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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2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5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4)

 

그렇다면 이교재와 함께 형무소에 갇힌 위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순서대로 적힌 인물들을 검토해 보자.

沈相沅에 관한 기록은 재판 기록 이외에서는 신상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형량에 있어서 이교재보다 적지만 다른 이들보다는 많은 1년 형이다.

다음으로 서석천의 경우, 1949년 4월에 발간된 한 언론에 실린 19명의 명단 속에 그의 이름이 있다.(민주중보 제1034호(7권) 1949년 4월 29일자. 이곳에 실린 명단은 沈倫, 金義植, 南海, 咸陽 金守東, 洪源轍, 徐錫天, 孫吉童, 朴洙東, 統營 金宜錫, 洪鍾濟, 宋孟守, 朴○漢, 馬山 金浩鉉, 高昇柱, 卞甲섭, 金英煥, 洪斗益, 卞相福, 李基鳳 등이다.)

들 중에서 예컨대 마산지역 출신으로 구분된 金浩鉉, 高昇柱, 卞甲燮, 金英煥, 洪斗益,卞相福, 李基鳳 등은 모두 삼진의거 때 피살당한 8의사들이다.

서석천은 남해와 함양 지역의 인물로 속해 있는데, 이로 보아 이교재와 같은 시기에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49년에 반민특위경남조사부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을 때, 당시 조사관들은 진동의 창의비에 참배를 하면서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 기미독립운동 당시 피체포자인 서석천도 동행하였다.(이때 체포된 인물 중 삼진의거 때 일본헌병의 일원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 총을 쏘았던 심의경이 포함되어 있다. 62세였던 그는 함안군 법수면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죄로 체포된 인물 중에 진동면 고현의 송도에 사는 金尙圭도 포함되어 있다.)

徐正奎(1889~1949)는 창원의 진동면 출신으로 1919년 3월 28일에 있었던 고현의 만세시위 참여하였고, 이어 4.3시위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그 역시 제령제7호와 출판법 위반으로 이교재와 같이 진주지청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에서 6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인터넷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관리번호 31950) 

출신지가 진동이고 고현과 4.3의거에 잇따라 참여하였음에도 의거 직후에 피체를 피한 채 다시 진주에 가서 활동한 것을 보면, 이교재 역시 이러한 궤적을 밟았으리라고 본다.

李炳秀(1896~1960)의 출생지 주소는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97번지이다. 이 주소는 현재 동대 마을에 있는 진전우체국 옆으로, 이교재와 바로 이웃한 곳에서 살았음을 보여준다.(인터넷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이병수는 이교재가 통영에서 군자금 모금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을 당시 “동지 이병수씨(현존)와 통영, 마산, 진주 방면으로 전전 피신하던 중에”라는 김형윤 기자의 회고담이 있는 것으로 보아(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두 사람은 친밀한 동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다.

진전면 오서리가 고향인 권영한의 죄명도 집행원부에 따르면 대정8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위반이며 이교재와 같이 9월 25일에 최종적으로 6개월 징역형이 확정되었다.(이들은 범죄인명부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최종적인 형명이나 형기를 알 수는 없으나 이병수와 같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동·진전·진북의 3개 면을 일컫는 삼진지역에서는 4.3삼진의거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에 못지않게 체포 투옥된 이들이 있지만,(「창원소요판결, 징역 1년 이하」, 매일신보, 1919년 5월 29일자 기사에 인명 朴和烈, 甘泰舜, 具在均, 薛灌銖, 裵龍文, 曹潤鎬, 孔道守, 張相五, 金相鎭, 金世元, 沈相璘, 申甲先, 曹喜舜, 史致洪, 金道根, 李大鎬, 金斯文, 金介同, 孔仕千, 金昌實, 崔介同, 申壽鉉, 安相錫, 金瀅源, 崔世植, 趙鏞瑨, 徐鎔守, 金南守, 許鎭, 權寧祚, 權寧震, 權五奎, 權泰濬, 白承仁, 盧秀?, 朴淳祚, 金鍾顥, 權五成, 李敎瑛 등의 이름이 보인다. ) 이들은 대부분 경성지방법원이나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와 달리 위의 6인은 진주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날에 같은 죄명으로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1923년의 통영사건 때에도 오서리 출신의 이만갑이라는 진주경찰서 고등형사에게 체포되었다고 알려졌는데,(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3.1운동 때에도 진주에서 체포되었기 때문에 삼진지역의 독립운동가와는 다른 법정에 서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컨대 이교재 일행은 삼진지역의 면민들이 연합대를 구성하여 진행한 3.1운동에 참여한 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진주에 가서 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하다 그곳에서 체포되었던 것이다.

복심법원에서의 형기를 마쳤다면 이교재는 1922년 3월 24일에 출옥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진전면에 소장된 범죄인명부에는 1년 3개월간의 형기를 마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1920년 12월 24일에 출옥한 셈이 된다.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다. 이교재는 출옥 직후에 상해의 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허나 아직껏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사건이 있다. 1922년 4월 18일이 판결 날짜로 되어 있는 국가기록원 소장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에 따르면 “이름은 이교재, 나이는 37세, 본적/주소는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이며, 죄명은 ‘대정 8년 제령제7호 위반’”이다.

판결기관은 마산지검 충무지청으로서 주문은 ‘죄가 되지 않음’이었다.(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판결문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622&evntId= &evntdowngbn=N&indpnId=0000145848&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앞에서 본 바와 같이 3.1운동으로 인한 복역기간이 1년 3개월이었다면 출옥 이후 1년 4개월여 만에 다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것이다.

이와 달리 진동면사무소 소장의 범죄인 명부에 기재된 죄명은 ‘기부금품모집취제규칙위반’이며, 형명과 형기는 ‘벌금 30원’, 판결청은 ‘마산분국’이다.

국가기록원 기록과 달리 죄명이 구체적이며 그에 따른 벌금까지 부과한 것이다.

이 「기부금품취체규칙」은 융희 3년(1909) 3월 1일에 각령 제2호로 관보에 실렸는데, 기부금품을 모집할 경우에는 모집 목적 및 방법, 모집 금품의 종류, 수량 및 보관 방법, 모집자의 주소· 직업· 성명· 연령 등을 갖춰 내부대신 및 사업 주무대신에게 청원하여 허가를 얻어야 했다.

이는 통감부가 당시에 불기 시작한 민립학교의 기부금 모집을 통제하여 학교 설립을 차단하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김효정, 「韓末 民立 師範學校의 設立과 敎育救國運動」,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교육과 역사전공 석사논문, 2015.2, 31쪽)

이 규칙이 이교재에게도 적용된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누구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기부금을 모집하여 어떤 용도로 쓰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음해에 통영에서 실제로 일어났듯이 독립군자금 모집과 관련된 일이 아니었을까라고 짐작해 보지만, 결정적인 자료는 없다.

그렇다면 이 기부금 사건도 이교재가 단독으로 실행한 것이라기보다 임정과 연계되어 진행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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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1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4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3)

 

이교재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뛰어든 것은 3.1운동 때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의 동지와 더불어 선언서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문건들을 道內 일원에 배부하다가 오서리 출신의 경찰인 이만갑에 의해 체포되어 진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고 알려졌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6쪽)

위와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간 독립만세 시위에 대한 참여나 체포 과정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적지 않았다.

다음의 기록은 그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1919년 7월 3일에 경상남도 장관인 사사키(佐佐木藤太郞)가 조선총독 하세가와에게 보낸 「소요에 관한 건(제7보)」에 따르면(문서제목, 「騷擾に關する件(第7報)」, 문서철명, 大正8年 騷擾事件に關する道長官報告綴 7冊內の7, 문서번호, 「慶南地親第491號朝鮮總督府 內秘補 135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정세가 점차 안정되어 가지만 아직도 강박문서가 때때로 각 방면에 배부되며 지난달(6월) 11일에 종래 李彰東의 명의로 진주에서 강박장을 배부하고 있던 이교재 체포(밑줄 필자)에 의해 금후는 화근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 뒤 지난달 24일에 도청 및 진주군청에서도 강박문서를 송부…”하고 있다면서 군내 유력자 77명을 진주문묘에 모아 놓고 그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교재는 6월 초순에도 이른바 강박문서를 진주에서 배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이창동의 명의’라는 것이 이창동의 이름으로 활동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교재가 저 이름으로 독립 관련 문서를 배포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3.1만세시위 직후부터 죽 계속된 것인지의 여부도 역시 확인하기 어렵지만, 함께 재판에 넘겨진 인물들과 6월 초순까지 진주에서 활동한 것은 분명하다.

진주경찰서에 잡혀간 이교재는 진주재판소를 거쳐 1919년 9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고 상소를 취하한 다음 9월 25일에 형이 확정되어 진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大正 8年(1919) 執行原簿(大邱覆審法院),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6752. 그러나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 정보에는 “삼일운동 때 경남북 일대에 선전문 배부 피체되어 3년 복역(진주형무소)”로 기술되어 있다.h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List. do?goTocode=20001 “경남북 일대”라는 부분도, 3년 복역이란 부분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이교재」항에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경상북도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진주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고 기술하였는데 이 역시 오류이다.)

당시 이교재와 같은 날에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을 언도받은 인물과 구형량은 다음과 같다.

<표 1> 3.1운동 당시 이교재와 일행의 재판 기록

성명 형량 죄명 재판소 형 확정일 형무소
李敎載 2년6개월 대정 8년 제령제7호 및 출판법 위반 대구복심법원 1919년9월25일 진주
沈相沅 1년 상동 상동 상동 상동
徐錫天 10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徐正奎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李炳秀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權寧漢 6개월 상동 상동 상동 상동

 

일제 당국이 이교재와 일행에게 언도한 죄명은 ‘대정 8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위반(출판법 위반의 구체적 내용은 ‘제1항 國交를 저해하고 政體를 붕괴케 하거나 국헌을 문란시키는 문서 및 도서를 출판했을 때는 3년 이하의 役刑에 처한다. 제2항 외교 및 군사의 기밀에 관한 문서 및 도화를 출판했을 때는 2년 이하의 역형에 처한다’ 등이었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역사문제연구 18, 2007, 14쪽)이었다.

