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이야기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0

by 운무허정도 2020. 2. 24.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3)

 

그렇다면 개별 문건들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이교재(우측 사진)가 전달하려던 문건 중에는 달성의 문영박(호는 장지, 1880~1930)에게 보내려던 두 종류의 문건이 있다.

하나는 문영박이 사망한 데 대해 임정에서 뒤늦게 조문한다는 추조문으로 내용은 ‘追弔 本國 慶北達成 大韓國春秋之翁 文章之先生之靈 大韓民國臨時政府一同’으로 되어 있다.

문영박은 1930년 12월 18일에 사망하였는데, 문서의 작성일자는 1931년 10월 3일이었으므로 사망한 지 10여 개월이 지난 뒤에 조문을 한 셈이다.

그의 자녀들, 곧 문대효에게 보낸 특발문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日中大事變’ 곧 1931년 9월의 만주사변이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고 있어서 국내에서 호응하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할 수 있으나 비용이 없으므로 특파원을 보내니 그에게 常備金을 보내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되면 무력감에 빠져있는 임시정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특발, 기원4264년· 대한민국 13년 10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 본국경북달성 문대효 애전」. 달성화원 인수문고 소장.)

제로 문영박은 191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30년까지 전국을 왕래하면서 임정에 군자금을 지속적으로 송달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1929년 2월 27일에는 대구경찰서의 고등계형사들에게 4시간 동안 가택수색을 당한 뒤, 장남 문원만과 함께 체포된 적도 있었다.(「大邱高等係員出動 文永樸富豪突然檢擧 사건내용은 중대시된다고 四時間의 家宅搜索, 삼월일일 압두고 예비검속인듯 」, 동아일보, 1929년 3월 3일자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문영박 [文永撲] ’(디지털달성문화대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는 1927년으로 기재되어 있다. 오류다.)

아울러 문영박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오세창과 유창환에게 각각 ‘수봉정사’와 ‘수백당’이란 친필을 받기도 하였고, 또 이들과 더불어 이승훈·한용운·김진호·姜邁·이상재·유진태·이득년은 1918년 망명지에서 국내로 잠입한 우당 이회영과 함께 국제정세의 변동에 대처할 방법을 비밀리에 논의하기도 하였다.(김종서, 「남평문씨(南平文氏) 수봉정사(壽峯精舍) 수백당(守白堂)과 하겸진(河謙鎭)의 ‘수봉정사기(壽峰精舍記)’」, [문헌과해석] 발표회 논문(2017년 12월 22일), 1-3쪽과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전편: 민족해방투쟁, 형설출판사, 1978, 127쪽.)

말하자면 전국적인 독립지사들의 네트워크 속에 포함되어 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문영박의 손자인 문태갑은, “조부가 큰 부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군자금을 많이 냈다는 말이 주변에 돌았다”고 하였다(2017년 9월 12~13일 양일간, 대구시 달성구 화원읍 남평문씨 세거지에 거주하는 문태갑 선생 방문 면담))

그는 특히 상해에서 활동하던 창강 김택영을 통해 많은 서책을 구입하였는데, 그 수송 방식은 상해에서 목포까지 배로 운송하면 그곳에서 다시 수레를 이용하여 화원까지 이송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문희응 씀, 仁興錄 -南平文氏與世居地, 규장각, 2003, 114쪽.)

이 역시 문영박과 임정과의 통로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임정에서 추조문을 보낸 이로는 밀양의 황상규가 포함되어 있다.

추조문 내용은 앞의 문영박 선생과 큰 내용은 같으나 일부 다른 점도 있다.

“追弔 本國慶南密陽/ 大韓國義士/白民黃尙圭君之 靈/紀元四千二百六十四年·大韓民國 十三年 十月三日(建國紀元節)/大韓民國臨時政府一同/派弔/上海(Shanghai)”이다.

문영박의 경우 ‘大韓國春秋主翁’으로 부른데 비해 황상규에게는 ‘大韓國義士’로 호칭하였다. 앞의 경우 역사의 주인이라는 뜻을, 황상규는 의사를 강조한 셈이다.

또한 문영박의 경우 수신인을 ‘본국 경북달성 문대효 애전’으로 표시하였으나 황상규의 추조문에는 이것이 빠져 있다.

검토해 보아야 하겠지만, 조문을 받을 대상이 마땅치 않았을 수도 있다.

밀양 출신인 황상규는 밀양 뿐만 아니라 만주와 임정에서도 활동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고, 특히 동양척식주식회사 창녕지역 관리인인 양인보를 설득하여 창녕군에서 받아들인 동척의 소작료 1년분을 받아 임시정부에 헌납한 것으로 알려졌다.(최필숙,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240~241쪽. )

이러한 공헌도 임정에게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황상규는 김약산의 고모부이자 의열단의 창립자로도 알려져 있었으나 1931년 9월 2일에 폐결핵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최필숙,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239~246쪽. 133)

임정에서 이교재를 통해 추조문을 보낼 때에는 그의 사망 사실이 거의 한달 만에 임정에 알려진 시점이었다.

