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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13. 00:00

마산번창기(1908) - 4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2

 

■ 각국 거류지(各國 居留地)

월영동의 일부와 신월동 일부를 쪼개서 이루어진 해변의 신시가(新市街)이며 마산이사청 관내의 중심인 곳이다.

1898년(명치 31년) 2월 21일부 칙재(勅裁)로 개항되고 다음 해 1899년(명치 32년) 5월 1일에 거류지 구획이 정해졌다. 그 면적은 138,888평 남짓이며 이것을 A, B로 나누어 A는 일등지를 뜻하며 그것을 1호부터 47호까지 세분했다.

B호는 이등지이며 1호부터 47호까지 세분되어 있다. 그 일등지 전부는 이미지상권 경매가 종료되고 현재로서는 러시아인 소유자 중 몇 개 구획이 빈터로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식 기와집이 즐비해 있다. 이등지는 17호 및 39호부터 45호까지 여덟 구획을 제외하고는 경매가 끝나고 길도 가로 세로 개통되어 집도 띄엄띄엄 지어지고 있지만, 산기슭에 가까운 데까지 집이 들어서려면 아직 몇 년은 걸릴 것 같다.

이 거류지에다 1902년(명치 35년) 즉 광무 6년에 당시의 영사(領事)인 사카타 주지로(坂田重次郞), 거류민회 이사인 센고쿠 간쿠로(仙石勘九郞), 박간지점 지배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 씨 등의 알선으로 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그 시장은 마산포와 같이 매월 3번, 10일 20일 30일에 열리는 산호동 즉 고관(古館)의 그것을 옮긴 것인데 8월 3일이 음력으로 6월 30일이라 즉 10일이 붙는 날이라서 그날을 시장 첫날로 잡은 것이며 장소는 혼마치(本町)부터 사카에마치(榮町, 홍문동)에 이르는 데서 장이 열렸다.

이때부터 거류지는 신시(新市)라 불리게 되었으나 한국인 중에는 시장 복구 운동을 위해 상경하는 사람도 나와 그 시장은 불과 5~6번 열린 후 고관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월동에 새 시장을 개시하여 매월 16일에 열게 했으나 손님들과 출품이 적어서 이 또한 실패했다. 그래도 거류지에 대한 신시란 명칭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신시가 지역 명명에 관해서 당국자들이 자주 모임을 가졌으나 좋은 구획 안이 나오지 않아 시간만 흘러가고 인구가 많아짐에 따라 작은 한 구획에도 십여 채의 전셋집들이 들어오게 되어 우편물의 배달이나 결창의 호구조사에도 A 몇 호인지, B 몇 호인지 조잡한 이름으로서 불편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1908년(명치 41년) 4월, 각국거류지회 회장인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거류민단 단장 마에다 에이치(前田榮一), 경찰서장 경시 미야가와 다케유키(宮川武行), 우체국장 도조 겐타로(東條源太郞), 기타 민단 의원, 유지자(有志者)들이 모여서 한 글자로 된 좋은 이름을 골라서 쓰기로 했다.

남북으로 11개 구획에 동 이름을 붙이고 동서로 11개 구획은 중앙으로부터 분할해서 동명(町名)을 붙이고 동(町)은 반드시 마치라고 읽도록 하고 죠메(丁目)를 나눈 곳에는 죠메(정목)마다 호번(戶番)을 따로 하고 각국거류지회는 이와 함께 동마다 몇 간(間) 간격을 기준으로 벚꽃을 심기로 했다.

그 11개 동의 내역은 아래와 같다.

 

 

□ 혼마치(本町, 1정목에서 5정목까지) - 현 월남동

북쪽의 창원교(昌原橋)로부터 중부의 마산교를 지나서 진해교에 이르는 지역이며 1899년(명치 32년) 개항 당시에 열렸으며 상가는 다음 해 연말부터 들어오게 된 가장 오래된 곳인 동시에 1906년(명치 39년) 말까지는 가장 번화한 곳이기도 했다.

