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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9.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2

본 회까지 총 12회에 걸쳐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포스팅하였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Ⅴ.맺음말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 두어 가지를 언급하면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이교재(우측 사진)의 사망 상황과 관련된 것이다. 현재까지는 옥사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예컨대 “부산형무소에서 2년 언도를 받고 복역중 1차 피검 당시의 전신타박과 고문의 여독으로 49세의 일기로 옥중에서 정돈”이라는 1954년 4월의 이교재댁 방문 기사가 그렇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이보다 7년 뒤에 동일한 신문사에서 작성한 이교재의 추도식 관련 기사에는 “진주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는 추도문을 전하기도 하였다.(「죽헌 이교재 열사, 32주기 추도회, 4월 17일」, 마산일보, 1961년 4월 1일자)

이보다 10여 년 뒤에도 변지섭은 “1931년 사명을 띠고 입국, 진주의 허만정, 달성의 문대효, 창녕의 성낙문 등 부호가를 역방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事露하여 마산경찰서에 피검, 부산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영면”하였다고 기술하였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8쪽. 그러나 문대효, 성낙문 등 부호가를 역방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피검되었다는 기술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각종 문건이 세상에 드러난 이후의 사실을 과거에 소급하였기 때문이다. 이교재는 문대효나 성낙문을 방문하지 못하였다)

이 기술은 사실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이교재는 위의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채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설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망 직후에 나온 신문 보도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교재의 사망 직후 동아일보는 「이교재씨 영면」이라는 제목 아래 “신유년 통영 사건으로 6년간의 철창생활을 겪고 나온 후 이래 10수년간을 해내외로 다니며 많은 활동을 하던 斗山 이교재씨는 풍상에 받은 악질로서 수년 동안 신음하던 바 불행히 지난 12일에 씨의 고향인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영영 이 세상을 이별하였다 한다.

유족으로는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고, 다만 80노모와 미망인 홍씨가 있을 뿐이라 한다”고 그의 부음을 전하였다.(「이교재씨 영면, 신유년통영사건으로 옥고 후 신음 중」, 동아일보, 1933년 3월 1일자)

“풍상에 받은 악질로서 수년 동안 신음하던 바.. 자택에서 세상을 이별”이라고 한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수년간 병으로 신음하였고, 마침내 악질로 인해 자택에서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만 ‘신유년 통영사건’이라거나 ‘6년간의 철창생활’은 잘못된 설명이다.

통영사건은 신유년(1921)이 아니라 1923년(임술)에 있었으며 감옥생활 역시 4년이었기 때문이다.

부산교도소라든가 옥사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가족으로는 부인과 노모 외에 8살 된 딸이 있었으나, 이 역시 빠트렸다.

따라서 이 신문기사에는 세 가지 정도의 오류가 있지만 죽음과 직접 관련되는 오류는 아니다.

이교재의 사망과 관련된 최초이자 당시의 기사라는 점에서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와병 중에 사망하였다는 사실은 김구의 백범일지에서도 확인된다.

그가 해방 이후 삼진의 이교재 묘소를 참배하고 유족들을 만난 뒤의 글에 따르면, “과거 상해 체류시 본국으로 파견하여 운동하다가 옥중 고문을 받고 결국 그 여독으로 세상을 떠난 이교재 지사의 유가족을 방문, 위로” 하였다는 것이다.(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417쪽)

와병의 원인을 각각 악질과 고문의 여독으로 약간 달리 보았지만, 악질 역시 고문의 후유증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두 종류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부산교도소 수감되었다거나 옥사하였다는 이야기는 결정적인 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믿기 어렵다.

진전면에 소장된 범죄인명부에도 이 사실이 기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와병 중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또한 그의 사망 뒤 집이 경매에 넘어갔을 정도로 경제 사정은 극히 어려웠다. 당시의 건물등기부에 따르면,(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건물등기부, 고유번호 1901-1912-162796. 2017년 10월 24일 발행) 이교재의 집은 그의 사망 직후인 1933년 3월 20일에 馬山府 萬町(오늘날의 동성동, 필자)에 사는 川崎泰次(가와사키는 함안군의 일본인 토지소유 중 11,197평으로 전체 25,305평 중 약 44%를 차지한 지주였다-이정은, 「경남 함안군 3.1독립운동」, 122~123쪽)에게 4백엔에 저당 잡혔으나 빚을 갚지 못해 경매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통영에 사는 朴喜鎣(박희형은 통영에 있는 하동집 박진영의 장손이고 통영군자금사건에 연루되었던 박성숙의 조카이다. 통영사연구회 회장 박형균의 증언에 따른다. 박형균은 박희영의 아들이다-2019년 4월 1일 인터뷰)이 이를 갚으면서 경매가 취하되었고, 최종적으로 그 집은 이교재의 모친인 金受室에게 유산으로 상속되었다.(김수실은 이교재의 모친이었다. 이교재의 손부인 조혜옥의 증언에 따른다-2019년 3월 27일 인터뷰)

이러한 어려움이 그의 유족으로 하여금 동대 마을을 떠나 도산 마을로 이주하게 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도산 마을을 방문한 김형윤은 ‘한두 섬의 저축이 있을 리 없는’ ‘불행한 혁명가’로 묘사하였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자)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이교재의 독립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초기의 독립운동에서 마지막 단계까지 초지일관 해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영역의 확대와 심화가 두드러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10년대 직후의 초기 단계에서 이교재는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삼진 지역의 3.1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넘어서 진주지역으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량이나 형명으로 본다면 단순 참가가 아닌 주도자의 역할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상해 망명 직후에 전개된 것으로, 주요 임무는 국내에 밀입국하여 군자금을 모으는데 진력한 일이었다.

통영에서 항일적 지사와 인척을 통해 군자금을 모으는 임무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간 이 지역에서 구축한 그의 조직 능력과 군자금 모금에 대한 그의 책임감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이 시기의 임정은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이교재와 같이 헌신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임정이 1931년 9월에 시작된 중국 동북침략전쟁(만주사변)을 반침략전쟁의 중요한 기회로 삼고 이봉창·윤봉길 의사들의 거사를 통해 광복을 도모하던 때에 국내에 파견되어 그에 호응하는 조직을 갖추면서 준비하던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이교재가 1931년 11월 말 이후 입국시 휴대하고 들어온 9개의 문건은 임정의 광복계획과 그에 따른 이교재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휴대한 문서에 따르면 창녕·밀양·진주·달성 등 경상남북도 지역에 임정의 후원망이 있었고, 이교재는 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활용하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임정 설립 직후 구축한 연통제나 교통국이 일제의 단속에 의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교재는 특파원으로서 이 과업을 수행하였으니, 임정의 국내연락망은 1930년대에도 여전히 살아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두 번째의 의미는 이교재가 그의 본거지이자 초기 활동무대였던 경남과 상해의 임정이라는 두 지역을 연계하면서 임정이 추구하는 조국광복이라는 광대한 목표를 지역이라는 맥락 속에서 실천했던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의미는 임정에서 부여한 군자금 모집에 많은 힘을 기울였고, 독립운동의 방법론과 조직화에 큰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였다는 점이다.

해방 뒤에 김구가 이교재의 묘소에 와서 남긴 말은, 단순한 상찬을 넘어서 그의 업적을 정확하게 평가한 것이었고, 임정문서를 휴대하고 입국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투고일 : 4월 22일 심사일 : 5월 17일 게재확정일 : 6월 3일

주제어 : 이교재, 창원 진전면 오서리, 경행재, 3.1독립운동, 상해 임시정부, 통영군

자금모금사건, 이교재임정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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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1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4)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상해격발」이라는 문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상화 소장 「상해격발」 참조.)

비단 위에 인쇄된 이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큰 주제는 ‘建國記念日建國對策建議案’이다. 현재 존재하는 임정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건의안인 셈이다.

격발의 대상은 국내와 韓僑를 포함하는 모든 선생이며, 이를 위해 특파원으로 李中光을 임명한다는 것이다. 건의안은 크게 임시정부 사명과 특파원 임무로 대별된다.

임시정부 사명에는 ‘建國策定衆議, 議會出席豫期, 議會日當通告, 各自集會決議, 統合機關組織, 戰務俱體議定’ 등 7개항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특파원의 임무는 ‘使命宣傳, 大勢宣傳, 黨員組織, 別隊組織, 戰資豫約, 交通部立, 交涉報告, 抗議報告’ 등 8개 항목이다.

요컨대 임정에서는 건국대책을, 의회에서는 항시 준비를, 각 기관과 조직을 통합하면서 戰務에 구체적으로 대비할 것을 사명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특파원들은 大勢, 곧 ‘일중대사변’으로 인해 광복의 기회가 이르렀다고 선전하는 일과 새로운 조직을 갖추면서 전쟁비용을 예비하고, 교섭이나 항의 사항을 보고하는 임무 등을 부여하였다.

이 과업을 수행할 특파원인 李中光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국내와 일본까지 활동범위에 넣고 있는 것으로 보아 특파원 중에서도 최상위의 요인이 아닐까 하지만, 현재까지 어떠한 독립운동 자료에도 검색되지는 않는다.

특파원 임무를 총괄하는 만큼 각 지역이나 각 업무에 맞는 특파원들도 있었을 것이나 이 역시 확인되지는 않는다.

여하튼 이 문건의 존재는 임정에서 새로 출현한 동아시아의 정세에 따라 국내외에서 총궐기하도록 격문을 만들었다는 점이고, 이것을 이교재에게 휴대하고 입국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이교재(위 사진) 역시 이러한 과업을 수행할 특파원이었고, 나아가 임정과 국내의 독립 세력을 연계하는 역할도 떠맡은 다중적 특파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것은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몇 가지 중요사항을 위임한다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위임장이다.(원본은 이상화가 소장하고 있으며, 복사본은 창원시 진전면 애국사당에 전시되어 있다.)

발행일은 대한민국 13년(1931) 11월 20일, 발행인은 임정의 내무장 조완구와 재무장 김구이다.

두 사람의 친필 사인이 쓰여 있고, 또 두 부서의 관인까지 찍혀 있어서 임정에서 발행한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임정은 이 위임장에서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다음의 몇 가지 중요 임무를 위임하였다.

1) 유지자 연락에 관한 일,

2)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적 지방조직을 행할 일,

3) 정부에 대한 특수헌성을 권행케 할 일 등 세 가지이다.

유지 연락, 비밀스런 독립조직, 그리고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도록 권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진 임무였다.

문제는 임정이 이러한 중차대한 임무를 왜 이교재에게 맡겼는가 하는 점이다.

