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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재2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2 본 회까지 총 12회에 걸쳐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포스팅하였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Ⅴ.맺음말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 두어 가지를 언급하면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이교재(우측 사진)의 사망 상황과 관련된 것이다. 현재까지는 옥사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예컨대 “부산형무소에서 2년 언도를 받고 복역중 1차 피검 당시의 전신.. 2020. 3. 9.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1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4)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상해격발」이라는 문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상화 소장 「상해격발」 참조.) 비단 위에 인쇄된 이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큰 주제는 ‘建國記念日建國對策建議案’이다. 현재 존재하는 임정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건의안인 셈이다. 격발의 대상은 국내와 韓僑를 포함하는 모든 선생이며, 이를 위해 특파원으로 李中光을 임명한다는 것이다. 건의안은 크게 임시정부 사명과 특파원 임무로 대별된다. 임시정부 사명에는 ‘建國策定衆議, 議會出席豫期, 議會日當通告, 各自集會決議, 統合機關組織, 戰務俱體議定’ 등 7개항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특파원의 임무는 ‘使命宣傳, 大勢宣傳, 黨員組織, 別隊組織, 戰資豫約, 交通部立, .. 2020. 3. 2.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0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3) 그렇다면 개별 문건들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이교재(우측 사진)가 전달하려던 문건 중에는 달성의 문영박(호는 장지, 1880~1930)에게 보내려던 두 종류의 문건이 있다. 하나는 문영박이 사망한 데 대해 임정에서 뒤늦게 조문한다는 추조문으로 내용은 ‘追弔 本國 慶北達成 大韓國春秋之翁 文章之先生之靈 大韓民國臨時政府一同’으로 되어 있다. 문영박은 1930년 12월 18일에 사망하였는데, 문서의 작성일자는 1931년 10월 3일이었으므로 사망한 지 10여 개월이 지난 뒤에 조문을 한 셈이다. 그의 자녀들, 곧 문대효에게 보낸 특발문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日中大事變’ 곧 1931년 9월의 만주사변이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고 있어서 국내에서 호응하면.. 2020. 2. 24.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9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2) 이교재(우측 사진)의 임정문서 일부가 동아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는 이정순의 아들인 이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이상화와의 면담은 2017년 9월 27일 마산의 이디야 커피집에서 있었다. 그는 부친께서 동아대학교 총장에게 기증하였다고 말하였다.) 해당 박물관에 찾아간 결과 밀양의 황상규에게 보내는 추조문, 창녕의 성낙문에게 보내는 특발문, 그리고 두 통의 편지 등 4개의 문건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간 까닭까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이상화의 말에 따르면 부친이 동아대학교 총장인 정재환에게 기증하였다는 것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소장자료 목록(74-4)과 관계자에 따르면(관련자료는 두 가지로서 1)분류번.. 2020. 2. 17.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8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운동 중에서 증거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부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급한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라는 위임장을 비롯하여 다종의 문건을 휴대하고 입국한 일일 것이다.(여기서는 ‘임명장’보다 ‘위임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경상남북도상주대표’에게 독립운동과 관련한 여러 가지 중요한 사항을 위임한 까닭이다.) 작성연도 중 제일 늦은 것이 1931년 11월 20일이니만큼 그의 입국은 상해에서 창원군 진전면까지의 거리나 교통 수단 등을 생각하면 빨라도 1932년 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교재가 국내에 가지고 들어온 이른바 ‘이교재임정문서’를 중심으로 그의 마지막 독립활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까지 필자가 조사해서 파악한 .. 2020. 2. 1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7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2) 이교재(우측 사진)가 상해 임정에 도착한 1921년대 혹은 1922년대 초는 임정으로서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베르사이유 체제가 공고화되고, 임정 내의 갈등도 증폭되었으며, 국내외의 독립자금 지원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임정은 1922년 이후 독립전쟁 준비론으로 나아갔다. 1922년 10월 여운형과 김구 중심의 임정 요인들은 한국노병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전쟁 준비 방략의 일환이었다. 