기에도 부자유하다.

선생이 지하에든지 봄바람 가을달이 몇 번이나 지났건만 찾는 사람 별로 없고 유족생계가 화급하여 그랬는지 봉축은 허물어져 황폐 그대로 이고 한 조각 표석조차 없으니 마음 없는 초동이야 지하의 고인이 어찌 누구인줄 알까보냐.

일행의 단심으로 묘전에 간단한 요핵(核)을 차려놓고 추념의 제를 지내게 되었으니 제문의 애절함에 전배자는 물론 유족의 단장애(斷腸哀)는 어느 누가 알아주랴.

오십 반평생 제물(祭物) 앞이나 무덤 앞에 절해본 일이 없는 기자가 뜻밖에도 이 날 제주(祭主)라는 직위로 초헌(初獻)을 올리고 절을 하게 된 것도 비망록에 기록하여 둘 일이다.

이어서 일행의 대표로 이(李) 마산시장이 아헌(亞獻), 다음으로 이 씨 문중 취객으로 허 금조(금융조합)이사의 순으로 정성껏 잔 들어 올리고 일동이 함께 재배하니 일행 중 백발이 휘날리는 윤치왕 군의학교 교장, 전 마산여고 교장 권영운 씨, 김형철 삼성병원장 등 삼노(三老)가 이날 특이한 채색(彩色)과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정성어린 추모의 제를 마치고 일행은 고인의 선영 앞 장방형으로 된 석축 위의 잔디에서 파제(罷祭) 제물을 벌려놓고 고인의 불타는 애국정신과 그 업적에 경탄과 찬양(讚揚)의 꽃을 피웠다.

아울러 허물어진 봉분의 수축, 유족의 생활대책 문제가 화제에 올라 즉석에서 선열의 기념사업 추진 발기인으로 권영운 김상용 양씨 외 기자 3명이 지명을 받고 단시일 내에 이 사업의 구체안을 구상하여 유종의 결실을 보도록 하였다.

각설(却說), 이교재 선생은 어떠한 경로를 밟고 어떠한 결과를 맺었는가 우선 윤곽만을 소개하고 상보(詳報)는 기념사업추위에 있을 것을 믿고 미루어 두기로 한다.

선생은 1919 독립운동이 전국 우내(宇內, 온 세계)에 창일하였을 때 감연(敢然)히 상해로 망명하여 당시 대한임시정부의 동지와 규합하고 굳은 결심과 사(死) 서(誓)하고(죽음을 맹세하고) 중대 밀명을 띈 밀사로 국내에 잠입 활약하였다함은 이미 소개한 바이나

국내 험의(험疑, ?) 처음 군자금 징모 사건으로 지명 수배되어 동지 이병수씨(현존)와 통영 마산 진주 방면으로 전전 피신하던 중 김도산 일행의 신파연극을 변장 관람 중 동(同) 고향인 오서리 출신 이만갑이라는 진주서 고등형사(부장)에게 발각 피검되어 혹독한 고문을 겪었으며 종시(終始) 일관(一貫) 굳게 입을 다물고 자백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치장 혹은 감방에서도 다만 동지들에게 「수구여병(守口如甁)」의 구호로써 동지들을 경고 하였다고한다.

5년 언도 후 공소심에서 3년형을 마치고 출옥 즉시 초지일관 백절불굴 조국광복의 열혈은 촌흐(寸?)도 냉(冷, 식다)함이 없이 상해 임정과 더욱 긴밀한 연락을 하다가 다시 혈고서파부(血告書播付, ?)사건이 발각되어 부산형무소에서 2년 언도를 받고 복역 중 일차 피검당시 전신 타박의 어혈병과 야만적 생식기 고문 여독의 화로 드디어 사십구 세를 일기로 열혈 심장의 고동도 장한을 품은 채 옥중에 정돈(停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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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2 / 1954년 4월 15일 (목)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2

 

일행은 이(李) 열사가 생전에 생장하셨다는 봉곡 부락 길가에 정차를 하고, 좁다란 밭 기슭을 타서 가면 신작로에서 불과 3·4분 만에 선생의 구거에 당도된다.