독립 이후 진전의 이교재 묘소를 참배한 김구에 따르면(허성진,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 이교재」, 마산 창원 역사읽기, 불휘, 2003, 145쪽. 김구 선생이 진전면 이교재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 때는 1946년 9월 17일이다. 진전면 임곡리 이교재묘 비석 참조) “그는 독립운동의 방법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관해 능력이 탁월하였고, 국내 주재 조직 및 독립운동 자금 모금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서 장관 몇 명이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였다고 술회하였다.

곧 독립운동의 방법과 조직화, 그리고 운동자금 모금에서 탁월했다는 것이다.

위임장을 작성할 당시 김구의 직책이 재무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임정에 필요한 부분은 특히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이에 적합한 인물로 이교재를 선택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요컨대 임정에서 위와 같은 능력을 갖춘 이교재에게 맡긴 책무는 네 가지 정도였을 것이다.

문서전달, 독립운동 자금 확보, 독립에 필요한 비밀조직, 거사 시의 가능성 타진 등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라는 직함을 부여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국내에서 이교재가 주어진 일을 추진하는 증명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중대한 임무를 부여한 일종의 특명서였다고 할 수 있다.

활동영역은 경상남북도이고, 따라서 해당 문건들을 전달하려는 대상 인물들도 숙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몇 차례의 감옥행으로 기록된 그의 독립운동 행적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감옥행은 드러난 것이지만 식민당국에 알려지지 않게 활동한 각종 행적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 준다.

김구가 이교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고 유가족을 위로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렇다면 임정에서는 왜 그 시기에 이교재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하였을까.

이를 위해서는 임정의 독립운동은 국가간의 전쟁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임정 출발 자체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였고, 조국의 광복은 일본의 패망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말하자면 일제의 패망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반침략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제2차 대비는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이었다.

앞의 특발문이나 김관제와 윤상태에 보낸 편지에서 확인되었듯이 만주사변은 일본을 패망에 몰아넣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이에 따라 임정은 1932년 전반기에 6건의 거사를 실천에 옮겼거나 준비하였으며 이는 반침략전쟁의 성격을 내포한 것이었다.

6건의 거사는

① 이봉창의 도쿄 의거(1932. 1. 8),

② 상해주둔 일본군사령부 폭파계획(중국인 용병- 실패, 1932. 2. 12),

③ 윤봉길 등의 상하이 일본비행장 폭파계획(좌절, 1932. 3. 3),

④ 이덕주·유진식의 조선총독 공략(좌절, 1932. 3),

⑤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1932. 4. 29),

⑥ 최흥식·유상근의 만주 관동청 공략(좌절, 1932. 5)

등이었다.(김희곤,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 지식산업사, 2015, 403쪽)

위의 6개 거사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윤봉길과 이봉창 의거는 임정의 반침략전쟁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김희곤,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 529쪽)

이러한 사실들과 이교재의 국내 파견을 연계시켜 보면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다.

그가 국내에 들어온 시기는 이봉창 의거나 윤봉길 의거가 실행되거나 준비되고 있던 시점이었고, 따라서 이교재에게 부여한 임무는 국내에서 전개될 반침략 전쟁을 준비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당시 국내에서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반전격문을 뿌리고 이 전쟁을 그치라고 나선 활동이 있었다. 박성숙의 친구이자 경성제대 학생이었던 신현중이 이 일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었는데, 이듬해 8월에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19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신현중은 가장 많은 3년형을 받았다. 이른바 ‘경성대반제동맹활동’이었다(박태일, 한국 근대문학의 실증과 방법, 소명, 2004, 41-42쪽). 이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박한용, 「 일제강점기 조선 반제동맹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논문, 2013, 162~172쪽.)

추정이지만 이교재가 국내에 들어오는 무렵에 이봉창(이봉창이 상해를 떠나 거사를 위해 동경으로 간 날짜는 1931년 12월 17일이었고 거사를 위해 준비하던 기간에는 임정 부근의 여관에 머물렀다(김구, 정본 백범일지, 400쪽). 이교재가 상해를 떠나기 전후의 시기와 중첩된다.)도 김구와 반침략전쟁을 모의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신들이 부여받은 임무를 모두 숙지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따라서 서로 만나 의논했을 가능성도 있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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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24.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0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3)

 

그렇다면 개별 문건들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이교재(우측 사진)가 전달하려던 문건 중에는 달성의 문영박(호는 장지, 1880~1930)에게 보내려던 두 종류의 문건이 있다.

하나는 문영박이 사망한 데 대해 임정에서 뒤늦게 조문한다는 추조문으로 내용은 ‘追弔 本國 慶北達成 大韓國春秋之翁 文章之先生之靈 大韓民國臨時政府一同’으로 되어 있다.

문영박은 1930년 12월 18일에 사망하였는데, 문서의 작성일자는 1931년 10월 3일이었으므로 사망한 지 10여 개월이 지난 뒤에 조문을 한 셈이다.

그의 자녀들, 곧 문대효에게 보낸 특발문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日中大事變’ 곧 1931년 9월의 만주사변이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고 있어서 국내에서 호응하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할 수 있으나 비용이 없으므로 특파원을 보내니 그에게 常備金을 보내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되면 무력감에 빠져있는 임시정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특발, 기원4264년· 대한민국 13년 10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 본국경북달성 문대효 애전」. 달성화원 인수문고 소장.)

제로 문영박은 191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30년까지 전국을 왕래하면서 임정에 군자금을 지속적으로 송달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1929년 2월 27일에는 대구경찰서의 고등계형사들에게 4시간 동안 가택수색을 당한 뒤, 장남 문원만과 함께 체포된 적도 있었다.(「大邱高等係員出動 文永樸富豪突然檢擧 사건내용은 중대시된다고 四時間의 家宅搜索, 삼월일일 압두고 예비검속인듯 」, 동아일보, 1929년 3월 3일자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문영박 [文永撲] ’(디지털달성문화대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는 1927년으로 기재되어 있다. 오류다.)

아울러 문영박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오세창과 유창환에게 각각 ‘수봉정사’와 ‘수백당’이란 친필을 받기도 하였고, 또 이들과 더불어 이승훈·한용운·김진호·姜邁·이상재·유진태·이득년은 1918년 망명지에서 국내로 잠입한 우당 이회영과 함께 국제정세의 변동에 대처할 방법을 비밀리에 논의하기도 하였다.(김종서, 「남평문씨(南平文氏) 수봉정사(壽峯精舍) 수백당(守白堂)과 하겸진(河謙鎭)의 ‘수봉정사기(壽峰精舍記)’」, [문헌과해석] 발표회 논문(2017년 12월 22일), 1-3쪽과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전편: 민족해방투쟁, 형설출판사, 1978, 127쪽.)

말하자면 전국적인 독립지사들의 네트워크 속에 포함되어 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문영박의 손자인 문태갑은, “조부가 큰 부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군자금을 많이 냈다는 말이 주변에 돌았다”고 하였다(2017년 9월 12~13일 양일간, 대구시 달성구 화원읍 남평문씨 세거지에 거주하는 문태갑 선생 방문 면담))

그는 특히 상해에서 활동하던 창강 김택영을 통해 많은 서책을 구입하였는데, 그 수송 방식은 상해에서 목포까지 배로 운송하면 그곳에서 다시 수레를 이용하여 화원까지 이송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문희응 씀, 仁興錄 -南平文氏與世居地, 규장각, 2003, 114쪽.)

이 역시 문영박과 임정과의 통로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임정에서 추조문을 보낸 이로는 밀양의 황상규가 포함되어 있다.

추조문 내용은 앞의 문영박 선생과 큰 내용은 같으나 일부 다른 점도 있다.

“追弔 本國慶南密陽/ 大韓國義士/白民黃尙圭君之 靈/紀元四千二百六十四年·大韓民國 十三年 十月三日(建國紀元節)/大韓民國臨時政府一同/派弔/上海(Shanghai)”이다.

문영박의 경우 ‘大韓國春秋主翁’으로 부른데 비해 황상규에게는 ‘大韓國義士’로 호칭하였다. 앞의 경우 역사의 주인이라는 뜻을, 황상규는 의사를 강조한 셈이다.

또한 문영박의 경우 수신인을 ‘본국 경북달성 문대효 애전’으로 표시하였으나 황상규의 추조문에는 이것이 빠져 있다.

검토해 보아야 하겠지만, 조문을 받을 대상이 마땅치 않았을 수도 있다.

밀양 출신인 황상규는 밀양 뿐만 아니라 만주와 임정에서도 활동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고, 특히 동양척식주식회사 창녕지역 관리인인 양인보를 설득하여 창녕군에서 받아들인 동척의 소작료 1년분을 받아 임시정부에 헌납한 것으로 알려졌다.(최필숙,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240~241쪽. )

이러한 공헌도 임정에게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황상규는 김약산의 고모부이자 의열단의 창립자로도 알려져 있었으나 1931년 9월 2일에 폐결핵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최필숙,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239~246쪽. 133)

임정에서 이교재를 통해 추조문을 보낼 때에는 그의 사망 사실이 거의 한달 만에 임정에 알려진 시점이었다.

임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국내의 정보를 수집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그에 맞는 예우를 해 준 것으로 보인다.

추조문이 애국인사에 대한 예우 차원의 성격이 강한 문건임에 비해 특발문은 임정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호소하는 문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영박에게 보낸 특발문은 이미 언급하였지만, 창녕의 성낙문에게도 거의 동일한 내용의 특발문을 보냈다.(「본국경남창녕 성낙문선생 귀하」라는 수신처만이 다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진주의 허만정에게 보낸 특발문도 위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허만정에게 보낸 특발문은 앞서 언급한 동아일보에만 소개되었을 뿐 소재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이를 알기 위해 2018년 9월 28일에 지수면 승산리에 있는 허만정 본가에 찾아갔지만 현재 그 후손이 부재 중이어서 특발문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성낙문과 허만정은 각각 창녕과 진주를 상징하는 부호들이었다.

창녕군 지포면 석리 출신의 성낙문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창녕지역의 대성이자 부호로서, 손녀인 성혜림(1937-2002)은 북한의 유명 여배우였고, 암살당한 김정남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성낙문은 1921년에 창녕자동차를 창립하는데 주주로 참여하였으며, 1940년에는 부산지방법원 창녕출장소 청사 신축 중에 건물 1동과 부속건물 등을 기부한 공로로 일제 당국으로부터 포상을 받은 기록도 있다.(조선총독부 관보 제3890호, 1940년 1월 12일자.)

