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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7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2)

 

이교재(우측 사진)가 상해 임정에 도착한 1921년대 혹은 1922년대 초는 임정으로서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베르사이유 체제가 공고화되고, 임정 내의 갈등도 증폭되었으며, 국내외의 독립자금 지원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임정은 1922년 이후 독립전쟁 준비론으로 나아갔다.

1922년 10월 여운형과 김구 중심의 임정 요인들은 한국노병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전쟁 준비 방략의 일환이었다.

곧 노동과 군사를 겸한 인물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면서 일본이 국제 전쟁에 휘말릴 때를 기다려 독립전쟁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임정에서 이것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이었고, 거기에는 중국군관학교에 한국인 입학생을 보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192~198쪽)

이러한 시기에 임정에 도착한 이교재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일원이 되었는지 역시 알 수는 없다. 앞서 말한 1922년의 기부금모집 위반으로 체포되었을 때에도 임정과의 관계를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1923년 9월에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된 사건을 통해 볼 때, 이교재는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 모금이라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겼을 정도로 임정의 요인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교재가 주도한 통영군자금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기관에서 작성한 두 종류의 재판기록과(마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 「형사사건부」 1-1(1923),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8428, 대구복심법원, 형사공소사건부 대정 13년(1924),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6075) 경남고등경찰부가 작성한 일지형식의 기록이 남아 있다.

먼저 1923년 9월 21일자로 경남고등경찰부에서 작성한 기록에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前敎員 李敎載가 上海假政府의 密命을 받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내로 들어와서 통영군 통영면 署町의 金宗元에게 군자금을 강요하던 중 체포되어 당국에 보내져 징역 2년에 처하였다”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慶尙南道警察部, 高等警察關係摘錄 –1919년~1935년-, 소화 11년, 39쪽)

이교재의 신분이 ‘전교원’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이미 말한 바지만, 그의 활동 근거가 임정의 밀명이었고, 그 목적은 국내에 들어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려는데 있었다.

그가 선택한 곳이 통영이었고 그 대상이 김종원이었다는 것이다.

1923년에 통영지청에서 작성한 刑事事件簿에 따르면, 통영경찰서에서 ‘비현행범’으로 체포된 이교재의 죄목은 ‘대정8년제령제7호위반’이었다. 구류일자는 대정 12년(1923년) 10월 4일, 검사에 이송된 날짜는 동년 10월 13일로서 ‘진주’로 표기되어 있다.

통영지청에서 재판을 받은 그날 진주교도소로의 이송이 결정된 것이다.

피고인의 본적과 직업, 그리고 연령은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 농민, 이교재 37세’로 적혀 있다.

같이 체포된 인물로는 金宗元, 姜相烋, 朴性淑, 朴世洪, 李瓚根, 潘光閔 등 6명으로 그 신상과 죄목, 구류일자, 검찰이송여부 등은 <표 2>와 같다.

<표 2> 이교재의 통영군자금 모금사건 관련자(마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 「형사사건부」 1-1(1923)에 의거하여 작성)

통영경찰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통영사건 관련자들의 죄명은 군자금 모금이 아니라 ‘증거인멸’이나 ‘범인은익’ 혹은 ‘동행취체령위반’ 등이었다.

모두 현행범이 아닌데다 증거를 확보하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명목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모두 10월 13일에 석방되었다. 이교재가 진주교도소로 간 것과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였을까?

김종원은 강상휴와 더불어 통영지역의 사회단체인 통영청년단의 창단멤버였다.(동아일보, 1921년 8월 27일자) 이 청년단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8월에 창립총회를 열고 통영기독교청년회장을 지낸 박봉삼을 초대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순회강연과 교육, 계몽, 순회공연 등이었다. 말하자면 통영지역의 애국운동과 사회계몽 운동의 본거지였다고 할 수 있다.

1923년 11월 18일에는 회관을 신축하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창립 당시에는 34명이던 회원이 3년여 만에 400여 명으로 증가한데다 그만큼 갖가지 활동을 한 덕택이었고, 3대 단장이던 임철규가 사재를 털어 회관을 신축하려던 참이었다.

이교재의 군자금 모집 사건은 바로 이 회관의 낙성 직전에 벌어졌던 것이다.

위의 명단에 올라있는 박성숙(朴性淑, 1900~1932)은 통영에서 하동집으로 알려진 부유 집안의 자제로서 일본 유학을 마친 뒤 귀향하여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고, 박세홍은 훈련을 담당하면서 수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박세홍은 1920년 3월 10일에 설립한 통영노동당의 회장이기도 하였다.(통영청년단에 대해서는 김상환, 「1920년대 통영지역 청년운동과 ‘김기정 징토운동’, 역사와 경계91, 2014.6, 191~229쪽과 정갑섭, 「통영청년단 1~3」, 한산신문1993년 7월 22-8월 5일. 일제시기 통영의 3.1운동에 대해서는 김상환, 일제시기 통영의 3.1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전개, 도서출판, 제일, 2005 참조)

사건부 기록에 박세홍은 학교 교사로 기재되어 있지만 통영합동노동조합에서 검사원으로도 일하고 있었다.

이 조합은 통영지역 노동조합의 연대체로서 1930년에 박세홍은 이 조합의 집행위원장의 자리에 올랐다.(통영시사편찬위원회, 통영시지1, 566쪽)

이찬근(李瓚根, 1893~1950)의 이름도 올라 있다. 형사사건부에는 직업이 의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통영시 항남 1번가에 壽南醫院을 개설하였다. 1914년 6월 1일자 조선총독부관보에도 그 이름이 올라있다.(조선총독부 관보제548호 1914년 6월 1일 10면, 휘보-조사 및 보고-위생. 그의 주소는 용남군 동면 북문동으로 되어 있다.)

