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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근22

창원시 근대건조물 10호, 가치를 논하다 마산YMCA 제22회 시민논단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1가 4-17번지에 현존하는 옛 전기회사 지점장 건물의 보전 문제를 두고 지난 3월 12일 창원시 근대건조물심의위원회가 심의한 뒤 그 가치를 인정해 ‘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로 결정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참석한 10명의 위원들이 격론을 벌이면서 토론한 결과라고 했다. 앞선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의 보존책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있다. 그중 근대기 유산은 도시 형성기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크다. 일제가 남긴 건물이라도 마찬가지다. 근대건조물로 결정된 뒤 이 건물에 대한 명칭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전기회사는 맞지만 그 전기회사가 한일와사전기인지 일한와사전기인지 아니면 경성전기인지 등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건축연.. 2021. 7. 1.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2 본 회까지 총 12회에 걸쳐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포스팅하였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Ⅴ.맺음말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 두어 가지를 언급하면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이교재(우측 사진)의 사망 상황과 관련된 것이다. 현재까지는 옥사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예컨대 “부산형무소에서 2년 언도를 받고 복역중 1차 피검 당시의 전신.. 2020. 3. 9.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1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4)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상해격발」이라는 문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상화 소장 「상해격발」 참조.) 비단 위에 인쇄된 이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큰 주제는 ‘建國記念日建國對策建議案’이다. 현재 존재하는 임정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건의안인 셈이다. 격발의 대상은 국내와 韓僑를 포함하는 모든 선생이며, 이를 위해 특파원으로 李中光을 임명한다는 것이다. 건의안은 크게 임시정부 사명과 특파원 임무로 대별된다. 임시정부 사명에는 ‘建國策定衆議, 議會出席豫期, 議會日當通告, 各自集會決議, 統合機關組織, 戰務俱體議定’ 등 7개항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특파원의 임무는 ‘使命宣傳, 大勢宣傳, 黨員組織, 別隊組織, 戰資豫約, 交通部立, .. 2020. 3. 2.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0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3) 그렇다면 개별 문건들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이교재(우측 사진)가 전달하려던 문건 중에는 달성의 문영박(호는 장지, 1880~1930)에게 보내려던 두 종류의 문건이 있다. 하나는 문영박이 사망한 데 대해 임정에서 뒤늦게 조문한다는 추조문으로 내용은 ‘追弔 本國 慶北達成 大韓國春秋之翁 文章之先生之靈 大韓民國臨時政府一同’으로 되어 있다. 문영박은 1930년 12월 18일에 사망하였는데, 문서의 작성일자는 1931년 10월 3일이었으므로 사망한 지 10여 개월이 지난 뒤에 조문을 한 셈이다. 그의 자녀들, 곧 문대효에게 보낸 특발문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日中大事變’ 곧 1931년 9월의 만주사변이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고 있어서 국내에서 호응하면.. 2020. 2. 24.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9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2) 이교재(우측 사진)의 임정문서 일부가 동아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는 이정순의 아들인 이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이상화와의 면담은 2017년 9월 27일 마산의 이디야 커피집에서 있었다. 그는 부친께서 동아대학교 총장에게 기증하였다고 말하였다.) 해당 박물관에 찾아간 결과 밀양의 황상규에게 보내는 추조문, 창녕의 성낙문에게 보내는 특발문, 그리고 두 통의 편지 등 4개의 문건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간 까닭까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이상화의 말에 따르면 부친이 동아대학교 총장인 정재환에게 기증하였다는 것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소장자료 목록(74-4)과 관계자에 따르면(관련자료는 두 가지로서 1)분류번.. 2020. 2. 17.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8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운동 중에서 증거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부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급한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라는 위임장을 비롯하여 다종의 문건을 휴대하고 입국한 일일 것이다.