표면상으로는 당시의 식민지배 당국에 협조하였던 것이다.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출신인 허만정은 1925년에 백산무역에 250주를 투자한 주주의 한 사람이자(朝鮮銀行會社要錄(1925年版), 東亞經濟時報社.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 한국근현대회사조합자료」 참고. h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hs_001_1925_08_14_0150) 중외일보의 창립자 명단에도 주식을 투자한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주식회사 중외일보사 창립총회의 건」,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 5 (京種警高秘 제15854호, 1928년 11월 24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내항일운동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GS 그룹의 창업주인 허만정은 ‘인심이 좋고 인권을 존중하는 유풍이 남아 있는 승산리’에서 만석꾼으로 이름이 났었고,(김동수 기자, 「진주시 지수면 ‘향토사’ 面誌(면지)발간 추진위 구성」, 「한국장애인신문/KJB방송, 2010년 6월 20일자) 또한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청년 중심으로 모인 보주청년회라는 단체에도 이름을 올린 34명 중 1인이었다.(「보주청년회 부흥기념식 성황, 사무실 낙성식도 거행」, 중외일보, 1926년 12월 28일자)

부호이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에도 적극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추조문과 특발문의 수신인들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먼저 상해임시정부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독립지사들이나 임정후원자들의 동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들을 정성들여 예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추조문이나 특발문은 비단에 쓸 정도로 세심하게 상대방을 배려하였다. 또한 특발문은 부호가들에게 보냈는데, 이들에게는 앞서의 문장지에서 본 바와 같이 ‘일중대사변’, 곧 만주사변으로 세계정세가 변하고 있으니, 재정적으로 독립투쟁을 더욱 지원해 달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예우를 넘어서서 실질적인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문장지나 허만정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는데 노출된 듯이 행동하였던 반면, 성낙문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고 오히려 지역유지로서 일제의 지역 지배 사업에 협력하는 양상도 보여 주었다.

수신인을 밝히지 않은 채 김관제와 윤상태에게 전달해 주기를 부탁한 편지에는 국내 지사들에게 투쟁을 독려하고 있는 내용이다.(임정 시절 김구는 “연구실행한 정책이 있으니 편지정책이다.. 임시정부의 현상을 극진 설명하고 동정을 구하는 편지를 써서 엄군(항섭), 안군(공근)에게 피봉을 써서 우송하는 것이 유일의 사무”라고 할 만큼 편지를 중요시하였다(김구 지음/도진순 탈초 교감, 정본 백범일지, 돌베개, 2016, 397쪽). 국내에는 우편으로 전하지 않고 개인에게 밀봉하는 방식으로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곧 현재 적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세계가 변동하면서 폭발하기 직전이니 칼을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국내의 지사들과 연합하여 그 성취를 함께 도모해야 할 것이며, 이에 이군(이교재, 필자주)을 파견한다는 것이다.

조완구와 김구가 연명하여 보낸 것이므로 임정의 이름으로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시영이 김관제에게 보낸 편지 역시 독립의 당위성과 협조를 부탁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임시정부의 지도층이 당시 경상남북도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더불어 임정의 현안을 도와주도록 요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두통의 비밀편지 형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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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7.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9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2)

 

이교재(우측 사진)의 임정문서 일부가 동아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는 이정순의 아들인 이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이상화와의 면담은 2017년 9월 27일 마산의 이디야 커피집에서 있었다. 그는 부친께서 동아대학교 총장에게 기증하였다고 말하였다.)

해당 박물관에 찾아간 결과 밀양의 황상규에게 보내는 추조문, 창녕의 성낙문에게 보내는 특발문, 그리고 두 통의 편지 등 4개의 문건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간 까닭까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이상화의 말에 따르면 부친이 동아대학교 총장인 정재환에게 기증하였다는 것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소장자료 목록(74-4)과 관계자에 따르면(관련자료는 두 가지로서 1)분류번호: 74-4, 품명: 대한민국임시정부특발, 2) 분류번호:동아대 003776-00000, 명칭:대한민국임시정부특발. 후자는 박물관이 부민동으로 이사할 때 새로 작성한 것이라고 관계자가 말해 주었다.125) 이상순으로부터 정재환이 기증받은 것을 박물관으로 이장하였으며, 그 날짜는 1963년 2월 1일로 되어 있다.

연유는 적혀 있지 않다.

그렇다면 동아대 박물관으로 간 문건들은 동아일보에 기사화되기 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곧 일부는 이미 정재환에게 전달되었고, 나머지 일부가 동아일보에서 보도되었다고 짐작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홍여사의 발언과 김형윤의 기행문, 동아일보기사, 남평문씨 세거지 소유 문건, 이상화의 진술 등을 통해 이교재 선생이 마지막으로 입국할 때 9개의 문건을 휴대하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홍여사의 진술을 통해 이들 문건이 이교재 선생이 직접 휴대하고 들어왔으며, 임정에서 발행한 문건이라는 사실도 명백하다고 본다.

형태상으로도 이 임정문서는 임정에서 발행한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모두 한문으로 작성한 이 문건들은 ‘기원 4264년, 대한민국 13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라고 기록하고 임시정부라는 글자 위에 사각형의 ‘大韓民國臨時政府印’이 새겨진 국새를 찍어 임정에서 발행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림 3>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이교재임정문서 4건. 성낙문에게 보내는 특발문(상), 조완구·김구발 김관제·윤상태 대조 편지(중), 이시영발 김관제 수신 편지(하우)와 밀양의 황상규에게 보내는 추조문(하좌)

 

이교재위임장의 경우에는 국새와 더불어 ‘내무장인’, ‘재무장인’이라는 부서인을 문건 좌측 상단에 나란히 찍었다.

성낙문에게 보내는 특발문에는 작은 부전지에 주석이자 법무장이던 이동녕의 이름과 인장을 덧붙여 놓아, 임정 발행의 문건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위임장, 상해격발문, 추조문, 특발문은 모두 비단에 작성하였고, 편지는 종이에 쓴 것이다.

이교재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는 위임장과 격발문은 한 장인 듯이 보이지만 내용과 발행일, 인쇄방식, 비단의 섬세함 등에서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문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증명을 위해 두 문건을 겹쳐 놓고 국새를 찍었기 때문에 하나의 문건처럼 보일 뿐이다.(이 문건은 2019년 3월부터 6월까지 창원시립마산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한 액자 속에 들어있는 이 문건은 유족들이 이를 보관하기 위해 배접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문건으로 인식하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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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8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운동 중에서 증거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부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급한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라는 위임장을 비롯하여 다종의 문건을 휴대하고 입국한 일일 것이다.(여기서는 ‘임명장’보다 ‘위임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경상남북도상주대표’에게 독립운동과 관련한 여러 가지 중요한 사항을 위임한 까닭이다.)

작성연도 중 제일 늦은 것이 1931년 11월 20일이니만큼 그의 입국은 상해에서 창원군 진전면까지의 거리나 교통 수단 등을 생각하면 빨라도 1932년 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교재가 국내에 가지고 들어온 이른바 ‘이교재임정문서’를 중심으로 그의 마지막 독립활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까지 필자가 조사해서 파악한 이교재임정문서 속의 문건은 9개이다.(여기서 문서는 상위개념, 문건은 하위개념이다. 다시 말해 문서는 범위가 넓고, 문건은 정해진 서식이나 규범에 맞춰 작성된 것으로, 기관의 규정 업무에 따라 생산된 기록물을 말한다(松世勤(中國人民大學 檔案學科), 「文書, 文件與公文有區別麽?」, 「檔案時空 1986年 01期, pp. 42~43). 따라서 ‘이교재임정문서’라는 의미는 임정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생산하여 이교재에게 건넨 문건의 조합이라는 뜻을 가지며, 각각의 문건은 그 문서에 포괄된다고 하겠다.)

문서에 포함된 문건의 명칭과 세부 사항은 <표 3>과 같다.

 

우선 이와 관련해서 검토해야 할 사항은 이 문서가 언제 국내에 들어왔으며 어떻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서에 대해 최초로 보도한 이는 마산일보의 김형윤 기자였다.

1954년 4월에 진전에 있는 이교재의 자택을 방문하였을 때 “洪老媼(이교재의 부인, 필자)은 우리를 맞아들이며 과거 상해 임정으로부터 선생이 군자금 모집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조완구·김구 두 사람 명의로 발부한 비밀지령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귀한 기념물”(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자)이라면서 문건을 소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그 문서를 이교재의 부인인 홍노온이 직접 소개하였다는 것, 두 번째로 그것은 김구·조완구의 명의로 발부된 비밀지령서로서 이교재가 군자금 모집이라는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휴대하였다는 것이다.

미루어 보건대 이 문건은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주요 임무를 위임하는 위임장이었을 것이다.

이 기사에는 다른 문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보다는 전체문서를 보존하기 위한 홍여사의 피나는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김기자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석양이 닥칠 때는 반드시 오리라는 신념으로 이 지령서를 굴뚝 속이 아니면 밧줄에 묶어서 우물 속에, 어떤 때에는 부녀자의 월경대로서 일각일분도 머릿속에 떠난 일 없이…” 숨기고 살아왔다고 전한다.

지령서를 갖가지 방식으로 숨겨왔다가 김형윤에게 털어놓았는데, 홍여사는 이 문서를 지령서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이교재를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몇가지 중요사항을 위임한 위임장(좌)와 상해격발문(우). 본래 두 개의 문건이지만 이어놓고 가운데에 임정의 국쇄를 찍었다.

<그림 2> 달성군 화원의 문장지에게 보낸 특발문(우)와 추조문(좌)

 

이보다 늦은 1963년에도 동아일보에서 이 문서의 일부를 소개하였다.(「32년 만에 주인 찾는 감사장」, 동아일보, 1963년 3월 16일자)

「32년만에 주인찾는 감사장」이라는 제하의 이 기사에는 임정에 자금을 제공한 3명의 애국지사에게 임정에서 발행한 감사장과 조문 석장이 33년 만에 주인을 찾은 사정을 소개하고 있다.

세 사람이라고 소개하였지만, 실은 진주의 ‘허만기’(허만정의 오기일 것이다.)와 경북 달성의 ‘문대호’(문장지의 아들인 문원만을 지칭함, 필자주)(‘대호’는 실명이 아니라 ‘대효’의 오기로서 5형제의 효도를 통칭하는 칭호라고 한다. 문원만이 대효의 대표로서 이 문서를 찾아간 것이다. 남평문씨의 이름이 조금 복잡한데, 임정에서 조문을 보낸 문장지는 문영박의 호이며, 아래에 나오는 문원만은 문영박의 다섯 아들 중에서 둘째인 시채의 가내 호칭이다-문영박의 손자인 문태갑의 증언이다. 2019년 3월 18일의 통화) 두 사람만 언급되고 있고 있을 뿐이다.