그의 경력을 보면 단순한 한의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에 창간된 중외일보는 1928년에 주식회사의 형태로 확대 개편하기 위해 주주를 모집하였는데 마산의 이형재·구성전·옥기환 등과 더불어 통영의 이찬근도 5주를 투자하는 것으로 이에 참여하였다.(경성종로경찰서장 발신, 「주식회사 중외일보사 창립총회의 건」,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 국사편찬위원회 국내항일운동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문서,1928년11월24일. htp:/db.history.go.kr/id/had_138_0720)

또한 이찬근은 통영지역에서 1920년대 말에 김두옥·최천 등과 더불어 동아일보사 통영지국장으로 거론되었으며,(김보한, 「김보한의 문화칼럼-진산 이찬근을 찾다」, 한산신문 2009년 9월 4일자) 1928년 3월 25일에 봉래좌에서 열린 신간회 통영지회 임시의장이기도 하였다.(통영시지 제1권, p.576. 설립준비위원으로 박세홍도 들어있다. 박세홍은 지회에서 조사연구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진보적이며 독립운동에서 관심이 있었던 인물이었다.(그는 통영수산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시와 글씨에 능해 통영출신의 시조 시인인 김상옥의 정신적 스승이었다고 하였으나 한국전쟁 시기에 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당하였다-블루버드 블로그, 「통영별곡 51-초정 김상옥 거리를 아시나요? 4」 참조)

경찰의 기록에는 이교재가 김종원에게 군자금을 강요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죄로 판명되었다.

김종원은 형사사건부에 농민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鱈魚, 곧 대구잡이 사업가로서 통영에서 꽤나 이름난 수산업자였던 것으로 보인다.(통영시지1, 518~519쪽)

또한 그는 통영의 3.1운동에서 사전 준비와 여론을 환기하던 시기의 주도 인물 19명 중 한사람이었다.(통영시지 1, 524쪽)

그러나 군자금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박성숙일 것이다. 박성숙의 부친인 박진영(1853~1939)은 일제 시대에 통영에서 3대 부자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하동집의 주인이었다.

그의 부인인 李仁은 바로 이교재의 고모였다.(김상현, 「나의 삶 나의 통영- 박형균 하동집이 왜 하동집이냐 하면.」 인터넷 통영인뉴스( htp:/www.tyinnews.com/), 2019.2.21., 「박형균 –2 백석, 윤이상, 통영현악4중주단. 통영인뉴스2019.2.28. 성주이씨문열공파세포권지2.186. 109)

이교재의 외손자인 한철수의 회고에 따르면, 외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이교재는 통영으로 날아다니듯이 다녔다고 한다.(한철수 마산상공회의소 회장 증언. 2017년 9월 8일 오후 마산상공회의소장실)

이 배경에는 이교재의 고모인 이인과 그의 아들인 박성숙 등이 통영에 거주하고 있었고, 부호인 이들이 독립운동에도 자금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교재가 사망한 뒤 그의 집이 저당 잡혀 경매에 넘어갔을 때 400엔어치의 저당권을 사들여 이교재의 모친에게 되돌려준 것도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249번지에 살던 朴喜鎣이었다.(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건물등기부, 고유번호 1901-1912-162796. 2017년 10월 24일 발행. 이 주소는 박진영의 주소였다.)

또한 앞서 말한 대동청년단 멤버이자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통영의 미곡상 서상호는 박성숙의 아내인 서말희의 오빠였다.

그가 통영에 자주 출입하면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씨네와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교재는 이 사건으로 인해 1923년 12월 20일에 끝난 제1심에서 제령제7호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9월 21일에 경찰에 체포된 지 4개월만이었다.

제2심의 공소신청은 같은 해 12월 24일이었다. 대구의 복심법원으로 넘어가 재판을 받았으나 검사의 공소 취하로 종결되었고, 확정판결은 1924년 1월 24일이었다.(대구복심법원, 형사공소사건부, 국가기록원관리번호 CJA0016705.)

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에도 죄명은 ‘대정8년제령제7호 위반’으로, 형명과 형기란에는 징역 4년으로 기재되어 있다.(진전면 범죄인명부18번 참조.)

그렇다면 그는 1924년 1월 24일부터 다시 4년간의 징역생활에 들어갔으니, 1928년 1월 23일에 만기출옥하였을 것이다. 42살 때의 일이다.

이후 이교재는 서대문형무소에서도 다시 수감되었다는 말도 있다.

주형무소에서의 출옥 직후 상해로 귀환하였고 그곳에서 임무를 부여받고 조선에 입국하는 도중에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는 것이다.(이현희, 「임시정부 수립 이후의 독립투쟁과 서대문형무소」, 백산학보70, 2004.12, 1014쪽. 이 글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투사 명단에 이교재가 포함되어 있으나, 그 전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관한 기록물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한 기술은 후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게다가 2년간 복역하였다면 시기상으로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봉착한다.

1928년에 출옥하였고, 다시 1931년 말쯤 국내에 잠입하였던 사정을 감안하면 그 기간 동안 상해행과 감옥행을 모두 경험하여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국내로 들어오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2년 형을 살았다면, 1931년말에 임정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으면서 새로운 임무를 떠맡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형을 살았다는 저간의 서술은 결정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은 한 신뢰하기 어렵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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