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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2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5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4)

 

그렇다면 이교재와 함께 형무소에 갇힌 위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순서대로 적힌 인물들을 검토해 보자.

沈相沅에 관한 기록은 재판 기록 이외에서는 신상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형량에 있어서 이교재보다 적지만 다른 이들보다는 많은 1년 형이다.

다음으로 서석천의 경우, 1949년 4월에 발간된 한 언론에 실린 19명의 명단 속에 그의 이름이 있다.(민주중보 제1034호(7권) 1949년 4월 29일자. 이곳에 실린 명단은 沈倫, 金義植, 南海, 咸陽 金守東, 洪源轍, 徐錫天, 孫吉童, 朴洙東, 統營 金宜錫, 洪鍾濟, 宋孟守, 朴○漢, 馬山 金浩鉉, 高昇柱, 卞甲섭, 金英煥, 洪斗益, 卞相福, 李基鳳 등이다.)

들 중에서 예컨대 마산지역 출신으로 구분된 金浩鉉, 高昇柱, 卞甲燮, 金英煥, 洪斗益,卞相福, 李基鳳 등은 모두 삼진의거 때 피살당한 8의사들이다.

서석천은 남해와 함양 지역의 인물로 속해 있는데, 이로 보아 이교재와 같은 시기에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49년에 반민특위경남조사부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을 때, 당시 조사관들은 진동의 창의비에 참배를 하면서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 기미독립운동 당시 피체포자인 서석천도 동행하였다.(이때 체포된 인물 중 삼진의거 때 일본헌병의 일원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 총을 쏘았던 심의경이 포함되어 있다. 62세였던 그는 함안군 법수면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죄로 체포된 인물 중에 진동면 고현의 송도에 사는 金尙圭도 포함되어 있다.)

徐正奎(1889~1949)는 창원의 진동면 출신으로 1919년 3월 28일에 있었던 고현의 만세시위 참여하였고, 이어 4.3시위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그 역시 제령제7호와 출판법 위반으로 이교재와 같이 진주지청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에서 6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인터넷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관리번호 31950) 

출신지가 진동이고 고현과 4.3의거에 잇따라 참여하였음에도 의거 직후에 피체를 피한 채 다시 진주에 가서 활동한 것을 보면, 이교재 역시 이러한 궤적을 밟았으리라고 본다.

李炳秀(1896~1960)의 출생지 주소는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97번지이다. 이 주소는 현재 동대 마을에 있는 진전우체국 옆으로, 이교재와 바로 이웃한 곳에서 살았음을 보여준다.(인터넷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이병수는 이교재가 통영에서 군자금 모금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을 당시 “동지 이병수씨(현존)와 통영, 마산, 진주 방면으로 전전 피신하던 중에”라는 김형윤 기자의 회고담이 있는 것으로 보아(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두 사람은 친밀한 동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다.

진전면 오서리가 고향인 권영한의 죄명도 집행원부에 따르면 대정8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위반이며 이교재와 같이 9월 25일에 최종적으로 6개월 징역형이 확정되었다.(이들은 범죄인명부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최종적인 형명이나 형기를 알 수는 없으나 이병수와 같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동·진전·진북의 3개 면을 일컫는 삼진지역에서는 4.3삼진의거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에 못지않게 체포 투옥된 이들이 있지만,(「창원소요판결, 징역 1년 이하」, 매일신보, 1919년 5월 29일자 기사에 인명 朴和烈, 甘泰舜, 具在均, 薛灌銖, 裵龍文, 曹潤鎬, 孔道守, 張相五, 金相鎭, 金世元, 沈相璘, 申甲先, 曹喜舜, 史致洪, 金道根, 李大鎬, 金斯文, 金介同, 孔仕千, 金昌實, 崔介同, 申壽鉉, 安相錫, 金瀅源, 崔世植, 趙鏞瑨, 徐鎔守, 金南守, 許鎭, 權寧祚, 權寧震, 權五奎, 權泰濬, 白承仁, 盧秀?, 朴淳祚, 金鍾顥, 權五成, 李敎瑛 등의 이름이 보인다. ) 이들은 대부분 경성지방법원이나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와 달리 위의 6인은 진주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날에 같은 죄명으로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1923년의 통영사건 때에도 오서리 출신의 이만갑이라는 진주경찰서 고등형사에게 체포되었다고 알려졌는데,(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3.1운동 때에도 진주에서 체포되었기 때문에 삼진지역의 독립운동가와는 다른 법정에 서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컨대 이교재 일행은 삼진지역의 면민들이 연합대를 구성하여 진행한 3.1운동에 참여한 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진주에 가서 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하다 그곳에서 체포되었던 것이다.

복심법원에서의 형기를 마쳤다면 이교재는 1922년 3월 24일에 출옥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진전면에 소장된 범죄인명부에는 1년 3개월간의 형기를 마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1920년 12월 24일에 출옥한 셈이 된다.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다. 이교재는 출옥 직후에 상해의 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허나 아직껏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사건이 있다. 1922년 4월 18일이 판결 날짜로 되어 있는 국가기록원 소장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에 따르면 “이름은 이교재, 나이는 37세, 본적/주소는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이며, 죄명은 ‘대정 8년 제령제7호 위반’”이다.

판결기관은 마산지검 충무지청으로서 주문은 ‘죄가 되지 않음’이었다.(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판결문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622&evntId= &evntdowngbn=N&indpnId=0000145848&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앞에서 본 바와 같이 3.1운동으로 인한 복역기간이 1년 3개월이었다면 출옥 이후 1년 4개월여 만에 다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것이다.

이와 달리 진동면사무소 소장의 범죄인 명부에 기재된 죄명은 ‘기부금품모집취제규칙위반’이며, 형명과 형기는 ‘벌금 30원’, 판결청은 ‘마산분국’이다.

국가기록원 기록과 달리 죄명이 구체적이며 그에 따른 벌금까지 부과한 것이다.

이 「기부금품취체규칙」은 융희 3년(1909) 3월 1일에 각령 제2호로 관보에 실렸는데, 기부금품을 모집할 경우에는 모집 목적 및 방법, 모집 금품의 종류, 수량 및 보관 방법, 모집자의 주소· 직업· 성명· 연령 등을 갖춰 내부대신 및 사업 주무대신에게 청원하여 허가를 얻어야 했다.

이는 통감부가 당시에 불기 시작한 민립학교의 기부금 모집을 통제하여 학교 설립을 차단하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김효정, 「韓末 民立 師範學校의 設立과 敎育救國運動」,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교육과 역사전공 석사논문, 2015.2, 31쪽)

이 규칙이 이교재에게도 적용된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누구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기부금을 모집하여 어떤 용도로 쓰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음해에 통영에서 실제로 일어났듯이 독립군자금 모집과 관련된 일이 아니었을까라고 짐작해 보지만, 결정적인 자료는 없다.

그렇다면 이 기부금 사건도 이교재가 단독으로 실행한 것이라기보다 임정과 연계되어 진행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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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1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4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3)

 

이교재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뛰어든 것은 3.1운동 때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의 동지와 더불어 선언서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문건들을 道內 일원에 배부하다가 오서리 출신의 경찰인 이만갑에 의해 체포되어 진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고 알려졌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6쪽)

위와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간 독립만세 시위에 대한 참여나 체포 과정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적지 않았다.

다음의 기록은 그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1919년 7월 3일에 경상남도 장관인 사사키(佐佐木藤太郞)가 조선총독 하세가와에게 보낸 「소요에 관한 건(제7보)」에 따르면(문서제목, 「騷擾に關する件(第7報)」, 문서철명, 大正8年 騷擾事件に關する道長官報告綴 7冊內の7, 문서번호, 「慶南地親第491號朝鮮總督府 內秘補 135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정세가 점차 안정되어 가지만 아직도 강박문서가 때때로 각 방면에 배부되며 지난달(6월) 11일에 종래 李彰東의 명의로 진주에서 강박장을 배부하고 있던 이교재 체포(밑줄 필자)에 의해 금후는 화근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 뒤 지난달 24일에 도청 및 진주군청에서도 강박문서를 송부…”하고 있다면서 군내 유력자 77명을 진주문묘에 모아 놓고 그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교재는 6월 초순에도 이른바 강박문서를 진주에서 배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이창동의 명의’라는 것이 이창동의 이름으로 활동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교재가 저 이름으로 독립 관련 문서를 배포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3.1만세시위 직후부터 죽 계속된 것인지의 여부도 역시 확인하기 어렵지만, 함께 재판에 넘겨진 인물들과 6월 초순까지 진주에서 활동한 것은 분명하다.