언급되지 않은 한 사람은 창녕의 성낙문이었을 것이며, 조문은 문장지(장지는 문영박의 호. 필자주)와 황상규에게 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기사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쓰여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연고자가 있다면 楊경남지사 또는 홍여사에게 제시하고 찾아가 주기를 바란다”는 부탁의 말도 곁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남도와 홍여사가 합동으로 문건들의 주인을 찾아주는 행사를 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여기서 말하는 양 경남지사는 1961년 8월 25일부터 1963년 12월 16일까지 재임한 양찬우 지사를 말한다.)

이 기사에 호응한 이는 달성의 문대호, 곧 문원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3년 4월 5일에 이교재의 양자인 이정순이 달성군에 있는 문영박의 아들 문원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순은 이 편지에서 “상별지후로 소식이 적적하여… 가지고 가신 서류를 조속히 부송하여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본인의 구호관계 수속을 취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이 편지는 달성의 남평문씨 세거지의 인수문고에서 보존하고 있던 것이다. 이곳에는 2017년 9월 12~13일, 2018년 9월 28일에 걸쳐 방문하였다. 이 편지와 두 개의 문건은 2017년 9월 13일에 확인하였다.)

문원만은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보고 진전면에 찾아와 문장지 관련 문서와 그 외의 문서를 빌려갔다고 한다. 필자가 달성의 남평문씨에서 운영하는 인수문고에 가서 확인한 결과, 그곳에서 보관 중인 문서에는 임정에서 보낸 추조문과 특발문 원본이 있으며 「상해격발문」과 「이교재위임장」은 복사본 형태로 소장되어 있었다.(「상해격발문」과 「이교재위임장」은 문원만이 붓글씨로 베껴 놓았다고 전해 주었다. 문건을 보여준 문태갑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이정순이 송부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뒤의 두 문건일 것이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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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7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2)

 

이교재(우측 사진)가 상해 임정에 도착한 1921년대 혹은 1922년대 초는 임정으로서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베르사이유 체제가 공고화되고, 임정 내의 갈등도 증폭되었으며, 국내외의 독립자금 지원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임정은 1922년 이후 독립전쟁 준비론으로 나아갔다.

1922년 10월 여운형과 김구 중심의 임정 요인들은 한국노병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전쟁 준비 방략의 일환이었다.

곧 노동과 군사를 겸한 인물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면서 일본이 국제 전쟁에 휘말릴 때를 기다려 독립전쟁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임정에서 이것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이었고, 거기에는 중국군관학교에 한국인 입학생을 보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192~198쪽)

이러한 시기에 임정에 도착한 이교재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일원이 되었는지 역시 알 수는 없다. 앞서 말한 1922년의 기부금모집 위반으로 체포되었을 때에도 임정과의 관계를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1923년 9월에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된 사건을 통해 볼 때, 이교재는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 모금이라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겼을 정도로 임정의 요인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교재가 주도한 통영군자금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기관에서 작성한 두 종류의 재판기록과(마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 「형사사건부」 1-1(1923),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8428, 대구복심법원, 형사공소사건부 대정 13년(1924),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6075) 경남고등경찰부가 작성한 일지형식의 기록이 남아 있다.

먼저 1923년 9월 21일자로 경남고등경찰부에서 작성한 기록에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前敎員 李敎載가 上海假政府의 密命을 받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내로 들어와서 통영군 통영면 署町의 金宗元에게 군자금을 강요하던 중 체포되어 당국에 보내져 징역 2년에 처하였다”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慶尙南道警察部, 高等警察關係摘錄 –1919년~1935년-, 소화 11년, 39쪽)

이교재의 신분이 ‘전교원’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이미 말한 바지만, 그의 활동 근거가 임정의 밀명이었고, 그 목적은 국내에 들어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려는데 있었다.

그가 선택한 곳이 통영이었고 그 대상이 김종원이었다는 것이다.

1923년에 통영지청에서 작성한 刑事事件簿에 따르면, 통영경찰서에서 ‘비현행범’으로 체포된 이교재의 죄목은 ‘대정8년제령제7호위반’이었다. 구류일자는 대정 12년(1923년) 10월 4일, 검사에 이송된 날짜는 동년 10월 13일로서 ‘진주’로 표기되어 있다.

통영지청에서 재판을 받은 그날 진주교도소로의 이송이 결정된 것이다.

피고인의 본적과 직업, 그리고 연령은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 농민, 이교재 37세’로 적혀 있다.

같이 체포된 인물로는 金宗元, 姜相烋, 朴性淑, 朴世洪, 李瓚根, 潘光閔 등 6명으로 그 신상과 죄목, 구류일자, 검찰이송여부 등은 <표 2>와 같다.

<표 2> 이교재의 통영군자금 모금사건 관련자(마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 「형사사건부」 1-1(1923)에 의거하여 작성)

통영경찰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통영사건 관련자들의 죄명은 군자금 모금이 아니라 ‘증거인멸’이나 ‘범인은익’ 혹은 ‘동행취체령위반’ 등이었다.

모두 현행범이 아닌데다 증거를 확보하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명목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모두 10월 13일에 석방되었다. 이교재가 진주교도소로 간 것과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였을까?

김종원은 강상휴와 더불어 통영지역의 사회단체인 통영청년단의 창단멤버였다.(동아일보, 1921년 8월 27일자) 이 청년단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8월에 창립총회를 열고 통영기독교청년회장을 지낸 박봉삼을 초대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순회강연과 교육, 계몽, 순회공연 등이었다. 말하자면 통영지역의 애국운동과 사회계몽 운동의 본거지였다고 할 수 있다.

1923년 11월 18일에는 회관을 신축하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창립 당시에는 34명이던 회원이 3년여 만에 400여 명으로 증가한데다 그만큼 갖가지 활동을 한 덕택이었고, 3대 단장이던 임철규가 사재를 털어 회관을 신축하려던 참이었다.

이교재의 군자금 모집 사건은 바로 이 회관의 낙성 직전에 벌어졌던 것이다.

위의 명단에 올라있는 박성숙(朴性淑, 1900~1932)은 통영에서 하동집으로 알려진 부유 집안의 자제로서 일본 유학을 마친 뒤 귀향하여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고, 박세홍은 훈련을 담당하면서 수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박세홍은 1920년 3월 10일에 설립한 통영노동당의 회장이기도 하였다.(통영청년단에 대해서는 김상환, 「1920년대 통영지역 청년운동과 ‘김기정 징토운동’, 역사와 경계91, 2014.6, 191~229쪽과 정갑섭, 「통영청년단 1~3」, 한산신문1993년 7월 22-8월 5일. 일제시기 통영의 3.1운동에 대해서는 김상환, 일제시기 통영의 3.1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전개, 도서출판, 제일, 2005 참조)

사건부 기록에 박세홍은 학교 교사로 기재되어 있지만 통영합동노동조합에서 검사원으로도 일하고 있었다.

이 조합은 통영지역 노동조합의 연대체로서 1930년에 박세홍은 이 조합의 집행위원장의 자리에 올랐다.(통영시사편찬위원회, 통영시지1, 566쪽)

이찬근(李瓚根, 1893~1950)의 이름도 올라 있다. 형사사건부에는 직업이 의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통영시 항남 1번가에 壽南醫院을 개설하였다. 1914년 6월 1일자 조선총독부관보에도 그 이름이 올라있다.(조선총독부 관보제548호 1914년 6월 1일 10면, 휘보-조사 및 보고-위생. 그의 주소는 용남군 동면 북문동으로 되어 있다.)

그의 경력을 보면 단순한 한의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에 창간된 중외일보는 1928년에 주식회사의 형태로 확대 개편하기 위해 주주를 모집하였는데 마산의 이형재·구성전·옥기환 등과 더불어 통영의 이찬근도 5주를 투자하는 것으로 이에 참여하였다.(경성종로경찰서장 발신, 「주식회사 중외일보사 창립총회의 건」,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 국사편찬위원회 국내항일운동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문서,1928년11월24일. htp:/db.history.go.kr/id/had_138_0720)

또한 이찬근은 통영지역에서 1920년대 말에 김두옥·최천 등과 더불어 동아일보사 통영지국장으로 거론되었으며,(김보한, 「김보한의 문화칼럼-진산 이찬근을 찾다」, 한산신문 2009년 9월 4일자) 1928년 3월 25일에 봉래좌에서 열린 신간회 통영지회 임시의장이기도 하였다.(통영시지 제1권, p.576. 설립준비위원으로 박세홍도 들어있다. 박세홍은 지회에서 조사연구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진보적이며 독립운동에서 관심이 있었던 인물이었다.(그는 통영수산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시와 글씨에 능해 통영출신의 시조 시인인 김상옥의 정신적 스승이었다고 하였으나 한국전쟁 시기에 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당하였다-블루버드 블로그, 「통영별곡 51-초정 김상옥 거리를 아시나요? 4」 참조)

경찰의 기록에는 이교재가 김종원에게 군자금을 강요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죄로 판명되었다.

김종원은 형사사건부에 농민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鱈魚, 곧 대구잡이 사업가로서 통영에서 꽤나 이름난 수산업자였던 것으로 보인다.(통영시지1, 518~519쪽)

또한 그는 통영의 3.1운동에서 사전 준비와 여론을 환기하던 시기의 주도 인물 19명 중 한사람이었다.(통영시지 1, 524쪽)

그러나 군자금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박성숙일 것이다. 박성숙의 부친인 박진영(1853~1939)은 일제 시대에 통영에서 3대 부자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하동집의 주인이었다.

그의 부인인 李仁은 바로 이교재의 고모였다.(김상현, 「나의 삶 나의 통영- 박형균 하동집이 왜 하동집이냐 하면.」 인터넷 통영인뉴스( htp:/www.tyinnews.com/), 2019.2.21., 「박형균 –2 백석, 윤이상, 통영현악4중주단. 통영인뉴스2019.2.28. 성주이씨문열공파세포권지2.186. 109)

이교재의 외손자인 한철수의 회고에 따르면, 외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이교재는 통영으로 날아다니듯이 다녔다고 한다.(한철수 마산상공회의소 회장 증언. 2017년 9월 8일 오후 마산상공회의소장실)

이 배경에는 이교재의 고모인 이인과 그의 아들인 박성숙 등이 통영에 거주하고 있었고, 부호인 이들이 독립운동에도 자금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교재가 사망한 뒤 그의 집이 저당 잡혀 경매에 넘어갔을 때 400엔어치의 저당권을 사들여 이교재의 모친에게 되돌려준 것도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249번지에 살던 朴喜鎣이었다.(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건물등기부, 고유번호 1901-1912-162796. 2017년 10월 24일 발행. 이 주소는 박진영의 주소였다.)

