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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305

마산번창기(1908) - 19 - 제9장 경제사정 제9장 경제 사정 - 2 ■ 수입품 나가사키(長崎), 시모노세키, 오사카, 고베 또는 부산 등에서 수입하고 기타 외국에서 직접 수입하는 것은 적다. 주된 품목은 견면마포(絹綿麻布, 청국제 포함), 일용잡화, 관제담배, 박래잡화(舶來雜貨), 일본 청주, 맥주 및 기타 주류, 한인용 솥 종류 및 기타 주철, 광철류, 밀가루, 설탕, 석유, 성냥, 기와, 대나무, 목탄, 목재 등이며 그 총량은 180만 원을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그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시황란(市況欄)에서 밝히겠다. 해산물 및 그 수송기관은 대개 아래와 같다. □ 마산수산주식회사 이 회사는 신시의 하마마치(濱町, 창포동) 3정목에 있으며 1905년 발기회를 열어 4월부터 어류 경매 영업을 시작하여 1906년 6월 1일 설립인가를 거쳐 법.. 2022. 1. 3.
마산번창기(1908) - 3 - 제1장 마산의대관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1 한국에서 마산같이 산이 좋고 물이 밝은 데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음양의 영혼인 대기(大氣)가 응어리져서 마산만의 물이 되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빛이 나는 아지랑이 속에 마산항의 땅이 굳어진 것이다. 구라파의 어떤 이는 이 항만을 가리켜 태평양 해안으로서는 호주의 시드니 항, 북 아메리카의 샌프란시스코 항에 다음가는 세계 세 번째 최우량의 산수(山水)라 하여 그 얼마나 군침을 흘렸는지 모른다. 러시아가 동양에서 얼어붙지 않는 항구로서 마산을 얻으려고 마산사건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짐작이 가듯이 얼마나 마산이 그 형세가 좋고 그 풍경 역시 보기 좋기는 누구나가 아는 바이다. 마산만은 부도수도(釜島水道)라 부르는 입구에서 9해리 거리를 두고 진해만에 붙어 있다. 진.. 2021. 9. 6.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6 2.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생활공간의 역사와 흔적 1) 사업구역 내 삶터의 흔적 - 4 ● 주변이 온통 국화밭이었던 시절 마산은 오랫동안 국화의 도시로 유명했다. 지금도 매년 가을이면 국화축제가 벌어진다. 2014년에 제14회를 맞이한 가고파국화축제는 마산의 대표 축제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마산은 국화의 주산지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상업적 국화재배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 현장이 회원동이다. 1960년 회원동에서 여섯 농가가 처음으로 국화 재배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전에 국화 재배에 처음 성공한 이는 여대기(余大基, 회원동 464번지 / '토마토 裁培技術(서울: 富民文化社, 1972)'이란 책을 쓰기도 한 우리나라 화훼농업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란 독농가이.. 2020. 9. 21.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8 Ⅳ. 맺음말 이 글에서 우리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난 1차 시위에 참가한 하상칠이라는 특정 개인의 경험에서 도출된 다음 두 가지 의문에 답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는 시위 참가 동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랜 침묵의 이유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의문과 관련해 사회적 요인을 바탕으로 개인적 요인들에 천착함으로써 개인에게 체화된 사회적 정의감을 확인했다. 두 번째 의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서 국가가 개인에게 가한 보복 공포증과 빨갱이 트라우마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볼 수 있었다. 하상칠의 증언은 3․15의거 당일 시청과 무학국교 앞에서 벌어졌던 야간시위의 전개과정을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향후 4월혁명 공로자 신청이 추가 시행된.. 2018. 11. 19.