(여기서는 ‘임명장’보다 ‘위임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경상남북도상주대표’에게 독립운동과 관련한 여러 가지 중요한 사항을 위임한 까닭이다.) 작성연도 중 제일 늦은 것이 1931년 11월 20일이니만큼 그의 입국은 상해에서 창원군 진전면까지의 거리나 교통 수단 등을 생각하면 빨라도 1932년 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교재가 국내에 가지고 들어온 이른바 ‘이교재임정문서’를 중심으로 그의 마지막 독립활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까지 필자가 조사해서 파악한 .. 2020. 2. 1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7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2) 이교재(우측 사진)가 상해 임정에 도착한 1921년대 혹은 1922년대 초는 임정으로서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베르사이유 체제가 공고화되고, 임정 내의 갈등도 증폭되었으며, 국내외의 독립자금 지원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임정은 1922년 이후 독립전쟁 준비론으로 나아갔다. 1922년 10월 여운형과 김구 중심의 임정 요인들은 한국노병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전쟁 준비 방략의 일환이었다. 곧 노동과 군사를 겸한 인물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면서 일본이 국제 전쟁에 휘말릴 때를 기다려 독립전쟁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임정에서 이것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이었고, 거기에는 중국.. 2020. 2. 3.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6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투쟁에서 두 번째 단계는 상해로 망명한 다음 상해 임시 정부의 일원으로서 활동한 시기이다. 그는 상해에 언제 갔으며, 어떻게 갔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은 없다. 가장 확실한 것은 임정의 지시를 받아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기록이다. 1923년 9월 21일에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재판을 받은 사실이 있다. 따라서 3.1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간 뒤 출옥했을 1921년 12월 이후에 상해행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간의 국내 기록들은 ‘3.1만세운동이 전국에 한창일 때 감연히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동지와 규합’하였다거나,(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 2020. 1. 27.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5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4) 그렇다면 이교재와 함께 형무소에 갇힌 위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순서대로 적힌 인물들을 검토해 보자. 沈相沅에 관한 기록은 재판 기록 이외에서는 신상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형량에 있어서 이교재보다 적지만 다른 이들보다는 많은 1년 형이다. 다음으로 서석천의 경우, 1949년 4월에 발간된 한 언론에 실린 19명의 명단 속에 그의 이름이 있다.(민주중보 제1034호(7권) 1949년 4월 29일자. 이곳에 실린 명단은 沈倫, 金義植, 南海, 咸陽 金守東, 洪源轍, 徐錫天, 孫吉童, 朴洙東, 統營 金宜錫, 洪鍾濟, 宋孟守, 朴○漢, 馬山 金浩鉉, 高昇柱, 卞甲섭, 金英煥, 洪斗益, 卞相福, 李基鳳 등이다.) 이들 중에서 예컨대 마산지역 출신으로 구.. 2020. 1. 2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4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3) 이교재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뛰어든 것은 3.1운동 때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의 동지와 더불어 선언서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문건들을 道內 일원에 배부하다가 오서리 출신의 경찰인 이만갑에 의해 체포되어 진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고 알려졌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6쪽) 위와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간 독립만세 시위에 대한 참여나 체포 과정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적지 않았다. 다음의 기록은 그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1919년 7월 3일에 경상남도 장관인 사사키(佐佐木藤太郞)가 조선총독 하세가와에게 보낸 「소요에 관한 건(제7보)」에 따르면(문서제목, 「騷擾に關する件(第7報.. 2020. 1. 13.