잘 알다시피 制令이란 일본의 식민지배의 효율성과 자의성의 극대화를 위해 조선총독에게 부여된 제령제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법률을 말한다.

일본정부는 1910년 8월 29일의 「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이라는 긴급칙령 324호를 발포하여 일제하 조선의 법률은 조선총독부령, 곧 제령의 형식으로 제정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김창록, 「제령에 관한 연구」, 법사학연구 26, 2002, 109~171쪽)

강점기 35년간 제정된 제령은 모두 681건으로 분야별로는 경제와 산업이 466건, 사법·경찰이 157건, 기타 사회, 문화, 행정 순이다.(한승연, 「제령을 통해 본 총독정치의 목표와 조선 총독의 행정적 권한 연구」, 정부학연구 제15권 제2호, 2009, 180~183쪽)

3.1운동에 참여한 독립 인사들을 처벌하는데 사용된 ‘대정8년제령제7호’는 이 운동이 발발된 직후에 제정된 것이다.

대정8년제령제7호는 3.1운동 참가자에 대하여 보안법 대신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해 총독부내 사법부 장관의 제언으로 제령을 작성한 뒤 도쿄의 법제국과 교섭하여 이것을 완성하였다.

이를 4월 15일에 ‘정치와 관한 범죄처벌의 건’으로 공포 시행하게 된 것이 이른바 대정8년제령제7호이다.(최고 2년형으로 제한되어 있는 기존의 보안법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법은 제1호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공동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방해하려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제2조 전조의 죄를 범한 자가 발각 전에 자수하였을 때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다만 내란죄에 해당하는 자는 제령제7호를 적용하지 않는다. 제3조 본령은 제국 밖에서 제1조의 죄를 범한 제국신민에게도 이를 적용한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50~152쪽). 내란죄를 적용한 시위는 48인 사건, 안성사건, 의주사건, 수안사건 등이었다. 이는 주재소를 습격 방화하거나 관공서를 파괴, 공문서기 집기류를 훼손한 행위, 일본인 상점을 부수거나 호적원부와 기물을 파괴하는 등의 행위였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155~156쪽)

3.1운동으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은 총 7,816명 중에서 보안법 위반자가 5,601명으로 가장 많고 소요·출판법 276명, 제령제7호 위반자는 161명에 달하였다.

이교재의 경우 출판법과 제령제7호를 동시에 위반함으로써 2년 6개월의 형을 받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인원수는 각각 74명과 13명이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44~146쪽)

출판법 위반의 내용은 독립선언서, 곧 허가받지 않은 문서의 작성과 출판에 관여했는지, 독립선언서를 교부, 반포했는지에 따라 6개월의 형량차가 있었다. 또한 이교재는 피검자의 6.2%에 해당하는 제령제7호로 처벌을 받았다.

제령 위반으로 2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이는 모두 13명인데, 그에 포함된 것이다. 손병희 등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시위를 계획한 이른바 ‘48인 사건’에서 2년 6개월의 형을 받은 이는 최남선과 이갑성 등 24명이다.

이들 중 최남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보안법 제7조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장신,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 145~148쪽). 말하자면 48인도 보안법 제7조로 처벌을 받은데 비해 이교재와 그 일행은 3.1운동 이후에 만들어진 제령제7호 위반으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교재 일행이 진주에서 체포된 시기는 6월이었기 때문에 4월에 제정된 제령제7호를 적용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원인 행위가 제령 제정 이전이었기 때문에 제령제7호를 소급하여 적용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윤상태와 같은 국권회복단 멤버들도 대정 8년 7월 16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대정8년제령제7호위반피고’로 재판을 받았으므로(「윤상태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99권-삼일운동과 국권회복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p:/db.history.go.kr/id/hd_009_0040_0080_0140 참조) 이교재 일행만이 제령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무거운 죄를 우선한 것이다.

그러나 이 죄명과 형기는 진전면 소장의 범죄인명부와 다르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 명부에도 확정 일자는 대정 8년 9월 25일이지만, 대면 재판이라는 사실을 명기하였고, 거기에 죄명은 ‘출판법 위반’이었다. 아울러 형명과 형기는 징역 1년 3개월로 적혀 있다.(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 이교재항, 이 명부는 삼진독립운동사, 252쪽에도 게재되어 있다.) 

제령제7호 위반은 해당되지 않았고, 출판법으로만 징역형을 언도한 셈이다.

출판법 위반으로도 1년 3개월의 징역형을 받은 것도 비교적 무거운 것이지만, 대구복심법원의 형기가 2년 6개월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년 3개월의 형량이 줄어든 것이다.

대구복심법원에서 결정한 판결내용과 범죄인명부의 그것이 다른 것은 궁금한 부분이지만, 출판법만 적용한 것은 다른 지역의 시위대와 달리 관청을 공격하여 기물을 파손하고 문서를 불태웠다거나 하는 등의 보안법 위반 사항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병수 역시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의 형을 받았으므로(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 이병수항 : 삼진독립운동사, 267쪽) 복심법원의 집행원부에서 보이는 제령제7호 위반은 잘못 적용된 법령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당시 3.1운동 참가자에 대한 재판에서 법리상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 변호인측에서 제기한 ‘공소불수리’, 곧 검찰이 독립운동가들을 제령제7호위반으로 공소한 것은 잘못이며 따라서 그들은 무죄라는 주장이었다.(「獨立宣言事件의 控訴公判 急轉直下로 事實審問에, 問題의 核心인 「公訴不受理」은 自歸水泡」, 동아일보, 1920년 9월 21일자)

결국 법원은 검찰의 공소가 무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기왕의 치안법이나 출판법을 적용하여 판결을 내렸으므로 이교재에게도 이 원칙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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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6.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3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2)

 

이교재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조선조 말기와 대한제국시기에 진전면 일대에는 몇몇 서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마을 단위이자 문중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문중 중에서도 이 지역의 주요 문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권씨, 초계변씨, 선산김씨, 밀성박씨, 창녕조씨, 회산황씨 등이 각각의 문중에 서당을 소유하고 있었고, 안동권씨가 운영하던 경행재도 그 중의 하나였다. (진전면에는 일암리의 誠久祠 경내의 道山書堂(草溪卞氏 문중), 오서리 동대에 있는 景行齋(安東權氏 문중), 오서리 서대(회동이 맞음. 필자주)에 있는 龜川精舍(密城朴氏 문중), 오서리 탑동에 있는 西溪精舍(安東權氏 문중) 등이 있었으며, 20세기에도 근곡리의 慕遠堂(善山金氏 문중), 평암리 미천의 棲巖亭(昌寧曺氏 문중), 임곡리의 石愚堂(檜山黃氏 문중) 등이 있었다(진전면지, 141쪽)

다만 이 서당들은 경행재에서 보듯이 대부분 문중의 재실과 서당을 병용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1867년 회동에 있는 회계서원의 支院으로 건축한 경행재는 1930년대의 조사에서도 안동권씨의 서당으로 기록되어 있다.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寫眞編 沿河部落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五西里 東大洞 安東權氏部落」 참조)

현재 남아 있는 건물구조는 4칸 반에 들보 3량 건물로써 좌우에 방이 있고, 중앙은 대청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1910년에 신식의 경행학교가 문을 연 이후 교실로 개조하면서 본래의 모습은 조금 바뀌었다고 한다.

건물 앞쪽으로는 비교적 넓은 마당이 있어서 소규모의 운동을 하기에 적당한 크기이다. 조선조 말기에 세워진 경행재의 서당 교육 프로그램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는 이교재 선생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권오봉의 사촌 동생으로 1905년에 태어난 권오익은 자전 속에서 6살 무렵부터 사숙, 곧 경행재에 다니면서 한문을 익혔으며 8세 때인 1913년 무렵에 소위 신학문으로 전환하여 낮에는 소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밤에는 한학을 습득하는 과중한 부담을 안았다는 것이다. (權五翼, 素波閑墨, 소파 권오익박사 환력기념논문집간행회, 1965, 94~98쪽)

적어도 1910년까지는 전통적인 서당이었으나 그 이후 신식학문을 도입하면서 당분간 2중식의 교육제도를 운영한 듯이 보인다. 서당 형태였던 경행재를 신식학교로 바꾼 이는 동대리 출신의 권오봉(1879~1959)으로 알려졌다.

약 300석 지기의 중농 집안 출신인 권오봉은 홀로 서울까지 걸어 올라가 고향 친구인 鄭祥煥(정상환은 1921년에 백산무역에 640주의 주식을 투자하였다(「디지털창원문화대전」, 권영조 참조)의 집에서 지내면서 1898년 2월에 김규식, 신민회 간부 李重華, 林珍洙가 교사로 있던 私立興化學校를 2년간 이수한 뒤 순회 연설, 격문 반포 혹은 학교교사 등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백산의 동지들, 부산일보사 기획출판국, 1998, 58쪽. 여기서 1898년이라고 한 것은 흥화학교가 그 해에 신문에 학생 모집 공고를 내고 자격과 개학일자 등을 공고한 것에 기반하여 이렇게 추정한 것은 아닐까 한다(리진호, 「사립흥화학교와 양지교육」, 향토서울 55, 1999, 91쪽). 백산 안희제도 1906년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경했고, 처음 1년 정도 흥화학교에서 수학한 적이 있다. 권오봉과 안희제는 동문이었던 것이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어문논총 77-0호, 2018.12, 153쪽). 흥화학교의 교육과정과 변화 및 교사진에 대해서는 김형목, 「사립흥화학교(1898~1911)의 근대교육사상 위치」, 백산학보 50, 1998과 정영희, 「사립흥화학교에 관한 연구」, 실학사상연구 13, 1999도 참고된다.)