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7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2) 증언 결심 동기 하상칠은 그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날 밤 내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증언록, 478쪽)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자에게 “들켜서 보복 당하거나 빨갱이로 몰려 패가망신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는 동안 그가 증언할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는 계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그가 구체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짐작해본다. 먼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 2018. 11. 12.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Ⅲ.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항적 행동으로 표출되도록 만든 사회적 요인이 무엇이었던가를 규명하는 데 치중해왔다. 따라서 3․15의거의 경우 “왜 하필 마산인가”라는 의문을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런데 특정 개인의 항쟁 참가, 예컨대 “왜 하상칠인가”라는 의문에 답하려면 이러한 사회적 요인보다 개인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 사회적 요인이 모든 참가자에게 해당되는 공통 요인이라면, 개인적 요인은 특정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개별적인 특수 요인이다. 양자를 동시에 살펴보는 것은 3․15의거를 좀 더 복합적이고 심층적으.. 2018. 10. 22.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한평 없어 어차피 얻은 구장집 머슴자리 지켜 새경 모은 것으로 동네 가난한 처자와 눈맞추어 토백이처럼 산 김씨 같은 사람도 있었다. 또, 부두노동으로 돈 모아 논밭 사둔 것이 나중에 개발되어 알부자 소리를 들은 천씨 같은 사람도 있고, 개울가 움막 같은 초가에 살았던 박씨처럼 어설픈 재인 노릇하다 결국 좀도둑으로 전락하여 비참한 삶을 마감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가며 난민생활을 하는 일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 2018. 3. 26.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같은 데에 담아 팔았고 대팻날 같은 데에 얼음덩이를 올려 즉석에서 갈아 팥, 향료, 설탕 등을 얹어 주던 빙수는 접시나 사발에 담아 팔았었다. 거기에 비해 아이스케키는 공장을 두어 제조했고, 보온 질통에 넣어 거리에 다니면서 파는 아이들이 마산에만도 이백 명이 넘을 정도로 판매규모가 방대했었다. 한편으론 어려운 집들의 청소년들이 학업도 포기해가면서 다투어 나섰기 때문에 더 붐이 일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어쨌든, 당시 도심 거리에 나가면 여기서 아이스케키! 저기서 께에끼! 그러다 한.. 2018. 3. 5.
기억을 찾아가다 - 16 16. 광복절 행사와 우리들의 영웅 초등학교 때도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가 있었지만 참여 정도가 미미해서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중학생이 되어 응원군으로 참여하면서 운동경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 선수들의 면면이 우리들의 선망대상으로 화제가 되었다. 특히 뛰어난 기량을 보였거나 남다른 재능이나 인기 끌 요소까지 겸비한 선수는 우리들의 영웅으로 부각되어 우리들 의식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기도 했다. 매년 8월 15일이 되면 방학 중인데도 모든 학생들은 등교하여 기념식에 참석해야 했다. 식이 끝나면 바로 시가행진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마산 인구는 전쟁 피난민이 보태져 10만 명이 조금 넘었을 정도였는데도 도로가의 시민들 참여도도 높고 하여 지금 세태로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장관을 연출했던 것.. 2018. 2. 5.
기억을 찾아가다 - 14 14. 정전 후의 체험들 Ⅴ - 마부 버스, 화물차 군용차 아닌 것들을 그때 우리들은 ‘개인차’라 불렀는데, 개인 승용차는 당시로선 하루에 한두 대 보기도 어려웠고, 거의 모두가 화물차와 버스였다. 거의 모두 일제가 두고 간 것이나 군에서 불하한 것들이었는데, 차종에 관계없이 크기가 좀 작고 연하게 생긴 것은 일제(일본제품), 크고 견고해 보이는 것은 미제(미국제품), 개조한 차들은 선제(조선제=국산)라 불렀다. 차에 호기심들이 많았던지라 지나가는 차들을 그렇게 분류하기를 즐겼고, 종종 분류를 다투기도 했다. 이 용어들은 한참동안 옷, 화장품, 학용품 등에서도 쓰였다. 60년대 서성동 버스 종합터미널이 생기기 전까지 회사 별로 여기저기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주로 오동동, 창동, 남성동에 있었는데, 회사가.. 2018. 1. 22.