그 북쪽 끝은 당시의 마산 정거장에 바로 통하고, 남쪽으로는 진해군(현재의 마산합포구 삼진지역의 옛 행정구역) 읍내를 거쳐 하나는 고성과 통영으로 하나는 진주를 거쳐 전라도를 가는 노선이었다.

교마치로(京町通)의 북쪽 끝이 정류장 사이의 왕복노선으로 개통되고 나서 그 번성이 모두 교마치 쪽으로 쏠리고 이제는 조금 기울어진 감이 있다. 그래도 앞의 바다와 관련된 시설이 있고 남쪽 끝의 일본전관지에 중포병영이 세위지게 되므로 그 경향이 만회된 셈이다.

혼마치 1정목은 동쪽이 바로 바다이기 때문에 건물이 적어서 한산한 감이 있으나 그 앞바다를 매립하려는 공사가 시작되리라는 소식이 있어 그때는 교마치로와 별 차이 없는 번화가로 둔갑할 것이다.

이 동네에 사는 고참인 시게무라 우리치(中村宇一), 다나카 츠루마츠(田中鶴松)씨에 의하면 자신들이 이주했던 1900년(명치 33년) 말까지 혼마치는 동네 양끝이 아직 개통되지 않았던 상태였다고 한다.

혼마치 2정목은 해안가 일대를 가리키며, 해관지(海關地)에 이르는 사이에 무학교(舞鶴橋)가 걸려 있다.

□ 교마치(京町, 1정목에서 3정목까지) - 현 두월동

북쪽의 완월교(玩月橋)에서 중부의 반룡교(盤龍橋)를 넘어 남쪽의 혼마치 모퉁이까지의 지역으로 1905년(명치 38년) 말부터 개통한 시가지이다.

1906년 초봄에 완월교 주변에 나가야(長屋)가 한두 채 세워진 후 초여름 때부터 건축공사를 보게 되었다. 그해 6월 20일 본 책 저자가 마산에 왔을 때는 동네 전체로 16~17채 밖에 되지 않았으며 특히 동쪽 일대에는 건물이 없어서 해면을 지나온 남풍이 바로 가게에 불어와 시원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북쪽 끝은 한 길이 있을 뿐 가게의 번창이란 엄두도 못 내던 터였는데 같은 해 가을에는 혼마치로의 남쪽 끝 길이 닫히게 되고 그와 동시에 동네 북쪽 끝머리에서 마산포에 통하는 길이 열려 정거장 길은 이때부터 동쪽으로 꺾이게 되었다.

그 이래 혼마치의 건축공사는 아주 바쁘게 돌아가게 되고 그 공가 소리는 밤에도 들릴 정도였다. 같은 해 연말에는 동네 동쪽에도 기와집 건설이 시작되어 마침내 혼마치의 번영을 능가하고 마산 제일의 장소가 된 것은 1907년 초봄부터이다. 혼마치 2정목 위에 있는 야나기마치(柳町, 신창동)에 이르는 모퉁이는 하나미사카(花見坂)라고 불리기도 했다.

□ 사카에마치(榮町) - 현 홍문동

사카에마치는 대사교(大使橋) 이남에 있으며 혼마치와 동시에 개통된 시가지이며 경찰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교차점 사방은 양측에 요리점이 생겨서 마치 마산의 유흥가처럼 되어 버렸다.

□ 하마마치(濱町) - 현 창포동

혼마치와의 경계를 이루는 신월교 이남에 있으며 혼마치 5정목으로 나올 때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가지는 해안 매립과 동시에 개통된 곳이라 바다와 면하여 있어 길 한 쪽에 집이 있을 뿐이다.

그 1정목에서 2정목까지는 모두 해관 소유지이지만 1정목에는 해운업, 위탁판매업, 기타 해관에 연고가 있는 자가 땅을 빌리는 허가를 받고 거주하거나 창고를 지어서 해안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기도 했다.

1907년(명치 40년) 7월에 해관이 창고를 건축할 예정이 있어서 그 터에 집과 창고를 없애도록 하여 그 꼭이 참으로 못 보게 되었다. 2정목은 애초부터 차지(借地) 허가를 내지 않아서 오늘날의 1정목보다는 아주 살풍경으로 자랑거리는 전혀 못된다.