곧 노동과 군사를 겸한 인물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면서 일본이 국제 전쟁에 휘말릴 때를 기다려 독립전쟁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임정에서 이것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이었고, 거기에는 중국.. 2020. 2. 3.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6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투쟁에서 두 번째 단계는 상해로 망명한 다음 상해 임시 정부의 일원으로서 활동한 시기이다. 그는 상해에 언제 갔으며, 어떻게 갔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은 없다. 가장 확실한 것은 임정의 지시를 받아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기록이다. 1923년 9월 21일에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재판을 받은 사실이 있다. 따라서 3.1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간 뒤 출옥했을 1921년 12월 이후에 상해행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간의 국내 기록들은 ‘3.1만세운동이 전국에 한창일 때 감연히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동지와 규합’하였다거나,(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 2020. 1. 27.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5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4) 그렇다면 이교재와 함께 형무소에 갇힌 위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순서대로 적힌 인물들을 검토해 보자. 沈相沅에 관한 기록은 재판 기록 이외에서는 신상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형량에 있어서 이교재보다 적지만 다른 이들보다는 많은 1년 형이다. 다음으로 서석천의 경우, 1949년 4월에 발간된 한 언론에 실린 19명의 명단 속에 그의 이름이 있다.(민주중보 제1034호(7권) 1949년 4월 29일자. 이곳에 실린 명단은 沈倫, 金義植, 南海, 咸陽 金守東, 洪源轍, 徐錫天, 孫吉童, 朴洙東, 統營 金宜錫, 洪鍾濟, 宋孟守, 朴○漢, 馬山 金浩鉉, 高昇柱, 卞甲섭, 金英煥, 洪斗益, 卞相福, 李基鳳 등이다.) 이들 중에서 예컨대 마산지역 출신으로 구.. 2020. 1. 2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4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3) 이교재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뛰어든 것은 3.1운동 때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의 동지와 더불어 선언서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문건들을 道內 일원에 배부하다가 오서리 출신의 경찰인 이만갑에 의해 체포되어 진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고 알려졌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6쪽) 위와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간 독립만세 시위에 대한 참여나 체포 과정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적지 않았다. 다음의 기록은 그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1919년 7월 3일에 경상남도 장관인 사사키(佐佐木藤太郞)가 조선총독 하세가와에게 보낸 「소요에 관한 건(제7보)」에 따르면(문서제목, 「騷擾に關する件(第7報.. 2020. 1. 13.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3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2) 이교재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조선조 말기와 대한제국시기에 진전면 일대에는 몇몇 서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마을 단위이자 문중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문중 중에서도 이 지역의 주요 문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권씨, 초계변씨, 선산김씨, 밀성박씨, 창녕조씨, 회산황씨 등이 각각의 문중에 서당을 소유하고 있었고, 안동권씨가 운영하던 경행재도 그 중의 하나였다. (진전면에는 일암리의 誠久祠 경내의 道山書堂(草溪卞氏 문중), 오서리 동대에 있는 景行齋(安東權氏 문중), 오서리 서대(회동이 맞음. 필자주)에 있는 龜川精舍(密城朴氏 문중), 오서리 탑동에 있는 西溪精舍(安東權氏 문중) 등이 있었으며, 20세기에도 근곡리의 慕遠堂(善山金氏 문중), 평암리 미.. 2020. 1. 6.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2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1) 이교재(사진)는 1887년(고종 24년) 7월 9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가 부농의 아들이었다는 기술이 있지만(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삼진독립운동사, 2001, 234쪽) 어느 정도의 부농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오서리 578번지의 대지 규모를 보면 적어도 중농 이상의 농가였다고 생각된다. 현재 세 필지로 구획된 이곳에는 1931년 당시 목조 초가 본채 건물 3평과 부속의 목조 초가 3평, 그리고 물건적치용 건물 각각 1평 5홉, 1평 2홉 등 모두 4채가 있었다.(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발행, 폐쇄등기부 증명서 고유번호 19.. 2019. 12. 3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 1 앞서 9회에 걸쳐 1954년 김형윤 선생이 마산일보에 기고한 '이교재 선생 생가 기행문' 「삼진기행」을 포스팅했다. 오늘부터는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11회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목 차 Ⅰ. 머리말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군자금 모금사건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2019. 12. 23.