기억을 찾아가다 - 13 13. 정전 후의 체험들 Ⅳ - ‘이용범 다리’ ‘용베미 다리’란 말을 언제 쯤 부터 들었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용범(아래 사진 / 1905~1968)이란 인물의 이름이 널리 퍼진 계기로 미루어보면, 1954년 총선 이후였다고 생각된다. 참고 ; 자유당 전성기 건설업계는 이용범의 대동공업, 황의성의 조흥토건, 김용산의 극동건설, 이재준의 대림산업, 정주영의 현대건설, 조정구의 삼부토건 다섯 회사가 지배했다. 고장이 나면 불편이 컸던 양덕교(현 마산자유무역지역 정문 앞의 다리, 지금은 복개되어 다리로 인식되지 않는다)를 두고 불평과 비난의 말들을 많이 했었는데, 그때에도 공사자나 회사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보거나 들었던 기억은 없다. 지금처럼 시공사의 이름을 써놓은 입간판 같은 건 그땐 .. 2018. 1. 15.
기억을 찾아가다 - 10 10. 정권 후의 체험들 Ⅰ- 깡통문화, 총탄 정전 반대를 외치는 집회와 행진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마산에서도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나 형들로부터 엿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였던 기억은 없다. 아마 선생님의 설명을 통하여 상황인식을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정부에선 백두산까지 밀고 올라가 통일하자고 했는데 유엔이 정전을 강행했다는 것만 알았다. 혼자서 수류탄을 들고 적 탱크 밑으로 들어가 산화한 전쟁영웅 열 명의 사진에 간단한 설명을 붙인 소의 ‘육탄 십 용사’포스터가 교실 벽마다 붙었고, 그들은 한동안 ‘반공웅변대회’의 중심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각 학교에서 ‘반공강연회’가 수시로 열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 2017. 12. 18.
기억을 찾아가다 - 9 9.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Ⅲ - 용의검사, 학력경쟁 가교사생활 직후부터 실시된 용의검사는 생활환경이 좋은 도회지 넉넉한 집 아이들에겐 별 부담이 안 되었겠지만, 누추한 환경에서 생활하거나 항상 흙을 묻히고 살아야하는 농촌 아이들에겐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1~2주에 한번 씩 하는 검사는 대체로 손발의 때 검사만 했기에 부담이 덜했지만 매 달하는 ‘총검사’는 팬티만 입혀놓고 했기에 그 전날부터 대비하느라 많은 고생들을 했다. 한 학년 차이의 내 여동생에게 들어서 알고 있거니와, 여학생들에게만 실시한 머릿니 검사도 역시 생활환경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많은 상처를 준 것 같다. 영양상태가 좋은 아이들은 피부에 윤기가 돌고 때도 잘 끼지 않을뿐더러 씻어내기도 쉬운데, 당시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 반대.. 2017. 12. 11.
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Ⅱ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으로 갔던 곳은 오동동파출소 서쪽 옆길 건너편의 한의원 2층이었다. 꽤 넓었다고 기억되는 것이, 그 다다미 방에서 집단으로 ‘고상받기’(레슬링 식으로 상대방을 항복시키는 놀이. ‘고상(こうさん)’은 항복의 일본 말)를 하다 선생님으로부터 단체 기합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얼마 후엔 파출소 2층으로 갔는데 거기선 담임선생님의 심한 매질을 여러 급우들이 당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시국 때문에 파출소가 비좁을 정도로 경범들이 많았던 상황에서도 아랑곳할 리 없는 우리들의 난동(?)에 경찰.. 2017. 12. 4.
