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운동 중에서 증거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부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급한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라는 위임장을 비롯하여 다종의 문건을 휴대하고 입국한 일일 것이다.(여기서는 ‘임명장’보다 ‘위임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경상남북도상주대표’에게 독립운동과 관련한 여러 가지 중요한 사항을 위임한 까닭이다.)
작성연도 중 제일 늦은 것이 1931년 11월 20일이니만큼 그의 입국은 상해에서 창원군 진전면까지의 거리나 교통 수단 등을 생각하면 빨라도 1932년 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교재가 국내에 가지고 들어온 이른바 ‘이교재임정문서’를 중심으로 그의 마지막 독립활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까지 필자가 조사해서 파악한 이교재임정문서 속의 문건은 9개이다.(여기서 문서는 상위개념, 문건은 하위개념이다. 다시 말해 문서는 범위가 넓고, 문건은 정해진 서식이나 규범에 맞춰 작성된 것으로, 기관의 규정 업무에 따라 생산된 기록물을 말한다(松世勤(中國人民大學 檔案學科), 「文書, 文件與公文有區別麽?」, 「檔案時空 1986年 01期, pp. 42~43). 따라서 ‘이교재임정문서’라는 의미는 임정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생산하여 이교재에게 건넨 문건의 조합이라는 뜻을 가지며, 각각의 문건은 그 문서에 포괄된다고 하겠다.)
문서에 포함된 문건의 명칭과 세부 사항은 <표 3>과 같다.
우선 이와 관련해서 검토해야 할 사항은 이 문서가 언제 국내에 들어왔으며 어떻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서에 대해 최초로 보도한 이는 마산일보의 김형윤 기자였다.
1954년 4월에 진전에 있는 이교재의 자택을 방문하였을 때 “洪老媼(이교재의 부인, 필자)은 우리를 맞아들이며 과거 상해 임정으로부터 선생이 군자금 모집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조완구·김구 두 사람 명의로 발부한 비밀지령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귀한 기념물”(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자)이라면서 문건을 소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그 문서를 이교재의 부인인 홍노온이 직접 소개하였다는 것, 두 번째로 그것은 김구·조완구의 명의로 발부된 비밀지령서로서 이교재가 군자금 모집이라는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휴대하였다는 것이다.
미루어 보건대 이 문건은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주요 임무를 위임하는 위임장이었을 것이다.
이 기사에는 다른 문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보다는 전체문서를 보존하기 위한 홍여사의 피나는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김기자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석양이 닥칠 때는 반드시 오리라는 신념으로 이 지령서를 굴뚝 속이 아니면 밧줄에 묶어서 우물 속에, 어떤 때에는 부녀자의 월경대로서 일각일분도 머릿속에 떠난 일 없이…” 숨기고 살아왔다고 전한다.
지령서를 갖가지 방식으로 숨겨왔다가 김형윤에게 털어놓았는데, 홍여사는 이 문서를 지령서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이교재를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몇가지 중요사항을 위임한 위임장(좌)와 상해격발문(우). 본래 두 개의 문건이지만 이어놓고 가운데에 임정의 국쇄를 찍었다.
<그림 2> 달성군 화원의 문장지에게 보낸 특발문(우)와 추조문(좌)
이보다 늦은 1963년에도 동아일보에서 이 문서의 일부를 소개하였다.(「32년 만에 주인 찾는 감사장」, 동아일보, 1963년 3월 16일자)
「32년만에 주인찾는 감사장」이라는 제하의 이 기사에는 임정에 자금을 제공한 3명의 애국지사에게 임정에서 발행한 감사장과 조문 석장이 33년 만에 주인을 찾은 사정을 소개하고 있다.
세 사람이라고 소개하였지만, 실은 진주의 ‘허만기’(허만정의 오기일 것이다.)와 경북 달성의 ‘문대호’(문장지의 아들인 문원만을 지칭함, 필자주)(‘대호’는 실명이 아니라 ‘대효’의 오기로서 5형제의 효도를 통칭하는 칭호라고 한다. 문원만이 대효의 대표로서 이 문서를 찾아간 것이다. 남평문씨의 이름이 조금 복잡한데, 임정에서 조문을 보낸 문장지는 문영박의 호이며, 아래에 나오는 문원만은 문영박의 다섯 아들 중에서 둘째인 시채의 가내 호칭이다-문영박의 손자인 문태갑의 증언이다. 2019년 3월 18일의 통화) 두 사람만 언급되고 있고 있을 뿐이다.
언급되지 않은 한 사람은 창녕의 성낙문이었을 것이며, 조문은 문장지(장지는 문영박의 호. 필자주)와 황상규에게 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기사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쓰여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연고자가 있다면 楊경남지사 또는 홍여사에게 제시하고 찾아가 주기를 바란다”는 부탁의 말도 곁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남도와 홍여사가 합동으로 문건들의 주인을 찾아주는 행사를 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여기서 말하는 양 경남지사는 1961년 8월 25일부터 1963년 12월 16일까지 재임한 양찬우 지사를 말한다.)
이 기사에 호응한 이는 달성의 문대호, 곧 문원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3년 4월 5일에 이교재의 양자인 이정순이 달성군에 있는 문영박의 아들 문원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순은 이 편지에서 “상별지후로 소식이 적적하여… 가지고 가신 서류를 조속히 부송하여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본인의 구호관계 수속을 취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이 편지는 달성의 남평문씨 세거지의 인수문고에서 보존하고 있던 것이다. 이곳에는 2017년 9월 12~13일, 2018년 9월 28일에 걸쳐 방문하였다. 이 편지와 두 개의 문건은 2017년 9월 13일에 확인하였다.)
문원만은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보고 진전면에 찾아와 문장지 관련 문서와 그 외의 문서를 빌려갔다고 한다. 필자가 달성의 남평문씨에서 운영하는 인수문고에 가서 확인한 결과, 그곳에서 보관 중인 문서에는 임정에서 보낸 추조문과 특발문 원본이 있으며 「상해격발문」과 「이교재위임장」은 복사본 형태로 소장되어 있었다.(「상해격발문」과 「이교재위임장」은 문원만이 붓글씨로 베껴 놓았다고 전해 주었다. 문건을 보여준 문태갑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이정순이 송부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뒤의 두 문건일 것이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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