가옥은 농촌의 공통으로, 나지막한 토장(土墻, 흙담)과 싸리(柴, 시 / 산야에 절로 나는 왜소한 잡목)문을 들어서니 선생이 거처하던 노후하였던 집은 전항(前項)의 말과 같이 소실되고 소나무 향기와 흙냄새가 나는 새(新)집으로 변하였다.

이름과 외관만은 새집이지만 찬바람이 스며드는 쓸쓸하기 한량없으니 생계야말로 과반사(過半思)가 아닐까?

선생의 계보를 들어보면 수대를 두고 독자(獨子)로서 백숙형제(伯叔兄弟)가 없었고 원척(遠戚, 먼 일가) 외에는 혈혈 고독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으며 장(長)하여는 조국광복에 침식을 돌보지 않았으니 담석지저(儋石之儲, 얼마 되지 않는 액수의 저축)가 있을 리 없다.

불행한 혁명가의 후일은 천하의 통례인가?

선생이 순(殉, 목숨을 바침)한 후 유족으로서 금년 칠순의 홍태출 노온(老媼, 늙은 여인)과 일점혈육으로 당년 27세의 독녀 이태순 씨(현, 한철수 창원상공회의소 회장 모친)가 있을 뿐!

적적황요(寂寂荒寥, 매우 외롭고 쓸쓸함)한 이 애국가의 가정은 글자 그대로 모녀 단 두 사람이 형영상조(形影相吊, 의지할 곳 없이 몹시 외로움)로 슬픈 일 즐거운 일 무슨 일이고 간에 아무리 둘러보아도 두 사람 외에 논하고 의지할 곳이 없었다.

3·1운동 후 애국하는 열혈열사의 탄압이 그(其) 극에 달하자 옛날 친근자(親近者)도 종기가 다치는 듯 전부가 이들 유가족을 기피하고 소원(疎遠)이하였다.

이런 일을 지금 애국자로서 기세 올리는 자는 한번 자야(子夜, 밤 12시경의 한밤중) 사방이 고요할 때 남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 살펴 보아라.

양심 있는 자면 똥물에라도 빠져 죽어야할 것이어늘 어찌하여서 이 자들이 감히 두천족지(頭天足地)하는가?

지금 원척(遠戚)의 이정순 군이 양자로 입가하여 노부인을 돕고 있으나 부락민들까지도 선생의 구거(舊居)에 위문한 일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섭섭한 일이다.

왕년 백범 김구 선생이 일차 고(故) 동지의 유족을 위문한 외 사회·민간할 것 없이 금반 우리 일행이 최초인 모양이다.

홍 노온(老媼)은 우리 일행을 맞아들이며 과거 상해 임정으로부터 선생이 군자금모집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가졌든 조완구·김구 양 선생의 명의로 발부한 비밀지령서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귀한 기념물이다. 노부인은 감격과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종시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일행 중 마산 금조(金組, 금융조합) 허기중 씨로부터 우리를 일일이 소개하고 위문금으로써 윤 군의교장(軍醫校長), 최 65육군병원장, 유 항공수리창장, 김 동양주정사장, 이 마고교장, 손 마산교육감, 주 창원교육감, 이 마산시장 제씨로부터 각기 금일봉을 드리고 곧 이어서 열사가 고이 잠든 오서리 오리허(許, 오리쯤 떨어진)에 있는 대실골(竹谷山, 죽곡산) 묘지로 향하였다.

묘소로 향할 제(際)에 고인과 청년시절에 막역하였던 친우 오륙 명과 미망인 그리고 양자인 이 군 등의 길안내로 굽은 밭길을 지나 산기슭을 둘러서 안치된 분묘 앞에 도착되었을 시에는 시간은 벌써 4시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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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1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1 / 1954년 4월 14일 (수)

오늘부터의 포스팅은 창원지역에서 평생 언론인으로 살다간 목발(目拔) 김형윤(金亨潤) 선생이 남긴 기행문이다.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실렸고, 기고자는 본명 대신 ‘H 생’이라 되어 있다. 제목은 「삼진기행」이며 1954년 4월 14일부터 23일까지 9회 실렸다.