또한 앞서 말한 대동청년단 멤버이자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통영의 미곡상 서상호는 박성숙의 아내인 서말희의 오빠였다.

그가 통영에 자주 출입하면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씨네와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교재는 이 사건으로 인해 1923년 12월 20일에 끝난 제1심에서 제령제7호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9월 21일에 경찰에 체포된 지 4개월만이었다.

제2심의 공소신청은 같은 해 12월 24일이었다. 대구의 복심법원으로 넘어가 재판을 받았으나 검사의 공소 취하로 종결되었고, 확정판결은 1924년 1월 24일이었다.(대구복심법원, 형사공소사건부, 국가기록원관리번호 CJA0016705.)

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에도 죄명은 ‘대정8년제령제7호 위반’으로, 형명과 형기란에는 징역 4년으로 기재되어 있다.(진전면 범죄인명부18번 참조.)

그렇다면 그는 1924년 1월 24일부터 다시 4년간의 징역생활에 들어갔으니, 1928년 1월 23일에 만기출옥하였을 것이다. 42살 때의 일이다.

이후 이교재는 서대문형무소에서도 다시 수감되었다는 말도 있다.

주형무소에서의 출옥 직후 상해로 귀환하였고 그곳에서 임무를 부여받고 조선에 입국하는 도중에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는 것이다.(이현희, 「임시정부 수립 이후의 독립투쟁과 서대문형무소」, 백산학보70, 2004.12, 1014쪽. 이 글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투사 명단에 이교재가 포함되어 있으나, 그 전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관한 기록물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한 기술은 후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게다가 2년간 복역하였다면 시기상으로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봉착한다.

1928년에 출옥하였고, 다시 1931년 말쯤 국내에 잠입하였던 사정을 감안하면 그 기간 동안 상해행과 감옥행을 모두 경험하여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국내로 들어오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2년 형을 살았다면, 1931년말에 임정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으면서 새로운 임무를 떠맡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형을 살았다는 저간의 서술은 결정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은 한 신뢰하기 어렵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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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27.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6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투쟁에서 두 번째 단계는 상해로 망명한 다음 상해 임시 정부의 일원으로서 활동한 시기이다.

그는 상해에 언제 갔으며, 어떻게 갔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은 없다. 가장 확실한 것은 임정의 지시를 받아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기록이다.

1923년 9월 21일에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재판을 받은 사실이 있다. 따라서 3.1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간 뒤 출옥했을 1921년 12월 이후에 상해행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간의 국내 기록들은 ‘3.1만세운동이 전국에 한창일 때 감연히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동지와 규합’하였다거나,(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1921년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갔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7쪽.)고 보았다.

만세운동이 한창일 때 상해로 망명한 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1921년 출옥 후 혹은 1922년 4월 벌금형 이후 상해로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기부금품취체규칙 위반으로 체포된 사실도 상해 임정과의 연계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본다면, 그의 첫 번째 상해행은 1920년도 말의 출옥 직후가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교재는 왜 상해로 갔을까? 이 점 역시 불분명하다.

당시 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을 통해 조선을 해방시키자는 부류와 외교와 정치력을 통해 해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부류가 있었다.(김희곤,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 지식산업사, 2016, 114~115쪽)

전자에 뜻을 둔 이들은 만주로, 후자는 상해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교재가 상해를 택한 이유는 통상적으로 일찍부터 한인들이 집결하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3.1운동 이후 망명자들이 급증하고 일본과 만주, 러시아 등지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면서 3월 하순경 최고기관 설립 논의가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임시정부와 의정원을 설립함으로써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18~51쪽) 독립운동에 뜻을 둔 인사들에게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진전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맺은 인맥이나 단체를 통해 상해로 들어갔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상해의 임정과 마산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연결하는 조직은 국권회복단이나 대동청년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권회복단은 1915년 대구의 안일암에서 윤상태·서상일 등이 경북지방의 유림을 포섭하여 조직한 항일운동결사였다.

이 단체는 마산에 지부를 설치하고 안확을 지부장으로, 李瀅宰·金璣成을 임원, 부원으로 이순상·배중세·변상태 등이 참여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경남의 역사와 사회연구, 경남대 경남지역문제연구소, 2004 참조)

이 중에서 일부 단원들이 4.3삼진의거 때 많은 군중을 동원하였고, 이후 상해 임정에도 독립운동자금을 송금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80쪽. 79)

1909년 10월에 안희제·서상일·이원식·남형우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형식의 대동청년단은 1945년까지 비밀결사로서 활동했기에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는 대동청년단의 거점이었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164쪽. 80) 떤 경우 대동청년단의 표면적인 조직활동으로서 국권회복단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160~163쪽)

마산과 삼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형재·배중세·변상태·김관재 등과(김봉열, 「마산 삼진의거의 3.1운동사적 고찰」, 경남의 역사와 사회연구, 239쪽) 윤상태·서상일·신상태·남형우·박영모·안희제·박중화 등도 양 단체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임시의정원 구성에서도 의원 중 남형우를 비롯한 대동청년단 출신이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80쪽)

이렇게 볼 때 이교재는 지역 내에서 활동하던 대동청년단 및 국권회복단과 일련의 연락망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교재는 1923년 9월에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된 적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서상환과 서상호가 국권회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하고 있었다.(통영시사편찬위원회, 통영시지1, 통영시사편찬위원회, 2018, 534쪽. 서상호는 이 지역의 독립운동가인 박성숙의 처남이었다. 박성숙은 또 이교재의 내종형제였다.)

또한 이교재가 마지막으로 국내에 들어올 때 임정에서 전한 문건 중에 김관제와 윤상태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2인 모두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1917년에 대동청년단에 가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 마산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에서 김관제는 변상태와 함께 각각 경남 동부와 경남 서부 일원의 의기를 책임지고 분담하였고,(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88쪽. 김관제는 경남 창원군 동면 무점리 51번지 출신으로 1920년 5월경에 있었던 의열단 폭탄 밀송 사건 관련자로 체포될 당시 김해군 김해면 남문통에서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었다(高等警察要史,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5권 1920년 7월 31일 의열단원 곽재기 이성우 등 26명). 이후 김관제는 대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직의 주요 인물이었던 변상태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송금하는 책임을 맡았다.86) 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80쪽. 86) 상해의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국권회복단의 마산지부 멤버 이순상(이순상은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1911년 3월에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70쪽)은 상해에서 잠입한 高漢과 부산에서 접촉하기도 하였다.

권오봉의 동지였던 안희제는(이병철, 「다시 쓰는 인물독립운동사, 백산의 동지들 9, 성재 권오봉」, 부산일보1995년 1018일자 : 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권오봉선생비문, 삼진독립운동사, 88~89) 1917년에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고, 특히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남형우와 윤현진을 파견하였으며, 임정의 재정난이 심각할 때 누만의 자금을 조달하여 위기를 돌파하도록 도와준 사실도 있었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11~113쪽) 나아가 윤현진은 임시정부 원년 7월 7일에 열린

제5회 임정원 의원에 경상도 대표 6인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을 맡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9(임시정부사 자료집), 독립유공자 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5, 155쪽) 백산상회 자금 30만 원을 임정에 헌납하기도 하였다.(인터넷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검색어 윤현진)

상해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고한은 배중세와 안확과도 면식이 있었고, 결국 배중세와 함께 상해로 탈출하였다.(「이순상신문조서(제1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7(국권회복단), 국사편찬위원회 인터넷판 참조) 이 때 상해로 탈출한 사람으로 배중세 뿐만 아니라 남형우, 윤현진도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이교재는 권오봉, 안확, 변상태, 김관제, 안희제, 배중세, 남형우 등을 비롯한 삼진, 마산 및 경남지역과 상해를 연결하는 국권회복단 및 대동청년단이라는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상해행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교재는 당시 어떤 루트를 통해 상해로 갔을까.

3.1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상해 및 만주로의 망명 열기가 타올랐다. 이 당시 상해행 루트는 열차로 신의주까지 간 다음 압록강 철교를 건너 중국의 단동(현 안동)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가는 노정이었다.

임정에서는 1919년 7월 10일에 연통제를 설립하면서 국내와 임정의 연락망을 조직화하였다. 연통제란 임정과 국내를 연결하는 비밀연락망 조직으로 당시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설립하여 국무원령 제1호로 공포되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9, 77~81쪽.)

남편을 따라 상해로 망명한 정정화는 연통제와 뒤이어 만들어진 교통국을 통해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에 파견되었다.

잠입경로는 상해에서 아일랜드인인 조지 루이스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안동으로 간 다음 그곳에 상주하는 통신원의 집에 머물고 그의 안내에 따라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로 오는 노정이었다.

신의주에서는 비밀연락 거점인 이세창 양복점을 접촉하였고, 그의 편의로 서울에 도착하면, 서울역 건너편 세브란스 병원 관사에 있는 신필호 박사를 찾아가 이곳에서 약 20일 동안 머물며 임정에서 지시한 사람을 만나고 자금을 모은 다음, 위의 귀환 코스를 거꾸로 되짚어 가며 상해로 귀환하였다.(한시준, 「정정화의 생애와 독립운동」, 사학지 47, 2013.12, 137~141쪽)

이교재도 이른바 ‘정정화루트’라고 부를 수 있는 코스를 따라 상해로 들어갔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위 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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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2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5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4)

 

그렇다면 이교재와 함께 형무소에 갇힌 위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순서대로 적힌 인물들을 검토해 보자.

沈相沅에 관한 기록은 재판 기록 이외에서는 신상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형량에 있어서 이교재보다 적지만 다른 이들보다는 많은 1년 형이다.

다음으로 서석천의 경우, 1949년 4월에 발간된 한 언론에 실린 19명의 명단 속에 그의 이름이 있다.(민주중보 제1034호(7권) 1949년 4월 29일자. 이곳에 실린 명단은 沈倫, 金義植, 南海, 咸陽 金守東, 洪源轍, 徐錫天, 孫吉童, 朴洙東, 統營 金宜錫, 洪鍾濟, 宋孟守, 朴○漢, 馬山 金浩鉉, 高昇柱, 卞甲섭, 金英煥, 洪斗益, 卞相福, 李基鳳 등이다.)

들 중에서 예컨대 마산지역 출신으로 구분된 金浩鉉, 高昇柱, 卞甲燮, 金英煥, 洪斗益,卞相福, 李基鳳 등은 모두 삼진의거 때 피살당한 8의사들이다.

