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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번창기(1908) - 19 - 제9장 경제사정

by 운무허정도 2022. 1. 3.

제9장 경제 사정 - 2

 

■ 수입품

나가사키(長崎), 시모노세키, 오사카, 고베 또는 부산 등에서 수입하고 기타 외국에서 직접 수입하는 것은 적다. 주된 품목은 견면마포(絹綿麻布, 청국제 포함), 일용잡화, 관제담배, 박래잡화(舶來雜貨), 일본 청주, 맥주 및 기타 주류, 한인용 솥 종류 및 기타 주철, 광철류, 밀가루, 설탕, 석유, 성냥, 기와, 대나무, 목탄, 목재 등이며 그 총량은 180만 원을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그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시황란(市況欄)에서 밝히겠다.

 

<당시 일본인들이 이용하던 신마산의 부두>

 

해산물 및 그 수송기관은 대개 아래와 같다.

 

□ 마산수산주식회사

이 회사는 신시의 하마마치(濱町, 창포동) 3정목에 있으며 1905년 발기회를 열어 4월부터 어류 경매 영업을 시작하여 1906년 6월 1일 설립인가를 거쳐 법인사단이 된 것이다. 총 자본 2만 원으로 하고 한 주당 50원씩 400주를 발행했다.

한 주당 한 번의 배당금은 4분의 1, 즉 12원 50정이라 한다. 경영하는데 이 배당도 충분하다 하여 반기(半期)마다 손익계산서에는 3할 이상의 손익이 났으며 거기서 적립금, 상여금, 기타 잡비를 빼고도 1할 6푼의 이익 배당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무이사는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씨이며 지배인은 마츠자카 한지(松崎半治) 씨이다. 그 영업소에는 앞바다에 두 채의 어시장을 건설하여 육지와 잇는 다리인 잔교(棧橋)를 길게 걸어놓고 매년 1월 1일을 빼고는 일 년 내내 이른 아침에 경매를 개시하고 있다.

그 경매수수료는 출품자로부터는 1할을, 경매낙찰 중매자로부터는 1푼을 받도록 되어 있다. 연간 평균 매상 예상액은 129,330여 원이며 평균 가격은 10관당 10원 60전으로 치면 크게 틀림이 없을 것이다.

고기 잡는 배와 어부는 매년 음력 정월과 7월의 두 달에는 그 3분의 2는 원적지(구마모토, 히로시마, 오카야마의 세 현이 많음)에 귀향하게 되니 그 점을 감안해서 계산을 하면 매일 출어하러 나가는 배는 27척, 어부는 108명꼴이 된다.

어부들은 원래 수산회사 뒤쪽의 나가야(長屋)에 살고 있었으나 대안 월영지역에 가옥을 5개동 25채를 지을 계획이 있어 가을 수확기가 끝나야 기공이 될 터인데 그 기초는 이미 정비되었고 거기에 전봇대 설치 신청까지 냈다고 들었다.

경매시장의 어종 및 평균액은 다음과 같다.

도미 12원, 삼치 12원, 갯장어 8원 50전, 가자미 8원, 전복 8원, 고등어 7원, 상어 6원 50전, 새우 20원, 문어 15원, 잡어 10원, 염장생선 4원 20전, 건어 5원 50전.

지배인 마츠자카 한지 씨는 가에이(嘉永) 5년(1852년) 1월, 나가사키 현 미나미고오라(南高來) 군(郡)에서 태어났다. 지금부터 십 수 년 전에 도한(渡韓)하여 부산의 핫토오시구미(八頭司組)란 인력회사에 오래 근무하다가 부산노동조합사무소 이사로 전직하였다. 거기가 해산하자 오기노(扇野) 모(某)란 자가 경영하는 나가토구미(長門組)의 감독이 되어 공사청부에 종사하여 크게 성공했다고 한다.

그 후 경성에 가서 독력(獨力)으로 수산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게 되니 이 사람의 실적을 보고 출자하자는 경성의 유지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식회사를 조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04년에 마산에 내려와서 마산수산주식회사를 이끌고 유지들의 협찬을 받으며 오늘의 융성을 보게 되었으니 그 경영 기획과 수완이 좋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마츠자카 씨는 최근 부인을 잃고 그 몸과 마음에 기운이 없어 보이니 참으로 동정을 금할 수가 없다. 그래도 마츠자키 씨는 원래 소양이 있고 지략이 깊은 사람인지라 경영책을 강구하는 데는 한 치의 느슨함이 없다.