그러나 이 학교의 학제나 교사 재직 연도로 보아 1906년 무렵에 입학하여 졸업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가 재학 중 혹은 이수 직후라고 말해지는 1899년에 당시의 교사 중에는 이중화와 임진수가 보이지 않고 김규식의 이름도 없다. 김규식과 임진수가 교사로 있던 시기는 1906년 전후였다(리진호, 「사립흥화학교와 양지교육」, 93~94쪽)

흥화학교의 교과와 운영, 지향하는 이념을 경험한 권오봉은 이러한 시스템을 경행재에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통상적으로는 1910년 10월에 사립경행학교를 창설하였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몇 년간 미인가 상태로 운영되다가 1914년 6월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것으로 본다.

박정선은 1910년 10월에 설립은 했으나 미인가 상태로 운영되다가 1914년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닐까라고 보았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39~141쪽). 말하자면 비공인 사립학교로 출범하였지만, 몇 년 뒤에는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1925년에는 6년제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1925년의 6년제 전환에 대해서는 「순회탐방(488) - 도처에 양전옥답 산물이 풍부(9)」, 동아일보 1927년 11월 20일자)

창설 초기에는 동대리 출신의 權寧祚(1883~1955) (「권영조씨 별세, 완월동 자택」, 마산일보 1955년 3월 13일자)와 고성 출신인 李鎭畿의 재정적 지원이 뒤따랐다.

특히 권영조는 “천신만고 끝에 校地 확장 및 학교림 조성 등 재정적 기초를 거의 독자적으로 마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51쪽)

개교 이후 18년 동안 권오봉 선생이 교장을 맡았다. (이병철, 앞의 글, 58쪽 : 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권오봉선생비문」, 삼진독립운동사, 2001, 88~89쪽. 고성군 독지가 李鎭坰, 오덕군, 허종택, 이진기 등 4명은 자담으로 각처에 유학한 학생을 도왔으며, 또 이진기가 파송한 유학생 安太元에게는 매월 20원씩을 보내어 일본의 山口縣고등상업학교에 다니도록 하였다. 자택에는 배둔공립보통학교 학생 4명의 의식을 전부 담당하는 등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한 인물이었다(동아일보 1920년 7월 3일자 및 1921년 4월 26일자 참조).

그러나 공립학교인 진전공립보통학교가 1927년에 설립되면서 경행학교도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통설상으로는 진전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면서 폐교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1928년 8월 19일에도 이 학교의 운동장에서 개인정구대회를 개최한다는 신문기사가 있었으므로,(「개인정구대회 -창원에서 개최」, 동아일보 1928년 8월 5일자) 실질적인 폐교는 그 이후인 1929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46쪽)

이런 추정은 실제 상황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이 학교의 교사진으로서는 창립자인 권오봉과 권영조를 들 수 있다. (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51쪽)

또한 권오익은 경행학교 시절을 회고하면서 “폭군적 독재자 조(趙) 선생”, “권영길(權寧吉) 선생의 열혈교육”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5쪽) 적어도 4명의 교사가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교재도 1923년 이전에 일제 경찰 당국에서 ‘전교원’으로 기술하였으므로, 1910년대에는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다.

1914년 창설 당시 학생수는 120명이요, 校舍는 40평으로 신축하고 학교의 유지비는 지방 유지의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6년제로 승격한 1925년에 11회째 배출한 졸업생이 2백 명에 달하였고, 그 중에서 국내외의 각 중등, 전문대학 유학생 수가 10명이며, 1927년의 학생수는 남녀 90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순회탐방(488) -도처에 양전옥답 산물이 풍부(9), 동아일보 1927년 11월 20일자. 1921년에 양촌리의 양전학교와 연합운동회를 개최하였는데, 경행학교 학생 약 150명과 양전학교 학생 약 50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양교 연합대운동」, 동아일보, 1921년 10월 23일자). 1921년 당시에도 여전히 큰 규모의 학교였던 것이다.) 성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의 유지비도 앞서 말한 독지가 뿐만 아니라 문중에서 나오는 경비까지 포함되면서 校舍를 유치하고 학교를 운영하였으니 궁핍한 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렇다면 신식의 경행학교에서 운영되는 교과과정과 그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권오익의 회고에 따르면, 신식 사립소학교에서는 배일사상의 고취와 항전의식을 앙양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순국열사, 의사에 대한 선동적 강화와 당시로서는 금서였던 유년필독, 월남망국사 등의 애국서책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상급반에서는 양계초의 조선망국사략을 부교재격으로 활용하였다.(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4~95쪽)

이러한 학습용 교과와 달리 돌격연습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나무막대기를 들고 행한 이 연습에서 “무쇠 골격 돌 근육 소년남아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와 같은 감동가를 불렀으며, 결국 이런 정신이 골수에 사무쳐 인생항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권오익, 「나의 학창시절」, 소파한묵, 94~95쪽)

1908년에 설립된 마산의 창신학교에서도 유사한 兵式체조를 실시하였다.(조호연편, 마산시체육사, 마산시, 2004, 29~31쪽) 항일정신의 함양에 필요한 교과와 그에 따르는 신체 훈련은 당시의 마산이나 창원 지역의 학교에서 많이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에서 촬영한 경행재 전경에는 운동장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 下編, 「寫眞編 書堂 慶尙南道 昌原郡 鎭田面 五西里 東大洞 安東東權氏書堂」 참조) 이런 곳이 체조나 돌격연습을 하는데 활용되었으리라고 본다.

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구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운동 부분에 많은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 이후 마산이나 진전 지역의 사립학교에서 독립운동을 고취하기 위해 문무를 겸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사립학교는 또한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거점이기도 하였다. 윤상태가 주도한 달성군의 덕산학교나 안희제의 龜明학교(구포), 宜新학교(의령), 창남학교(의령) 등이 이에 속한다.(이동언, 「안희제의 교육구국운동」, 국학연구 4, 2000, 40~62쪽)

이는 1907년 「교육윤음」이 내려진 이후 각 서원이 사립학교를 부설하면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는데, 경남에서는 1908년에 안희제, 이원식, 서상일 등 대동청년단과 국권회복단의 중심 인물들이 교남교육회를 창립하였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민족문화논총 9, 1988, 164~165쪽)

이런 맥락에서 보면 권오익을 중심으로 시작된 경행학교의 신식 교육은 당시 지역사회에서 진행된 국권회복 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경행학교에서는 독립운동가나 교육자, 프로문학가와 영화 감독 등이 다수 배출되었다.(이는 함안 칠원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독립만세시위가 교회와 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과 대비된다(이정은, 「경남 함안군 3.1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7, 2006.12, 105~106쪽)

동경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교수와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권오익(1905~1998), 영화 <암로>의 감독으로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월북한 강호(1908~1984) (이성철, 경남지역 영화사 - 마산의 강호 감독과 창원의 리버티늬우스, 호밀밭, 2015, 31~76쪽), 권오봉의 아들이자 카프시인으로 활동한 권환(1903~ 1954), 동래고등여학교 초대교장 권영운, 고현시장 의거를 조직한 권오규(1895~1961)와 독립운동가 이교재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58쪽)

경행재와 경행학교에 대한 위와 같은 검토에도 불구하고 이교재와 관련된 자료는 많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의 서술에 어려움이 있다.

1887년생인 이교재는 어린 시절에 서당식의 경행재에서 유교경전 중심의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권오익 선생이 6세 때 서당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으므로 이교재 선생도 대략 그 나이 때에 경행재에 들어갔으리라고 본다.

1893년 이후의 시기에 해당된다. 언제 그가 이 서당 교육을 마무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권오봉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임은 확실해 보인.(부산일보 특별취재팀, 「민족혼 심은 산 교육자, 성재 권오봉」, 59쪽)

또한 그가 24살이 되던 1910년에도 사립경행학교에 다녔는지는 역시 알기 어렵다.

변지섭에 따르면 이교재는 대한제국의 멸망 직후인 24세의 나이에 국권회복에 진력하고자 동지를 모집하였고, 1913년부터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활동하였다고 기술하였기 때문이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6쪽)

그렇다면 일제의 강제합병 직후에는 경행학교에 재학 중이었다기 보다는 이미 졸업하여 사회활동을 하는 신분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이교재는 일제의 강제합병 이후에 이 학교의 교사로서 적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식민지 경찰의 사건일지식 기록(1923년 9월 21일)에 따르면 “前敎員 이교재가 임시정부의 밀명에 따라 국내로 잠입,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다”라는 구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慶尙南道 警察部, 慶南高等警察府高等警察關係摘錄 1919-1935, 1936, 39쪽)

‘전교원’이라고 기술한 것은 적어도 경행재가 소학교로 전환한 다음에 그가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이것이 1923년 이전 어느 시점에 마무리되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그가 경행학교에 재직하였을 시기는 1910년에서 1923년 직전까지일 터인데, 3.1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수감되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1919년 이전까지였을 것이다. 곧 1910년 사립경행학교 설립 이후부터 1919년 이전까지였을 것으로 보는 편이 무난하다.

그는 이러한 교육경력을 바탕으로 1920년 12월에 조직된 진전교육회에도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의 경력에서 아직까지 주목받지 못한 진전교육회는 “지난해 1월에 창원군 진전면 유지 제씨의 발기로 교육진흥, 지식교환, 체육발달, 풍속 개정 등을 목적으로 면내에 거주하는 자로서 만 20세 이상의 남자에 한하여 진전교육회를 조직하였다”고 보도되었다.

