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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3

by 운무허정도 2020. 1. 6.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2)

 

이교재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조선조 말기와 대한제국시기에 진전면 일대에는 몇몇 서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마을 단위이자 문중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문중 중에서도 이 지역의 주요 문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권씨, 초계변씨, 선산김씨, 밀성박씨, 창녕조씨, 회산황씨 등이 각각의 문중에 서당을 소유하고 있었고, 안동권씨가 운영하던 경행재도 그 중의 하나였다. (진전면에는 일암리의 誠久祠 경내의 道山書堂(草溪卞氏 문중), 오서리 동대에 있는 景行齋(安東權氏 문중), 오서리 서대(회동이 맞음. 필자주)에 있는 龜川精舍(密城朴氏 문중), 오서리 탑동에 있는 西溪精舍(安東權氏 문중) 등이 있었으며, 20세기에도 근곡리의 慕遠堂(善山金氏 문중), 평암리 미천의 棲巖亭(昌寧曺氏 문중), 임곡리의 石愚堂(檜山黃氏 문중) 등이 있었다(진전면지, 141쪽)

다만 이 서당들은 경행재에서 보듯이 대부분 문중의 재실과 서당을 병용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1867년 회동에 있는 회계서원의 支院으로 건축한 경행재는 1930년대의 조사에서도 안동권씨의 서당으로 기록되어 있다.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寫眞編 沿河部落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五西里 東大洞 安東權氏部落」 참조)

현재 남아 있는 건물구조는 4칸 반에 들보 3량 건물로써 좌우에 방이 있고, 중앙은 대청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1910년에 신식의 경행학교가 문을 연 이후 교실로 개조하면서 본래의 모습은 조금 바뀌었다고 한다.

건물 앞쪽으로는 비교적 넓은 마당이 있어서 소규모의 운동을 하기에 적당한 크기이다. 조선조 말기에 세워진 경행재의 서당 교육 프로그램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는 이교재 선생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권오봉의 사촌 동생으로 1905년에 태어난 권오익은 자전 속에서 6살 무렵부터 사숙, 곧 경행재에 다니면서 한문을 익혔으며 8세 때인 1913년 무렵에 소위 신학문으로 전환하여 낮에는 소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밤에는 한학을 습득하는 과중한 부담을 안았다는 것이다. (權五翼, 素波閑墨, 소파 권오익박사 환력기념논문집간행회, 1965, 94~98쪽)

적어도 1910년까지는 전통적인 서당이었으나 그 이후 신식학문을 도입하면서 당분간 2중식의 교육제도를 운영한 듯이 보인다. 서당 형태였던 경행재를 신식학교로 바꾼 이는 동대리 출신의 권오봉(1879~1959)으로 알려졌다.

약 300석 지기의 중농 집안 출신인 권오봉은 홀로 서울까지 걸어 올라가 고향 친구인 鄭祥煥(정상환은 1921년에 백산무역에 640주의 주식을 투자하였다(「디지털창원문화대전」, 권영조 참조)의 집에서 지내면서 1898년 2월에 김규식, 신민회 간부 李重華, 林珍洙가 교사로 있던 私立興化學校를 2년간 이수한 뒤 순회 연설, 격문 반포 혹은 학교교사 등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백산의 동지들, 부산일보사 기획출판국, 1998, 58쪽. 여기서 1898년이라고 한 것은 흥화학교가 그 해에 신문에 학생 모집 공고를 내고 자격과 개학일자 등을 공고한 것에 기반하여 이렇게 추정한 것은 아닐까 한다(리진호, 「사립흥화학교와 양지교육」, 향토서울 55, 1999, 91쪽). 백산 안희제도 1906년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경했고, 처음 1년 정도 흥화학교에서 수학한 적이 있다. 권오봉과 안희제는 동문이었던 것이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어문논총 77-0호, 2018.12, 153쪽). 흥화학교의 교육과정과 변화 및 교사진에 대해서는 김형목, 「사립흥화학교(1898~1911)의 근대교육사상 위치」, 백산학보 50, 1998과 정영희, 「사립흥화학교에 관한 연구」, 실학사상연구 13, 1999도 참고된다.)