당시 마산일보 사장이었던 김형윤 선생이 15명의 벗들과 함께 1933년 순국한 독립지사 '죽헌 이교재 선생'의 유족을 찾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을 찾았던 기록이다.

 

<죽헌 이교재 선생>

 

이 글의 가치는 이교재 선생과 유족에 대한 내용과 함께,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당시의 삼진지역(진동, 진전, 진북)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다.

김형윤 선생의 기고문에 맞추어 모두 9회에 걸쳐 포스팅할 예정이다. 원문 그대로 옮기지만 일부 고문(古文)은 읽기 편하게 고쳐 쓰고, 설명이 필요한 경우 푸른 글로 첨가한다.

 

먼저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수록된 김형윤 선생(아래 우측 사진)을 소개한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에서 태어난 김형윤(金亨潤, 1903~1973)은 1915년 마산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21년 귀국하여 창원 산업 조합에서 근무했다.

1923년 조선일보 마산 지국 기자 생활을 시작으로 『남선 신문』, 『동아 일보』에서도 활동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아나키즘에 몰두하여 무정부 활동에 가담했으며, 1945년 12월 신탁 통치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종로 경찰서에 구금되어 1947년 봄에 석방되었다.

1947년 『남선 신문』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1948년 제호를 변경한 남조선 일보 사장 대리가 되었다. 1950년 『남조선 일보』를 『마산 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여 1966년 사직 때까지 편집과 경영 전반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73년 12월 5일 유작으로 『마산 야화(馬山野話)』가 발간되었고, 1974년 8월 18일에 마산 산호 공원에 불망비가 건립되었다.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1

4월 10일 천랑기청(天朗氣淸)한 오후 2시 반, 기자는 3·1 독립운동 시 순국하신 이교재 선생의 묘소 전배차 일행 15명과 더불어 자동차 다섯 대로 분승하고 마산일보 정문을 출발, 일로 창원군 진전 방면으로 향발하였다.

이번 전배하는 일행에는 과거 일정 시 변절 혹은 매절한 분자를 제외한 것이 마음 가운데 통쾌함을 금치 못한 것이다.

우산(牛山) 고개를 넘어 예곡을 거쳐 통칭 옛날 군도(群盜)가 출몰하던 ‘동전이 재’까지 가는 도중에는 농민 부역군들이 도로개수공사에 여념이 없어 우리 일행을 흔히 보는 시찰이나 유람객으로 아는 모양인 듯 본체만체 차 지난 뒤 사진(沙塵, 모래먼지) 속에서 꾸준히 일들만 하고 있다.

이윽고 진동읍내를 일관하여 서(西)로 달리는데 눈에 뜨이는 것은 6·25사변 당시 소개(疏開) 후 파괴되었던 집들이 모두 다 개축되어 각기 영세한 생을 개탁하여 조선(祖先)의 뼈 묻힌 고장에 깊이 뿌리를 박고 지상의 낙도로 삼고 있는 것은 무한히 아름다운 광경이다.

도로 우측 평야 저 편에 깎은 듯이 직하(直下)된 험한 산이 즉 사변 당시 적과 격전한 각드미산(여항산, 갓데미산)이라 한다.

만약에 적군이 침공하였을 때 이 산이 없었더라면 마산은 병풍 무학산도 존재의 가치를 보전하였을까 아닐까가 의심날 일이다.

적들의 중요한 거점인 이 각드미산이야말로 적들의 최후 운명을 결정한 방채선(防砦線)으로서 길이 기념하여야 할 곳이다.

구치사방 산정수정(驅馳四方 山程水程, 산길 물길 할 것 없이 사방으로 떠돌아 다님)식 19세기의 나그네가 아니니 한가히 고개로 이리저리 돌려볼 수 없을 터인데 삼진 방면을 소개하시던 마산서중 이기재 선생의 선도로 일행은 진전면 입구에서 일시 정지하였다.