울러 임원으로는 “會長 權五鳳, 副會長 卞舜燮, 總務 權五成, 學術部長 李鍾協, 矯風部將 權寧寔, 運動部長 權寧祚, 部員 李昌淳, 金晟洙, 姜德永, 卞相憲, 李基榮, 卞相述, 幹事 李敎載, 金聖漢, 卞又範, 會計員 權榮鎭 金敦洙, 書記 李玘宰, 評護員 金태鉉 외 12인”(「진전교육회 출범」, 동아일보, 1921년 5월 6일자)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목록에 진전교육회의 간사로서 이교재가 김성한, 변우범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허나 이 기록에는 검토해야 할 사항이 있다. 1920년 12월에는 이교재가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죄목으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진전면사무소에 소장되어 있는 범죄인 명부 ‘이교재’ 항의 「刑名 刑期」란에 ‘징역 1년 3월’로 기재되어 있음을 참작하면(慶尙南道 警察部, 慶南高等警察府高等警察關係摘錄 1919-1935, 1936 3冊中 제1호, 18번, 이 자료를 찾아준 고성군 기록연구사 김상민 선생에게 감사한다.)육회 조직 당시에는 출옥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질적으로 이 조직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 교육회의 멤버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을 살펴보면 이교재 선생의 인맥과 사회인식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권오봉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동대 마을 안동권씨의 일원으로써 카프문학가로 이름이 높은 권환의 부친이었고, 인맥도 상당히 넓었던 것 같다.

그는 의령의 애국지사인 남저 이우식과 사돈관계였는데, 권오봉의 둘째 아들이 남저의 사위였다. 이우식은 대종교도였는데, 권오봉도 대종교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권환의 휘문고보 학생학적부의 ‘가정 혹 본인신앙’에 ‘대종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이장렬, 권환 문학 연구, 경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10쪽)

당시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상당수가 대종교를 신앙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교재도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동대 마을의 ‘진사골목’이라고 부르는 동네 길에서 이교재와 이웃하여 살았던 권오봉은 또한 1919년 4월 3일에 거행된 삼진독립의거 때 진전면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직원록 1920년 지방관서>경상남도>부군도>창원군) 이때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성금을 갹출하는데 앞장섰다.

권오봉은 1920년 무렵에 진전에 설립된 오정 야학의 학장으로, 또 1923년에 소작농 수천명을 망라해 결성된 삼진노동공제회의 간부로, 오서부업장려회 회장이자 삼진농민조합에서는 제3부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는 등 지역사회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박정선, 「권환의 초기문학과 진전의 문화환경」, 149~150쪽)

교육회의 운동부장 권영조는 1919년 3월 28일에 있었던 진동면 고현의거에서 이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마산감옥에서 1년간 수형생활을 한 적이 있고, 경행학교의 교사로도 재직하였다. 교육회의 부원인 변상헌과 변상술은 4.3의거를 주도한 죄명으로 1년간 복역하였으며, 일암리 출신의 변우범(1898-1974) 역시 4.3의거 때의 주동자로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변우범 참조) 곧 1919년의 삼진만세시위 당시 주도했던 인물들이 교육회의 핵심 멤버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물 구성의 특징은 삼진지역의 명족이라 할 수 있는 안동권씨, 초계변씨, 성주이씨, 선산김씨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삼진의거의 특징 중 하나가 각지에 세거하고 있던 이들 명족이 연대하였다는 사실인,(이종흡 외, 「4.3 삼진의거 연구」, 가라문화 21·22, 2009, 106~107쪽. 이러한 양상은 합천에서도 유사하였다. 예컨대 3월 23일의 삼가 시위는 군내의 가회, 삼가, 백산면 등이 중심이었고, 지역 내의 지주와 유지, 자산가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이정은, 「경남 합천의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11, 247~248쪽) 이로써 우리는 교육회 역시 명족과 애국심이 결합되어 조직된 지역사회의 교육운동체이며 여기에 이교재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교재는 1919년 전후에 지역사회에서 교육과 애국운동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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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3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2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1)

 

이교재(사진)는 1887년(고종 24년) 7월 9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가 부농의 아들이었다는 기술이 있지만(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삼진독립운동사, 2001, 234쪽) 어느 정도의 부농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오서리 578번지의 대지 규모를 보면 적어도 중농 이상의 농가였다고 생각된다.

현재 세 필지로 구획된 이곳에는 1931년 당시 목조 초가 본채 건물 3평과 부속의 목조 초가 3평, 그리고 물건적치용 건물 각각 1평 5홉, 1평 2홉 등 모두 4채가 있었다.(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발행, 폐쇄등기부 증명서 고유번호 1901-1996-359486, 2017년 10월 21일 발행) 평수가 작은 것은 실제 상황이었다기보다 축소해서 신고하는 당시의 관행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오서리 중에서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동대 마을이었다.

오서리는 조선시대 진해현 서면에 있던 다섯 개 마을, 곧 동대, 서대, 회동, 탑동, 월안이라는 마을을 행정적으로 통합하여 만든 동리이다.(진전면과 오서리라는 행정구역명의 탄생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이후의 일이다. 창원군 진서면과 진주군의 양전면이 통합되어 창원군 진전면으로, 서면에 있는 다섯 개 마을을 통합하여 오서리가 되었다고 한다-디지털창원문화대전 오서리 참조. 그러나 1872년에 편찬된 진해현지에는 서면 10개리 중에 월안리, 탑동리, 회동리, 대곡리가 각각 병기되어 있으며, 1992년에 펴낸 창원 웅천 진해부읍지의 「진해현지편에는 진전면 13개리 중에 오서리가 있으나 이에는 竹谷, 虎山, 月安, 塔洞, 檜洞, 牛色 등의 마을이 포함되어 있다-금란계편집위원회, 창원 웅천 진해부읍지, 4~8쪽. 그러므로 죽곡-혹은 대곡-이 언제 동대와 서대로 나누어졌는지, 또 우색과 호산이 언제, 왜 빠져나갔고, 오서리라는 행정명이 탄생하였는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다. 우색은 현재 울빛재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자가 들어 있는 이유는 이곳의 한글 지명이 대실[竹谷]이었기 때문이다. 2001년 오서리의 전체 인구는 345세대에 957명이고, 남녀는 각각 486명과 471명이었다.(진전면지편찬위원회, 진전면지, 2001, 31쪽. 이 수치는 약간 줄기는 했지만 현재에도 비슷하다 - 동대리 이장 권오익과의 인터뷰, 2018.4.12. 동대마을회관.  호수/인구, 남/녀 = 동대 176/530, 272/258   서대 76/204, 105/99   회동 40/94, 48/46   탑동 22/57, 29/28   월안 31/72, 32/40  총계 345/957, 486/471)

이 마을은 대개 동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대에는 안동권씨가, 서대마을에는 밀양박씨가 세거지로 삼았으며, 회동과 탑동, 그리고 월안에도 권씨와 박씨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곧 오서리의 동성집단은 권씨와 박씨가 다수이며, 나머지는 다른 성씨가 뒤섞여 있는 양성 중심의 농촌이라 할만하다.

성주이씨인 이교재가 동대리에서 출생하여 왜 이곳에서 활동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성주이씨의 세거지는 오서리에서 북쪽의 진전천과 뜰을 건너 자리하고 있는 곡안리이다.

그럼에도 이교재의 선대들은 오서리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이조년을 중시조로 삼고 있는 성주이씨문열공파보에 따르면, (星州李氏文烈公派譜 권지2, (대구:고전출판사, 1991),  825쪽. 물론 이 족보는 1990년대에 편찬된 것이라서 이교재의 거주지를 곡안으로 기록하였다.) 그의 증조부인 應斗(1753~?. 9. 15)의 묘가 竹谷 兩岩間인 곧 오서리이며, 부친인 鳳華(1852~ ?.11. 5)의 묘지도 진전면 오서리 앞산 선영 아래로 기록되어 있다.

조부인 亨愚(1827~1904. 6.17)의 무덤을 고성에 쓴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여하튼 부친이나 이교재가 오서리에서 살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오랫동안 이곳을 세거지로 삼아 생활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동족 마을이 우세한 이 지역에서 이교재의 출생과 생업, 그리고 사회 활동은 조금 독특한 부분이며, 특히 동대 마을에서도 안동권씨들이 진사를 많이 배출하였다고 하여 ‘진사골목’이라 일컬어지는 곳에 뿌리를 내렸던 사실도 앞으로 궁구해 볼 과제이다.

그가 홍순영의 딸인 洪泰出(이 이름은 김형윤의 기행문에 출현한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과 언제 결혼하였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홍태출은 정해(1887) 8월 14일에 출생하여 계축(1973) 9월 19일에 사망한 것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교재와 동갑이다.

부부 사이에 아들은 없고 1928년 11월 6일 생의 泰淳이란 이름의 딸이 한 명 있다. 나이 40을 넘어 첫 딸을 본 것이다.

이교재가 통영군자금 사건으로 4년형을 받고 진주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출옥한 것이 1928년 1월 28일의 일이니, 그 해 말쯤에 딸을 얻은 셈이다. 딸의 출생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그들의 결혼 연도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또 사망 이후, 언제인지 역시 알 수 없으나 李正淳을 양자로 두었고, 딸인 태순은 韓禎鶴과 결혼하였다. (태순의 자녀인 한철수는 창원에 소재한 고려철강의 회장이자 현재 창원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1930년대의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동대리는 특색 있는 동족 중심의 연하 마을로 분류되어 있다. 멀지 않은 동쪽에 창포 바다가 있지만, 연하 촌락으로 구분한 이유는 진전면 최북단의 여양리에서 발원한 진전천이 이 동네의 외곽지대를 흘러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쪽으로는 산을 끼고 있으면서 진전면 시락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평탄한 지형의 남쪽은 상당 부분 광활한 평야가 이어지고 있다.

1930년대 초에 동대 마을에는 안동권씨가 102호, 417명, 동성 이외의 호수 및 인구수는 39호와 122인으로서, 권씨는 총인구의 약 77%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이들은 19세기에 진해현의 행정치소가 있던 동면에는 한 명도 살지 않았다. 동면에는 김해김씨와 완산이씨가 대성이었다(武田幸男, 學習院大學藏 朝鮮戶籍大帳の基礎的硏究 –19世紀, 慶尙南道鎭海縣の戶籍大帳をじて-, 學習院大學東洋文化硏究所, 1983, 56쪽).