임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국내의 정보를 수집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그에 맞는 예우를 해 준 것으로 보인다.

추조문이 애국인사에 대한 예우 차원의 성격이 강한 문건임에 비해 특발문은 임정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호소하는 문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영박에게 보낸 특발문은 이미 언급하였지만, 창녕의 성낙문에게도 거의 동일한 내용의 특발문을 보냈다.(「본국경남창녕 성낙문선생 귀하」라는 수신처만이 다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진주의 허만정에게 보낸 특발문도 위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허만정에게 보낸 특발문은 앞서 언급한 동아일보에만 소개되었을 뿐 소재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이를 알기 위해 2018년 9월 28일에 지수면 승산리에 있는 허만정 본가에 찾아갔지만 현재 그 후손이 부재 중이어서 특발문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성낙문과 허만정은 각각 창녕과 진주를 상징하는 부호들이었다.

창녕군 지포면 석리 출신의 성낙문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창녕지역의 대성이자 부호로서, 손녀인 성혜림(1937-2002)은 북한의 유명 여배우였고, 암살당한 김정남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성낙문은 1921년에 창녕자동차를 창립하는데 주주로 참여하였으며, 1940년에는 부산지방법원 창녕출장소 청사 신축 중에 건물 1동과 부속건물 등을 기부한 공로로 일제 당국으로부터 포상을 받은 기록도 있다.(조선총독부 관보 제3890호, 1940년 1월 12일자.)

표면상으로는 당시의 식민지배 당국에 협조하였던 것이다.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출신인 허만정은 1925년에 백산무역에 250주를 투자한 주주의 한 사람이자(朝鮮銀行會社要錄(1925年版), 東亞經濟時報社.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 한국근현대회사조합자료」 참고. h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hs_001_1925_08_14_0150) 중외일보의 창립자 명단에도 주식을 투자한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주식회사 중외일보사 창립총회의 건」,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 5 (京種警高秘 제15854호, 1928년 11월 24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내항일운동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GS 그룹의 창업주인 허만정은 ‘인심이 좋고 인권을 존중하는 유풍이 남아 있는 승산리’에서 만석꾼으로 이름이 났었고,(김동수 기자, 「진주시 지수면 ‘향토사’ 面誌(면지)발간 추진위 구성」, 「한국장애인신문/KJB방송, 2010년 6월 20일자) 또한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청년 중심으로 모인 보주청년회라는 단체에도 이름을 올린 34명 중 1인이었다.(「보주청년회 부흥기념식 성황, 사무실 낙성식도 거행」, 중외일보, 1926년 12월 28일자)

부호이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에도 적극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추조문과 특발문의 수신인들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먼저 상해임시정부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독립지사들이나 임정후원자들의 동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들을 정성들여 예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추조문이나 특발문은 비단에 쓸 정도로 세심하게 상대방을 배려하였다. 또한 특발문은 부호가들에게 보냈는데, 이들에게는 앞서의 문장지에서 본 바와 같이 ‘일중대사변’, 곧 만주사변으로 세계정세가 변하고 있으니, 재정적으로 독립투쟁을 더욱 지원해 달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예우를 넘어서서 실질적인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문장지나 허만정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는데 노출된 듯이 행동하였던 반면, 성낙문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고 오히려 지역유지로서 일제의 지역 지배 사업에 협력하는 양상도 보여 주었다.

수신인을 밝히지 않은 채 김관제와 윤상태에게 전달해 주기를 부탁한 편지에는 국내 지사들에게 투쟁을 독려하고 있는 내용이다.(임정 시절 김구는 “연구실행한 정책이 있으니 편지정책이다.. 임시정부의 현상을 극진 설명하고 동정을 구하는 편지를 써서 엄군(항섭), 안군(공근)에게 피봉을 써서 우송하는 것이 유일의 사무”라고 할 만큼 편지를 중요시하였다(김구 지음/도진순 탈초 교감, 정본 백범일지, 돌베개, 2016, 397쪽). 국내에는 우편으로 전하지 않고 개인에게 밀봉하는 방식으로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곧 현재 적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세계가 변동하면서 폭발하기 직전이니 칼을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국내의 지사들과 연합하여 그 성취를 함께 도모해야 할 것이며, 이에 이군(이교재, 필자주)을 파견한다는 것이다.

조완구와 김구가 연명하여 보낸 것이므로 임정의 이름으로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시영이 김관제에게 보낸 편지 역시 독립의 당위성과 협조를 부탁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임시정부의 지도층이 당시 경상남북도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더불어 임정의 현안을 도와주도록 요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두통의 비밀편지 형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