기억을 찾아가다 -7 7.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Ⅰ - 떠돌이 수업 피난 갔다 와서 학교에 나가보니, 들은 대로 학교는 이미 군용병원이 되어 있었다. 이웃 마산상업중학교(용마고의 전신인 마산상고와 마산동중이 분리되기 전의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우리들의 떠돌이 학교생활은 2년 남짓 계속되었다. 처음엔 용마산 남쪽 비탈 중하단 정도 되는 곳으로 등교했다. 거기엔 전쟁에 대비하여 파놓은 ‘ㄷ’자형의 참호가 많이 있었고, 거기서 우리 반뿐만 아니라 여러 반이 이웃하여 학습생활을 했다. 가운데에 작대기를 세워 칠판을 걸고 우리들은 호 안에 기대거나 서고, 바깥 풀 위에도 앉고 하여 진행하는 수업형태였다. 그때 우리들 각자가 선생님 지시에 따라 마련한 책상 대용 필수품이 ‘화판’이라 불린 물건이었다. 판자들을 덧대어 만든 넓.. 2017. 11. 27.
기억을 찾아가다 - 6 6.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Ⅳ - 징병, 피난 귀향 전쟁 나고 열흘 쯤 되었다. 낯선 얼굴을 보기 어려운 시골마을에 낯선 복장에 낯선 체형의 사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린 아직 어려 잘 인지하지 못했으나, 어른들이나 형들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의 눈에도 그들의 양태가 박히게 되었다. 허름한 바지저고리에 짚신이나 낡은 검정고무신 차림과는 완연히 대조되는, 색깔 있는 셔츠에 빳빳한 바지, 그리고 단단하고 날렵해 보이는 운동화 차림이었다. 가을이 되어서는 당시로선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던 점퍼들도 입고 있었다. 체격도 구부정한 농민들과는 달리 몸이 곧고 날렵해 보였다. 형사들이었다. 그들이 나타나면 우리들도 알아보게 되었고, 형들이나 아저씨들에게 전해주기도 했었다. 그들은 징집대상자들을 차출하러 그렇게 다니면서.. 2017. 11. 20.
기억을 찾아가다 - 5 5.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Ⅲ - 미군들 우리들은 예사로 ‘할로’를 외치곤 했지만, 어른들이 인식은 많이 달랐었다. 특히 처녀들과 젊은 아녀자들에게 미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느 새댁은 야산에 끌려가 윤간당한 후 소나무에 목을 맸다느니, 어떤 처자는 사후에 아예 양색시(미군 상대 매음부)로 변신했다느니, 회원동 난민촌에선 미군의 횡포에 대들던 청년이 총 맞아 죽었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참 한참 동안 끊임없이 들려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실제로 내 큰누님과 육촌형수가 집 앞 우물가에서 나물을 씻다가 둘 앞에 세우는 방구쟁이 차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집안으로 뛰어 들어온 일도 있었고, 언젠가는 그런 두 사람의 뒤로 두 미군병사가 따라 들어와 권총을 빼들고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을 질리게 했던 일도 있었다. 그들로 .. 2017. 11. 13.
기억을 찾아가다 - 2 2. 봉암동 형성 Ⅱ 팔용산에 수원지가 건설된 것은 1930년이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일인 1일 급수량 170리터 기준으로 인구 16,000명을 예상하고 만들었다가 증축을 하기도 했다. 광역상수도 확장사업이 완료된 1984년 말까지 마산시민의 식수원이었다. 수원지 물은 송수관을 타고 추산동 산중턱에 있었던 정수장을 거쳐 시민들에게 공급되었다. 50년대 후반에 민원을 받아 송수관 중간에 지관시설을 하여 정수장으로 가기 전의 원수를 봉암동 주민들에게 주기도 했었다. 수원지 길 들머리에서 백여 미터 올라가면 왼쪽 계곡에 집채만 한 바위들이 여럿 늘려있고, 오른쪽 석벽엔 아직도 홈을 새긴 것 같은 길쭉한 다이너마이트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어, 당시 난공사의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산악타기 초보자들의 암벽등반.. 2017. 