그러나 이 학교의 학제나 교사 재직 연도로 보아 1906년 무렵에 입학하여 졸업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가 재학 중 혹은 이수 직후라고 말해지는 1899년에 당시의 교사 중에는 이중화와 임진수가 보이지 않고 김규식의 이름도 없다. 김규식과 임진수가 교사로 있던 시기는 1906년 전후였다(리진호, 「사립흥화학교와 양지교육」, 93~94쪽)

흥화학교의 교과와 운영, 지향하는 이념을 경험한 권오봉은 이러한 시스템을 경행재에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통상적으로는 1910년 10월에 사립경행학교를 창설하였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몇 년간 미인가 상태로 운영되다가 1914년 6월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것으로 본다.

박정선은 1910년 10월에 설립은 했으나 미인가 상태로 운영되다가 1914년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닐까라고 보았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39~141쪽). 말하자면 비공인 사립학교로 출범하였지만, 몇 년 뒤에는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1925년에는 6년제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1925년의 6년제 전환에 대해서는 「순회탐방(488) - 도처에 양전옥답 산물이 풍부(9)」, 동아일보 1927년 11월 20일자)

창설 초기에는 동대리 출신의 權寧祚(1883~1955) (「권영조씨 별세, 완월동 자택」, 마산일보 1955년 3월 13일자)와 고성 출신인 李鎭畿의 재정적 지원이 뒤따랐다.

특히 권영조는 “천신만고 끝에 校地 확장 및 학교림 조성 등 재정적 기초를 거의 독자적으로 마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51쪽)

개교 이후 18년 동안 권오봉 선생이 교장을 맡았다. (이병철, 앞의 글, 58쪽 : 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권오봉선생비문」, 삼진독립운동사, 2001, 88~89쪽. 고성군 독지가 李鎭坰, 오덕군, 허종택, 이진기 등 4명은 자담으로 각처에 유학한 학생을 도왔으며, 또 이진기가 파송한 유학생 安太元에게는 매월 20원씩을 보내어 일본의 山口縣고등상업학교에 다니도록 하였다. 자택에는 배둔공립보통학교 학생 4명의 의식을 전부 담당하는 등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한 인물이었다(동아일보 1920년 7월 3일자 및 1921년 4월 26일자 참조).

그러나 공립학교인 진전공립보통학교가 1927년에 설립되면서 경행학교도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통설상으로는 진전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면서 폐교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1928년 8월 19일에도 이 학교의 운동장에서 개인정구대회를 개최한다는 신문기사가 있었으므로,(「개인정구대회 -창원에서 개최」, 동아일보 1928년 8월 5일자) 실질적인 폐교는 그 이후인 1929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46쪽)

이런 추정은 실제 상황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이 학교의 교사진으로서는 창립자인 권오봉과 권영조를 들 수 있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51쪽)

또한 권오익은 경행학교 시절을 회고하면서 “폭군적 독재자 조(趙) 선생”, “권영길(權寧吉) 선생의 열혈교육”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5쪽) 적어도 4명의 교사가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교재도 1923년 이전에 일제 경찰 당국에서 ‘전교원’으로 기술하였으므로, 1910년대에는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다.

1914년 창설 당시 학생수는 120명이요, 校舍는 40평으로 신축하고 학교의 유지비는 지방 유지의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6년제로 승격한 1925년에 11회째 배출한 졸업생이 2백 명에 달하였고, 그 중에서 국내외의 각 중등, 전문대학 유학생 수가 10명이며, 1927년의 학생수는 남녀 90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순회탐방(488) -도처에 양전옥답 산물이 풍부(9), 동아일보 1927년 11월 20일자. 1921년에 양촌리의 양전학교와 연합운동회를 개최하였는데, 경행학교 학생 약 150명과 양전학교 학생 약 50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양교 연합대운동」, 동아일보, 1921년 10월 23일자). 1921년 당시에도 여전히 큰 규모의 학교였던 것이다.) 성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의 유지비도 앞서 말한 독지가 뿐만 아니라 문중에서 나오는 경비까지 포함되면서 校舍를 유치하고 학교를 운영하였으니 궁핍한 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렇다면 신식의 경행학교에서 운영되는 교과과정과 그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권오익의 회고에 따르면, 신식 사립소학교에서는 배일사상의 고취와 항전의식을 앙양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순국열사, 의사에 대한 선동적 강화와 당시로서는 금서였던 유년필독, 월남망국사 등의 애국서책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상급반에서는 양계초의 조선망국사략을 부교재격으로 활용하였다.(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4~95쪽)