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3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2) 이교재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조선조 말기와 대한제국시기에 진전면 일대에는 몇몇 서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마을 단위이자 문중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문중 중에서도 이 지역의 주요 문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권씨, 초계변씨, 선산김씨, 밀성박씨, 창녕조씨, 회산황씨 등이 각각의 문중에 서당을 소유하고 있었고, 안동권씨가 운영하던 경행재도 그 중의 하나였다. (진전면에는 일암리의 誠久祠 경내의 道山書堂(草溪卞氏 문중), 오서리 동대에 있는 景行齋(安東權氏 문중), 오서리 서대(회동이 맞음. 필자주)에 있는 龜川精舍(密城朴氏 문중), 오서리 탑동에 있는 西溪精舍(安東權氏 문중) 등이 있었으며, 20세기에도 근곡리의 慕遠堂(善山金氏 문중), 평암리 미.. 2020. 1. 6.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2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1) 이교재(사진)는 1887년(고종 24년) 7월 9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가 부농의 아들이었다는 기술이 있지만(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삼진독립운동사, 2001, 234쪽) 어느 정도의 부농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오서리 578번지의 대지 규모를 보면 적어도 중농 이상의 농가였다고 생각된다. 현재 세 필지로 구획된 이곳에는 1931년 당시 목조 초가 본채 건물 3평과 부속의 목조 초가 3평, 그리고 물건적치용 건물 각각 1평 5홉, 1평 2홉 등 모두 4채가 있었다.(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발행, 폐쇄등기부 증명서 고유번호 19.. 2019. 12. 3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 1 앞서 9회에 걸쳐 1954년 김형윤 선생이 마산일보에 기고한 '이교재 선생 생가 기행문' 「삼진기행」을 포스팅했다. 오늘부터는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11회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목 차 Ⅰ. 머리말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군자금 모금사건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2019. 12. 23.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9) - 일본 청주에 밀려난 조선 탁주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4 일본 청주에 밀려난 조선 탁주 역사 연구에도 일종의 흐름이 있다. 술과 같은 음식문화도 그런 흐름을 타는 품목 중의 하나이다. 사실 유교주의적 학문 세계 속에서 먹는 것이라든가 입는 것, 또는 인간의 본능과 관련된 분야는 늘 소외되어 왔다. 송나라 때의 주자학자들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인간에게 있어서 굶어죽는 일은 아주 사소한 것인 반면, 의리를 잃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역사에서는 국가나 민족, 이념, 엘리트 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 생활 그 자체 역시 중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인간의 본능이 최근에 이르러 인문학자들에게 중시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2015. 2. 16.
한국100명산. 3. 최치원의 수양지 무학산 ♬ 예상치 않았던 무학산 100명산 탐방 : 둘레길만 걷던 초보등산꾼들이라 원거리 원정일정을 잡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예정대로라면 포항 내연산은 8월말에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이런 저런 핑계로 8월의 100명산 원정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빼먹기를 쉽게하면 앞으로 애로사항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심 기회가 닿으면 무학산이라도 오를 기회가 있다면 그 달의 건수는 채워야지 하는 생각에 원정기념 현수막을 넣어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지지난주에 회원 모두가 참석하는 흔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잘되었다 싶어서 "오늘은 모처럼 모두 참석했는데 정상한번 가입시더"라고 의견을 내어서 100산중의 하나인 무학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 무학산 지명의 유래 무학산은 마산 중심가를 둘러싸고 있.. 2013. 9.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3) - 강점제3시기 한 도시를 짧은 말 한마디로 규정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도시는 그 도시의 특유한 자연조건과 문화조건 혹은 대표적인 생산품 등으로 그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목포하면 항구, 진해는 벚꽃 등과 같은 것들을 두고 하는 말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강점기 마산을 말한다면「술과 꽃의 도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산지역의 역사에서 술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마산지역을 찾은 관료나 시인들의 시를 보면 술과 관련된 작품이 적지 않습니다. 고려의 유명한 시인 정지상은 “푸른 물결 아득하고 돌이 우뚝한데……백년 풍류에 싯귀가 새롭고 만리 강산에 한잔 술을 드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이는 “기이한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한데 모두들 유선.. 2012. 10.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 2011. 9. 19.