10. 23.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2. 영불의 함대 입항 142. 영·불(英·佛) 함대 입항 1920년 여름, 안남(安南, 월남)에 있는 불함(佛艦)이 마산 저도 좌편 안쪽에 투묘(投錨)했다가 삼일 후에 출항한 뒤를 이어, 상해에 주둔하고 있는 영함(英艦) 호오킨스호가 동도(同島) 훨씬 뒤편 마산 바로 앞면에 정박했다. 이들 영·불 양 극동 함대가 진해 해군기지에 들르지 않고 마산만으로 들어온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과의 친선을 위한 단순한 의례적 순방이라 했지만, 그들이 일본 육해군의 중요한 요새지인 이곳에 온 근본 저의를 번연히 알고 있는 일본군 당국자들은, 과거 동맹국으로 국제 친선의 예방인 만큼 속으로는 앓고 있으면서도 표면상으로는 환대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 두 함대가 거제 수도(水道)에 나타나기 직전, 진해 해군기지에서는 연막을 쳐서 군항의 .. 2017. 3. 2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4. 매축권과 대일 투쟁 134. 매축권(埋築權)과 대일(對日) 투쟁 구마산포는 옛날부터 농수산물의 집산지로서 중부 경남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기능을 가진 요지로 발달해 온 곳이었다. 망국의 낌새가 스며들던 한말, 마산의 토지소유권을 비롯한 모든 이권이 노·일 양국의 각축과정에서 외인(外人)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가운데서도 구마산 항민(港民)들은 꾸준히 그들의 상권을 투쟁으로 수호 유지해 왔다. 이러한 투쟁의 현실적인 뒷받침은 물론 축적된 상업자본의 힘에서 온 것이지만, 이러한 것이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되어 더욱 상업자본이 축적되어 갔고 그 결과 일본 상인들에 대해서도 투쟁의 현실적인 실력을 갖추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외인(外人)이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시작한 개항 이후 그들이 노리는 중요한 이권 가운데 하나가 창탄(漲.. 2017. 1. 23.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3. 노공관의 점유지 133. 노공관(露公館)의 점유지 1899년 노서아와 일본 정부가 마산에 해군 근거지를 두려고 각축전이 치열했는데 노서아는 서부 마산에 조차 조약을 체결한 뒤 지금의 일성 펌프공장 자리에 영사관을 두고 백조악기점 자리에는 관사를 두었다. 그리고 신마산 공설시장 역내 대지 86번지 동 87, 동 88, 동 72-9, 동 72의 2, 동 72의 17, 동 72-12 등 7개소를 점유하여 지금도 등기상 노서아의 소유가 되어 있으므로 한국인의 공유(公有)나 이유(利有)가 불가능하며 국립요양원 뒷산에는 로인(露人) 묘지 2봉(封)이 있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2017. 1. 16.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0. 신간회 130. 신간회(新幹會) 3·1운동이란 약소민족 해방의 봉화가 계림팔도에 팽배함에 이어, 일본 여러 곳 대, 소 전문학교의 유학생들은 어느덧 사회주의 사상에 침투되어 그 격랑은 드디어 극동 전역을 석권하는 판도가 되었다. 순순하고 열렬한 민족주의자의 단일 전선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제 공산당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지하 근거지로 발화시켜, 이 불꽃으로 민족 전선에서 속속 이탈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이루스쿡크’파 여운형의 고려 공산당 같은 것이며, 내지에서도 이들 수배(數倍)의 선풍이 농민운동, 노동조합 부녀동맹, 청년동맹 심지어 소년소녀동맹, 독서회 등 수십 개의 관계 단체에도 휘몰아쳤다. 