이러한 학습용 교과와 달리 돌격연습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나무막대기를 들고 행한 이 연습에서 “무쇠 골격 돌 근육 소년남아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와 같은 감동가를 불렀으며, 결국 이런 정신이 골수에 사무쳐 인생항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4~95쪽)

1908년에 설립된 마산의 창신학교에서도 유사한 兵式체조를 실시하였다.(조호연편, 마산시체육사, 마산시, 2004, 29~31쪽) 항일정신의 함양에 필요한 교과와 그에 따르는 신체 훈련은 당시의 마산이나 창원 지역의 학교에서 많이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에서 촬영한 경행재 전경에는 운동장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 下編, 「寫眞編 書堂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五西里 東大洞 安東東權氏書堂」 참조) 이런 곳이 체조나 돌격연습을 하는데 활용되었으리라고 본다.

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구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운동 부분에 많은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 이후 마산이나 진전 지역의 사립학교에서 독립운동을 고취하기 위해 문무를 겸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사립학교는 또한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거점이기도 하였다. 윤상태가 주도한 달성군의 덕산학교나 안희제의 龜明학교(구포), 宜新학교(의령), 창남학교(의령) 등이 이에 속한다.(이동언, 「안희제의 교육구국운동」, 국학연구 4, 2000, 40~62쪽)

이는 1907년 「교육윤음」이 내려진 이후 각 서원이 사립학교를 부설하면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는데, 경남에서는 1908년에 안희제, 이원식, 서상일 등 대동청년단과 국권회복단의 중심 인물들이 교남교육회를 창립하였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민족문화논총 9, 1988, 164~165쪽)

이런 맥락에서 보면 권오익을 중심으로 시작된 경행학교의 신식 교육은 당시 지역사회에서 진행된 국권회복 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경행학교에서는 독립운동가나 교육자, 프로문학가와 영화 감독 등이 다수 배출되었다.(이는 함안 칠원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독립만세시위가 교회와 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과 대비된다(이정은, 「경남 함안군 3.1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7, 2006.12, 105~106쪽)

동경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교수와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권오익(1905~1998), 영화 <암로>의 감독으로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월북한 강호(1908~1984) (이성철, 경남지역 영화사 - 마산의 강호 감독과 창원의 리버티늬우스, 호밀밭, 2015, 31~76쪽), 권오봉의 아들이자 카프시인으로 활동한 권환(1903~ 1954), 동래고등여학교 초대교장 권영운, 고현시장 의거를 조직한 권오규(1895~1961)와 독립운동가 이교재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58쪽)

경행재와 경행학교에 대한 위와 같은 검토에도 불구하고 이교재와 관련된 자료는 많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의 서술에 어려움이 있다.

1887년생인 이교재는 어린 시절에 서당식의 경행재에서 유교경전 중심의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권오익 선생이 6세 때 서당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으므로 이교재 선생도 대략 그 나이 때에 경행재에 들어갔으리라고 본다.

1893년 이후의 시기에 해당된다. 언제 그가 이 서당 교육을 마무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권오봉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임은 확실해 보인.(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59쪽)

또한 그가 24살이 되던 1910년에도 사립경행학교에 다녔는지는 역시 알기 어렵다.

변지섭에 따르면 이교재는 대한제국의 멸망 직후인 24세의 나이에 국권회복에 진력하고자 동지를 모집하였고, 1913년부터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활동하였다고 기술하였기 때문이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6쪽)

그렇다면 일제의 강제합병 직후에는 경행학교에 재학 중이었다기 보다는 이미 졸업하여 사회활동을 하는 신분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이교재는 일제의 강제합병 이후에 이 학교의 교사로서 적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식민지 경찰의 사건일지식 기록(1923년 9월 21일)에 따르면 “前敎員 이교재가 임시정부의 밀명에 따라 국내로 잠입,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다”라는 구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慶尙南道 警察部, 慶南高等警察府高等警察關係摘錄 1919-1935, 1936, 39쪽)

‘전교원’이라고 기술한 것은 적어도 경행재가 소학교로 전환한 다음에 그가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이것이 1923년 이전 어느 시점에 마무리되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그가 경행학교에 재직하였을 시기는 1910년에서 1923년 직전까지일 터인데, 3.1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수감되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1919년 이전까지였을 것이다. 곧 1910년 사립경행학교 설립 이후부터 1919년 이전까지였을 것으로 보는 편이 무난하다.