만날고개의 옛길을 걷다 3월 5일, 오후 2시. 날씨는 봄기운이 완연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습니다. 유장근 교수의 마산도시탐방대 열 다섯번째 길, 모두 스무사람 쯤 만났습니다. 오늘 탐방지는 만날고개. 만날재의 전설과 옛 주막, 아기무덤터와 계비, 일제기 군용지 표지석과 일본인 유지들의 사유지 경계석, 그리고 월영마을 옛 신당,,,, 무심코 지나쳤던 만날재에 끝도 없이 펼쳐진 역사의 향연에 일행은 몸을 맡겼습니다. 이 글은 그 중 옛날 월영리에서 만날재로 넘어갔던 오래된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만날재공원을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 올라가지만, 이 길이 뚫리기 전까지 만날재로 가는 유일한 길은 당산마을 한복판의 좁은 길이었습니다. 당산마을은 산복도로 윗쪽 마을 이름인데 마을에 당산나무가 있어서 지으진 이름.. 2011. 3.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개항이후부터 1910년 이전의 시기에 제작된 마산지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지도의 기본정보 표기는 개항기 때와 같습니다. 는 지도의 제목이며 제목 아래에 표기한 것이 지도의 기본 정보입니다. 표기 순서는「제작연도 / 제작자 / 발행처 / 축척 / 수록처 / 소장처」순입니다. 기록이 불가능한 부분은 해당 칸을 비워「/ /」로 표기하는데 지도제목이 동일한 경우에는 지도명칭 뒤에「*, **, ***」를 붙여 구분하겠습니다. -조계지현황도**- 1900년 / / / 마산포사건 관련 일본 해군대신관방서류(秘) / 미의회도서관(11)NT(C)NO.178 지도의 명칭은 원래 없었습니다. 「馬山機密本第八六號附屬 (마산기밀본 제86호 부속)」이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는데 지도의 내용을 참고하여 제가 임의로 지도의 명칭을 붙였.. 2010. 12. 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5) - 개항기 이것으로 개항기까지의 글은 마감합니다. 정리하는 의미로 최근 찍은 항공사진에 1899년 문을 연 마산개항장의 위치를 표시해 보았습니다. 노란색의 조계지를 포함한 도시전부가 당시에는 모두 논밭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탐욕스럽게 똬리를 틀었던 저 조계지가 근간이 되어 오늘날 마산도시의 골격이 형성되었습니다. 111년 동안 있었던 도시의 생성과 변환,,,,, 넓게 펼쳐진 저 도시가 노란색 조계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 도시가 생명체임이 다시 한 번 실감납니다. 그렇다면 마산개항은 우리 정부가 자의적으로 했을까요? 아니면 열강의 강제에 의한 것일까요? 마산 개항의 성격은 아직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크게보면, 대한제국 정부에 의한 자의적인 개항이다. 아니다, 열강의 강요에 의한 강제적인 개항이다... 2010. 9. 27.
살아있는 박물관 '근대산업유산' 재생 - 살아있는 도시박물관 - 두 사진은 일본 키타큐슈 모지항에 있는 주차장 벽체 사진입니다. 위의 사진은 주차장 내부에서 찍은 것이고, 아래 사진은 외부에서 찍은 겁니다. 원래 공장으로 사용했던 건물인데 벽만 남겨 놓았습니다. 홀로 남은 벽체가 쓰러질까봐 철골로 보강하면서 그걸 디자인 요소로 삼았습니다. 나는 이 벽체를 보는 순간, 그들의 도시개발 수준이 우리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모지항의 오래된 과거, 그 긴 시간의 궤적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오래된 건 모조리 헐어내고 새걸로 바꾸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와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새 담장보다 효율도 떨어지고 돈도 더 많이 들었을텐데 이렇게라도 모지항의 역사유산을 살리려는 그들의 자세를 배울만 하지 않습니까? 문화.. 2010. 6. 23.
즐거웠던 밤 - 서익진 교수의 출판기념회 마산시의회가 마산을 창원 진해와 통합시키기로 결정한 3일 후인 어제, 12월 10일 목요일 밤. ‘마산을 살리자’는 책의 출판을 축하하기 위해 경남대 평생교육원에 사람들이 모였다. 서익진 교수의 신간 『마산, 길을 찾다』의 출판기념회 이야기이다. 이 책은 서 교수가 그 동안 마산도시재생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남겨 놓은 글들과 마산도시재생과 관련한 각종 토론회 등에서 주장한 내용들을 재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리아미디어'에서 기획한 '리아프리즘문고 제1호' 출판이었다. 리아프리즘문고는 지역 도시영역, 문화 예술영역, 인문 사회영역의 세 분야에 걸쳐 지속적인 출판을 구상하고 있다. 지역 연구자들을 발굴하고 지원하겠다는 포부도 보였다. 도서출판 불휘를 운영하는 우무석 김리아 부부의 아름답고 원대한 시작이었다. 경.. 2009. 1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