때가 소비에트의 ‘콤민테룬’의 지령에 움직이고 있는 때라, 민족주의라는 보수적 고첩(孤疊)에 고민하고 있는 .. 2016. 12. 26.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5. 벽신문 125. 벽신문 1924년 여름께 국내 처음으로 벽신문이란 것이 나왔다. 그때도 ‘벽신문’이란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상한 것이라 하여 화제가 되었으며 이것이 신문에 예보도(豫報道)되자 보도 기관이 희소한 관계로 그랬던가 몇몇 지방에서는 지국 설치 희망자로부터 규약과 보증금 액수 그리고 부수에 대한 할부 관계 무가지 매수를 문의하는 우편물이 쇄도하여 쓴웃음을 머금게 했다. 여기에 벽신문에 관한 취지와 유래를 약설(略說)해 보면 이것을 Sten gajeta~Stennya gazeta라 칭하며 멀리 제정 러시아 때부터 적색소비에트 또는 프랑스 등의 적위군(赤衛軍)의 대내(隊內)에서 유행하여 이것이 점차로 각 공장과 공청(公廳) 노동자 구락부, 농촌 독서실 그리고 학교 등에 보급된 신문 형식이었는데 주로 .. 2016. 11. 21.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1. 경영난의 남선일보 121. 경영난의 남선일보(南鮮日報) 마산지방에서 발간하는 일간지(일문 4페이지)는 멀리 명치 38년 경에 마산신문으로 발행하다가 폐간, 그 후 명치 43년 경 경성일보가 발행권을 가졌다. 강용일(岡 庸一)이란 사람이 10년 계약으로 운영하였는데, 기계는 16혈(頁) 수동식, 소설은 일본서 지형(紙型)아닌 연판(鉛版)으로 들어오고, 사옥은 신마산 진일기계사 창고 옆에 있다가 다시 구 러시아 영사관(현 일성펌프공장)으로 옮겼으나, 기계에 모터 장치란 꿈에도 모를 때고, 족답(足踏)으로는 회전이 되지 않아서 기계공 4명이 수동을 하여 신문 한 장이 나오는 시간이 약 4초 내지 5초가 소요되었다. 기계공 4명 모두 유발자(有髮者)라 수동할 때 상방(相方) 2명의 상투가 수동 회수에 따라 꺼떡거리는 광경은 지금.. 2016. 10. 31.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9. 태운환의 취항 119. 태운환(太運丸)의 취항 바다에 화륜선(火輪船)이 생긴 뒤로 목조 범선이 취급하던 하물과 승객을 거의 아끼던 시절에 마산 앞바다에 하나의 색다른 배가 생겨 일반의 호기심을 자아냈었는데 그게 바로 ‘빡락선’(혹은 똑딱선)이라는 발동선이었다. 1912년에 진해(현동)-마산간의 화객(貨客)을 취급하던 배였는데 몸집이 크고 속도가 느릿느릿하게만 보이던 화륜선보다 통탕통탕 성급한 소리를 내며 까불까불 달리는 ‘빨락선’에 인기가 집중되었던 것이다. 물론 회조업(廻漕業)은 스노우찌(須之內, 수지내)라는 일인이 독점하였으나, 매표는 노천 선착장에서 일인과 조선인 두 사람이 따로따로 출찰(出札)하였다. 개업한 이틀째부터 자연히 생기게 되니, 일본 매표구는 파리를 날리는 판이 되고 조선인 매표구는 저가(시장)처럼 .. 2016. 10. 17.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5. 이등방망이 피살보 115. 이등(伊藤)방망이 피살보(被殺報) 1909년 10월 27일(이등 피살 이튿날) 마산공립보통학교 제4학년 정영관(본교 3회 졸업생)은 완월 의숙(義塾)학원 생도들과 하학 도중 성지학원 앞에서 만났다. 그는 이등박문이 북만주 ‘하르빈’이라는 정거장에서 한인 독립군 안중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총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전했다. 전보 통신이나 라디오가 없던 시절인 만큼 신문보도인 경성일보를 본 흑목원이(黑木源二) 교장이 전교생을 모은 가운데 울면서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등이 어떠한 위치에서 무엇을 하는 위인인가는 확실히 모르면서도 한인의 원수라는 것만은 막연하게 알고 있는 일부 국민들은 덮어놓고 통쾌하게 생각했으며, 이등박문이라는 것이 와전되어 이등방망이가 한국인의 방망이에 맞아 죽었다고들 하였던 것이다... 2016. 9. 26.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3. 생도들의 복습소, 114. 간수의 인권유린 113. 