그는 이러한 교육경력을 바탕으로 1920년 12월에 조직된 진전교육회에도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의 경력에서 아직까지 주목받지 못한 진전교육회는 “지난해 1월에 창원군 진전면 유지 제씨의 발기로 교육진흥, 지식교환, 체육발달, 풍속 개정 등을 목적으로 면내에 거주하는 자로서 만 20세 이상의 남자에 한하여 진전교육회를 조직하였다”고 보도되었다.

울러 임원으로는 “會長 權五鳳, 副會長 卞舜燮, 總務 權五成, 學術部長 李鍾協, 矯風部將 權寧寔, 運動部長 權寧祚, 部員 李昌淳, 金晟洙, 姜德永, 卞相憲, 李基榮, 卞相述, 幹事 李敎載, 金聖漢, 卞又範, 會計員 權榮鎭 金敦洙, 書記 李玘宰, 評護員 金태鉉 외 12인”(「진전교육회 출범」, 동아일보, 1921년 5월 6일자)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목록에 진전교육회의 간사로서 이교재가 김성한, 변우범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허나 이 기록에는 검토해야 할 사항이 있다. 1920년 12월에는 이교재가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죄목으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진전면사무소에 소장되어 있는 범죄인 명부 ‘이교재’ 항의 「刑名 刑期」란에 ‘징역 1년 3월’로 기재되어 있음을 참작하면(慶尙南道 警察部, 慶南高等警察府高等警察關係摘錄 1919-1935, 1936 3冊中 제1호, 18번, 이 자료를 찾아준 고성군 기록연구사 김상민 선생에게 감사한다.)육회 조직 당시에는 출옥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질적으로 이 조직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 교육회의 멤버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을 살펴보면 이교재 선생의 인맥과 사회인식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권오봉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동대 마을 안동권씨의 일원으로써 카프문학가로 이름이 높은 권환의 부친이었고, 인맥도 상당히 넓었던 것 같다.

그는 의령의 애국지사인 남저 이우식과 사돈관계였는데, 권오봉의 둘째 아들이 남저의 사위였다. 이우식은 대종교도였는데, 권오봉도 대종교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권환의 휘문고보 학생학적부의 ‘가정 혹 본인신앙’에 ‘대종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이장렬, 권환 문학 연구, 경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10쪽)

당시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상당수가 대종교를 신앙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교재도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동대 마을의 ‘진사골목’이라고 부르는 동네 길에서 이교재와 이웃하여 살았던 권오봉은 또한 1919년 4월 3일에 거행된 삼진독립의거 때 진전면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직원록 1920년 지방관서>경상남도>부군도>창원군) 이때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성금을 갹출하는데 앞장섰다.

권오봉은 1920년 무렵에 진전에 설립된 오정 야학의 학장으로, 또 1923년에 소작농 수천명을 망라해 결성된 삼진노동공제회의 간부로, 오서부업장려회 회장이자 삼진농민조합에서는 제3부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는 등 지역사회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49~150쪽)

교육회의 운동부장 권영조는 1919년 3월 28일에 있었던 진동면 고현의거에서 이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마산감옥에서 1년간 수형생활을 한 적이 있고, 경행학교의 교사로도 재직하였다. 교육회의 부원인 변상헌과 변상술은 4.3의거를 주도한 죄명으로 1년간 복역하였으며, 일암리 출신의 변우범(1898-1974) 역시 4.3의거 때의 주동자로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변우범 참조) 곧 1919년의 삼진만세시위 당시 주도했던 인물들이 교육회의 핵심 멤버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물 구성의 특징은 삼진지역의 명족이라 할 수 있는 안동권씨, 초계변씨, 성주이씨, 선산김씨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삼진의거의 특징 중 하나가 각지에 세거하고 있던 이들 명족이 연대하였다는 사실인,(이종흡 외, 「4.3 삼진의거 연구」, 가라문화 21·22, 2009, 106~107쪽. 이러한 양상은 합천에서도 유사하였다. 예컨대 3월 23일의 삼가 시위는 군내의 가회, 삼가, 백산면 등이 중심이었고, 지역 내의 지주와 유지, 자산가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이정은, 「경남 합천의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11, 247~248쪽) 이로써 우리는 교육회 역시 명족과 애국심이 결합되어 조직된 지역사회의 교육운동체이며 여기에 이교재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교재는 1919년 전후에 지역사회에서 교육과 애국운동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