서석천은 남해와 함양 지역의 인물로 속해 있는데, 이로 보아 이교재와 같은 시기에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49년에 반민특위경남조사부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을 때, 당시 조사관들은 진동의 창의비에 참배를 하면서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 기미독립운동 당시 피체포자인 서석천도 동행하였다.(이때 체포된 인물 중 삼진의거 때 일본헌병의 일원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 총을 쏘았던 심의경이 포함되어 있다. 62세였던 그는 함안군 법수면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죄로 체포된 인물 중에 진동면 고현의 송도에 사는 金尙圭도 포함되어 있다.)

徐正奎(1889~1949)는 창원의 진동면 출신으로 1919년 3월 28일에 있었던 고현의 만세시위 참여하였고, 이어 4.3시위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그 역시 제령제7호와 출판법 위반으로 이교재와 같이 진주지청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에서 6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인터넷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관리번호 31950) 

출신지가 진동이고 고현과 4.3의거에 잇따라 참여하였음에도 의거 직후에 피체를 피한 채 다시 진주에 가서 활동한 것을 보면, 이교재 역시 이러한 궤적을 밟았으리라고 본다.

李炳秀(1896~1960)의 출생지 주소는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97번지이다. 이 주소는 현재 동대 마을에 있는 진전우체국 옆으로, 이교재와 바로 이웃한 곳에서 살았음을 보여준다.(인터넷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이병수는 이교재가 통영에서 군자금 모금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을 당시 “동지 이병수씨(현존)와 통영, 마산, 진주 방면으로 전전 피신하던 중에”라는 김형윤 기자의 회고담이 있는 것으로 보아(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두 사람은 친밀한 동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다.

진전면 오서리가 고향인 권영한의 죄명도 집행원부에 따르면 대정8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위반이며 이교재와 같이 9월 25일에 최종적으로 6개월 징역형이 확정되었다.(이들은 범죄인명부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최종적인 형명이나 형기를 알 수는 없으나 이병수와 같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동·진전·진북의 3개 면을 일컫는 삼진지역에서는 4.3삼진의거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에 못지않게 체포 투옥된 이들이 있지만,(「창원소요판결, 징역 1년 이하」, 매일신보, 1919년 5월 29일자 기사에 인명 朴和烈, 甘泰舜, 具在均, 薛灌銖, 裵龍文, 曹潤鎬, 孔道守, 張相五, 金相鎭, 金世元, 沈相璘, 申甲先, 曹喜舜, 史致洪, 金道根, 李大鎬, 金斯文, 金介同, 孔仕千, 金昌實, 崔介同, 申壽鉉, 安相錫, 金瀅源, 崔世植, 趙鏞瑨, 徐鎔守, 金南守, 許鎭, 權寧祚, 權寧震, 權五奎, 權泰濬, 白承仁, 盧秀?, 朴淳祚, 金鍾顥, 權五成, 李敎瑛 등의 이름이 보인다. ) 이들은 대부분 경성지방법원이나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와 달리 위의 6인은 진주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날에 같은 죄명으로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1923년의 통영사건 때에도 오서리 출신의 이만갑이라는 진주경찰서 고등형사에게 체포되었다고 알려졌는데,(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3.1운동 때에도 진주에서 체포되었기 때문에 삼진지역의 독립운동가와는 다른 법정에 서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컨대 이교재 일행은 삼진지역의 면민들이 연합대를 구성하여 진행한 3.1운동에 참여한 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진주에 가서 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하다 그곳에서 체포되었던 것이다.

복심법원에서의 형기를 마쳤다면 이교재는 1922년 3월 24일에 출옥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진전면에 소장된 범죄인명부에는 1년 3개월간의 형기를 마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1920년 12월 24일에 출옥한 셈이 된다.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다. 이교재는 출옥 직후에 상해의 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허나 아직껏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사건이 있다. 1922년 4월 18일이 판결 날짜로 되어 있는 국가기록원 소장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에 따르면 “이름은 이교재, 나이는 37세, 본적/주소는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이며, 죄명은 ‘대정 8년 제령제7호 위반’”이다.

판결기관은 마산지검 충무지청으로서 주문은 ‘죄가 되지 않음’이었다.(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판결문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622&evntId= &evntdowngbn=N&indpnId=0000145848&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앞에서 본 바와 같이 3.1운동으로 인한 복역기간이 1년 3개월이었다면 출옥 이후 1년 4개월여 만에 다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것이다.

이와 달리 진동면사무소 소장의 범죄인 명부에 기재된 죄명은 ‘기부금품모집취제규칙위반’이며, 형명과 형기는 ‘벌금 30원’, 판결청은 ‘마산분국’이다.

국가기록원 기록과 달리 죄명이 구체적이며 그에 따른 벌금까지 부과한 것이다.

이 「기부금품취체규칙」은 융희 3년(1909) 3월 1일에 각령 제2호로 관보에 실렸는데, 기부금품을 모집할 경우에는 모집 목적 및 방법, 모집 금품의 종류, 수량 및 보관 방법, 모집자의 주소· 직업· 성명· 연령 등을 갖춰 내부대신 및 사업 주무대신에게 청원하여 허가를 얻어야 했다.

이는 통감부가 당시에 불기 시작한 민립학교의 기부금 모집을 통제하여 학교 설립을 차단하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김효정, 「韓末 民立 師範學校의 設立과 敎育救國運動」,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교육과 역사전공 석사논문, 2015.2, 31쪽)

이 규칙이 이교재에게도 적용된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누구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기부금을 모집하여 어떤 용도로 쓰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음해에 통영에서 실제로 일어났듯이 독립군자금 모집과 관련된 일이 아니었을까라고 짐작해 보지만, 결정적인 자료는 없다.

그렇다면 이 기부금 사건도 이교재가 단독으로 실행한 것이라기보다 임정과 연계되어 진행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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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1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4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3)

 

이교재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뛰어든 것은 3.1운동 때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의 동지와 더불어 선언서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문건들을 道內 일원에 배부하다가 오서리 출신의 경찰인 이만갑에 의해 체포되어 진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고 알려졌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6쪽)

위와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간 독립만세 시위에 대한 참여나 체포 과정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적지 않았다.

다음의 기록은 그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1919년 7월 3일에 경상남도 장관인 사사키(佐佐木藤太郞)가 조선총독 하세가와에게 보낸 「소요에 관한 건(제7보)」에 따르면(문서제목, 「騷擾に關する件(第7報)」, 문서철명, 大正8年 騷擾事件に關する道長官報告綴 7冊內の7, 문서번호, 「慶南地親第491號朝鮮總督府 內秘補 135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정세가 점차 안정되어 가지만 아직도 강박문서가 때때로 각 방면에 배부되며 지난달(6월) 11일에 종래 李彰東의 명의로 진주에서 강박장을 배부하고 있던 이교재 체포(밑줄 필자)에 의해 금후는 화근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 뒤 지난달 24일에 도청 및 진주군청에서도 강박문서를 송부…”하고 있다면서 군내 유력자 77명을 진주문묘에 모아 놓고 그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교재는 6월 초순에도 이른바 강박문서를 진주에서 배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이창동의 명의’라는 것이 이창동의 이름으로 활동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교재가 저 이름으로 독립 관련 문서를 배포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3.1만세시위 직후부터 죽 계속된 것인지의 여부도 역시 확인하기 어렵지만, 함께 재판에 넘겨진 인물들과 6월 초순까지 진주에서 활동한 것은 분명하다.

진주경찰서에 잡혀간 이교재는 진주재판소를 거쳐 1919년 9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고 상소를 취하한 다음 9월 25일에 형이 확정되어 진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大正 8年(1919) 執行原簿(大邱覆審法院),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6752. 그러나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 정보에는 “삼일운동 때 경남북 일대에 선전문 배부 피체되어 3년 복역(진주형무소)”로 기술되어 있다.h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List. do?goTocode=20001 “경남북 일대”라는 부분도, 3년 복역이란 부분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이교재」항에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경상북도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진주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고 기술하였는데 이 역시 오류이다.)

당시 이교재와 같은 날에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을 언도받은 인물과 구형량은 다음과 같다.

<표 1> 3.1운동 당시 이교재와 일행의 재판 기록

성명 형량 죄명 재판소 형 확정일 형무소
李敎載 2년6개월 대정 8년 제령제7호 및 출판법 위반 대구복심법원 1919년9월25일 진주
沈相沅 1년 상동 상동 상동 상동
徐錫天 10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徐正奎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李炳秀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權寧漢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일제 당국이 이교재와 일행에게 언도한 죄명은 ‘대정 8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위반(출판법 위반의 구체적 내용은 ‘제1항 國交를 저해하고 政體를 붕괴케 하거나 국헌을 문란시키는 문서 및 도서를 출판했을 때는 3년 이하의 役刑에 처한다. 제2항 외교 및 군사의 기밀에 관한 문서 및 도화를 출판했을 때는 2년 이하의 역형에 처한다’ 등이었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역사문제연구 18, 2007, 14쪽)이었다.

잘 알다시피 制令이란 일본의 식민지배의 효율성과 자의성의 극대화를 위해 조선총독에게 부여된 제령제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법률을 말한다.

일본정부는 1910년 8월 29일의 「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이라는 긴급칙령 324호를 발포하여 일제하 조선의 법률은 조선총독부령, 곧 제령의 형식으로 제정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김창록, 「제령에 관한 연구」, 법사학연구 26, 2002, 109~171쪽)

강점기 35년간 제정된 제령은 모두 681건으로 분야별로는 경제와 산업이 466건, 사법·경찰이 157건, 기타 사회, 문화, 행정 순이다.(한승연, 「제령을 통해 본 총독정치의 목표와 조선 총독의 행정적 권한 연구」, 정부학연구 제15권 제2호, 2009, 180~183쪽)

3.1운동에 참여한 독립 인사들을 처벌하는데 사용된 ‘대정8년제령제7호’는 이 운동이 발발된 직후에 제정된 것이다.

대정8년제령제7호는 3.1운동 참가자에 대하여 보안법 대신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해 총독부내 사법부 장관의 제언으로 제령을 작성한 뒤 도쿄의 법제국과 교섭하여 이것을 완성하였다.