장소는 다르지마는 노변석벽(路邊石壁)에는 3.1의거 시 동면(同面) 황교 교반에 공봉(棒)과 적권(赤拳)으로 무장한 왜적의 폭재(暴材)하는 진중으로 돌격하다 장렬한 호국의 신(神)으로 순한 김수동(원문에는 김동수로 되어 있음) 이기봉 씨 외 6선열의 창의비(진북면 지산리에 있는 팔의사 창의탑. 지금은 인근에 이전) 앞에서 잠시 묵례를 드리고 다시 황교의 고전장(古戰場)을 거쳐 목적하였던 이교재 선생의 유족이 계시는 봉곡리 도산부락에 도착한 것이 세 시를 훨씬 지나 30분 경이었다.

이 부락도 역시 적색분자가 침투할 것이라는 추측 아래 소개 명령을 받고난 뒤 연합군의 폭격례를 받고 전 부락 50여 호가 소실되었던 곳으로 가옥이야 태어난 팔자대로 일간 모 옥(屋)으로 신축하여 쓰라린 기억도 잊은 듯이 생기발랄한 것을 볼 때 파탄에 빠진 현재 농촌에도 언제나 영원한 봄 서광이 비쳐 오리라는 희망을 던져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 우리가 경(敬)공히 찾아뵈올 이교재 선생 유족의 가정과 생계는 어떠한가? 일행은 마음 초급히(焦急-, 시간 여유 없이 아주 급하게) 이(李) 선열 미망인의 주택을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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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2) -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이교재」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5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 「이교재」

 

1982년 3월 1일, 언론은 이교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였음을 증명하는 위임장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 동안 남몰래 보관해오던 선생의 양자인 이정순씨가 공개한 위임장은 가로 29cm 세로 20cm 크기의 명주천에 붓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다음 사항을 위임한다. 나, 애국지사 연락에 관한 일, 하나,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적 지방조직을 행할 일, 하나,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

(李敎載 右人을 慶尙南北 常駐代表로 右記事項을 委任함 一. 有志者 聯絡에 關한 일, 一. 獨立運動에 對한 秘密的 地方組織을 行할 일, 一. 政府에 對한 特殊獻誠을 勸行케 할 일, 大韓民國 十三年十一月二十日 大韓民國 臨時政府 內務長 趙琬九, 財務長 金九)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임시정부)의 내무장 조완구와 재무장 김구의 직인이 나란히 찍혀 있는 위임장이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발견되기는 처음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의 도(道)마다 대표를 임명하여 특별 임무를 부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주대표가 일본경찰에 의해 쫓겨다녔고 가족들도 보관하기보다는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위임장이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산을 찾은 백범 김구-

1946917일 창원군(현 마산시) 진전면 도산리에는 당시에는 보기 드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여 우리 민족의 지도자인 항일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죽헌 이교재 선생은 독립운동을 같이 하던 나의 동지였습니다. 이교재 선생이 살아 계셨더라면 지금 얼싸안고 반가이 맞아 주었을 텐데, 나라를 위해 먼저 순국하셨으니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진작 성묘도 하고 참배도 하고자 하였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이제야 찾아 왔습니다. 

 

해방 후 어수선한 정국 상황에도 불구하고 백범 김구 선생은 항일독립지사들의 유족을 위로 방문하기 위해 삼남지방(경남·전남·충남)으로 향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이 다른 곳보다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바로 이교재 선생의 유족이었다.

이는 이교재 선생에 대한 김구 선생의 각별한 애정을 알 수 있는 유명한 역사적 일화의 하나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죽헌(竹軒) 이교재(李敎載) 선생은 188779경남 마산시 진전면 오서리에서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남달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항일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한일합방이 되던 24세때였다. 그때부터 그는 고향에서 뜻이 맞는 동지를 모아 구국격문을 비밀리에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렇게 몰래 항일운동을 하던 중 1919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동지와 함께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돌리다가 진주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결국 이교재 선생은 대구법원에서 불온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26개월형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처음으로 옥고를 겪게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하다-

1921년 만기 출옥한 이교재 선생은 더 큰 뜻을 품고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당연히 상해임시정부에 가담하였고 곧이어 군자금 모금과 국내 연락책으로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비밀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통영군 김종원(金宗元) 집안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1923921일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교재 선생은 3년 간 마산교도소에 갇혀 두 번째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그는 국내의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를 가지고 상해로 되돌아가려다가 신의주 국경에서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간 세 번째 옥고를 겪게 되었다.