김형윤의 <삼진기행> 8 / 1954년 4월 22일 (목)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2 논둑 받아(?) 둑아 날 살리라 심의중(沈宜中)이 불콩이 날 죽인다! 이것은 누구의 창작인지 미상이나 지금도 산야엘 가면 나물 캐는 촌새악씨나 나무하는 목동이나 또는 소먹이는 어린 목동의 애절한 목소리와 가련한 입에서 구(舊)아리랑 곡으로 처량히 흘러내리는 민요라 한다. 이 민요는 누가 들어도 직해(直解)할 수 있는 것이니 삼진부락민이 기미년 독립운동 당시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러 진주(進駐)하여 가는 도중 황교교각에서 잠복하였던 일인 헌병과 협력한 보조헌병 심의중이라는 악도가 있었는데 일본헌병이 처음에는 공포(空砲)로 위협하고 일보 더 접근되자 적두(赤豆)로 유인하여 사정 내에 애국용사가 돌입하였을 때 최선두에서 제1발을 쏜 자가 심의중이라는 자라고 한다.. 2019. 12. 9.
김형윤의 <삼진기행> 7 / 1954년 4월 21일 (수)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1 우리일행은 이교재선생의 묘소에 정중한 전배식(展拜式)을 마치고 산에서 마을까지 내려왔을 때에는 사양(斜陽)이 부락에 빚칠 때이다. 일행은 노부인과 작별인사를 할 때 굵은 눈물방울이 양 볼에 흘러내리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양친을 일찍 여읜 기자의 가슴속에 형상할 수 없는 만감이 충격한다. 기자는 다시 노부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후일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떠나면서 고개를 잠시 돌려보니 아직도 동구(洞口)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서있다. 마치 자식을 먼 길로 보내는 자모(慈母)와도 같다. 일행은 급급히 회로(回路)를 달리며 다시 한 번 황교 좌우를 돌려보며 1919년 삼일독립전투시를 회상해본다. 1919년이면 지금부터 손꼽아서 삼십육 년이라는 옛날이다... 2019. 12. 2.
김형윤의 <삼진기행> 6 / 1954년 4월 20일 (화)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6 불우 순국열사들!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백년 일세기를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의 식민지로서 정치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치명상을 입고 경제적으로 약탈착취(掠奪搾取)를 완부(完膚, 흠이 없이 완전함) 없이 당(當)튼 남방아주(南方亞洲)의 태반에 걸쳐 반거하고 있는 인도보다 그 인구에 있어서 십분의 일에도 불과하며 피치(被治) 연월도 삼십육 년이지마는 약소민족 투쟁기록은 세계 독립운동사상 이 나라 우에 따라올 국가가 없다. 비폭력을 내세운 미약독립투쟁! 비협력인 「스와라지」운동(1906년 인도에서 전개되었던 반영 자치 운동)으로 도저히 주권탈환을 기약할 수 없는 일이므로 외국의 노예제도의「멍에」에서 벗어나는 데는 그 나라 민족전체가 선혈을 뿌리.. 2019. 11. 25.
김형윤의 <삼진기행> 5 / 1954년 4월 18일 (일)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5 그러면 다른 말은 잠간(暫間, '잠깐'의 비표준어) 차정(次頂)에 미루어두기로 하고 정부에서는 무수한 순국열사에게 무엇으로 보답하였으며 무엇을 하려고 구상하고 있는가? 또 누구의 은덕으로 대한민국의 자모(慈母) 품안에서 평안히 행복 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를 한번이라도 돌이켜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현재 국가의 요직에 안如히 있는 자(者) 중에 진심으로 민족 전체의 이해(利害) 휴척(休戚,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일)을 염두에 두고 적성(赤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 국가를 걱정해본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는가? 8.15가 지난 기년(幾年, 몇 해) 후 정부에서는 각도(各道)를 통하여 애국자 병.. 2019. 11. 18.