이를 4월 15일에 ‘정치와 관한 범죄처벌의 건’으로 공포 시행하게 된 것이 이른바 대정8년제령제7호이다.(최고 2년형으로 제한되어 있는 기존의 보안법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법은 제1호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공동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방해하려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제2조 전조의 죄를 범한 자가 발각 전에 자수하였을 때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다만 내란죄에 해당하는 자는 제령제7호를 적용하지 않는다. 제3조 본령은 제국 밖에서 제1조의 죄를 범한 제국신민에게도 이를 적용한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50~152쪽). 내란죄를 적용한 시위는 48인 사건, 안성사건, 의주사건, 수안사건 등이었다. 이는 주재소를 습격 방화하거나 관공서를 파괴, 공문서기 집기류를 훼손한 행위, 일본인 상점을 부수거나 호적원부와 기물을 파괴하는 등의 행위였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155~156쪽)

3.1운동으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은 총 7,816명 중에서 보안법 위반자가 5,601명으로 가장 많고 소요·출판법 276명, 제령제7호 위반자는 161명에 달하였다.

이교재의 경우 출판법과 제령제7호를 동시에 위반함으로써 2년 6개월의 형을 받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인원수는 각각 74명과 13명이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44~146쪽)

출판법 위반의 내용은 독립선언서, 곧 허가받지 않은 문서의 작성과 출판에 관여했는지, 독립선언서를 교부, 반포했는지에 따라 6개월의 형량차가 있었다. 또한 이교재는 피검자의 6.2%에 해당하는 제령제7호로 처벌을 받았다.

제령 위반으로 2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이는 모두 13명인데, 그에 포함된 것이다. 손병희 등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시위를 계획한 이른바 ‘48인 사건’에서 2년 6개월의 형을 받은 이는 최남선과 이갑성 등 24명이다.

이들 중 최남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보안법 제7조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45~148쪽). 말하자면 48인도 보안법 제7조로 처벌을 받은데 비해 이교재와 그 일행은 3.1운동 이후에 만들어진 제령제7호 위반으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교재 일행이 진주에서 체포된 시기는 6월이었기 때문에 4월에 제정된 제령제7호를 적용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원인 행위가 제령 제정 이전이었기 때문에 제령제7호를 소급하여 적용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윤상태와 같은 국권회복단 멤버들도 대정 8년 7월 16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대정8년제령제7호위반피고’로 재판을 받았으므로(「윤상태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99권-삼일운동과 국권회복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p:/db.history.go.kr/id/hd_009_0040_0080_0140 참조) 이교재 일행만이 제령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무거운 죄를 우선한 것이다.

그러나 이 죄명과 형기는 진전면 소장의 범죄인명부와 다르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 명부에도 확정 일자는 대정 8년 9월 25일이지만, 대면 재판이라는 사실을 명기하였고, 거기에 죄명은 ‘출판법 위반’이었다. 아울러 형명과 형기는 징역 1년 3개월로 적혀 있다.(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 이교재항, 이 명부는 삼진독립운동사, 252쪽에도 게재되어 있다.) 

제령제7호 위반은 해당되지 않았고, 출판법으로만 징역형을 언도한 셈이다.

출판법 위반으로도 1년 3개월의 징역형을 받은 것도 비교적 무거운 것이지만, 대구복심법원의 형기가 2년 6개월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년 3개월의 형량이 줄어든 것이다.

대구복심법원에서 결정한 판결내용과 범죄인명부의 그것이 다른 것은 궁금한 부분이지만, 출판법만 적용한 것은 다른 지역의 시위대와 달리 관청을 공격하여 기물을 파손하고 문서를 불태웠다거나 하는 등의 보안법 위반 사항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병수 역시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의 형을 받았으므로(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 이병수항 : 삼진독립운동사, 267쪽) 복심법원의 집행원부에서 보이는 제령제7호 위반은 잘못 적용된 법령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당시 3.1운동 참가자에 대한 재판에서 법리상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 변호인측에서 제기한 ‘공소불수리’, 곧 검찰이 독립운동가들을 제령제7호위반으로 공소한 것은 잘못이며 따라서 그들은 무죄라는 주장이었다.(「獨立宣言事件의 控訴公判 急轉直下로 事實審問에, 問題의 核心인 「公訴不受理」은 自歸水泡」, 동아일보, 1920년 9월 21일자)

결국 법원은 검찰의 공소가 무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기왕의 치안법이나 출판법을 적용하여 판결을 내렸으므로 이교재에게도 이 원칙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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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6.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3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2)

 

이교재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조선조 말기와 대한제국시기에 진전면 일대에는 몇몇 서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마을 단위이자 문중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문중 중에서도 이 지역의 주요 문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권씨, 초계변씨, 선산김씨, 밀성박씨, 창녕조씨, 회산황씨 등이 각각의 문중에 서당을 소유하고 있었고, 안동권씨가 운영하던 경행재도 그 중의 하나였다. (진전면에는 일암리의 誠久祠 경내의 道山書堂(草溪卞氏 문중), 오서리 동대에 있는 景行齋(安東權氏 문중), 오서리 서대(회동이 맞음. 필자주)에 있는 龜川精舍(密城朴氏 문중), 오서리 탑동에 있는 西溪精舍(安東權氏 문중) 등이 있었으며, 20세기에도 근곡리의 慕遠堂(善山金氏 문중), 평암리 미천의 棲巖亭(昌寧曺氏 문중), 임곡리의 石愚堂(檜山黃氏 문중) 등이 있었다(진전면지, 141쪽)

다만 이 서당들은 경행재에서 보듯이 대부분 문중의 재실과 서당을 병용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1867년 회동에 있는 회계서원의 支院으로 건축한 경행재는 1930년대의 조사에서도 안동권씨의 서당으로 기록되어 있다.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寫眞編 沿河部落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五西里 東大洞 安東權氏部落」 참조)

현재 남아 있는 건물구조는 4칸 반에 들보 3량 건물로써 좌우에 방이 있고, 중앙은 대청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1910년에 신식의 경행학교가 문을 연 이후 교실로 개조하면서 본래의 모습은 조금 바뀌었다고 한다.

건물 앞쪽으로는 비교적 넓은 마당이 있어서 소규모의 운동을 하기에 적당한 크기이다. 조선조 말기에 세워진 경행재의 서당 교육 프로그램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는 이교재 선생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권오봉의 사촌 동생으로 1905년에 태어난 권오익은 자전 속에서 6살 무렵부터 사숙, 곧 경행재에 다니면서 한문을 익혔으며 8세 때인 1913년 무렵에 소위 신학문으로 전환하여 낮에는 소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밤에는 한학을 습득하는 과중한 부담을 안았다는 것이다. (權五翼, 素波閑墨, 소파 권오익박사 환력기념논문집간행회, 1965, 94~98쪽)

적어도 1910년까지는 전통적인 서당이었으나 그 이후 신식학문을 도입하면서 당분간 2중식의 교육제도를 운영한 듯이 보인다. 서당 형태였던 경행재를 신식학교로 바꾼 이는 동대리 출신의 권오봉(1879~1959)으로 알려졌다.

약 300석 지기의 중농 집안 출신인 권오봉은 홀로 서울까지 걸어 올라가 고향 친구인 鄭祥煥(정상환은 1921년에 백산무역에 640주의 주식을 투자하였다(「디지털창원문화대전」, 권영조 참조)의 집에서 지내면서 1898년 2월에 김규식, 신민회 간부 李重華, 林珍洙가 교사로 있던 私立興化學校를 2년간 이수한 뒤 순회 연설, 격문 반포 혹은 학교교사 등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백산의 동지들, 부산일보사 기획출판국, 1998, 58쪽. 여기서 1898년이라고 한 것은 흥화학교가 그 해에 신문에 학생 모집 공고를 내고 자격과 개학일자 등을 공고한 것에 기반하여 이렇게 추정한 것은 아닐까 한다(리진호, 「사립흥화학교와 양지교육」, 향토서울 55, 1999, 91쪽). 백산 안희제도 1906년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경했고, 처음 1년 정도 흥화학교에서 수학한 적이 있다. 권오봉과 안희제는 동문이었던 것이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어문논총 77-0호, 2018.12, 153쪽). 흥화학교의 교육과정과 변화 및 교사진에 대해서는 김형목, 「사립흥화학교(1898~1911)의 근대교육사상 위치」, 백산학보 50, 1998과 정영희, 「사립흥화학교에 관한 연구」, 실학사상연구 13, 1999도 참고된다.)

그러나 이 학교의 학제나 교사 재직 연도로 보아 1906년 무렵에 입학하여 졸업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가 재학 중 혹은 이수 직후라고 말해지는 1899년에 당시의 교사 중에는 이중화와 임진수가 보이지 않고 김규식의 이름도 없다. 김규식과 임진수가 교사로 있던 시기는 1906년 전후였다(리진호, 「사립흥화학교와 양지교육」, 93~94쪽)

흥화학교의 교과와 운영, 지향하는 이념을 경험한 권오봉은 이러한 시스템을 경행재에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통상적으로는 1910년 10월에 사립경행학교를 창설하였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몇 년간 미인가 상태로 운영되다가 1914년 6월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것으로 본다.

박정선은 1910년 10월에 설립은 했으나 미인가 상태로 운영되다가 1914년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닐까라고 보았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39~141쪽). 말하자면 비공인 사립학교로 출범하였지만, 몇 년 뒤에는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1925년에는 6년제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1925년의 6년제 전환에 대해서는 「순회탐방(488) - 도처에 양전옥답 산물이 풍부(9)」, 동아일보 1927년 11월 20일자)

창설 초기에는 동대리 출신의 權寧祚(1883~1955) (「권영조씨 별세, 완월동 자택」, 마산일보 1955년 3월 13일자)와 고성 출신인 李鎭畿의 재정적 지원이 뒤따랐다.

특히 권영조는 “천신만고 끝에 校地 확장 및 학교림 조성 등 재정적 기초를 거의 독자적으로 마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51쪽)

개교 이후 18년 동안 권오봉 선생이 교장을 맡았다. (이병철, 앞의 글, 58쪽 : 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권오봉선생비문」, 삼진독립운동사, 2001, 88~89쪽. 고성군 독지가 李鎭坰, 오덕군, 허종택, 이진기 등 4명은 자담으로 각처에 유학한 학생을 도왔으며, 또 이진기가 파송한 유학생 安太元에게는 매월 20원씩을 보내어 일본의 山口縣고등상업학교에 다니도록 하였다. 자택에는 배둔공립보통학교 학생 4명의 의식을 전부 담당하는 등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한 인물이었다(동아일보 1920년 7월 3일자 및 1921년 4월 26일자 참조).