진주경찰서에 잡혀간 이교재는 진주재판소를 거쳐 1919년 9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고 상소를 취하한 다음 9월 25일에 형이 확정되어 진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大正 8年(1919) 執行原簿(大邱覆審法院),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6752. 그러나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 정보에는 “삼일운동 때 경남북 일대에 선전문 배부 피체되어 3년 복역(진주형무소)”로 기술되어 있다.h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List. do?goTocode=20001 “경남북 일대”라는 부분도, 3년 복역이란 부분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이교재」항에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경상북도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진주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고 기술하였는데 이 역시 오류이다.)

당시 이교재와 같은 날에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을 언도받은 인물과 구형량은 다음과 같다.

<표 1> 3.1운동 당시 이교재와 일행의 재판 기록

성명 형량 죄명 재판소 형 확정일 형무소
李敎載 2년6개월 대정 8년 제령제7호 및 출판법 위반 대구복심법원 1919년9월25일 진주
沈相沅 1년 상동 상동 상동 상동
徐錫天 10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徐正奎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李炳秀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權寧漢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일제 당국이 이교재와 일행에게 언도한 죄명은 ‘대정 8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위반(출판법 위반의 구체적 내용은 ‘제1항 國交를 저해하고 政體를 붕괴케 하거나 국헌을 문란시키는 문서 및 도서를 출판했을 때는 3년 이하의 役刑에 처한다. 제2항 외교 및 군사의 기밀에 관한 문서 및 도화를 출판했을 때는 2년 이하의 역형에 처한다’ 등이었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역사문제연구 18, 2007, 14쪽)이었다.

잘 알다시피 制令이란 일본의 식민지배의 효율성과 자의성의 극대화를 위해 조선총독에게 부여된 제령제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법률을 말한다.

일본정부는 1910년 8월 29일의 「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이라는 긴급칙령 324호를 발포하여 일제하 조선의 법률은 조선총독부령, 곧 제령의 형식으로 제정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김창록, 「제령에 관한 연구」, 법사학연구 26, 2002, 109~171쪽)

강점기 35년간 제정된 제령은 모두 681건으로 분야별로는 경제와 산업이 466건, 사법·경찰이 157건, 기타 사회, 문화, 행정 순이다.(한승연, 「제령을 통해 본 총독정치의 목표와 조선 총독의 행정적 권한 연구」, 정부학연구 제15권 제2호, 2009, 180~183쪽)

3.1운동에 참여한 독립 인사들을 처벌하는데 사용된 ‘대정8년제령제7호’는 이 운동이 발발된 직후에 제정된 것이다.

대정8년제령제7호는 3.1운동 참가자에 대하여 보안법 대신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해 총독부내 사법부 장관의 제언으로 제령을 작성한 뒤 도쿄의 법제국과 교섭하여 이것을 완성하였다.

이를 4월 15일에 ‘정치와 관한 범죄처벌의 건’으로 공포 시행하게 된 것이 이른바 대정8년제령제7호이다.(최고 2년형으로 제한되어 있는 기존의 보안법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법은 제1호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공동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방해하려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제2조 전조의 죄를 범한 자가 발각 전에 자수하였을 때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다만 내란죄에 해당하는 자는 제령제7호를 적용하지 않는다. 제3조 본령은 제국 밖에서 제1조의 죄를 범한 제국신민에게도 이를 적용한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50~152쪽). 내란죄를 적용한 시위는 48인 사건, 안성사건, 의주사건, 수안사건 등이었다. 이는 주재소를 습격 방화하거나 관공서를 파괴, 공문서기 집기류를 훼손한 행위, 일본인 상점을 부수거나 호적원부와 기물을 파괴하는 등의 행위였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155~156쪽)

3.1운동으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은 총 7,816명 중에서 보안법 위반자가 5,601명으로 가장 많고 소요·출판법 276명, 제령제7호 위반자는 161명에 달하였다.

이교재의 경우 출판법과 제령제7호를 동시에 위반함으로써 2년 6개월의 형을 받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인원수는 각각 74명과 13명이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44~146쪽)

출판법 위반의 내용은 독립선언서, 곧 허가받지 않은 문서의 작성과 출판에 관여했는지, 독립선언서를 교부, 반포했는지에 따라 6개월의 형량차가 있었다. 또한 이교재는 피검자의 6.2%에 해당하는 제령제7호로 처벌을 받았다.

제령 위반으로 2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이는 모두 13명인데, 그에 포함된 것이다. 손병희 등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시위를 계획한 이른바 ‘48인 사건’에서 2년 6개월의 형을 받은 이는 최남선과 이갑성 등 24명이다.

이들 중 최남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보안법 제7조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45~148쪽). 말하자면 48인도 보안법 제7조로 처벌을 받은데 비해 이교재와 그 일행은 3.1운동 이후에 만들어진 제령제7호 위반으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교재 일행이 진주에서 체포된 시기는 6월이었기 때문에 4월에 제정된 제령제7호를 적용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원인 행위가 제령 제정 이전이었기 때문에 제령제7호를 소급하여 적용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윤상태와 같은 국권회복단 멤버들도 대정 8년 7월 16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대정8년제령제7호위반피고’로 재판을 받았으므로(「윤상태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99권-삼일운동과 국권회복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p:/db.history.go.kr/id/hd_009_0040_0080_0140 참조) 이교재 일행만이 제령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무거운 죄를 우선한 것이다.

그러나 이 죄명과 형기는 진전면 소장의 범죄인명부와 다르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 명부에도 확정 일자는 대정 8년 9월 25일이지만, 대면 재판이라는 사실을 명기하였고, 거기에 죄명은 ‘출판법 위반’이었다. 아울러 형명과 형기는 징역 1년 3개월로 적혀 있다.(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 이교재항, 이 명부는 삼진독립운동사, 252쪽에도 게재되어 있다.) 

제령제7호 위반은 해당되지 않았고, 출판법으로만 징역형을 언도한 셈이다.

출판법 위반으로도 1년 3개월의 징역형을 받은 것도 비교적 무거운 것이지만, 대구복심법원의 형기가 2년 6개월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년 3개월의 형량이 줄어든 것이다.

대구복심법원에서 결정한 판결내용과 범죄인명부의 그것이 다른 것은 궁금한 부분이지만, 출판법만 적용한 것은 다른 지역의 시위대와 달리 관청을 공격하여 기물을 파손하고 문서를 불태웠다거나 하는 등의 보안법 위반 사항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병수 역시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의 형을 받았으므로(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 이병수항 : 삼진독립운동사, 267쪽) 복심법원의 집행원부에서 보이는 제령제7호 위반은 잘못 적용된 법령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당시 3.1운동 참가자에 대한 재판에서 법리상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 변호인측에서 제기한 ‘공소불수리’, 곧 검찰이 독립운동가들을 제령제7호위반으로 공소한 것은 잘못이며 따라서 그들은 무죄라는 주장이었다.(「獨立宣言事件의 控訴公判 急轉直下로 事實審問에, 問題의 核心인 「公訴不受理」은 自歸水泡」, 동아일보, 1920년 9월 21일자)

결국 법원은 검찰의 공소가 무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기왕의 치안법이나 출판법을 적용하여 판결을 내렸으므로 이교재에게도 이 원칙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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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6.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3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2)

 

이교재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조선조 말기와 대한제국시기에 진전면 일대에는 몇몇 서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마을 단위이자 문중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문중 중에서도 이 지역의 주요 문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권씨, 초계변씨, 선산김씨, 밀성박씨, 창녕조씨, 회산황씨 등이 각각의 문중에 서당을 소유하고 있었고, 안동권씨가 운영하던 경행재도 그 중의 하나였다. (진전면에는 일암리의 誠久祠 경내의 道山書堂(草溪卞氏 문중), 오서리 동대에 있는 景行齋(安東權氏 문중), 오서리 서대(회동이 맞음. 필자주)에 있는 龜川精舍(密城朴氏 문중), 오서리 탑동에 있는 西溪精舍(安東權氏 문중) 등이 있었으며, 20세기에도 근곡리의 慕遠堂(善山金氏 문중), 평암리 미천의 棲巖亭(昌寧曺氏 문중), 임곡리의 石愚堂(檜山黃氏 문중) 등이 있었다(진전면지, 141쪽)

다만 이 서당들은 경행재에서 보듯이 대부분 문중의 재실과 서당을 병용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1867년 회동에 있는 회계서원의 支院으로 건축한 경행재는 1930년대의 조사에서도 안동권씨의 서당으로 기록되어 있다.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寫眞編 沿河部落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五西里 東大洞 安東權氏部落」 참조)

현재 남아 있는 건물구조는 4칸 반에 들보 3량 건물로써 좌우에 방이 있고, 중앙은 대청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1910년에 신식의 경행학교가 문을 연 이후 교실로 개조하면서 본래의 모습은 조금 바뀌었다고 한다.