마을 내의 주된 직업은 농업이었다. 같은 시기의 토지를 기준으로 한 소유형태는 지주 6호, 자작 12호, 자작 겸 소작 28호, 소작인 80호, 기타 직업 15호였다. 기타는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였다.

세족인 안동권씨는 대략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대에 경북의 안동에서 이곳으로 와서 뿌리를 내렸고, 숙종조(1674~1720 재위)에는 이조참판 권용견을 배출하면서 100여 년만에 타성을 압도할 만큼 번영하였다고 한다.(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1933, 862쪽)

이 점에서 오서리, 특히 동대 마을은 권씨 중심의 비옥한 농업지대였고, 그를 바탕으로 지주 소작제도 일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주최씨들이 집거하고 있는 고성군 하일면 학동에서도 문중 자산을 비교적 빈곤한 동족에게 유리하게 소작토록 하고, 그 수익은 문중 자산 이용법 및 동족 구제 시설, 조상제사 비용으로 충당하고 일부는 적립하였다 -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881쪽).

1930년대의 마을 내 자치 상황을 보면 다소 특이한 점들이 보인다.

당시까지도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히면 門罰이라 칭하는 공동제제가 작동하였으며, 융화성이 많고 단결 역강하는 예절을 중히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878~879쪽)

또한 문중 재산이 있어서 자산의 경우 동족에게 대부를 해주는 방식으로 이식을 도모하였고,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사설학술강습회의 경비, 조상제사 비용, 동족 구제에 필요한 경비 등에 사용하였다.

1923년에 이르러 일제 당국은 오서리에 부업장려회를 조직하여 가마니짜기와 양잠을 장려하면서 산업진흥을 꾀하였는데, 이를 통해 마을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여 갔을 것이라 짐작된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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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2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 1

앞서 9회에 걸쳐 1954년 김형윤 선생이 마산일보에 기고한 '이교재 선생 생가 기행문' 「삼진기행」을 포스팅했다.

오늘부터는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11회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목 차

Ⅰ. 머리말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군자금 모금사건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 창원군 진전면이라는 행정구역명칭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이후의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명은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이다. 이 글에서는 이교재가 주로 활동하였던 1910년대 이후의 지명인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를 사용한다.) 출신인 이교재는 창원시에서 운영하는 애국지사 사당에서 이윤재, 주기철과 함께 독립장을 받은 3인 중 한 사람으로, 봉안된 위패에서도 최상위에 올라 있는 항일독립지사이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부여한 군자금 모집 임무나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에도 헌신적으로 일을 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의 감옥 생활을 겪었고 결국 신병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변지섭이 경남독립운동소사(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삼협인쇄, 1966, 176~178쪽)에서 그를 소개한 이후 이를 기초로 쓴 몇 편의 짧은 글과 신문기사들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료조차도 단편적이거나 종종 오류(변지섭의 경남독립운동소사는 많은 이들이 활용을 하지만, 더러 구체적인 사실에서 착오를 보인다고 비판을 받았다. 예컨대 합천군 초계면 3.1운동 서술에서 4월 5,6일경 창원의 변상태가 초계를 심방하면서 4월 20일에 시위가 일어났다고 하지만, 초계 시위는 3월 21일에 일어난 까닭에 전후 관계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다. 가회면의 주도자도 정확하지 않다 / 이정은, 「경남 합천의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 234~235·238쪽 참조)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이교재의 독립운동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도 그의 공적을 1) 3.1운동 때 경남북 일대에 선전문배포, 피체되어 3년 복역(진주형무소),  2)상해로 망명, 임정의 밀령으로 입국 피체되어 5년간 복역(대구형무소), 3) 다시 상해로 망명 도중 신의주에서 피체 2년간 복역(서대문형무소), 4)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재입국 사명 수행 중 피체, 1933년 2월 부산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 등으로 열거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검색어 ‘이교재’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List.do?goTocode=200014)

이 공적조서 또한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점들을 고려하여 우선 당대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그의 독립운동을 몇 단계로 나누어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그의 성장터였던 진전의 지리적· 인문적 환경과 성장과정, 그리고 3.1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체포되어 수감되는 상황을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로는 상해 망명 이후 1923년 9월에 있었던 통영군자금 모금사건의 실체와 관련 인물들을 통해 그의 활동 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1931년 말 이후에 국내에 입국할 때 휴대하고 온 9개의 상해 임정 문건, 곧 ‘이교재임정문서’를 통해 그의 임무가 무엇이었고 이 문서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몇 단계의 활동들을 검토하면 그의 독립운동 전반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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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16.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9) - 일본 청주에 밀려난 조선 탁주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4  일본 청주에 밀려난 조선 탁주

 

역사 연구에도 일종의 흐름이 있다. 술과 같은 음식문화도 그런 흐름을 타는 품목 중의 하나이다.

사실 유교주의적 학문 세계 속에서 먹는 것이라든가 입는 것, 또는 인간의 본능과 관련된 분야는 늘 소외되어 왔다.

송나라 때의 주자학자들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인간에게 있어서 굶어죽는 일은 아주 사소한 것인 반면, 의리를 잃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역사에서는 국가나 민족, 이념, 엘리트 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 생활 그 자체 역시 중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인간의 본능이 최근에 이르러 인문학자들에게 중시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굶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음식문화는 국가라는 단위보다는 대체로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그 특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지역사회를 이해하는데 좋은 재료가 된다.

마산 지역 사회는 해산물과 농산물이 다양하게 생산되고 있고, 대륙문화와 해양문화의 접점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에 매우 독특한 음식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이를 통해 이 지역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종래와는 다른 역사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의례 중에 제천의식이 있다. 여기에서는 주야로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곧 음주가 하늘에 대한 제사 의식에서 그만큼 중요하다고 하였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곧 술은 인간과 신을 연결해 주는 매개물로 인식하였으며, 이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도 각종 의례에 빠짐없이 술이 등장하였다.

 

-술에 대한 기억들-

마산 지역의 역사에서 술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이곳을 찾은 관료나 시인들의 시를 보면 술과 관련된 작품이 적지 않다. 고려의 유명한 시인 정지상은 “푸른 물결 아득하고 돌이 우뚝한데... 백년 풍류에 싯귀가 새롭고 만리강산에 한잔 술을 드네”라고 하였다.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이는 “기이한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한데 모두들 유선(儒仙)이 읊조리던 축대라 말한다..... 주객은 만날 때에 여러 번이나 잔을 든다”라고 읊었다.

두 사람 모두 바다와 산, 그리고 바위가 어우러진 마산의 풍광, 특히 유선으로 불린 최치원이 노닐었다는 월영대 주변에서 술 마시는 장면을 시로 묘사하였다.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남긴 시에도 월영대와 술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숙종 때에 행정 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김이건이라는 사람은 “조창에서 곡식을 싣고 출발하기 전에 위로의 마음으로 음식을 내려주고 포구에서는 기생들이 춤을 추어”라는 조금 색다른 시를 남겼다.

조운선을 타고 바닷길을 통해 한양까지 가는 일은 앞길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험난하였다.

그러므로 저와 같이 관청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기생들로 하여금 춤까지 추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술이 항해의 안전을 축원하는 용도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요정 망월관 (1908년)>

 

마산 지역 사회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에 술과 관련된 기록은 저 정도이지만, 1899년의 개항 이후에는 각종 기록, 특히 일본인들인 남긴 자료 속에서 술과 관련된 여러 요소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마산 지역에 진출해서 주목한 것은 좋은 물과 기후, 그리고 인근의 풍부한 물산이었다.

곧 양주업을 하는데 최상의 곳이라고 판단하였다. 예를 들어 물의 경우 마산의 물은 감로수와 같다고 평가하였다.

무학산 뒤편에 자리한 감천리의 물로 막걸리를 빗으면 청량 사이다와 같다던가, 세찬 완월 폭포의 물을 기관차에 넣으면 오르막길도 힘차게 올라갈 정도라는 말에서, 우리는 지역사회에서 물에 대한 믿음이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산 시내의 샘물 중에서도 광대바위 샘물(일명몽고정)을 비롯한 몇 곳의 샘은 1911년의 총독부 검사 결과 가장 우수한 샘물로 인정을 받았다.

물론 이 샘들은 1919-20년에 마산을 비롯한 전국을 휩쓴 콜레라 발생 이후 공동수도가 생기는 바람에 쇠퇴하였지만, 아직까지도‘물 좋은 마산’이라는 별명은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일제 강점 이후 일본식 술인 청주의 재료는 쌀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어야 했다.

마산 인근의 고성, 김해, 창원과 같은 넓은 들에서 필요한 쌀을 공급할 수 있었다. 더구나 겨울에 춥지 않고 여름에 덥지 않는기후도 술을 빗기에 좋았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일본인만이 알았던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의 남부 지방은 조선조 말기에도 술도가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9년의 조사 결과를 보면 전통식 주조장은 전국에 모두 155,000개였는데, 이 중 경상남도에 22,853개, 경상북도에 26,298개가 있었으며, 그 다음으로 경기도와 전남 및 충남에 각각 1만여 개, 그리고 북부지방인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대략 4,000개-7천 개 정도가 있었다.

곧 남부가 많고 그 다음이 중부, 그리고 북부의 순이었다.

조선시대의 술 제조 양도 남부 지방이 우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원인도 결국 물산과물, 그리고 기후 탓이라고 생각된다.

 <마산의 일본인 양조장>

 

-술 제조는 일제의 식민지 경제 전략-

마산 지역이 술의 생산지로 양호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곧바로 술의 주생산지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의 재정수입 확보라는 식민지 경제전략이 마산을 술의 도시로 성장시켰다.