3정목와 2정목이 이어지는 지역은 러시아인의 소유라 건축물이란 아예 없다. 다만 모퉁이 한 구획을 사이에 둔 구역에는 마산수산회사 및 부속어시장이 있기 때문에 상점들이 많이 덜어서고 있다. 가게 뒷 터에는 어부의 집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빼곡히 줄지어 있다.

출선(出船) 후의 어부 집들은 다른 데와 변함없으나 배가 들어온 후에는 먹고 마시며 소란을 피우고 시끄럽기만 하여 여기저기서 노래 소리, 싸움소리가 이어진다. 근처의 상점들도 이때가 장사가 잘 되는 법이다. 출선과 입선은 매일 다소나마 있지만 출어기는 길게는 일주일, 짧게는 사흘 정도 걸린다.

이 뒷골목은 일본에서 말하는 빈민굴보다 더 열악하여 다타미 서너 장 넓이의 집에 부부로 세 가족이 살면서 줄판이 벌어질 때에는 아침 낮 밤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번갈아 들락거리기도 한다. 세상에 불경기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양상이니 참 기운도 좋은 사람들이라 하겠다.

이 악의 없는 어부들이 수산회사 소속의 에비스신사(惠美壽神社)를 중심으로 해업을 독점하고 그 기세가 높은 것도 마산의 꽃이라고도 하겠다.

□ 다이마치(臺町) - 현 대내동

다이마치는 이사청이 마산포에서 이사해 왔을 때 개척된 곳이라 이사청, 러시아영사관 소유지와 영국계약의 지계(地界) 일대의 총칭이다.

이사청, 이사청 관저, 이사청 직원 숙소 및 러시아 영사관이 있을 뿐 상가는 한 채도 없다. 다만 조망이 좋아 소나무가 울창한 일화산록(日和山麓)에 자리 잡고 있다.

□ 야나기마치(柳町) - 현 신창동

야나기마치는 북쪽의 웅천교를 꺾어 올라 교마치의 서쪽 위에 나란히 가면서 대사교(大使橋)에 이르는 사이의 지역이며 교마치와 같은 시기에 개통한 시가지이다.

평탄하지 않은 비탈이 많은 동네라서 아직은 번화롭지는 못하다. 이름에는 버들 유(柳)자가 들어갔지만 버드나무는 없다. 집들이 이제야 들어서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2, 3년 내에는 변화가가 될 것이다.

□ 아사히마치(旭町) - 현 평화동

아나기마치와 나란히 월견교까지 이르는 지역

□ 사쿠라마치(櫻町) - 현 문화동

아사히마치의 서쪽 조금 높은 데로 아사히마치와 병행하는 지역으로 시중(市中)에서 가장 높은 시가지이다.

□ 토모에마치(巴町) - 현 대외동

마산경찰서가 있는 곳이며 그 서쪽 옆구리 지역 일대를 총칭한다.

□ 미도리마치(綠町) - 현 유록동

토모에마치의 서쪽에 위치하며 그와 병행하는 지역이다.

□ 아케보노마치(曙町) - 현 청계동

월견교(月見橋) 이남의 사카에마치와 토모에마치 사이에 있는 구역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네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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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23. 00:00

마산번창기(1908) - 1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를 포스팅한다. 기록전문가 박영주 선생이 일본의 한 대학도서관에 참자고 있던 이 책을 찾아냈고, 이를 창원시정연구원이 번역 출판하였다.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마산이 언급된 책은 『韓国出張復命書』(1901), 『韓国案内』(1902), 『韓国水産誌』(1908) 등이 있지만 단행본으로는 이 책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는 『馬山と鎮海湾』(1911)으로 알려졌었다.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 통감부 설치와 통감 정치, 고종의 강제퇴위와 순종 즉위 등으로 이어지는, 사실상 반(半)식민지 상태였던 당시의 시대상황은 마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창원군청이 아니라 통감부의 마산이사청이 실질적인 통치기관이었다.