건물 앞쪽으로는 비교적 넓은 마당이 있어서 소규모의 운동을 하기에 적당한 크기이다. 조선조 말기에 세워진 경행재의 서당 교육 프로그램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는 이교재 선생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권오봉의 사촌 동생으로 1905년에 태어난 권오익은 자전 속에서 6살 무렵부터 사숙, 곧 경행재에 다니면서 한문을 익혔으며 8세 때인 1913년 무렵에 소위 신학문으로 전환하여 낮에는 소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밤에는 한학을 습득하는 과중한 부담을 안았다는 것이다. (權五翼, 素波閑墨, 소파 권오익박사 환력기념논문집간행회, 1965, 94~98쪽)

적어도 1910년까지는 전통적인 서당이었으나 그 이후 신식학문을 도입하면서 당분간 2중식의 교육제도를 운영한 듯이 보인다. 서당 형태였던 경행재를 신식학교로 바꾼 이는 동대리 출신의 권오봉(1879~1959)으로 알려졌다.

약 300석 지기의 중농 집안 출신인 권오봉은 홀로 서울까지 걸어 올라가 고향 친구인 鄭祥煥(정상환은 1921년에 백산무역에 640주의 주식을 투자하였다(「디지털창원문화대전」, 권영조 참조)의 집에서 지내면서 1898년 2월에 김규식, 신민회 간부 李重華, 林珍洙가 교사로 있던 私立興化學校를 2년간 이수한 뒤 순회 연설, 격문 반포 혹은 학교교사 등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백산의 동지들, 부산일보사 기획출판국, 1998, 58쪽. 여기서 1898년이라고 한 것은 흥화학교가 그 해에 신문에 학생 모집 공고를 내고 자격과 개학일자 등을 공고한 것에 기반하여 이렇게 추정한 것은 아닐까 한다(리진호, 「사립흥화학교와 양지교육」, 향토서울 55, 1999, 91쪽). 백산 안희제도 1906년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경했고, 처음 1년 정도 흥화학교에서 수학한 적이 있다. 권오봉과 안희제는 동문이었던 것이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어문논총 77-0호, 2018.12, 153쪽). 흥화학교의 교육과정과 변화 및 교사진에 대해서는 김형목, 「사립흥화학교(1898~1911)의 근대교육사상 위치」, 백산학보 50, 1998과 정영희, 「사립흥화학교에 관한 연구」, 실학사상연구 13, 1999도 참고된다.)

그러나 이 학교의 학제나 교사 재직 연도로 보아 1906년 무렵에 입학하여 졸업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가 재학 중 혹은 이수 직후라고 말해지는 1899년에 당시의 교사 중에는 이중화와 임진수가 보이지 않고 김규식의 이름도 없다. 김규식과 임진수가 교사로 있던 시기는 1906년 전후였다(리진호, 「사립흥화학교와 양지교육」, 93~94쪽)

흥화학교의 교과와 운영, 지향하는 이념을 경험한 권오봉은 이러한 시스템을 경행재에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통상적으로는 1910년 10월에 사립경행학교를 창설하였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몇 년간 미인가 상태로 운영되다가 1914년 6월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것으로 본다.

박정선은 1910년 10월에 설립은 했으나 미인가 상태로 운영되다가 1914년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닐까라고 보았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39~141쪽). 말하자면 비공인 사립학교로 출범하였지만, 몇 년 뒤에는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1925년에는 6년제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1925년의 6년제 전환에 대해서는 「순회탐방(488) - 도처에 양전옥답 산물이 풍부(9)」, 동아일보 1927년 11월 20일자)

창설 초기에는 동대리 출신의 權寧祚(1883~1955) (「권영조씨 별세, 완월동 자택」, 마산일보 1955년 3월 13일자)와 고성 출신인 李鎭畿의 재정적 지원이 뒤따랐다.

특히 권영조는 “천신만고 끝에 校地 확장 및 학교림 조성 등 재정적 기초를 거의 독자적으로 마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51쪽)

개교 이후 18년 동안 권오봉 선생이 교장을 맡았다. (이병철, 앞의 글, 58쪽 : 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권오봉선생비문」, 삼진독립운동사, 2001, 88~89쪽. 고성군 독지가 李鎭坰, 오덕군, 허종택, 이진기 등 4명은 자담으로 각처에 유학한 학생을 도왔으며, 또 이진기가 파송한 유학생 安太元에게는 매월 20원씩을 보내어 일본의 山口縣고등상업학교에 다니도록 하였다. 자택에는 배둔공립보통학교 학생 4명의 의식을 전부 담당하는 등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한 인물이었다(동아일보 1920년 7월 3일자 및 1921년 4월 26일자 참조).

그러나 공립학교인 진전공립보통학교가 1927년에 설립되면서 경행학교도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통설상으로는 진전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면서 폐교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1928년 8월 19일에도 이 학교의 운동장에서 개인정구대회를 개최한다는 신문기사가 있었으므로,(「개인정구대회 -창원에서 개최」, 동아일보 1928년 8월 5일자) 실질적인 폐교는 그 이후인 1929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46쪽)

이런 추정은 실제 상황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이 학교의 교사진으로서는 창립자인 권오봉과 권영조를 들 수 있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51쪽)

또한 권오익은 경행학교 시절을 회고하면서 “폭군적 독재자 조(趙) 선생”, “권영길(權寧吉) 선생의 열혈교육”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5쪽) 적어도 4명의 교사가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교재도 1923년 이전에 일제 경찰 당국에서 ‘전교원’으로 기술하였으므로, 1910년대에는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다.

1914년 창설 당시 학생수는 120명이요, 校舍는 40평으로 신축하고 학교의 유지비는 지방 유지의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6년제로 승격한 1925년에 11회째 배출한 졸업생이 2백 명에 달하였고, 그 중에서 국내외의 각 중등, 전문대학 유학생 수가 10명이며, 1927년의 학생수는 남녀 90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순회탐방(488) -도처에 양전옥답 산물이 풍부(9), 동아일보 1927년 11월 20일자. 1921년에 양촌리의 양전학교와 연합운동회를 개최하였는데, 경행학교 학생 약 150명과 양전학교 학생 약 50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양교 연합대운동」, 동아일보, 1921년 10월 23일자). 1921년 당시에도 여전히 큰 규모의 학교였던 것이다.) 성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의 유지비도 앞서 말한 독지가 뿐만 아니라 문중에서 나오는 경비까지 포함되면서 校舍를 유치하고 학교를 운영하였으니 궁핍한 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렇다면 신식의 경행학교에서 운영되는 교과과정과 그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권오익의 회고에 따르면, 신식 사립소학교에서는 배일사상의 고취와 항전의식을 앙양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순국열사, 의사에 대한 선동적 강화와 당시로서는 금서였던 유년필독, 월남망국사 등의 애국서책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상급반에서는 양계초의 조선망국사략을 부교재격으로 활용하였다.(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4~95쪽)

이러한 학습용 교과와 달리 돌격연습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나무막대기를 들고 행한 이 연습에서 “무쇠 골격 돌 근육 소년남아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와 같은 감동가를 불렀으며, 결국 이런 정신이 골수에 사무쳐 인생항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4~95쪽)

1908년에 설립된 마산의 창신학교에서도 유사한 兵式체조를 실시하였다.(조호연편, 마산시체육사, 마산시, 2004, 29~31쪽) 항일정신의 함양에 필요한 교과와 그에 따르는 신체 훈련은 당시의 마산이나 창원 지역의 학교에서 많이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에서 촬영한 경행재 전경에는 운동장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 下編, 「寫眞編 書堂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五西里 東大洞 安東東權氏書堂」 참조) 이런 곳이 체조나 돌격연습을 하는데 활용되었으리라고 본다.