사실 조선시대의 술은 대부분 주막과 같이 음식점과 숙박시설을 겸하던 곳에서 생산되거나 자가 소비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확보라는 측면보다 그야말로 음식의 일부였던 셈이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에 주세법을 제정하여 자가 제조의 술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술을 만드는 원료인 누룩에 대해서도 해당되었다. 누룩업을 통제하여야만이 주조업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누룩제조조합을 만들었고, 이에 따라 누룩도 공장에서 대량으로 제조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말기에 누룩은 대개 농가의 부업으로 생산하였고, 일부는 경남지역에서와 같이 사원의 승려가 부업으로 이를 제조 판매하는 형국이었으나 이런 방식은 점차 소멸되었다.

새로운 일본식 주조 기술이 도입되었고, 이를 지도하기 위해 각 지방마다 기술관이 파견되었다. 또 주류협회를 조직한 다음, 이곳을 재정담당 관료가 장악하였다.

그 결과 1934년에 이르면 주세는 국가 세입3할을 차지할 정도로 그 비율이 높아졌다.

또한 개항 이후 마산지역에 형성된 일본인 사회도 마산의 술 산업을 발전시킨 요인이 되었다.

일본인이 마산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러일 전쟁 이후였는데, 이때 이미 술 공장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1911년에 이르면 일본인이 세운 술공장이 14개나 되었다. 그와 더불어 술의 주종목도 서서히 바뀌어 갔다.

일본인들이 개발하여 발전시킨 청주가 한국 사회에 도입되었다. 여기서 청주란 우리가 흔히 회집에 갔을 때 따근하게 데워달라고 주문하는 정종을 가리킨다.

이후 마산 지역에서 주로 청주를 생산하는 술 공장은 주인이 변하고 공장의 증감이 있기는 하지만 위의 숫자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들 청주업자들은 동업조합을 만들어 시내의 신사(神社)에 자신들의 주호신(酒護神)을 모시고 정기적으로 모여 제사를 지내곤 하였다.

이들은 청주 질의 향상에도 힘을 쏟은결과 1920년대 초에는 일본에서 더 이상 청주수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고, 1930년대 중엽에 이르면 마산은 전국에서 최다의 술 생산지로 부상하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지역 내 시장이 커진 탓도 있지만, 만주라는 큰 시장을 목표로 삼았던 덕도 있었다.

이것이 마산에서 생산된 청주가 만주까지 ‘진출’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식 술 생산체제가 뿌리를 내리는 것과 병행하여 한국 술의 전통적 자가 생산 체제도 공장 생산 체제로 바뀌었다.

마산에서 탁주 회사가 설립된 것은 대략 1920년대 후반인 듯한데, 이후 주식회사나 합자회사 형태의 탁주회사가 주로 창동 일대의 마산포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청주 공장이 대개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신마산 지역이나 중앙동, 장군동 등 중앙 마산 일대를 중심으로 세워진 것과 대비된다.

탁주 회사 자체가 대규모 생산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므로 당연히 생산량도 증가하였으니, 1928년에 1,500(1석은 약 큰 말로 10斗)이던 것이 1938년에는 약 5만석으로 증가하였다.

술 제조업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산업으로 인식된 것이다. 마산 술 산업의 성장은 결국 일제의 식민지 경제에서 마산 지역이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의미한다.

 

-청주와 탁주-

일제의 경제전략으로 술 산업이 발전하면서 당시의 조선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아마도 192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일제의 술 정책이 농촌 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면 191943일에 있었던 삼진 만세 시위 때, 연도의 마을에서는 각자 빚은 술을 시위대에게 제공하였다고 한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집에서 만든 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국가의 통제 정책에 따라 집마다 전해오던 특별한 술이나 지방색이 강한 술은 사라져 갔다.

이 때문에 당시의 농민들은 오늘날 술맛은 변해있고 즐거움도 그만큼 줄어 들었다고 한탄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을 쓴 뒤 마산에 내려와 살던 장지연도 하루종일 술을 마시면서 세상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성동의 석교(石橋)양조장이라는 청주 공장에서 만든 대전 정종(大典正宗)이라는 술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우국지사라고해도 일본 술에 익숙해있었던 셈이다.

사실 일제 시대를 기억하는 한국인 중에는 마산의 술이 이름났던 이유를 꽃 속에서, 그리고 마산만을 바라보면서 술을 마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특히 조계지를 가로지르는 대곡천(大谷川) 가에는 유명한 고급 술집과 함께 벚꽃이 화려하였기 때문에 꽃필 무렵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들을 위해 만든『관광의 마산』이란 팜플렛 표지에는 산과 바다를 배경으로 일본풍의 술통과 벚꽃이 흐드러진 곳으로 마산을 그리고 있다. 마치 이상향과 같은 이미지이다.

<마산부에서 관광안내서로 간행한『觀光の馬山』의 표지이다. ‘술과 꽃의 도시’마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자료이다.>

 

지금도 그 당시에 명성을 떨쳤던 고급 술집이 마치 폐허처럼 남아 있지만, 이곳은 일본에서 들여온 기생과 음악, 멋진 음식과 술로 인해 마산의 명사들이 모이던 사교장 역할을 하였다.

마산포 일대에도 전통적인 조선식 술집과 더불어 중국식 술집, 그리고 일본식 술집 등이 잇따라 생기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여러 술이 민족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공존하는 새로운 술 문화가 싹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식 청주는 지역의 ‘상류인사’에게 고급스런 술집에서 마실 수 있는 술로 선택되었던 것 같다.

국가의 기술감독, 기술자 초빙 및연구실 설치, 품평회를 통한 질의 향상, 그리고 고도의 영업전략 등 모든 수단이 동원된 결과였다.

이에 비해 영업전략을 갖지 못한 탁주는 그저 그런 술집에서 ‘보통의 한국인’들이 먹는 술로 인식되었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위생이나 뒷맛 등의 이유를 들어 탁주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산 거주 한국인들도 대체로 고급스런 청주와 그렇지 못한 탁주라는 술의 위계를 인정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은 물론 해방 뒤에도 변형된 채 이어졌지만 술의 도시 마산이라는 명성은 점차 쇠퇴하였다.

일본인이 물러가면서 그들이 즐겨 마시던 청주의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일본인에 의해 이식된 주조 기술이 한국인에게 제대로 전수되지 않은 탓도 있었다.

해방 이후의 식량난도 주조업에 타격을주었다. 술을 만드는데 쌀을 사용하기가 점점 힘들어 졌던 것이다.

근대기 마산의 술 산업은 본래 식민지 당국의 재정정책과 통제, 일본인 이주자들의 욕망, 지역의 자연과 물적 조건, 그리고 이에 부응한 지역사회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어우러지면서 마산 사회의 한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유장근 / 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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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25. 00:00

한국100명산. 3. 최치원의 수양지 무학산

예상치 않았던 무학산 100명산 탐방 : 둘레길만 걷던 초보등산꾼들이라 원거리 원정일정을 잡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예정대로라면 포항 내연산은 8월말에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이런 저런 핑계로 8월의 100명산 원정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빼먹기를 쉽게하면 앞으로 애로사항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심 기회가 닿으면 무학산이라도 오를 기회가 있다면 그 달의 건수는 채워야지 하는 생각에 원정기념 현수막을 넣어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지지난주에 회원 모두가 참석하는 흔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잘되었다 싶어서 "오늘은 모처럼 모두 참석했는데 정상한번 가입시더"라고 의견을 내어서 100산중의 하나인 무학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무학산 지명의 유래

무학산은 마산 중심가를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본래 이름은 [경상도지리지]에 두척산(斗尺山)이라는 이름으도 등장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척산이 회원현에 있은데 봉우리에 위에 고운대가 있으며, 월영대에서 북쪽 5리에 있다고 하였다. 아시다시피 월영대는 신라시대 문창후(文昌候) 최치원이 대(臺)를 쌓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며. 두척산의 고운대는 최치원선생이 수양지로 보고 있습니다.

'고운대'는 조선시대의 지도나 전통 시대의 문인들이 남긴 시에 종종 출현한 지명이다물론 이 명승처를 최치원이 직접 고운대라고 지칭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조선 초기 문인들이 전국에 산재한 고운대를 이야기하였고, 무학산의 고운대에 관해서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그 지명의 연원 또한 월영대와 마찬가지로 유구하다 할 것이다, [무학산의 '학봉', 이제 '고운대'로 불러야 , 유장근교수]

즉, 무학산에서 현재 학봉이라 불리우는 고운대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그러나 두척산이 언제부터 무학산으로 불러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제시대부터로 산의 형세가 학이 춤추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1.팔각정에서 근심바위까지(9시 45 - 10시 30분) : 출발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습도가 높은게 마치 비가 못와서 짜증을 부리는 듯한 그런 날씨였습니다.  항상 오던 무학산이라 별 감동도 없이 오직 정상에서 사진하나 박겠다는 마음으로 올랐습니다. 계곡을 사이로 요리조리 걸어 오르다가, 약간 급한 경사를 앞두고 하천근처에 잠시 쉬기로 하였습니다. 나무데크 위에 마련된 의자는 한숨돌리기 좋은 휴게쉼터인 것 같았습니다. 습기에 몸이 땀과 더불어 촉촉해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때 누가 이야기 했습니다. "정상까지 45분만에 올라갈 수 있다 하더라"라는 말도 않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산을 잘타는 누구누구 얘기고 우리는 1시간 반은 걸려야 된다"는 오고가는 얘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죽자고 1시간 이상은 올라야 정상에 도착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코스가 정상을 향한 가장 근거리 코스인 관계로 경사도 가장 심한 코스라 난코스임에는 틀림이 없는 ㄱ것 같았습니다.  두번째 쉰곳은 팔각정자가 있는 근심바위였습니다. 도심을 내려보니 안개비와 운무에 의해 말그대로 자욱한 안개속에였습니다.은 뿌연 상태였습니다. 숨고르기와 물 한모금을 마신후 다시 출발했습니다.(걱정바위 정자) : 시내를 잘 볼 수 있는 단골쉼터(시내전경) : 운무에 쌓인 마산시내

2.근심바위에서 정상까지(10시 40분 - 11시 20분) : 몸이 어느정도 풀려서인지 걷기는 한결 수월해 졌습니다. 10여분이 지나자 '1년계단'에 도착했습니다. 그냥 걷기 지루할까봐 1월 1일부터 12월 말일까지 적혀진 나무계단입니다. 계단을 오르기 한결 가뿐한 것 같았읍니다. 암튼 서마지기에 도착해서 다시 물 한모금하고 정상을 향하였다. 날씨가 꾸무리 한것이 비가 못와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한 읍습한 기후였습니다. 그럼에도 서마지기에서 무학산 정상으로 향하는 1년계단을 다시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꺼이! 꺼이! 정상에 다다르자, 이게 왠일입니까! 갑자기 시껀먼 하늘에서 짜증을 부리던 구름끼리 한바탕 나타전이 벌어진 것 같았습니다. 쏴아 하고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도 정상에서 기념촬영할려고 하던 차에 순식간에 쏟아 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도 기념촬영은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비옷도 대충 걸친채 사진부터 한방 박았습니다. 쉴틈도 없이 하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100명산 세번째 산행은 우중에 짧게 마무리 하였습니다.