더구나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일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항기와 식민지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마산이라는 지역 사회를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또 하나의 자료가 추가된 셈이다. 번역서에 실린 ‘발간사’와 ‘마산번창기 해제’를 우선 소개한다.

 

 

발간사

지역의 역사와 문화전반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지역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웃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데 필수적인 기초가 될 것입니다. 또한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자긍심을 확립하려는 노력은 도시성장을 위한 지방자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지난 2020년 12월, 지방자치법 정부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창원시는 마침내 인구 100만 대도시에 걸맞은 ‘특례시’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창원, 마산, 진해의 3개 시가 통합한 지 10년 만에 얻게 된 소중한 결실로, 통합창원시를 감싸왔던 3분 4열의 원심력이 ‘셋(3)이 하나(1) 됨으로써 다섯의 총합으로 나타난다’는 3·15의 구심력 원리가 발현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 창원시는 2022년 ‘창원특례시로서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됩니다. 따라서 ‘창원의 번창’을 위해 한 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 행진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여러 시민의 발걸음과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해 봄, 창원시정연구원은 창원이 가진 고유성과 차별성을 찾고 현재를 기록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필요한 역사·문헌자료의 발굴 및 번역, 시민·전문가 연구 공모사업 등의 다양한 연구 활동을 맡을 창원학연구센터를 출범시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2021년 새해의 시작과 함께 그 첫 번째 결과물로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마산번창기(馬山繁昌記)』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마산을 다룬 문헌 중 가장 유명한 『마산항지(馬山港誌)』의 저자인 스와 부고츠(諏方武骨)가 1908년에 발행한 책으로, 전통적인 농어촌이었던 마산지역이 근대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최초의 조사연구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하에서 한국의 근대식민도시가 어떻게 형성되고 건설되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엿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일본인의 시각에서 근대 창원지역, 그 가운데 근대 마산사회를 대상으로 자신들의 번창을 구가한 점은 뼈아프지만, 한국의 근대사가 안았던 숙명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하며, 역사의 교훈을 절실하게 새기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마산번창기』가 출간되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습니다.

오랫동안 제목 정도만 알 뿐 구할 수 없었던 귀한 자료를 찾아 내어주신 박영주 선생님, 자료가 지닌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알아보시고 창원학연구센터의 첫 과제로 제안하고 발간에 필요한 모든 작업을 도맡아 주신 한석태 초빙연구원과 송효진 센터장, 그리고 일본어와 우리말의 간격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매끄럽게 번역해주신 재일동포 하동길 선생님, 어떤 요청에도 흔쾌히 도와주신 문창문화연구원의 안용준 연구위원 및 한 면 한 면 정성으로 디자인과 편집을 맡아주신 불휘미디어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창원시정연구원과 창원학연구센터는 창원인에 의한 『창원번창기』가 나오길 기대하고, 창원의 언어, 역사, 지리, 풍속, 예술, 문화, 인물 등의 인문학 분야를 중심으로 사회, 정치, 경제, 행정 등 사회과학 분야와 도시, 조경, 건축, 교통, 물류 등의 지역 도시학 분야 등과 연계할 수 있는 체계적인 연구기반을 다져 나가며 창원인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2월

창원시정연구원장 전수식

 

마산번창기 해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탈과 경영은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창원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일본 문헌자료를 번역하는 작업은 이 지역의 식민지화 전개과정을 살펴보는 데 필수적 과제이다. 창원의 근대사 연구에 선결해야 할 작업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산과 진해지역은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을 이른 시기에, 가장 직접적이고도 강력하게 받은, 일본제국의 식민도시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식민도시 건설 당시 일본인의 시작에 의해 기록된 문헌자료의 검색과 정리는 지역의 근대사 연구에 있어 더 이상 미루어 둘 수 없는 일임은 자명하다.

『마산번창기』는 1908년(명치 41년)에 발간된 저작으로, 1902년(명치 35년) 『한국안내(韓國案內)』 속의 마산편에서 소개된 소략한 기사와는 달리 한 개인 기록자이자 연구가인 단행본 체재의 형식과 내용을 갖춘, 창원지역 중의 마산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지리지이다. 동일 저자에 의해 보강된 1926년(대정 15년) 『마산항지(馬山港誌)』와 함께 근대 식민도시 마산을 조명하는 데 가장 비중이 크고 내용이 충실한 것으로 평가된다.