세 번째의 옥고를 치른 후 이교재 선생은 상해임시정부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교재 선생은 잠시 쉴 틈도 없이 얼마지 않아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서울에서 칼톱회를 조직하였다고 한다.

칼톱회는 고학생들의 조직으로 이교재 선생은 그들에게 독립사상을 심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톱회원들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지사들간의 연락을 맡는 등 여러 가지 지원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칼톱회의 구체적인 조직 형태가 현재에 전해지지 않아 선생의 활동을 정리하는데 많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1931년, 이교재 선생은 국내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다시 상해임시정부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같은 해 1120일,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장 백범 김구와 내무장 조완구로부터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 직위를 위임받게 된다.

이는 자신을 돌보지 않는 선생의 헌신적인 항일투쟁이 상해임시정부로부터 큰 신뢰를 얻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교재 선생은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서 또 다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부터 위임받은 임무는 모두 세 가지였다.

먼저, 경상남북도에 퍼져 있는 애국지사와 상해임시정부간에 연락책 역할을 하는 것이고 다음은, 각 지방에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임무는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이었다. 어느 것 하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진주로, 대구로, 또 창녕으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산에서 다시 경찰에게 체포돼 6년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하지만 경찰에게 체포된 후 당했던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부산교도소는 이교재 선생을 강제로 출소시켰다.

강제로 풀려난 지 10여일 만인 193321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47세의 젊은 나이로 조국의 해방을 보지도 못하고 순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선생이 죽은 이후에도 일제는 선생의 형기가 남았다는 이유로 그의 묘소에 철책을 설치하기도 했다.

 

-나라와 겨레의 임이로다-

이교재 선생의 독립활동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김구 선생의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이교재 선생은 학자고 선비입니다. 인격이 매우 고매하시고 지혜가 뛰어나시며 정의감과 애국심이 투철하신 분입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여러 번 만났는데 독립운동의 방법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관해 능력이 탁월하였습니다. 선생은 국내주재 조직 및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였습니다. 그의 임무는 장관 몇 명이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였습니다. 독립운동자금을 보내오고 연락이 자주 오다가 그만 연락이 끊겼습니다. 미처 조국의 광복을 못 보시고 순국하였으니 하느님이 원망스럽습니다. 

 

해방 당시 선생의 묘소는 애국지사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초라했다. 그러나 마산시 진전면 임곡리에 위치하고 있는 현재 묘소는 옛날의 묘소에 비하면 잘 정돈되어 있다.

그렇게 선생의 명예가 회복되는데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1954년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의 사장이었던 김형윤(작고)이 이교재 선생의 뜻을 기리는 추모회를 만들어 지역 유지와 학생들의 성금을 모금하여 현 위치로 묘소를 옮긴 것이다.

그 당시에 새로 세운 이교재 선생의 묘비에는 그의 의로운 투쟁을 기리는 글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상해가 세 번이라면 감옥은 네 번이요 기 꺾일줄있으랴만 몸은 이미 마쳤구나 아, 임이로다 나라와 겨레의 임이로다 

 

 

현재 이교재 선생의 묘소에 이르는 길은 마산시에 의해서 죽헌로(竹軒路)로 명명되어 그의 항일구국투쟁 정신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이교재 선생의 항일투쟁은 19633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제208호)을 추서 받아 국가로 부터 그의 공적을 공식 인정받게 되었다.<<<

허성진 / 당시 마산문화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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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4.10.20 09: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요즈임 사람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저절로 된것처럼 알고 있습니다.