(서마지기에서 시내전경) 완전히 구름에 체포되어 있음(서마지기에서 봉화산방향) : 오히려 산중의 시야가 더 좋음(서마지기에서 정상방향) ; 이렇게 인적인 없었던 적은 없었다.(정상에서 비상훈련): 소나기공습에 우산과 비옷을 급히'')(정상기념촬영) : 비는 왔지만 표정은 엄청 좋읍니다.(다시 한컷) 무학산은 한국100명산에 해당됩니다.

3. 정상에서 서원곡입구까지(11시 30분 - 12시 20분) : 당초 계획은 우회하는 코스로 학봉을 통해 하산을 하려했으나 가장 단거리 코스를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던 길로 다시 하산을 하였습니다. 서마지기에 도착하자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는데, 그 소리의 충격이 워낙 큰지라 모든 사람이 정자안으로 숨게 만들었습니다. 정자 안에서 비옷을 다시 정비하고 하산을 하였습니다. 모처럼 맞는 비로인해 기분이 몹시 상쾌했습니다. 비닐 우의는 걸쳤지만 바지와 신발은 빗물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산에 오를때 피부를 끈적이게 했던 습한 기운을 소낙비가 앗아가는 듯 합니다. 갑자기 내린비로 주변의 나무와 바위도 한결 깨끗해 보입니다. 신록이 더욱 푸르러 보이고, 바위가 더욱 파란빛을 띠는 것 같습니다. 암튼 소나기로 인해 무학산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모든 사물을 그대로인데 괜히 보는 사람의 기분땜에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근심바위정자에서 만난 고교생) : 고3 청소년들인데 도시락까지 싸서''', 기특했습니다. 용마고학생이랍니다.(비에 젖은 등산로) : 물만난 대지와 나무들(물 만난 돌탑) : 바위의 열기가 식혀지는 것 같습니다.(자작히 젖은 낙엽들) : 낙엽을 보니 가을이 온 것 같기도 하고

- 내려 오는 길에 오를때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 건졌습니다. 죽은 나무에 새겨진 웃는 장승입니다. 아시는 분들오 있겠지만 창원에 사시는 분인데 주로 죽은나무에 나무 조각을 한다고 하는데, 창원 인근의 산에 주로 산행하면서 죽은 나무를 보아 두었다가 때를 봐서 조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무학산에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니 엄청 반가웠습니다. (웃는 장승모습) : 한그루 나무로 2개의 장승을 만드는게 보통 실력이 아닌것 같습니다. 특히 오른쪽 두상의 일부를 삐쭉하게 남겨둔 이유는? 심오한 뜻이 있는지도 모를''''

- 일행 중에 한명은 그런 사람을 추천해서 상을 줘야 된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면서 서원곡 입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의 정체는 신들린 조각님이랍니다.(네이버에서 블로그명입니다.

암튼 별탈없이 100명산 3번째 등정은 성공리에 마무리 하였습니다. 이 참에 기념비 하나를 소개할 까 합니다. 서원곡 팔각정 주차장에서 팔각정으로 가는 초입 우측에 큰 바위위에 비석하나가 있답니다. 신경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답니다. 언젠가 신경이 쓰여서 올라가 보니 최치원 선생의 후손들이 최치원선생을 기리는 기념비인데 시멘트로 제작되었으며, 건립시기는 1965년도로 되어있습니다. 의미있는 기념비인것 같았습니다. 무학산 오를때 시간이 되시면 한번 보시기 권합니다.

(큰바위 위에 외로이 선 비석)(비문) 건립시기가 정묘년이면 1987년 아님 1927년이고, 경주 후인 김무영씨가 적은 것 같으며, 내용은 고운 최치원 관련 내용인 것 같읍니다.

* 무학산 주변산들 : 무학산 (716미터)자락에 연해 있는 봉우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읍니다. 정상에서 북측으로 봉화산(262.9미터)이 있으며, 남측으로 대곡산(516.4미터), 만날고개에서 더 남측으로 내려가면 밤밭고개 아래쪽으로 청량산(323미터)까지 연결됩니다. 앞서 언급된 고운대(397미터)에서 동측으로 내려가면 환주산(추산공원)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밤밭고개로 향하는 도로로 인해서 청량산과 단절되어 있으며, 고운대에서 환주산과 연결되는 곳은 산복도로(합포고등학교 앞으로 산복도로가 개설되면서 산맥이 단절되어서 일주순환을 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언젠가 이 두곳이 산행을 위한 종주코스를 위해 어떠한 형태로라도 연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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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kdaudrb 2013.09.25 21:16 address edit & del reply

    반갑습니다 우선 무학산이 100명산 탐방대 축하 드립니다 저의는 님들께서 소개한 죽은나무에 조각한 네이버에 신들린 조각입니다 감사합니다

    • 삼식 2013.09.26 16:51 address edit & del

      반갑군요, 사이트 한번 방문하겠습니다.

  2. rkdaudrb 2013.10.14 20:23 address edit & del reply

    이렇게 다시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비오는날 산행 멋져요
    비오날에는 운치도 있고 낭만도 있고 비를 맞는 기분이 좋아요
    창원에 정병산에 있는 장승도 올려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건 kbs 생생 투데이에 나온 장승 이네요 ㅋㅋ

2012. 10. 2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3) - 강점제3시기

<술과 꽃의 도시, 마산 1>

한 도시를 짧은 말 한마디로 규정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도시는 그 도시의 특유한 자연조건과 문화조건 혹은 대표적인 생산품 등으로 그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목포하면 항구, 진해는 벚꽃 등과 같은 것들을 두고 하는 말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강점기 마산을 말한다면「술과 꽃의 도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산지역의 역사에서 술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마산지역을 찾은 관료나 시인들의 시를 보면 술과 관련된 작품이 적지 않습니다.

고려의 유명한 시인 정지상은 “푸른 물결 아득하고 돌이 우뚝한데……백년 풍류에 싯귀가 새롭고 만리 강산에 한잔 술을 드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이는 “기이한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한데 모두들 유선(儒仙)이 읊조리던 축대라 말한다……주객은 만날 때에 여러 번이나 잔을 든다”라고 읊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바다와 산, 그리고 바위가 어우러진 마산의 풍광, 특히 유선으로 불린 최치원이 노닐었다는 월영대 주변에서 술 마시는 장면을 시로 묘사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남긴 시에도 월영대와 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숙종 때에 행정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김이건이라는 사람은 “조창에서 고식을 싣고 출발하기 전에 위로의 마음으로 음식을 내려주고 포구에서는 기생들이 춤을 추어”라는 조금 색다른 의미의 시를 남겼습니다.

조운선을 타고 바닷길을 통해 한양까지 가는 일은 앞길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험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같이 관청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기생들로 하여금 춤까지 추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술이 항해의 안전을 축원하는 용도로 쓰였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근대기에 마산지역이 술로 유명해지는 결정적인 계기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들어온 일본청주 때문입니다.

개항 직후인 1904년 일본인 동충용(東忠勇)이 최초로 아즈마(東)양조장을 설립한 이후 마산의 양조산업은 1928년 전국 지역별 주조생산량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였습니다.

다음 사진은 식민지시대 일본사람들이 마산에서 생산한 청주 통입니다.

당시 술의 질(質)을 좌우하는 요소는 물맛과 기후 그리고 양질의 쌀 등 세 가지였는데 마산은 이 중 하나도 모자람이 없는 최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물의 경우 마산의 물은 감로수와 같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무학산 뒤편에 자리한 감천리의 물로 막걸리를 빚으면 청량사이다와 같다던가, 세찬 완월폭포의 물을 기관차에 넣으면 오르막 길도 힘차게 올라갈 정도라는 말에서, 우리는 지역사회에서 물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산 시내의 샘물 중에서도 광대바위 샘물(일명 몽고정)을 비롯한 몇 곳의 샘은 1911년 총독부 검사 결과 가장 우수한 샘물로 인정 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샘들은 1919년-1920년에 마산을 비롯한 전국을 휩쓴 콜레라 발생이후 공동수도가 생기는 바람에 쇠퇴하였지만 아직까지도 ‘물 좋은 마산’이라는 별명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일본 술 청주는 쌀로 만들기 때문에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어야 했는데 마산 인근의 고성, 김해, 창원과 같은 넓은 들이 뒷받침하였고, 겨울에 춥지 않고 여름에 덥지 않은 기후도 술 빗기에 제격이었습니다. <<<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2012/09/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2012/09/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2012/10/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2012/10/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2012/10/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2012/10/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2)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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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640여 평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였습니다. (도로면적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각종 자료에 나오는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마산지방해운항만청이 발간한 『마산항백서』에 의하면 이 매립공사는 1911년 착공되어 1914년 7월 준공되었다고 합니다.
『마산항지』에서는 1910년 착공하여 1913년 준공되었다고 기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매립공사는 부산에 살았던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은 일본 화가산현(和歌山縣) 출신으로 대판 오백정장평(五百井長平)상점에 들어갔다가 21세가 되던 해 한국으로 왔습니다.
무역업으로 일을 시작한 박간은 1905년부터는 독립하여 수산업․창고업․목물무역업․토지매매중개업 등에 종사했습니다.