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구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운동 부분에 많은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 이후 마산이나 진전 지역의 사립학교에서 독립운동을 고취하기 위해 문무를 겸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사립학교는 또한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거점이기도 하였다. 윤상태가 주도한 달성군의 덕산학교나 안희제의 龜明학교(구포), 宜新학교(의령), 창남학교(의령) 등이 이에 속한다.(이동언, 「안희제의 교육구국운동」, 국학연구 4, 2000, 40~62쪽)

이는 1907년 「교육윤음」이 내려진 이후 각 서원이 사립학교를 부설하면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는데, 경남에서는 1908년에 안희제, 이원식, 서상일 등 대동청년단과 국권회복단의 중심 인물들이 교남교육회를 창립하였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민족문화논총 9, 1988, 164~165쪽)

이런 맥락에서 보면 권오익을 중심으로 시작된 경행학교의 신식 교육은 당시 지역사회에서 진행된 국권회복 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경행학교에서는 독립운동가나 교육자, 프로문학가와 영화 감독 등이 다수 배출되었다.(이는 함안 칠원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독립만세시위가 교회와 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과 대비된다(이정은, 「경남 함안군 3.1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7, 2006.12, 105~106쪽)

동경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교수와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권오익(1905~1998), 영화 <암로>의 감독으로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월북한 강호(1908~1984) (이성철, 경남지역 영화사 - 마산의 강호 감독과 창원의 리버티늬우스, 호밀밭, 2015, 31~76쪽), 권오봉의 아들이자 카프시인으로 활동한 권환(1903~ 1954), 동래고등여학교 초대교장 권영운, 고현시장 의거를 조직한 권오규(1895~1961)와 독립운동가 이교재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58쪽)

경행재와 경행학교에 대한 위와 같은 검토에도 불구하고 이교재와 관련된 자료는 많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의 서술에 어려움이 있다.

1887년생인 이교재는 어린 시절에 서당식의 경행재에서 유교경전 중심의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권오익 선생이 6세 때 서당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으므로 이교재 선생도 대략 그 나이 때에 경행재에 들어갔으리라고 본다.

1893년 이후의 시기에 해당된다. 언제 그가 이 서당 교육을 마무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권오봉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임은 확실해 보인.(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59쪽)

또한 그가 24살이 되던 1910년에도 사립경행학교에 다녔는지는 역시 알기 어렵다.

변지섭에 따르면 이교재는 대한제국의 멸망 직후인 24세의 나이에 국권회복에 진력하고자 동지를 모집하였고, 1913년부터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활동하였다고 기술하였기 때문이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6쪽)

그렇다면 일제의 강제합병 직후에는 경행학교에 재학 중이었다기 보다는 이미 졸업하여 사회활동을 하는 신분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이교재는 일제의 강제합병 이후에 이 학교의 교사로서 적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식민지 경찰의 사건일지식 기록(1923년 9월 21일)에 따르면 “前敎員 이교재가 임시정부의 밀명에 따라 국내로 잠입,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다”라는 구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慶尙南道 警察部, 慶南高等警察府高等警察關係摘錄 1919-1935, 1936, 39쪽)

‘전교원’이라고 기술한 것은 적어도 경행재가 소학교로 전환한 다음에 그가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이것이 1923년 이전 어느 시점에 마무리되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그가 경행학교에 재직하였을 시기는 1910년에서 1923년 직전까지일 터인데, 3.1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수감되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1919년 이전까지였을 것이다. 곧 1910년 사립경행학교 설립 이후부터 1919년 이전까지였을 것으로 보는 편이 무난하다.

그는 이러한 교육경력을 바탕으로 1920년 12월에 조직된 진전교육회에도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의 경력에서 아직까지 주목받지 못한 진전교육회는 “지난해 1월에 창원군 진전면 유지 제씨의 발기로 교육진흥, 지식교환, 체육발달, 풍속 개정 등을 목적으로 면내에 거주하는 자로서 만 20세 이상의 남자에 한하여 진전교육회를 조직하였다”고 보도되었다.

울러 임원으로는 “會長 權五鳳, 副會長 卞舜燮, 總務 權五成, 學術部長 李鍾協, 矯風部將 權寧寔, 運動部長 權寧祚, 部員 李昌淳, 金晟洙, 姜德永, 卞相憲, 李基榮, 卞相述, 幹事 李敎載, 金聖漢, 卞又範, 會計員 權榮鎭 金敦洙, 書記 李玘宰, 評護員 金태鉉 외 12인”(「진전교육회 출범」, 동아일보, 1921년 5월 6일자)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목록에 진전교육회의 간사로서 이교재가 김성한, 변우범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허나 이 기록에는 검토해야 할 사항이 있다. 1920년 12월에는 이교재가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죄목으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진전면사무소에 소장되어 있는 범죄인 명부 ‘이교재’ 항의 「刑名 刑期」란에 ‘징역 1년 3월’로 기재되어 있음을 참작하면(慶尙南道 警察部, 慶南高等警察府高等警察關係摘錄 1919-1935, 1936 3冊中 제1호, 18번, 이 자료를 찾아준 고성군 기록연구사 김상민 선생에게 감사한다.)육회 조직 당시에는 출옥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질적으로 이 조직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 교육회의 멤버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을 살펴보면 이교재 선생의 인맥과 사회인식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권오봉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동대 마을 안동권씨의 일원으로써 카프문학가로 이름이 높은 권환의 부친이었고, 인맥도 상당히 넓었던 것 같다.

그는 의령의 애국지사인 남저 이우식과 사돈관계였는데, 권오봉의 둘째 아들이 남저의 사위였다. 이우식은 대종교도였는데, 권오봉도 대종교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권환의 휘문고보 학생학적부의 ‘가정 혹 본인신앙’에 ‘대종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이장렬, 권환 문학 연구, 경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10쪽)

당시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상당수가 대종교를 신앙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교재도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동대 마을의 ‘진사골목’이라고 부르는 동네 길에서 이교재와 이웃하여 살았던 권오봉은 또한 1919년 4월 3일에 거행된 삼진독립의거 때 진전면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직원록 1920년 지방관서>경상남도>부군도>창원군) 이때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성금을 갹출하는데 앞장섰다.

권오봉은 1920년 무렵에 진전에 설립된 오정 야학의 학장으로, 또 1923년에 소작농 수천명을 망라해 결성된 삼진노동공제회의 간부로, 오서부업장려회 회장이자 삼진농민조합에서는 제3부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는 등 지역사회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49~150쪽)

교육회의 운동부장 권영조는 1919년 3월 28일에 있었던 진동면 고현의거에서 이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마산감옥에서 1년간 수형생활을 한 적이 있고, 경행학교의 교사로도 재직하였다. 교육회의 부원인 변상헌과 변상술은 4.3의거를 주도한 죄명으로 1년간 복역하였으며, 일암리 출신의 변우범(1898-1974) 역시 4.3의거 때의 주동자로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변우범 참조) 곧 1919년의 삼진만세시위 당시 주도했던 인물들이 교육회의 핵심 멤버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물 구성의 특징은 삼진지역의 명족이라 할 수 있는 안동권씨, 초계변씨, 성주이씨, 선산김씨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삼진의거의 특징 중 하나가 각지에 세거하고 있던 이들 명족이 연대하였다는 사실인,(이종흡 외, 「4.3 삼진의거 연구」, 가라문화 21·22, 2009, 106~107쪽. 이러한 양상은 합천에서도 유사하였다. 예컨대 3월 23일의 삼가 시위는 군내의 가회, 삼가, 백산면 등이 중심이었고, 지역 내의 지주와 유지, 자산가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이정은, 「경남 합천의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11, 247~248쪽) 이로써 우리는 교육회 역시 명족과 애국심이 결합되어 조직된 지역사회의 교육운동체이며 여기에 이교재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교재는 1919년 전후에 지역사회에서 교육과 애국운동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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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3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2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1)

 

이교재(사진)는 1887년(고종 24년) 7월 9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가 부농의 아들이었다는 기술이 있지만(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삼진독립운동사, 2001, 234쪽) 어느 정도의 부농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오서리 578번지의 대지 규모를 보면 적어도 중농 이상의 농가였다고 생각된다.

현재 세 필지로 구획된 이곳에는 1931년 당시 목조 초가 본채 건물 3평과 부속의 목조 초가 3평, 그리고 물건적치용 건물 각각 1평 5홉, 1평 2홉 등 모두 4채가 있었다.(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발행, 폐쇄등기부 증명서 고유번호 1901-1996-359486, 2017년 10월 21일 발행) 평수가 작은 것은 실제 상황이었다기보다 축소해서 신고하는 당시의 관행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오서리 중에서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동대 마을이었다.