저자 스와 부고츠(諏方武骨)는 부친 고슈(翁洲)의 차남으로 태어나 부친의 영향으로 시문에 일찍이 눈을 떴다 한다.

부친은 아이즈와카마츠(會津若松)란 대번의 무가 출신으로 소년 시기 선발되어 에도에 가서 쇼헤고(昌平黌)에서 10년간 수학하고, 귀향한 후 일신관(日新館)의 교수가 되었다. 보신전쟁(戊辰戰爭)에 연루되어 참전했다가 지금의 후쿠시마 현인 아이즈번의 몰락을 보게 된다. 유폐의 고초를 겪은 후 와카마츠 현 양성학교장 겸 예과학과장, 후쿠시마 현 제3사범학교 학감을 역임하고 1888년(명치 21년) 미야기(宮城) 현 센다이(仙台) 시에서 세이신기쥬쿠(聲振義塾) 관사숙을 열고 한문을 교수했다. 동북의 두 석학 중 일인으로 칭해졌다.

저자는 어릴 적부터 부친의 훈도에 따라 영문, 한문, 일문을 배우고 일찍이 지리 역사에 취미를 가졌다 한다. 몰락한 무산 계급이 대만과 조선으로 진출한 사례의 한 전형으로 저자의 이동 경로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저자는 도한하기 전 먼저 대만에서 일정 시간 주유한 뒤 모친을 히로시마(廣島)의 집에서 장사 치루었다. 오카야마(岡山) 출신의 보육원 교사이자 산파 자격증을 가진 부인과 혼인한 것도 이 시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인천에 도착한 다음, 마산에 온 것은 1906년(명치 39년) 3월이었다. 이 해 6월 하순부터 기록을 개시하여 1908년(명치 41년) 9월에 완성한 것이 바로 『마산번창기』이다.

명치 41년 12월 1일 발행일자의 저자 겸 발행자는 스와 부고츠(諏方武骨)란 본명을 밝히고 책의 서언에서는 거동노부(去洞老夫) 스와 쇼오센(諏方松仙)이란 아호와 필명을 사용한다. 별천지(洞天)를 찾는(去) 소나무 아래 신선(松仙) 이름과 사무라이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무골(武骨)이란 이름이 퍽 대조적이다.

후일 『마산항지』에서는 스와 시로(諏方史郞)란 이름을 사용하고 자신을 겸칭할 때는 국사(局史 ; 시로의 눈)라 하기도 하여 역사기록자임을 자임한다. 자신의 집필 공간을 하쿠엔보(白猿坊)라 하여 백수(白首)임을 은연중 드러내는 문사적 기질을 드러내기도 한다.

17년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마산항지』와 『경남사적명승담총(慶南史蹟名勝談叢)』이란 책을 상재하고 그 후 건강이 악화되어 병상에서 「경남사적보유」를 쓰다가 1927년(소화 2년) 2월 8일 타계하였다.

본 『번창기』는 연구자에게 실물을 제공하기 위해 원본을 그대로 후철하고 번역본을 전철하기로 한다. 원본에는 25쪽에 걸친 광고가 게재되어 있어 당시 마산의 사회경제상 일면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광고 연구자들에게 희소식일 것이다.

목차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언

제1장 마산의 대관

제2장 마산의 관공서

제3장 지질 및 기후

제4장 위생 및 의사

제5장 교육기관

제6장 신도 및 종교

제7장 교통

제8장 호구

제9장 경제사정

제10장 마산의 잡록, 여러 근황

마산의 노래

본문 109쪽, 전부(前付) 14쪽, 후부 14쪽으로 전체가 구성되어 있다.