    • 허정도 2014.10.23 22:59 address edit & del

      글쎄 말입니다

  2. 2014.11.10 22:4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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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의 포스팅은 창원지역에서 평생 언론인으로 살다간 목발(目拔) 김형윤(金亨潤) 선생이 남긴 기행문이다.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실렸고, 기고자는 본명 대신 &lsquo;H 생&rsquo;이라 되어 있다. 제목은 「삼진기..

총독에게 폭탄 던진 65세 강우규 의사

부끄러웠던 그날 저녁 지난 9월 19일 옛 서울 역 건물에서 열린 &lsquo;대한민국 건축문화제&rsquo;에 갔다가 역 광장에서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의사 동상을 처음 보았다. 세운지 오래되었겠지만 서울 갈 일이 ..

재생에너지만 사용하는 구글과 애플

탈원전 정책 차질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탈핵경남시민행동 공동대표 박종권 지난 9월 3일 창원시정연구원과 창원상공회의소는 &lsquo;정부 에너지 정책 변화와 지역 경제 세미나&rsquo;를 개최해 원전 산업이 살아 있는 상태..

2003년생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의 외침

어른들, 언제까지 돈타령만 할 건가? 최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2003년생 소녀 그레타 툰베리에 대한 이야깁니다. 스웨덴의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9월 23일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 연설자로 나섰습니다. ..

탈원전 정책은 유지되어야 한다

에너지전환은 전 세계 추세, 새 원전 건설은 결코 안돼 요즘 창원 경제가 정부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어렵고 260 여개 원전 관련업체의 생존이 위태롭다고 한다. 창원시정연구원은 탈석탄.탈원전 등 정부 에너지 정책이 급변하면서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기후위기, 시간이 없습니다"

"기후위기, 시간이 없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의 주인공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가 2014년 9월 24일 유엔 기후변화 정상회담에 모인 세계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지금 기후변..

꽃과 미녀의 도시, 콜롬비아 메데진(Medellin) - 7 / 보테로의 도시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 1932~ ) 일정 중 틈을 내 메데진 사람들의 자부심 미술가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를 감상했다. 보테로(Fernando Botero)는 콜롬비아의 화가..

꽃과 미녀의 도시, 콜롬비아 메데진(Medellin) - 6 / 국제 시(詩) 축제

아래의 글은 도시연구자 박용남 선생의 글을 참조하였습니다. 시(詩)가 도시를 살릴 수 있을까? 시인(혹은 시)을 매개로 개최되는 축제는 국내에도 많다. 축제 분위기는 대부분 서정적이다. 하지만 메데진의 &lsquo;국제 시(詩..

꽃과 미녀의 도시, 콜롬비아 메데진(Medellin) - 5 / 빈민은행 Bancuadra

이 글은 도시연구자 박용남 선생의 글을 참조하였습니다. &ldquo;어느 누구도 그들이 사는 곳 때문에 그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를 거절당해서는 안 된다.&rdquo; 이 슬로건으로 하층민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방사능 올림픽은 절대로 안된다

성명서 / 탈핵경남시민행동 그린피스의 원자력 분야 전문가인 &lsquo;숀 버니&rsquo; 그린피스 수석은 &lsquo;이코노미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일본정부는 방사능 오염수 110만 톤을 바다로 방류할 계획이 있다고 주장..

꽃과 미녀의 도시, 콜롬비아 메데진(Medellin) - 4 / K-LINE Cable Metro

-그들의 도전- 통영 및 여수, 최근 다시 속도를 내고 있는 설악 오색케이블카 등 우리사회에서 케이블카 설치는 지역의 관광산업의 활성화의 중요한 화두로 부각되고 있다. 그에 따른 지역개발과 환경보전 사이의 논쟁이 끊이지 않는 ..

꽃과 미녀의 도시, 콜롬비아 메데진(Medellin) - 3 / COMUNA 13

-평화를 회복하다- 메데진市의 16구역 중 13구역(La comuna 13)은 마약갱단과 반군들의 주둔지로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였다. 지금의 'COMUNA 13'은 2002년 10월 16일 내린 Alvar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