오서리는 조선시대 진해현 서면에 있던 다섯 개 마을, 곧 동대, 서대, 회동, 탑동, 월안이라는 마을을 행정적으로 통합하여 만든 동리이다.(진전면과 오서리라는 행정구역명의 탄생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이후의 일이다. 창원군 진서면과 진주군의 양전면이 통합되어 창원군 진전면으로, 서면에 있는 다섯 개 마을을 통합하여 오서리가 되었다고 한다-디지털창원문화대전 오서리 참조. 그러나 1872년에 편찬된 진해현지에는 서면 10개리 중에 월안리, 탑동리, 회동리, 대곡리가 각각 병기되어 있으며, 1992년에 펴낸 창원 웅천 진해부읍지의 「진해현지편에는 진전면 13개리 중에 오서리가 있으나 이에는 竹谷, 虎山, 月安, 塔洞, 檜洞, 牛色 등의 마을이 포함되어 있다-금란계편집위원회, 창원 웅천 진해부읍지, 4~8쪽. 그러므로 죽곡-혹은 대곡-이 언제 동대와 서대로 나누어졌는지, 또 우색과 호산이 언제, 왜 빠져나갔고, 오서리라는 행정명이 탄생하였는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다. 우색은 현재 울빛재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자가 들어 있는 이유는 이곳의 한글 지명이 대실[竹谷]이었기 때문이다. 2001년 오서리의 전체 인구는 345세대에 957명이고, 남녀는 각각 486명과 471명이었다.(진전면지편찬위원회, 진전면지, 2001, 31쪽. 이 수치는 약간 줄기는 했지만 현재에도 비슷하다 - 동대리 이장 권오익과의 인터뷰, 2018.4.12. 동대마을회관.  호수/인구, 남/녀 = 동대 176/530, 272/258   서대 76/204, 105/99   회동 40/94, 48/46   탑동 22/57, 29/28   월안 31/72, 32/40  총계 345/957, 486/471)

이 마을은 대개 동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대에는 안동권씨가, 서대마을에는 밀양박씨가 세거지로 삼았으며, 회동과 탑동, 그리고 월안에도 권씨와 박씨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곧 오서리의 동성집단은 권씨와 박씨가 다수이며, 나머지는 다른 성씨가 뒤섞여 있는 양성 중심의 농촌이라 할만하다.

성주이씨인 이교재가 동대리에서 출생하여 왜 이곳에서 활동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성주이씨의 세거지는 오서리에서 북쪽의 진전천과 뜰을 건너 자리하고 있는 곡안리이다.

그럼에도 이교재의 선대들은 오서리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이조년을 중시조로 삼고 있는 성주이씨문열공파보에 따르면, (星州李氏文烈公派譜 권지2, (대구:고전출판사, 1991),  825쪽. 물론 이 족보는 1990년대에 편찬된 것이라서 이교재의 거주지를 곡안으로 기록하였다.) 그의 증조부인 應斗(1753~?. 9. 15)의 묘가 竹谷 兩岩間인 곧 오서리이며, 부친인 鳳華(1852~ ?.11. 5)의 묘지도 진전면 오서리 앞산 선영 아래로 기록되어 있다.

조부인 亨愚(1827~1904. 6.17)의 무덤을 고성에 쓴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여하튼 부친이나 이교재가 오서리에서 살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오랫동안 이곳을 세거지로 삼아 생활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동족 마을이 우세한 이 지역에서 이교재의 출생과 생업, 그리고 사회 활동은 조금 독특한 부분이며, 특히 동대 마을에서도 안동권씨들이 진사를 많이 배출하였다고 하여 ‘진사골목’이라 일컬어지는 곳에 뿌리를 내렸던 사실도 앞으로 궁구해 볼 과제이다.

그가 홍순영의 딸인 洪泰出(이 이름은 김형윤의 기행문에 출현한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과 언제 결혼하였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홍태출은 정해(1887) 8월 14일에 출생하여 계축(1973) 9월 19일에 사망한 것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교재와 동갑이다.

부부 사이에 아들은 없고 1928년 11월 6일 생의 泰淳이란 이름의 딸이 한 명 있다. 나이 40을 넘어 첫 딸을 본 것이다.

이교재가 통영군자금 사건으로 4년형을 받고 진주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출옥한 것이 1928년 1월 28일의 일이니, 그 해 말쯤에 딸을 얻은 셈이다. 딸의 출생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그들의 결혼 연도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또 사망 이후, 언제인지 역시 알 수 없으나 李正淳을 양자로 두었고, 딸인 태순은 韓禎鶴과 결혼하였다. (태순의 자녀인 한철수는 창원에 소재한 고려철강의 회장이자 현재 창원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1930년대의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동대리는 특색 있는 동족 중심의 연하 마을로 분류되어 있다. 멀지 않은 동쪽에 창포 바다가 있지만, 연하 촌락으로 구분한 이유는 진전면 최북단의 여양리에서 발원한 진전천이 이 동네의 외곽지대를 흘러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쪽으로는 산을 끼고 있으면서 진전면 시락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평탄한 지형의 남쪽은 상당 부분 광활한 평야가 이어지고 있다.

1930년대 초에 동대 마을에는 안동권씨가 102호, 417명, 동성 이외의 호수 및 인구수는 39호와 122인으로서, 권씨는 총인구의 약 77%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이들은 19세기에 진해현의 행정치소가 있던 동면에는 한 명도 살지 않았다. 동면에는 김해김씨와 완산이씨가 대성이었다(武田幸男, 學習院大學藏 朝鮮戶籍大帳の基礎的硏究 –19世紀, 慶尙南道鎭海縣の戶籍大帳をじて-, 學習院大學東洋文化硏究所, 1983, 56쪽).

마을 내의 주된 직업은 농업이었다. 같은 시기의 토지를 기준으로 한 소유형태는 지주 6호, 자작 12호, 자작 겸 소작 28호, 소작인 80호, 기타 직업 15호였다. 기타는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였다.

세족인 안동권씨는 대략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대에 경북의 안동에서 이곳으로 와서 뿌리를 내렸고, 숙종조(1674~1720 재위)에는 이조참판 권용견을 배출하면서 100여 년만에 타성을 압도할 만큼 번영하였다고 한다.(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1933, 862쪽)

이 점에서 오서리, 특히 동대 마을은 권씨 중심의 비옥한 농업지대였고, 그를 바탕으로 지주 소작제도 일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주최씨들이 집거하고 있는 고성군 하일면 학동에서도 문중 자산을 비교적 빈곤한 동족에게 유리하게 소작토록 하고, 그 수익은 문중 자산 이용법 및 동족 구제 시설, 조상제사 비용으로 충당하고 일부는 적립하였다 -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881쪽).

1930년대의 마을 내 자치 상황을 보면 다소 특이한 점들이 보인다.

당시까지도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히면 門罰이라 칭하는 공동제제가 작동하였으며, 융화성이 많고 단결 역강하는 예절을 중히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878~879쪽)

또한 문중 재산이 있어서 자산의 경우 동족에게 대부를 해주는 방식으로 이식을 도모하였고,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사설학술강습회의 경비, 조상제사 비용, 동족 구제에 필요한 경비 등에 사용하였다.

1923년에 이르러 일제 당국은 오서리에 부업장려회를 조직하여 가마니짜기와 양잠을 장려하면서 산업진흥을 꾀하였는데, 이를 통해 마을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여 갔을 것이라 짐작된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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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2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 1

앞서 9회에 걸쳐 1954년 김형윤 선생이 마산일보에 기고한 '이교재 선생 생가 기행문' 「삼진기행」을 포스팅했다.