유명한 동래별장의 주인이며 당시 부산 제일의 땅 부자였습니다.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위원․경상남도회부의장․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였고 부산토지주식회사사장․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쥐락펴락한 인물입니다.

1923년 부산을 현지 르뽀한 잡지 개벽(開闢)의 기자는
「․․․․迫間方太郞 같은 사람은 그 한사람의 부력(富力)이 10,031호 조선인의 전 부력을 당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도시사학자 손정목은
‘그가 개인적으로 한반도 전체 일본인 중 최고의 자산가였다’
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국에 나온 일본인 중 최고부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지역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경남 도내 소작지의 3.5%를 소유하였고 소작농이 2,000여 호가 될 정도의 대지주였으며 김해 진영면과 창원 대산면 동면 등 3개면에 걸친 진영농장의 주인이기도 했으니 옛 창원시의 땅도 많이 가졌던 셈입니다.

그런가하면 1896년 11월에는 부산에서 자본금 2만 5천원으로 부산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 회사가 우리나라에 세운 일본인 회사의 효시입니다.

유명한 '마산포 사건' 때는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조선인 지주들을 꾀어 토지를 매수하도록 하였고, 그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서훈을 받기도 했으니 마산과도 인연이 깊은 셈입니다.

유장근 교수와 함께 걸었던 도시탐방대 답사 때 무학산 어느 능선에서 그의 땅이었다는 표지석이 서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7-80년은 되었을 돌이었습니다.
후에 생길지도 모를 ‘마산근대사 박물관’에 전시하기 딱 좋은 유물이라, 보관해 놓을 생각도 했는데 무거워서 옮기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박간소유지(迫間所有地)’라고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간의 ‘마산과의 인연’은 바로 남성동 매립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개항 초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매립 때문에 생긴 충돌, 즉 앞서 포스팅한 김경덕 매축권에 대한 홍청삼(弘淸三)의 권한 계승 시비 사건(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이 있었던 이곳을 그가 매립한 것입니다.

매립의 실제 전주(錢主)는 박간방태랑이었지만 이 사업을 마산에서 직접 시행한 이는 바로 홍청삼(弘淸三)이었습니다.
홍청삼은 당시 마산거주 일본인의 거물로 현 제일여고에 있었던 신사건립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다음 그림은 제가 복원한 당시 지도인데 이 그림을 보면 쉽게 매립전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것은 매립 전인 1910년 경 도면이고 뒤것은 매립이 끝난 1920년 도면입니다.
 

 

이 때 매립된 토지의 지번과 소유자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토지는 총 52필지로 수성동115, 116, 117번지와 남성동 172번지부터 221번지까지였습니다. 수성동에 3필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 지역의 명칭을 ‘남성동 매립지’라고 부르겠습니다.

매립된 52필지 중 수성동 116번지 374평과 117번지 34평, 합408평은 일본인 송원조장(松原早藏)의 소유(■부분)로, 남성동 200번지는 국유지(●부분)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매립주 박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항만의 요지(要地), 즉 초록색으로 표시한 ●부분의 남성동 200번지, 102평의 대지가 국유지로 된 사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박간이 너무 넓은 대지를 매립을 통해 일거에 소유하게 되자 그 답례로 부두용지 혹은 공공건물 부지로 총독부에 헌납했던지, 아니면 공공의 목적으로 그 땅을 정부가 매입했는지, 그저 추정만 해볼 뿐입니다.

박간 소유의 대지 49필지 7,568평은 아무런 변화 없이 전부 1936년 2월 22일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박간수웅(迫間秀雄)에게 이전되었고, 그런 상태로 해방까지 갑니다.

박간수웅(迫間秀雄)이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성이 같다는 점과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미루어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승계 시켰다면 아들아닌가 라고 추정했을 뿐입니다.

다른 기록인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경남지역 일본인 지주의 형성과정과 투자 사례, 1999, p.68, 한국민족문화 제14집」에 의하면 박간의 아들로 박간일남(迫間一男)이 등장하고, 그의 가계 중 박간무웅(迫間武雄)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간수웅은 혹 박간의 집안 조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이 많은 토지를 한 필지도 매매하지 않고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대지 혹은 건물을 전부 임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지역에서 발간된 자료에서는 ‘
새로 매립된 토지의 가격이 최저 7원 50전에서 최고 22원까지 토지의 위치에 따라 상당한 격차가 있었는데 이를 박간이 분양하였다’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 매립지가 해방 때까지 소유자 변경이 없었다는 것을 토지대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馬山港誌』의「馬山浦 埋立地」편에서도 추방사랑(諏方史郞)은 매립지에 대해「․․․유감스러운 것은․․․․․․차지료(借地料)가 비교적 고율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박간이라는 일본인 단 한 사람에게 마산포에서 생업을 이어 가던 모든 사람들이 대지와 혹은 건물을 임대하여 영업을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튼 매립 후부터 이곳은 원마산 상권의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것처럼 마산만에는 박간 매립 전부터 여러 차례 매립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군부 혹은 공공기관에서 시행했거나 임의의 매립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박간의 매립은 민간인이 이윤을 목적으로 법적허가를 득하여 매립한 사례로 최초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미 포스팅한 1910년경 마산포 토지소유상태를 통해 이미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은 확인했습니만 본 매립사업 이후 일제의 원마산 상권 장악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매립은 일제가 항만도시 마산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식민정책 중 가장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수탈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때 매립된 남성동 해안에는 석축안벽(石築岸壁)과 석축돌제(石築突堤) 등의 항만시설이 조성되었고 소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과 물량장을 갖추었습니다.
이 부두는 어선과 소형 화물선들의 정박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통영․거제 등 남해안 일대를 운항하는 연안 여객선 부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립지에 신설된 도로 사이에는 원정우편소(元町郵便所, 현 남성동우체국)를 시작으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매립하고 10년 쯤 지난 1924년, 이곳에 다음과 같은 길이 63.6m의 사석방파제가 설치되었습니다.

제 나이 열 두세살 쯤,
이 방파제 위에서 낚시를 했는데 팔뚝만한 뽀드라치를 한마리 낚아 올린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2011/06/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2011/06/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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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3. 9. 00:00

만날고개의 옛길을 걷다


3월 5일, 오후 2시.

날씨는 봄기운이 완연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습니다. 
유장근 교수의 마산도시탐방대 열 다섯번째 길, 모두 스무사람 쯤 만났습니다.

오늘 탐방지는 만날고개.
만날재의 전설과 옛 주막, 아기무덤터와 계비, 일제기 군용지 표지석과 일본인 유지들의 사유지 경계석, 그리고 월영마을 옛 신당,,,,
무심코 지나쳤던 만날재에 끝도 없이 펼쳐진 역사의 향연에 일행은 몸을 맡겼습니다.

이 글은 그 중 옛날 월영리에서 만날재로 넘어갔던 오래된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만날재공원을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 올라가지만, 이 길이 뚫리기 전까지 만날재로 가는 유일한 길은 당산마을 한복판의 좁은 길이었습니다.
당산마을은 산복도로 윗쪽 마을 이름인데 마을에 당산나무가 있어서 지으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당산마을은 옛날 월영리 제일 윗쪽 산 밑에 붙어있던 마을로 현재 경남대 뒤 산복도로 위쪽에 붙어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감천 넘어가는 사람들과 감천에서 마산포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목을 축였던 주막과 마을의 안녕을 빌었던 당산목인 수백년된 팽나무가 지난 세월을 말해주고 있는 오래된 마을입니다.

낡고 좁고 오래된 옛길이지만 창신대학 실용미술과에서 길벽화를 장식해 놓아 길이 훤했습니다.





이 길은 옛날 월영리 사람들이 만날재(무학산)를 넘어 감천거쳐 내서로, 그리고 함안으로 다녔던 길입니다.
길이야 함안 아니라 서울까지도 이어지게 마련이지만 굳이 함안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월영리가 조계지였던 시절에 발행한 지도 때문입니다.

아래 그림이 지도의 일부입니다. 1907년 일본인이 제작한 지도인데 이 지도에 대해서는 지난 1월 3일 이미 포스팅한바 있습니다.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옛 창원군청) 앞에서 만날고개로 올라오는 넓은 길이 이 좁은 골목과 연결되었는데 그 넓은 길에 함안신정(咸安新町)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길이 함안으로 이어진다는 뜻인지, 함안 쪽에서 볼 때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이곳이 함안과 관련있다는 의미아니겠습니까.



이 길이 만날고개를 넘어 감천과 내서거쳐 함안으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 몇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음 지도는 1916년 일본육지측량부가 제작한 1/ 5만 '마산(군사극비)' 지도입니다.



1919년 일본육지측량부가 제작한 1/ 1만 '마산' 지도입니다.



1926년 일본육지측량부가 제작한 1/5만 '마산(조선교통도)' 지도입니다.



1937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제작한 1/20만 '마산' 지도입니다.
함안까지 연결되는 길이 전부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함안은 지금의 가야읍이 아니라 당시 읍소재지였던 함안읍입니다.




최근인 1990년대 지도도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지역의 위성사진을 통해 비교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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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종만 2011.03.09 08:51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네요.
    몰랐던 사료지도를 보니 이 길이 참 중요한 길이었음을 알것 같습니다.
    지금은 현대길에 밀려 명맥만 유지하지만요. ㅎㅎ

  2. 옥가실 2011.03.09 18:19 address edit & del reply

    글을 읽어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좋은 자료가 참으로 많아요.

    차암... 빨간펜 한곳,

    원문에 산당마을이라고 썼는데, 제가 잘못 알려준 불찰입니다.
    당산 마을입니다.
    산복도로 건너기 바로 직전에 당산 경로당도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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