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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번창기(1908) - 15 - 제6장 신도 및 종교

by 운무허정도 2021. 11. 29.

제6장 신도 및 종교

 

일본 고유의 신도(神道)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런 시설도 없지만 멀리 고향을 떠나 한국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가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숭배하여 앞날의 안전을 기원하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 건너와 오늘날 평온하게 살 수 있음은 신명(神明)의 가호(加護) 덕분이라 감사하지 않는 자 또한 없으리라. 날마다 신에게 감사하고 우국지심을 굳건히 하는 데는 간접적으로라기보다 직접적으로 참배를 통해서 그 기원을 실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것이 무사도(武士道)의 장려에 도움이 되고 일본 정신을 양성한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신시 제일의 경승지(景勝地) 속칭 호시오카(星岡)는 당국자들 사이에 이미 공원지가 될 것으로 예정되어 맨 먼저 이세신궁의 그 혼을 나누어 받는다는 기획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가. 하루 빨리 실현되었으면 한다. 신생아의 참배가 이루어지고 신덕(神德)을 느끼고 맹세를 올리며 나아가 대일본제국 국민임에 위안을 주게 되는 것은 거류민 전반이 강하게 바라는 바이다.

불교로는 본파본원사(本派本願寺), 정토종(淨土宗), 진언종진의파(眞言宗眞義派)의 세 교장(敎場)이 있다.

 

 

□ 본파본원사

포교장(布敎場)은 신시 하마마치(濱町 빈정, 현 창포동) 2정목 1번호(혼마치 4정목을 동쪽으로 들어간 모퉁이)에 있으며 개항 당시 러시아의 미센코(개항 이후 마산포에서 상업활동을 한 러시아인)란 사람의 소유 가옥을 빌려 쓰면서 히다카 타츠케이(日高達契) 스님이 열심히 포교에 종사하고 있다.

불교 여성회는 열심히 포교하는 중에 생겨나 제법 그 기세가 뚜렷하다. 스님의 세력 범위는 오직 마산에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통영, 창원, 진영, 낙동강까지도 미치고 있다.

스님은 야마구치(山口) 현 출신이며 1904년 러일 전쟁 때 한국에 건너오게 되어 먼저 진해만방비대에서 설법하여 병사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래 매월 한 번씩 첫째 일요일에 거제 송진까지 가서 설교를 계속하고 있다.

또한 매월 15일에는 진영에 가서 무라이(村井) 농장의 농부들을 모아서 설교를 듣게 하고 있다. 스님은 활달한 성격으로 세상일에도 밝고 교제장(交際場)에서도 많이 환영을 받고 있다.

 

□ 정토종 포교장

신월동에 있으며 미스미다 지몬(三隅田持門) 씨가 혼자서 운영하는 작은 사원이다.

그곳은 마침 화장터에 통하는 길에서 있어서 종파를 불문하여 화장자의 관을 이 절에 안치하고 망자를 보내는 사람들은 여기서 고별하는 것이 예사다.

지몬 스님도 야마구치현 출신이며 다소 학식이 있고 세상일을 잘 알며 일본인 학교를 마산에 처음 세운 원조이기도 하다. 또한 세속사, 세상의 단맛 쓴맛 다 잘 아는 인물이라 하겠다. 마산 염불 강좌를 스님이 행한다.

 

□ 진언종 포교장

마산포 공신당산(公神堂山)의 동쪽 기슭에 있다. 곧 홍법대사당(弘法大師堂)이며 마산포 유지자(有志者)의 정신 수양을 위한 도량이다.

1908년 마산포의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송원조장)를 중심으로 그 외 유지들이 포교사 미츠미야 류코오(三宮隆晃, 삼궁융황) 스님을 위해 건축한 것이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숲이 우거진 데에 있어서 전형적인 사원풍의 절로서 마산포의 자랑에 들어간다. 스님은 니이카타(新瀉, 신사) 현 출신이며 대학림(大學林)을 나와서 그 유명한 도쿄 메지로(目白)의 절에서 샤쿠운쇼(釋雲照, 석운조, 1827~1909,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일본 진언종의 승려) 율사의 제자가 된 스님이다. 지금도 깊은 인연에 있어 만사 그 율사의 지휘를 받고 있다.

왕년에 서생이었기 때문인지 먹고 마시는 것에는 개의치 않고 가요, 음곡(音曲) 등에 능하다 한다. 가요와 시는 지금도 한다 하니 그 품행이 단정한지는 보증할 수 없는 노릇이다.

본 항(港)의 불교회의 상황은 이상과 같으나 한국인에 대한 도화기관(道化機關)을 갖춘 곳은 아직은 없다.

일상에서의 근행(勤行)은 우선 의식을 응용해서 일본 불교의 진상을 발양(發揚)하기 위해 활동을 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생사를 깊이 사고하여 제행무상(諸行無常) 함을 각성하고 헛되이 장례에 부조가 많음을 바라는 것보다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위안을 주는 것을 바라며 있다가도 없어질 재물이 많아지기를 원하기보다 고생이 낙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것을 원하고 방편적(方便的)인 설교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보다는 도리어 선남선녀를 도의 길로 이끄는 것을 더 원하는 마음이야말로 오늘날 불교계의 정신 자리라 할 것이다.

 

□ 기독교는 마산포에 천주교는 완월동에 두 유파가 있다.

완월동 쪽은 프랑스 사람이 이끌고 마산포 쪽은 한인이 이끌고 있으며 두 파 모두 한인만을 상대하고 있다.

여기에 다니는 한인들은 여전히 선도된 모습을 모여주지 못하고 있다. 협박, 허위, 절도, 사기, 속임 등 온갖 악덕스러운 문자(文字)에 신도들이 씌워져 있다.

신시에는 일본 기독교회가 있기는 하나 이 또한 상주하는 교사나 목사가 있는 곳은 아니다. 특히 신도 중에는 그 교리를 활용할 능력을 갖춘 이가 적고 고집스럽고 완고하여 세상에서 인정을 못 받고 있다.

구래(舊來)의 신도도 도리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경향이 있어 보이며 교세는 거의 보잘것없고 겨우겨우 유지되고 있는 감이 있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다섯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