오늘부터는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11회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목 차

Ⅰ. 머리말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군자금 모금사건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 창원군 진전면이라는 행정구역명칭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이후의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명은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이다. 이 글에서는 이교재가 주로 활동하였던 1910년대 이후의 지명인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를 사용한다.) 출신인 이교재는 창원시에서 운영하는 애국지사 사당에서 이윤재, 주기철과 함께 독립장을 받은 3인 중 한 사람으로, 봉안된 위패에서도 최상위에 올라 있는 항일독립지사이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부여한 군자금 모집 임무나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에도 헌신적으로 일을 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의 감옥 생활을 겪었고 결국 신병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변지섭이 경남독립운동소사(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삼협인쇄, 1966, 176~178쪽)에서 그를 소개한 이후 이를 기초로 쓴 몇 편의 짧은 글과 신문기사들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료조차도 단편적이거나 종종 오류(변지섭의 경남독립운동소사는 많은 이들이 활용을 하지만, 더러 구체적인 사실에서 착오를 보인다고 비판을 받았다. 예컨대 합천군 초계면 3.1운동 서술에서 4월 5,6일경 창원의 변상태가 초계를 심방하면서 4월 20일에 시위가 일어났다고 하지만, 초계 시위는 3월 21일에 일어난 까닭에 전후 관계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다. 가회면의 주도자도 정확하지 않다 / 이정은, 「경남 합천의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 234~235·238쪽 참조)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이교재의 독립운동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도 그의 공적을 1) 3.1운동 때 경남북 일대에 선전문배포, 피체되어 3년 복역(진주형무소),  2)상해로 망명, 임정의 밀령으로 입국 피체되어 5년간 복역(대구형무소), 3) 다시 상해로 망명 도중 신의주에서 피체 2년간 복역(서대문형무소), 4)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재입국 사명 수행 중 피체, 1933년 2월 부산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 등으로 열거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검색어 ‘이교재’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List.do?goTocode=200014)

이 공적조서 또한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점들을 고려하여 우선 당대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그의 독립운동을 몇 단계로 나누어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그의 성장터였던 진전의 지리적· 인문적 환경과 성장과정, 그리고 3.1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체포되어 수감되는 상황을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로는 상해 망명 이후 1923년 9월에 있었던 통영군자금 모금사건의 실체와 관련 인물들을 통해 그의 활동 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1931년 말 이후에 국내에 입국할 때 휴대하고 온 9개의 상해 임정 문건, 곧 ‘이교재임정문서’를 통해 그의 임무가 무엇이었고 이 문서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몇 단계의 활동들을 검토하면 그의 독립운동 전반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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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9.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8 / 1954년 4월 22일 (목)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2

 

논둑 받아(?) 둑아 날 살리라 심의중(沈宜中)이 불콩이 날 죽인다!

이것은 누구의 창작인지 미상이나 지금도 산야엘 가면 나물 캐는 촌새악씨나 나무하는 목동이나 또는 소먹이는 어린 목동의 애절한 목소리와 가련한 입에서 구(舊)아리랑 곡으로 처량히 흘러내리는 민요라 한다.

이 민요는 누가 들어도 직해(直解)할 수 있는 것이니 삼진부락민이 기미년 독립운동 당시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러 진주(進駐)하여 가는 도중 황교교각에서 잠복하였던 일인 헌병과 협력한 보조헌병 심의중이라는 악도가 있었는데 일본헌병이 처음에는 공포(空砲)로 위협하고 일보 더 접근되자 적두(赤豆)로 유인하여 사정 내에 애국용사가 돌입하였을 때 최선두에서 제1발을 쏜 자가 심의중이라는 자라고 한다.

적탄은 간발도 없이 난사되었으나 맨주먹과 곤봉만 휘두르던 앞선 용사는 쓰러지고 용사의 시체를 넘어 다시 돌진하던 동지도 일보 더 전진하지 못하고 또한 비참하게도 전사의 시체 위에 쓰러져 열렬한 애국청년의 선혈은 대지에 물들었으니 김수동 김호현 고묘주 변갑석 김영환 홍두익 변상복 이기봉 씨 등이 즉 8열사들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서 이교재 선생이나 이들 팔열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초개에 파묻혀 있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닐 것이다. 이분들 대개가 순박한 농민이며 기이한 운명을 약속한 것 같이 순국 후 겨우 무덤에 벌초 정도나 해줄 양자들이 대부분이니 일가친척들인들 백사지(白沙地)같은 세도인심(世道人心)이라 오비(吾鼻)도 수삼 척에 순사(殉死)한 이들에게 마음만으로 어찌할 것인가?

일정시대에는 친일파와 밀정이 횡행하므로 자기신변이 위태로워 도와주지 못했고 8·15 후는 유상무상(有象無象)의 군맹(群盲)이 매관매직과 모리(牟利)에 분망하였으니 사욕에 실명한 자들이 이해득실이 없는 남의 일에 관심될 리가 만무하다.

총탄과 백인(白刃)에 몸은 사력(砂礫)에 폭쇄되어 지하삼 척(尺)에서 묵묵히 묻혀있고 혼백은 백학을 타고 구만리 장천으로 등(登)히 선(仙)하였으나 허구한 세월에도 시냇물은 유유자류(悠悠自流)하며 산용(山容)은 의구하니 팔열사의 고전장(古戰場)에 오고가는 나그네가 뉘라서 발을 멈추리요?

삼진방면의 애국열사가 사파(沙婆)를 떠난 지 근 사십년. 생시에는 조국광복에 일편적심이요, 몰(歿) 후에는 호국의 충혼이 되었으나 사자(死者) 이미 입을 굳게 닫았으니 은수(恩讐, 은혜와 원한) 가 누구인가 알 길이 바이없다.

이화(李華)의 글을 차용하면

鳥無聲兮山寂寂(조무성혜산적적 : 새들은 우짖지 않고 산은 고요하다)

夜正長兮風淅淅(야정장혜풍석석 : 밤은 참으로 긴데 바람 소리만 쓸쓸히 들린다)

魂魄結兮天沈沈(혼백결혜천침침 : 혼백이 서로 엉키어 하늘은 자욱하고)

鬼神聚兮雲冪冪(귀신취혜운멱멱 : 귀신이 모여들어 구름이 뒤덮인다)

日光寒兮草短(일광한혜초단 : 햇빛이 차가우니 풀조차 자라지 않고)

月色苦兮霜白(월색고혜상백 : 달빛은 처량한데 서리가 하얗다)

傷心慘目(상심참목 : 상처난 마음 처참한 눈이)

有如是耶(유여시야 : 이와 같은 곳이 또 있을까)

-(중략)

布奠傾觴(포전경상 : 마침내 제사상을 차려 술판에 술을 붓고)

哭望天涯(곡망천애 : 통곡하면서 하늘 끝을 바라보니)

天地爲愁(천지위수 : 하늘도 땅도 그를 위해 슬퍼하고)

草木凄悲(초목처비 : 초목도 처량하고 비통해 한다)

弔祭不至(조제불지 :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가 지극하지 않으면)

精魂無(본문은 何)依(정혼무의 : 혼령도 의탁할 곳이 없으리니)

-(하략)

실로 혼신을 울리던 8열사의 장렬한 최후. 공민(公民)된 자 누가 머리를 숙이지 않을 소냐?

누가 그 공적을 그대로 방치하고 묵살할 것인가?

그들 유족은 거의 산지사방(散之四方)하여 실낱같은 로명(露命, 이슬처럼 덧없는 목숨)을 겨우겨우 이어간다는 풍문만 들리니 선열에 대한 예의는 빠졌으나 후손이라도 찾을 수 없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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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2. 20:34

김형윤의 <삼진기행> 7 / 1954년 4월 21일 (수)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1

 

우리일행은 이교재선생의 묘소에 정중한 전배식(展拜式)을 마치고 산에서 마을까지 내려왔을 때에는 사양(斜陽)이 부락에 빚칠 때이다.

일행은 노부인과 작별인사를 할 때 굵은 눈물방울이 양 볼에 흘러내리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양친을 일찍 여읜 기자의 가슴속에 형상할 수 없는 만감이 충격한다.

기자는 다시 노부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후일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떠나면서 고개를 잠시 돌려보니 아직도 동구(洞口)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서있다.

마치 자식을 먼 길로 보내는 자모(慈母)와도 같다.

일행은 급급히 회로(回路)를 달리며 다시 한 번 황교 좌우를 돌려보며 1919년 삼일독립전투시를 회상해본다. 1919년이면 지금부터 손꼽아서 삼십육 년이라는 옛날이다.

그때 이 태황께서 승단하시고 인산(因山)을 기회로 국내외 동포들은 분연히 일어서서 독립만세를 절규하자 그 위세는 요원의 불길같이 급속도로 전토(全土)에 미만(彌滿, 널리 퍼지어 가득 참)하자 일부 호농(豪農)과 일본인에 아부하여 재산생명을 보호 받는 무리들 외 일제봉기(一齊蜂起)하여 방방곡곡이 타도일본 독립만세 소리가 하늘을 질렀다.