김형윤의 <삼진기행> 3 / 1954년 4월 16일 (금)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3 산협의 좁은 비렁(‘벼랑’의 방언)을 얼마쯤 나가니, 간데 마다 산은 백구질을 하여 황토만 노출(露出)한 독산인데 이 산 중복(中腹)쯤 되는 곳에 선생의 백골(白骨)이 묻혀있는 허물어진 분묘가 눈에 뜨이고 조금 아래 양지쪽에 두 봉(封)의 묘소가 있는데 이곳은 선생의 선친 선영이다. 노(老) 미망인은 여기서 시부모와 부군을 추억하는 듯 몇 개의 풀을 뽑고 있었다. 선생의 봉분 아래는 산이 급각도로 수직하며 묘소 정면은 협소하여 성묘하기에도 부자유하다. 선생이 지하에든지 봄바람 가을달이 몇 번이나 지났건만 찾는 사람 별로 없고 유족생계가 화급하여 그랬는지 봉축은 허물어져 황폐 그대로 이고 한 조각 표석조차 없으니 마음 없는 초동이야 지하의 고인이 어찌.. 2019. 11. 4.
김형윤의 <삼진기행> 2 / 1954년 4월 15일 (목)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2 일행은 이(李) 열사가 생전에 생장하셨다는 봉곡 부락 길가에 정차를 하고, 좁다란 밭 기슭을 타서 가면 신작로에서 불과 3·4분 만에 선생의 구거에 당도된다. 가옥은 농촌의 공통으로, 나지막한 토장(土墻, 흙담)과 싸리(柴, 시 / 산야에 절로 나는 왜소한 잡목)문을 들어서니 선생이 거처하던 노후하였던 집은 전항(前項)의 말과 같이 소실되고 소나무 향기와 흙냄새가 나는 새(新)집으로 변하였다. 이름과 외관만은 새집이지만 찬바람이 스며드는 쓸쓸하기 한량없으니 생계야말로 과반사(過半思)가 아닐까? 선생의 계보를 들어보면 수대를 두고 독자(獨子)로서 백숙형제(伯叔兄弟)가 없었고 원척(遠戚, 먼 일가) 외에는 혈혈 고독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으며 장(長)하여.. 2019. 10. 28.
김형윤의 <삼진기행> 1 / 1954년 4월 14일 (수) 오늘부터의 포스팅은 창원지역에서 평생 언론인으로 살다간 목발(目拔) 김형윤(金亨潤) 선생이 남긴 기행문이다.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실렸고, 기고자는 본명 대신 ‘H 생’이라 되어 있다. 제목은 「삼진기행」이며 1954년 4월 14일부터 23일까지 9회 실렸다. 당시 마산일보 사장이었던 김형윤 선생이 15명의 벗들과 함께 1933년 순국한 독립지사 '죽헌 이교재 선생'의 유족을 찾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을 찾았던 기록이다. 이 글의 가치는 이교재 선생과 유족에 대한 내용과 함께,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당시의 삼진지역(진동, 진전, 진북)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다. 김형윤 선생의 기고문에 맞추어 모두 9회에 걸쳐 포스팅할 예정이다. 원문 그대로 옮기지만 일부 고문(古文)은 읽기 편하게 고쳐 쓰고,.. 2019. 10. 21.
마산창원 역사 읽기 (22) -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이교재」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5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 「이교재」 1982년 3월 1일, 언론은 이교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였음을 증명하는 위임장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 동안 남몰래 보관해오던 선생의 양자인 이정순씨가 공개한 위임장은 가로 29cm 세로 20cm 크기의 명주천에 붓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다음 사항을 위임한다. 하나, 애국지사 연락에 관한 일, 하나,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적 지방조직을 행할 일, 하나,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 (李敎載 右人을 慶尙南北 常駐代表로 右記事項을 委任함 一. 有志者 聯絡에 關한 일, 一. 獨立運動에 對한 秘密的 地方組織을 行할 일, 一. 政府에 對한 特殊獻誠을 勸行케 할 일, 大韓民國 .. 2014.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