마산수산의 발달상 큰 공적이 있는 이로서 모두가 경의를 표해야할 것이다. 현재는 메이지생명보험주식회사의 대리점도 맡고 있다.

 

□ 한해수산조합(韓海水産組合) 마산지부

여기의 상황은 수출물 항목에서 자세히 적어 놓았다. 지부장 미야하라 가네유키(宮原兼行) 씨는 순라선(巡邏船) 내 우편소장으로서 때때로 마산만에서부터 진해만 안팎의 어장을 순라, 경계하고 있다.

미야하라 씨는 원래 경관 출신이다. 1891년 고향인 가고시마(鹿兒島)를 떠나 외무성 경찰관이 되었으며 부산 영사관의 경찰관으로 순사부장까지 승진하여 1894-5년의 청일전쟁 때의 공훈으로 훈8등 백색동엽장(白色桐葉章)이란 훈장을 받기도 했다.

건실하게 근무한 지 수년으로 거류민의 신뢰가 있었는데 1900년에 그 직을 그만두고 수산조합에 들어와 지금도 신뢰를 얻으며 근무하고 있다. 씨는 공공사업에 열성적인 사람이라 거류민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04년 8월에는 센고쿠(仙石) 이사 다음으로 이사가 되어 민단제 시행 이후 민장 대리였다. 누가 무어라 해도 씨는 개항 이래 마산 경영계의 주역이라 하겠다.

 

□ 마산포 어시장

이곳은 원래부터 한인을 위해 설치된 것이며 음력 설날부터 보름까지 만은 쉬고 나머지는 휴일 없이 운영된다. 거래는 한인끼리 엽전으로 이루어지니 그 가격과 거래량을 기록할 수가 없다. 이 시장은 생선보다 말리거나 소금에 절인 것들을 주로 취급한다. 대구(大口魚)의 어획기에는 날마다 4천 원 내외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 다음 가는 품목은 원산에서 들어오는 말린 명태이며 매월 5일장, 10일장에는 거래금액이 6,500원을 넘을 때가 흔하다고 한다.

 

□ 건염어 회사

이 회사는 한인 사이의 주식회사이며 원산진(元山津)과의 거래를 하는 곳인데 그 실태는 상세히 알 수가 없다.

 

□ 농업

논밭은 의연히 두락제(斗落制)에 의하며 논의 한 두락은 일곱 걸음부터 좁을 때는 네 걸음에 이르며 밭은 넓어도 두 걸음을 넘는 것이 없고, 좁게는 한 걸음도 안 되는 것도 있다.

한인은 논을 답(沓)이라 하고 밭을 전(田)이라고 한다. 그 판매가격은 장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마산권 내의 시세는 밭 한 마지기가 67원에서부터 30원까지이며 논은 그 다섯 배 이상이다. 그렇기에 권내 밭의 과방은 군용지 혹은 일인의 소유지인데 스스로 경작하여 농사를 짓는 사람은 적다.

앞으로 시가지가 발전하여 그 시가가 올라갔을 때 팔고 이익을 남기려는 자가 많았었는데 고장에서 나는 채소류가 적어서 그 공급의 많은 부분을 시모노세키, 부산 혹은 밀양, 삼랑진에 기대고 가격도 비싸게 되니 요사이에는 스스로 농사짓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그 중에서 노련한 사람은 밭 1반보(反步)에서 일 년에 150원에서 200원까지 연수익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그 이익은 쌀의 수익보다 7,8배가 되므로 논을 밭으로 바꾸려는 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산 항구권의 지역은 논이 1반보당 가격이 20원에서 3,40원 사이이며 저렴하긴 하지만 훗날 항구가 발전해 감에 따라 주택지로서 땅 가격이 상승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단지 쌀과 밀의 수확을 바랄 뿐이다.

논과 밭이 둘 다 비싼 감이 있더라도 장래 시가지의 택지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또한 채소류를 기를 목적으로라도 항구 내 장소를 구입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군용지는 거류민단이 기본재산 증식을 위해 군에서 빌려 거류민에게 대부해 주는데 그 절차는 경매 입찰에 의하는 발 비싼 곳은 한 평당 연세가 7전을 넘는 것도 있다. 자기 집 바로 옆에 있는 논밭으로서는 부당한 임대로는 아니지만 진정한 농사 종사자로서 1반보당 연간 임대료가 15원을 초과할 것 같으며 도저히 농사에서 수입을 업을 길은 없으리라 사료된다.

하물며 철도용지의 경우에는 그 임대료가 한 달 한 평당 12전을 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아무리 경쟁 입찰이라 할지라도 이래가지고서야 발전을 위한 상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아홉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