그때 도시에서는 단순한 비밀삐라 산포가 아니면 만세절규에 그쳤지마는 농촌에서는 이와 같은 서당 샌님들의 미온태도에 만족치 않고 감연(敢然)히 일헌(日憲)에게 직접 행동을 가하였음으로 그 때문에 피해정도가 극히 참혹하였다고 한다.

수원교회 학살 사건도 국내에서 가장 으뜸 될 일이니 이것은 불의의 피습으로 말미암아 하가(何暇, 어느 겨를)에 대항은 고사하고 피난할 겨를조차 없어 비참한 희생을 입었지마는 그 최후의 장렬함에 있어서는 삼진방면의 황교전투보다 오른편에 내세울 비극은 드물다는 것이다.

도시나 농촌이 모두 마찬가지지마는 음모 행동은 대부분이 시일(市日, 장날)을 택한 모양인데 삼진의 전투로 최고의 희생을 당한 날이 음력 2월 3일의 진북의 시일(市日)을 기하여 인근 부락민의 대거출동으로 일헌(日憲)에 일격을 가하고자함에 그 정신과 그 기세야말로 장할 지고!

그러나 어찌 꾀 하였으리요, 무기 없는 불행한 약소민족으로 범 앞에 둥지개 바람(?)이니 어찌 통분함을 금할 수 있으리오.

그 의지는 장하고 용(勇)하였으나 결국은 비극의 씨를 뿌리게 되었으니 후일의 민중운동에 커다란 교훈을 우리들에게 남겼다고 할 것이다.

그때 누구의 말인지 모르나 유아동포 유진무태(唯我同胞 有進無退) 라는 「모토」대로 이를 애국청년에게는 오직 전진이 있었을 뿐이고 조국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든 것이니 서반아(西班牙)혁명 때 부인(婦人)이 가슴을 내밀고 적의 권총 앞에 돌격하던 것을 연상케 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으냐?

비극의 황교 동편에는 일헌과 그의 주구되는 헌병 보조원이 총부리를 들고 대진(對陣)하고 있었고 오서리 방면에서 합류한 청년들은 이것을 격퇴코저 진군할 때 별안간 적측(敵側)에서 탄환이 발사되었다.

그러나 그 탄환은 팥(赤豆)이었으므로 그들이 유도작전을 하는 흉계에 속아서 일제히 선풍지세(旋風之勢)로 헌병을 포위하려고 할 찰나에 실탄은 소낙비와 같이 애국청년의 머리 위에 쏟아져서 유탄(流彈)으로 어린애가5명 청장년 8명이 일시에 절명되었든 것을 일행은 다시 한 번 돌이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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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25.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6 / 1954년 4월 20일 (화)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6

 

불우 순국열사들!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백년 일세기를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의 식민지로서 정치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치명상을 입고 경제적으로 약탈착취(掠奪搾取)를 완부(完膚, 흠이 없이 완전함) 없이 당(當)튼 남방아주(南方亞洲)의 태반에 걸쳐 반거하고 있는 인도보다 그 인구에 있어서 십분의 일에도 불과하며 피치(被治) 연월도 삼십육 년이지마는 약소민족 투쟁기록은 세계 독립운동사상 이 나라 우에 따라올 국가가 없다.

비폭력을 내세운 미약독립투쟁! 비협력인 「스와라지」운동(1906년 인도에서 전개되었던 반영 자치 운동)으로 도저히 주권탈환을 기약할 수 없는 일이므로 외국의 노예제도의「멍에」에서 벗어나는 데는 그 나라 민족전체가 선혈을 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오, 동시에 정신 육체 공히 숭고한 재단에 오르지 않으면 주권회복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자는 국민제위에게 죄송스러운 말이지마는 독립선언서라든지 33인의 그때 태도를 그리 감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언서 그 자체가 폭력을 부정하였고 이 선언을 발포하는 동시에 태서관(太西館)요리점에서 비장한 각오 아래 경기도 경찰부에 전화로써 자수 연락을 하였다.

얼핏 들으면 영웅 같기도 하나 이런 일은 「아라비안나이트」에나오는 이야기와도 같고 중세기 나이트(騎士)의 용감한 역사 인물도 같으니 냉철(冷徹)한 눈으로 비판하면 찬양(讚揚)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독립투쟁이나 사회운동이 어느 정도 성숙하기까지에는 심오한 계략과 엄히 비밀리에 잠입 침투한 후 상당한 정신무장을 장비한 연(然)에 그 행동이 전광석화적(的)으로 지상에 나타나서 적의 급소와 허를 무자비하게 격충(激衝)하여도 실패 뒤 오는 비경(悲境)이 왕왕(往往)함에도 불구하고 국민민족의 흥망성쇠가 좌우되는 최절정이며 중요한 인산(因山) 기회를 전후한 최단시간에 하등의 무장도 갖추지 못한 채 요리점에서 일정(日政)의 개들에게 이 중대한 음모를「제공」하고 「온순히 포승」을 받았는가?

생각해보면 심히 불유쾌하기 한이 없는 일이다.

냉정하면 염○의 영웅심리를 투매가로서 적에 제공함으로 그 영명(令名)은 고가(高價)로 국내에 선포된 것이 아닐까?

바로 말하면 가령 일본의 개들에게 전화 연락을 하였을지라도 체포하러왔던 개새끼들을 문전에서 격살쯤은 하여야 민족의 열혈이 용솟음쳤을 것이거늘 그 유유낙낙 끌려간다는 것은 아무리보아도 적진에 투항이 아니면 자살적 타협행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이럴 때 일수록 불란서혁명의 지휘자인 「마라, Jean-Paul Marat, 프랑스 혁명기 급진적인 산악당 지도자」 「탄론(?)」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 급진적 자코뱅당 지도자로 프랑스 혁명의 주요인물」들과 같이 료군(僚軍(?)) 최첨단에서 사기를 북돋우고 적을 호령하며 때로는 적진에 돌입하여야 할 것인바 자기들은 실내에서 비항거로 붙들려가고 기다(幾多, 수효가 많음)의 동포들만 피를 흘리게 한 것은 그리 찬성할 수가 없다.

약소민족운동은 정치적 타협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투쟁이며 피를 요구한다. 그렇지 못하면 외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치운동은 될지 모르나 그것은 완전독립운동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와라지」운동을 역설하는 「마하트마 간디즘」을 조소하였고 국민협회의 민원식 시중회(時中會)의 최린 일파의 친일적 자치운동을 타○ 매장(埋葬)하였던 것은 국민의 기억에 새로운 일이다.

유차관지(由此觀之)컨대 불행한 이 나라에 나서 이 나라 운명을 바로잡고자 생명을 홍모나 초개(草芥) 같이 조국에 바친 불우한 열혈애국지사가 지금은 풀잎사이에서 이슬과 서리를 맞으며 이 세상과 시국을 한탄하는 유명무명의 수많은 백골들도 생시에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견적필살(見敵必殺)의 굳고 굳은 결심으로 직접행동을 아끼지 않은 때문에 세계사에 희생된 수가 시간적으로 계산하여 으뜸이며 약소국가에 용명(勇名)이 휘날렸으며 구역(逆)날 말이나 총독정책도 다소 달라졌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호기로 삼십삼인 중 보따리를 소초(小礎, 小礎國昭, 고이소 쿠니아키, 제8대 조선총독)나 남차랑(南次郞, 미나미 지로, 제7대 조선총독)에 팔아먹던 자도 생겼고 밀정이 잠행하였고 매국친일도당이 횡행하였으며 어제의 친일범죄를 해결치 않고 오늘은 일본 놈의 사무를 받은 듯이 국가사회에 군림하고 선열을 무시하는 현상을 볼 때 영혼이 구천에 그 자들 두상에 낙뢰 없는 것이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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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18.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5 / 1954년 4월 18일 (일)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5

 

그러면 다른 말은 잠간(暫間, '잠깐'의 비표준어) 차정(次頂)에 미루어두기로 하고 정부에서는 무수한 순국열사에게 무엇으로 보답하였으며 무엇을 하려고 구상하고 있는가?

또 누구의 은덕으로 대한민국의 자모(慈母) 품안에서 평안히 행복 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를 한번이라도 돌이켜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현재 국가의 요직에 안如히 있는 자(者) 중에 진심으로 민족 전체의 이해(利害) 휴척(休戚,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일)을 염두에 두고 적성(赤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 국가를 걱정해본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는가?