그러나 공립학교인 진전공립보통학교가 1927년에 설립되면서 경행학교도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통설상으로는 진전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면서 폐교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1928년 8월 19일에도 이 학교의 운동장에서 개인정구대회를 개최한다는 신문기사가 있었으므로,(「개인정구대회 -창원에서 개최」, 동아일보 1928년 8월 5일자) 실질적인 폐교는 그 이후인 1929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46쪽)

이런 추정은 실제 상황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이 학교의 교사진으로서는 창립자인 권오봉과 권영조를 들 수 있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51쪽)

또한 권오익은 경행학교 시절을 회고하면서 “폭군적 독재자 조(趙) 선생”, “권영길(權寧吉) 선생의 열혈교육”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5쪽) 적어도 4명의 교사가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교재도 1923년 이전에 일제 경찰 당국에서 ‘전교원’으로 기술하였으므로, 1910년대에는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다.

1914년 창설 당시 학생수는 120명이요, 校舍는 40평으로 신축하고 학교의 유지비는 지방 유지의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6년제로 승격한 1925년에 11회째 배출한 졸업생이 2백 명에 달하였고, 그 중에서 국내외의 각 중등, 전문대학 유학생 수가 10명이며, 1927년의 학생수는 남녀 90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순회탐방(488) -도처에 양전옥답 산물이 풍부(9), 동아일보 1927년 11월 20일자. 1921년에 양촌리의 양전학교와 연합운동회를 개최하였는데, 경행학교 학생 약 150명과 양전학교 학생 약 50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양교 연합대운동」, 동아일보, 1921년 10월 23일자). 1921년 당시에도 여전히 큰 규모의 학교였던 것이다.) 성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의 유지비도 앞서 말한 독지가 뿐만 아니라 문중에서 나오는 경비까지 포함되면서 校舍를 유치하고 학교를 운영하였으니 궁핍한 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렇다면 신식의 경행학교에서 운영되는 교과과정과 그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권오익의 회고에 따르면, 신식 사립소학교에서는 배일사상의 고취와 항전의식을 앙양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순국열사, 의사에 대한 선동적 강화와 당시로서는 금서였던 유년필독, 월남망국사 등의 애국서책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상급반에서는 양계초의 조선망국사략을 부교재격으로 활용하였다.(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4~95쪽)

이러한 학습용 교과와 달리 돌격연습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나무막대기를 들고 행한 이 연습에서 “무쇠 골격 돌 근육 소년남아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와 같은 감동가를 불렀으며, 결국 이런 정신이 골수에 사무쳐 인생항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4~95쪽)

1908년에 설립된 마산의 창신학교에서도 유사한 兵式체조를 실시하였다.(조호연편, 마산시체육사, 마산시, 2004, 29~31쪽) 항일정신의 함양에 필요한 교과와 그에 따르는 신체 훈련은 당시의 마산이나 창원 지역의 학교에서 많이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에서 촬영한 경행재 전경에는 운동장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 下編, 「寫眞編 書堂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五西里 東大洞 安東東權氏書堂」 참조) 이런 곳이 체조나 돌격연습을 하는데 활용되었으리라고 본다.

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구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운동 부분에 많은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 이후 마산이나 진전 지역의 사립학교에서 독립운동을 고취하기 위해 문무를 겸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사립학교는 또한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거점이기도 하였다. 윤상태가 주도한 달성군의 덕산학교나 안희제의 龜明학교(구포), 宜新학교(의령), 창남학교(의령) 등이 이에 속한다.(이동언, 「안희제의 교육구국운동」, 국학연구 4, 2000, 40~62쪽)

이는 1907년 「교육윤음」이 내려진 이후 각 서원이 사립학교를 부설하면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는데, 경남에서는 1908년에 안희제, 이원식, 서상일 등 대동청년단과 국권회복단의 중심 인물들이 교남교육회를 창립하였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민족문화논총 9, 1988, 164~165쪽)

이런 맥락에서 보면 권오익을 중심으로 시작된 경행학교의 신식 교육은 당시 지역사회에서 진행된 국권회복 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경행학교에서는 독립운동가나 교육자, 프로문학가와 영화 감독 등이 다수 배출되었다.(이는 함안 칠원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독립만세시위가 교회와 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과 대비된다(이정은, 「경남 함안군 3.1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7, 2006.12, 105~106쪽)

동경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교수와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권오익(1905~1998), 영화 <암로>의 감독으로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월북한 강호(1908~1984) (이성철, 경남지역 영화사 - 마산의 강호 감독과 창원의 리버티늬우스, 호밀밭, 2015, 31~76쪽), 권오봉의 아들이자 카프시인으로 활동한 권환(1903~ 1954), 동래고등여학교 초대교장 권영운, 고현시장 의거를 조직한 권오규(1895~1961)와 독립운동가 이교재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58쪽)

경행재와 경행학교에 대한 위와 같은 검토에도 불구하고 이교재와 관련된 자료는 많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의 서술에 어려움이 있다.

1887년생인 이교재는 어린 시절에 서당식의 경행재에서 유교경전 중심의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권오익 선생이 6세 때 서당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으므로 이교재 선생도 대략 그 나이 때에 경행재에 들어갔으리라고 본다.

1893년 이후의 시기에 해당된다. 언제 그가 이 서당 교육을 마무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권오봉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임은 확실해 보인.(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59쪽)

또한 그가 24살이 되던 1910년에도 사립경행학교에 다녔는지는 역시 알기 어렵다.

변지섭에 따르면 이교재는 대한제국의 멸망 직후인 24세의 나이에 국권회복에 진력하고자 동지를 모집하였고, 1913년부터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활동하였다고 기술하였기 때문이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6쪽)

그렇다면 일제의 강제합병 직후에는 경행학교에 재학 중이었다기 보다는 이미 졸업하여 사회활동을 하는 신분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이교재는 일제의 강제합병 이후에 이 학교의 교사로서 적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식민지 경찰의 사건일지식 기록(1923년 9월 21일)에 따르면 “前敎員 이교재가 임시정부의 밀명에 따라 국내로 잠입,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다”라는 구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慶尙南道 警察部, 慶南高等警察府高等警察關係摘錄 1919-1935, 1936, 39쪽)

‘전교원’이라고 기술한 것은 적어도 경행재가 소학교로 전환한 다음에 그가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이것이 1923년 이전 어느 시점에 마무리되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그가 경행학교에 재직하였을 시기는 1910년에서 1923년 직전까지일 터인데, 3.1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수감되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1919년 이전까지였을 것이다. 곧 1910년 사립경행학교 설립 이후부터 1919년 이전까지였을 것으로 보는 편이 무난하다.

그는 이러한 교육경력을 바탕으로 1920년 12월에 조직된 진전교육회에도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의 경력에서 아직까지 주목받지 못한 진전교육회는 “지난해 1월에 창원군 진전면 유지 제씨의 발기로 교육진흥, 지식교환, 체육발달, 풍속 개정 등을 목적으로 면내에 거주하는 자로서 만 20세 이상의 남자에 한하여 진전교육회를 조직하였다”고 보도되었다.

울러 임원으로는 “會長 權五鳳, 副會長 卞舜燮, 總務 權五成, 學術部長 李鍾協, 矯風部將 權寧寔, 運動部長 權寧祚, 部員 李昌淳, 金晟洙, 姜德永, 卞相憲, 李基榮, 卞相述, 幹事 李敎載, 金聖漢, 卞又範, 會計員 權榮鎭 金敦洙, 書記 李玘宰, 評護員 金태鉉 외 12인”(「진전교육회 출범」, 동아일보, 1921년 5월 6일자)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목록에 진전교육회의 간사로서 이교재가 김성한, 변우범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허나 이 기록에는 검토해야 할 사항이 있다. 1920년 12월에는 이교재가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죄목으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진전면사무소에 소장되어 있는 범죄인 명부 ‘이교재’ 항의 「刑名 刑期」란에 ‘징역 1년 3월’로 기재되어 있음을 참작하면(慶尙南道 警察部, 慶南高等警察府高等警察關係摘錄 1919-1935, 1936 3冊中 제1호, 18번, 이 자료를 찾아준 고성군 기록연구사 김상민 선생에게 감사한다.)육회 조직 당시에는 출옥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질적으로 이 조직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 교육회의 멤버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을 살펴보면 이교재 선생의 인맥과 사회인식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권오봉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동대 마을 안동권씨의 일원으로써 카프문학가로 이름이 높은 권환의 부친이었고, 인맥도 상당히 넓었던 것 같다.

그는 의령의 애국지사인 남저 이우식과 사돈관계였는데, 권오봉의 둘째 아들이 남저의 사위였다. 이우식은 대종교도였는데, 권오봉도 대종교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권환의 휘문고보 학생학적부의 ‘가정 혹 본인신앙’에 ‘대종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이장렬, 권환 문학 연구, 경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10쪽)

당시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상당수가 대종교를 신앙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교재도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동대 마을의 ‘진사골목’이라고 부르는 동네 길에서 이교재와 이웃하여 살았던 권오봉은 또한 1919년 4월 3일에 거행된 삼진독립의거 때 진전면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직원록 1920년 지방관서>경상남도>부군도>창원군) 이때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성금을 갹출하는데 앞장섰다.

권오봉은 1920년 무렵에 진전에 설립된 오정 야학의 학장으로, 또 1923년에 소작농 수천명을 망라해 결성된 삼진노동공제회의 간부로, 오서부업장려회 회장이자 삼진농민조합에서는 제3부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는 등 지역사회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49~150쪽)

교육회의 운동부장 권영조는 1919년 3월 28일에 있었던 진동면 고현의거에서 이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마산감옥에서 1년간 수형생활을 한 적이 있고, 경행학교의 교사로도 재직하였다. 교육회의 부원인 변상헌과 변상술은 4.3의거를 주도한 죄명으로 1년간 복역하였으며, 일암리 출신의 변우범(1898-1974) 역시 4.3의거 때의 주동자로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변우범 참조) 곧 1919년의 삼진만세시위 당시 주도했던 인물들이 교육회의 핵심 멤버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물 구성의 특징은 삼진지역의 명족이라 할 수 있는 안동권씨, 초계변씨, 성주이씨, 선산김씨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삼진의거의 특징 중 하나가 각지에 세거하고 있던 이들 명족이 연대하였다는 사실인,(이종흡 외, 「4.3 삼진의거 연구」, 가라문화 21·22, 2009, 106~107쪽. 이러한 양상은 합천에서도 유사하였다. 예컨대 3월 23일의 삼가 시위는 군내의 가회, 삼가, 백산면 등이 중심이었고, 지역 내의 지주와 유지, 자산가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이정은, 「경남 합천의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11, 247~248쪽) 이로써 우리는 교육회 역시 명족과 애국심이 결합되어 조직된 지역사회의 교육운동체이며 여기에 이교재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교재는 1919년 전후에 지역사회에서 교육과 애국운동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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