생도들의 복습소 천자문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동안 신학문이 들어오고 학교가 설립됨에 따라 학교에서 하학하면 과거의 서당과 마찬가지로 그 날 배운 과목을 단순히 통독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 있었고, 이것을 독려하기 위한 무료 과외 수업격인 복습소를 웬만한 가정에서는 차릴 수가 있었다. 즉 한 칸 방을 복습소로서 다수 학생을 상대로 이를 제공하게 되면 학부형들은 연료인 화목대(火木代)만 부담하면 석유대는 없어도 좋고, 또 전등이 있더라도 전기 사용료라는 명목은 없었다. 상급 생도는 하급생을 감독하였고, 또 일정한 시간에 출석하여 일정한 시간에 복습을 시킨 후 공동 취침을 하는데, 때로는 복습소끼리 경쟁을 하여 성적이 우수한 복습소에는 학교 선생과 부형들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각 복습.. 2016. 9. 19.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1. 독립교회의 탄생 102.제약회사의 선전 경쟁 101. 독립교회의 탄생 1927년 11월 27일 마산 문창 장로교회에서 벗어나온 교인 일단이 ‘신앙의 자유와 자활적 정신에 입각하여 모든 교파를 초월하고 그리스도에게로, 인위적 조직과 제도를 더나 성서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이념을 내어 걸고 독립 마산예수교회를 창설했다. 당시 교인 총수는 손덕우 장로를 비롯하여 남녀 200여명, 초대 교역자로는 김산(金山) 목사(중국 남경 금릉대학 출신)를 추대하니 교회 초창기에 희생적인 노력이 많았다. 1928년 11월 27일에 헌당식을 거행했다. 당시 김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에 희생적으로 봉사한 교인은 다음과 같다. 손덕우(장로) 한좌건, 김주봉, 박덕우, 박채우, 김은수, 최종안, 이창우, 최원칙, 유진구, 정대근, 박덕근, 황덕수, 문덕중, 이일래, 서상삼, 설반.. 2016. 7. 18.
김형윤의 <마산야화> - 97. 탄산가스 소동 97. 탄산가스 소동 마산의 도로 연혁이 별로 없으니 상보(詳報)는 어려우나 부림시장에서 서성동 내림길 일대에는 수백년을 헤아리는 고목들이 가히 천일(天日)을 가릴만치 울밀(鬱密)하여 이곳을 숲골(林谷)이라 불렀고, 또는 서림(西林)이라고도 하여 지금 이한철(李翰喆) 치과의원 아랫집 터에 보통학교 생도들의 복습방이 있어 그 이름을 ‘서촌숙(西村塾)’이라고 부르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곳에 신작로를 설치하기 위하여 모든 초부(樵夫)들을 동원하여 그 굵은 나무들을 톱질을 해서 베어내는 것인데, 그 초부라는 것이 산에 잡목이나 메는 말하자면 졸때기들이어서 고목을 베는 큰 톱을 써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고목을 베는 상식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몇 개의 고목을 베는 동안에 초부 수십명이 한꺼.. 2016. 6. 2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3. 어시장 93. 어시장(魚市場) 마산의 한인 경제의 동맥이라고 일컫는 구마산 어시장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약 2백 수십 년 전부터라는 고로(古老)들의 추측으로서 생선과 일용품 시장은 6,70년 전까지는 구강(舊江, 현 산호동)이라는 취락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지금은 어업조합으로 약진하여 부산에 버금되는 조합건물이 윤환(輪奐)의 위세를 뽐내고 있지마는, 조합 이전의 어시장에는 객주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영세 어민에게는 조업자금을 대여함으로써 어로고(漁撈高)의 몇 분의 얼마를 이자조로 공제하여 객주와 어민간의 상호 유대를 견지해 왔던 것이다. 합포사라는 객주들의 협의기관을 조직하여 외래자금의 침투를 공고하게 방어하여 그 움직임이 일사불란하였다. 한 예를 들면 외래자금이라는 것은 특히 일인들을 지칭하는 것인바, 그 .. 2016.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