2020년 여름, 창원시정연구원 창원학연구센터 자문위원인 박영주(朴永周) 선생이 일본 내 대학도서관 수장고에서 잠자고 있던 원본을, 출간한지 110여 년 만에 발굴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명치시대의 어문으로 난독의 저술인지라 재일동포 재야사학자이자 교토 소재 국제중고등학교 전 교장 하동길(河東吉) 선생께 번역을 의뢰하였고 쾌히 수락한 번역 작업에 박영주 선생이 각주를 달고 본인이 윤문과 해제를 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창원학연구센터가 기획하고 있는 창원지역 근대문헌자료 번역 작업의 첫 결과물로서 발간함을 밝혀두고자 한다.

2021년 2월 18일

창원시정연구원 창원학연구센터 초빙연구원 한석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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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11. 00:00

馬山繁昌記(마산번창기) / 1908년 발간

지난 3월 31일 페이스북에 흥미로운 글이 하나 떴다. 창원지역에서 기록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박영주 선생의 글이었다. 112년 전인 1908년에 발간된 『馬山繁昌記(마산번창기)』라는 고서를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반가운 일이라 포스팅한다.

 

<마산번창기 표지>

 

먼저 페이스북에 올린 박영주 선생의 글 전문을 소개한다.

 

개항기 마산 문헌 하나 찾았다

 

오래 전부터 이름 정도만 알고 못 찾았던 자료인데 이번에 드디어 찾았다.

『慶南志稿第一編 馬山繁昌記』. 明治41年, 1908년 마산의 耕浦堂에서 발행한 책으로 저자는 諏方武骨. 일제강점기 마산에 대한 가장 유명한 문헌인 馬山港誌(1926)의 저자이기도 하다.

책은 광고면 등을 포함해 148면 분량으로 서언, 마산의 대관, 관공서, 지질및기후, 위생및의사, 교육기관, 신도및종교, 교통, 호구, 경제사정, 마산잡록잡황, 마산의 노래 등으로 구성된 종합적인 안내서 성격이다.

1900년대의 마산에 대한 일본 문헌으로 韓国出張復命書(1901), 韓国案内(1902), 韓国水産誌(1908) 등 여러 문헌에 단편적으로 언급된 것이 있지만 단행본으로는 이 자료가 처음으로 보인다. 지금까지는 馬山と鎮海湾(1911)으로 알려졌었다.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 통감부 설치와 통감 정치, 고종의 강제퇴위와 순종 즉위 등으로 이어지는, 사실상 반(半)식민지 상태였던 당시의 시대상황은 마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한제국의 창원군청이 아니라 통감부의 마산이사청이 실질적인 통치기관이었다.

더구나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번창해 가는 新市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일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또 近刊 書目으로 馬山開港十年史, 馬山名所舊跡誌, 馬山裏面 세 권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계획을 주도한 것으로 보여지는 諏方武骨은 1906년경부터 마산에 정착한 이후 1915년에 朝鮮史談会란 단체를 만들고 朝鮮史談이란 잡지도 내며 활동하다가 1926년에 馬山港誌를 출판했다.

근간할 예정이었던 책들은 아마도 출판되지 못했고 아마도 馬山港誌에 수렴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다음 해에 慶南史蹟名勝談叢이 그의 유고집으로 나왔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항기와 식민지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마산이라는 지역 사회를 좀더 깊이 이해하는 또 하나의 자료가 추가된 셈이다. 

 

<마산번창기 광고면에 실린 현 월남동 3가에 자리한 인풍당약국과 자산동의 한국요리점 융월. 융월의 광고에는 두 기생의 사진과 함께 하단에 명월, 월선 등 기생 이름을 공개해 놓았다>

 

위의 글을 4월 6일 경남도민일보 최석환 기자가 기사화 했다. 기사 제목은 「개항기 풍경 담은 〈마산번창기〉 발견」.

이 책의 광고 면에는 당시 마산의 약식 지도 외에 약, 요리, 잡화, 여관, 은행, 병원, 신문, 주조, 정미소, 인쇄, 수산회사, 법률사무소, 목재상, 사진관, 산파, 미곡, 담배 등의 업체를 소개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통영의 산업에 대한 광고이다. 통영의 어시장, 여관, 잡화점, 선박회사, 요리점, 약국 등도 이 책 광고 면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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