8.15가 지난 기년(幾年, 몇 해) 후 정부에서는 각도(各道)를 통하여 애국자 병기(並其) 유가족의 업적을 조사 보고토록 행정 최말초(最末梢) 기관에 명하고 해(該)보고서에 준하여 각도(各道)에서 애국한 행로의 경중을 개량하는 소위 심사(?)회에 소위 ‘엄정’한 심의를 행한 것은 아주(원문에는 ‘아즉’) 가까운 사실이었다.

이러한 행사는 주권을 갖는 민족으로서는 매우 신선(新鮮)한 일이요 한 개의 생생한 교육이 아닐 수 없었든 것이다.

연(然)이나 소위 ‘엄정심의(嚴正審議)’라는 상자 속에는 진정한 애국열사의 혼이 구름이냐? 바람이냐? 혹은 유령이냐? 영자(影子, 불투명한 물체가 빛을 가려 나타나는 검은 형상)와도 같이 다시 사회에서 사라져버린 것은 말단기관의 실책인가? 체송(遞送) 중 도난인가? 당국의 사무적 착잡(錯雜,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뒤섞여 어수선함)의 과오이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심의해볼 일분의 가치가 없었더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애국한 비중이라든지 순국한 열사의 업적이 저울에 달아본 결과 보천하(普天下, 만천하)에 높이 선양할 공적은 크지마는 그들은 배경이 없고 사회에 두각이 나타난 인물이 없는 것을 따져서 심의하는 인물의 수지계산이 맞지 않다는 말 외 적중될 이유가 없지 않다고 본다.

심의 당사자가 여기에 항의할지 모르나 사실은 어디까지나 비인(非認)하지 못할 것이니 한 번 사리를 역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실례(實例)를 들면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교재 선생에 대해서 심의 담당자이든 도당국은 무슨 변명할 자료가 있거든 번듯하게 제시해 보아라.

독립열사를 표창한데 이의할 국민은 아마 한사람도 없을 것이고 쌍수를 들어서 환영하며 갈채를 아끼지 않을 것이나 그들 피표창자 중에 전부가 3·1정신과 그의 꿋꿋한 절개를 가졌던 자 몇 사람이나 있었는가를 엄밀하게 분석해 보았는가?

이 점이 매우 불쾌한 불순선(不純線)을 발견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설사 변절은 하였을지라도 제법 출세나 하고 세도깨나 있는 부류는 일약(一躍) 지사에 급재하고 이것도 저것도 없는 사람은 흙이나 재(灰) 속에 묻어버리고만 셈이라고 민족정기로 보아서 호령(號令)할 것이 아니냐?

당시 이규재 선생과 황교에서 전사한 팔열사의 전사(戰史)를 진전면장 박열주 씨가 보고(報告) 상신(上申)하였음에도 돌보지 않고 도에서 ‘넉아웃’을 하였음에 박 씨가 수(數) 이차(二次) 상도(上道)하여 역설한바 있었으나 그때의 양(梁) 경남지사는 코대답 정도로서 회피하여 오늘까지 묵살한 심정은 아무리보아도 선의(善意) 해석할 수 없는 일이다.

위정자가 이 모양이니 무의식한 백성이야 마음이 있은들 어찌 하리요.

이러한 일에도 일반 대(對) 위정자 간에 틈이 생기게 되니 책임은 누가 져야 될지 모르나 본래가 민중운동이라는 것은 민중 그 자신이 해결할 생각(원문은 ‘生意’)도 못하고 어(於) 천만사(千萬事)가 총망(悤忙, 매우 급하고 바쁨)한 위정자에게 의뢰하는 데에 우매(愚昧)한 민중의 비애가 생(生)하는 것을 더욱 계몽(啓蒙)하고 싶다.

어쨌든 지면이 용인(원문에는 ‘容入’)하는 대로 차항(次項)에 계속하기로 하거니와 금반(今般) 민간인 유지 제씨(諸氏)가 착안한 삼진지구의 선열제공(先烈諸公)의 기념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 성과 있기를 크게 기대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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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4.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3 / 1954년 4월 16일 (금)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3

 

산협의 좁은 비렁(‘벼랑’의 방언)을 얼마쯤 나가니, 간데 마다 산은 백구질을 하여 황토만 노출(露出)한 독산인데 이 산 중복(中腹)쯤 되는 곳에 선생의 백골(白骨)이 묻혀있는 허물어진 분묘가 눈에 뜨이고 조금 아래 양지쪽에 두 봉(封)의 묘소가 있는데 이곳은 선생의 선친 선영이다.

노(老) 미망인은 여기서 시부모와 부군을 추억하는 듯 몇 개의 풀을 뽑고 있었다.

선생의 봉분 아래는 산이 급각도로 수직하며 묘소 정면은 협소하여 성묘하기에도 부자유하다.

선생이 지하에든지 봄바람 가을달이 몇 번이나 지났건만 찾는 사람 별로 없고 유족생계가 화급하여 그랬는지 봉축은 허물어져 황폐 그대로 이고 한 조각 표석조차 없으니 마음 없는 초동이야 지하의 고인이 어찌 누구인줄 알까보냐.

일행의 단심으로 묘전에 간단한 요핵(核)을 차려놓고 추념의 제를 지내게 되었으니 제문의 애절함에 전배자는 물론 유족의 단장애(斷腸哀)는 어느 누가 알아주랴.

오십 반평생 제물(祭物) 앞이나 무덤 앞에 절해본 일이 없는 기자가 뜻밖에도 이 날 제주(祭主)라는 직위로 초헌(初獻)을 올리고 절을 하게 된 것도 비망록에 기록하여 둘 일이다.

이어서 일행의 대표로 이(李) 마산시장이 아헌(亞獻), 다음으로 이 씨 문중 취객으로 허 금조(금융조합)이사의 순으로 정성껏 잔 들어 올리고 일동이 함께 재배하니 일행 중 백발이 휘날리는 윤치왕 군의학교 교장, 전 마산여고 교장 권영운 씨, 김형철 삼성병원장 등 삼노(三老)가 이날 특이한 채색(彩色)과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정성어린 추모의 제를 마치고 일행은 고인의 선영 앞 장방형으로 된 석축 위의 잔디에서 파제(罷祭) 제물을 벌려놓고 고인의 불타는 애국정신과 그 업적에 경탄과 찬양(讚揚)의 꽃을 피웠다.

아울러 허물어진 봉분의 수축, 유족의 생활대책 문제가 화제에 올라 즉석에서 선열의 기념사업 추진 발기인으로 권영운 김상용 양씨 외 기자 3명이 지명을 받고 단시일 내에 이 사업의 구체안을 구상하여 유종의 결실을 보도록 하였다.

각설(却說), 이교재 선생은 어떠한 경로를 밟고 어떠한 결과를 맺었는가 우선 윤곽만을 소개하고 상보(詳報)는 기념사업추위에 있을 것을 믿고 미루어 두기로 한다.

선생은 1919 독립운동이 전국 우내(宇內, 온 세계)에 창일하였을 때 감연(敢然)히 상해로 망명하여 당시 대한임시정부의 동지와 규합하고 굳은 결심과 사(死) 서(誓)하고(죽음을 맹세하고) 중대 밀명을 띈 밀사로 국내에 잠입 활약하였다함은 이미 소개한 바이나

국내 험의(험疑, ?) 처음 군자금 징모 사건으로 지명 수배되어 동지 이병수씨(현존)와 통영 마산 진주 방면으로 전전 피신하던 중 김도산 일행의 신파연극을 변장 관람 중 동(同) 고향인 오서리 출신 이만갑이라는 진주서 고등형사(부장)에게 발각 피검되어 혹독한 고문을 겪었으며 종시(終始) 일관(一貫) 굳게 입을 다물고 자백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치장 혹은 감방에서도 다만 동지들에게 「수구여병(守口如甁)」의 구호로써 동지들을 경고 하였다고한다.

5년 언도 후 공소심에서 3년형을 마치고 출옥 즉시 초지일관 백절불굴 조국광복의 열혈은 촌흐(寸?)도 냉(冷, 식다)함이 없이 상해 임정과 더욱 긴밀한 연락을 하다가 다시 혈고서파부(血告書播付, ?)사건이 발각되어 부산형무소에서 2년 언도를 받고 복역 중 일차 피검당시 전신 타박의 어혈병과 야만적 생식기 고문 여독의 화로 드디어 사십구 세를 일기로 열혈 심장의 고동도 장한을 품은 채 옥중에 정돈(停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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