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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7. 27. 00:00

<조선토목사업지>의 마산항만

이 글은 1928년에 펴낸 <조선토목사업지>에 기록된 마산의 '항만' 편 번역문이다. 초벌 번역이라 글이 거칠다. 그림은 책의 표지와 목차이다.

 

 

마산항은 경상남도의 중앙 진해만의 가장 안쪽에 있다.

동경 28도 33분, 북위 35도 11분에 위치하며, 동․북․서 세 방향으로는 육지로 둘러 싸여 있어 남쪽으로 항구를 열고 있다. 게다가 항외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섬들이 잔재하여 외해로부터의 파도를 막아 주며, 항내의 수면 면적은 752여 헥타르(2,276,010평)는 항상 잔잔하다.

간만의 차이는 2.22미터(7.33척)으로 수심이 깊어 진정한 천혜의 양항(良港)이다.

본항은 예부터 조선의 남쪽지역에 있는 유수한 항만으로 이용되어 왔고, 고려시대 원종 15년 갑술년 곧 일본의 문영(文永)11년, 충렬왕 7년 신사년 곧 홍안(弘安) 4년의 2역(二役)에서는 정동행영(征東行營)을 합포(현재의 구 마산)에 두었고,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의 근거지로 여기서부터 일본으로 향하여 출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이조시대에 이르러 현종 4년(일본의 靈元 천황의 寬文 3년 德川家綱時代) 이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여 每田 1결에 대하여 가을에는 7말, 봄에는 6말을 상납하도록 하였고, 마산포 지역 내의 일각에 조창을 설치하여 창원군수를 전운사(轉運使)로 겸임하게 하였다.

그로 인해 창원․함안․칠원․창녕․영산․의령․진동․고성․사천․진주․밀양․김해․거제 등 13개 군의 공미(貢米)를 이 지역으로 집적하여 수시로 공매(公賣)하고 경창(京倉)에 금수(金輸?)하는 것으로 되어 감으로써 급격하게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되며, 이에 따라 동성․서성․중성․성산․성호․오산의 6개소를 포섭하는 신마산포를 조성하고 이를 창원항과 공칭하며, 본래의 마산포는 구강이라고 불렀다. 현재의 구마산이 곧 이것이다.

그 후 광무 3년(明治 32년) 5월 1일 군산․성진과 함께 통상항(通商港)으로서 개항하고, 동년 6월 2일 거류지 규칙(제7절 군산항부에 기재된 부분을 참조)이 협정되었고, 다시 광무 6년(明治 35년) 5월 17일 다음과 같이 일본 전용관리 거류지에 관한 계약을 하게 되었다.

 

마산-일본 전용관리 거류지 약정서

제1조 각국의 조계지 외 10리 이내에 있어서 永租, 暫租의 章程에 준하여, 일본 정부가 매수한 지구 및 그 부근을 일본 거류지로 하고 해당 거류지의 위치 및 구역을 별지 도면에 따라 정함.

제2조 거류지내에 있는 도로, 구거는 본래 관청소유에 속한 것으로 이 조약 시행 후에는 제반 시설 유지의 권한은 일본 영사에게 일임함.

제3조 거류지내에 있는, 본 약정서의 조인 당시에, 이미 외국인(일본인 포함)이 소유한 지역이나, 매수하였으나 아직 결제하지 아니한 한국인 소유의 지역은 매수 전에는 종래의 소정 지세를 납부토록 함.

단, 한국인 소유지역은 본 약정서 조인 후 1개년 이내에 일본정부가 그것을 매수할 것이므로 이 매수 전에는 해당 지역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매도나 임대할 수 있음.

제4조 거류지에 있는 한국정부 관유지의 매수 가격은 매 1백제곱미터당 日貨 3元으로 정함. 한국인의 소유지역과 가옥의 매수에 관해서는, 만일 소유자의 신청가격을 일본 영사가 인정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을 경우에는, 한국 감리는 일본 영사와 회동하여 평가인으로서 공평하게 평가해야 함.

제5조 거류지의 지세는 본 약정서 조인일로부터 기산하여 1개년 1백제곱미터당 日貨 20錢으로 정하고 매년 1월 10일 이내에 그 해의 年稅를 지불함.

제6조 거류지내의 미매수지 내에 있는 일반 백성의 무덤을 이장해야할 때는 매 무덤마다 日貨 5元의 이장비를 일본 영사로부터 지급받음.

제7조 거류지에 필요가 있어 그 곳의 해수면을 매립하는 경우에는 미리 한국 監理와 협의를 거침을 요함.

본 약정서는 日韓文으로 각 2통을 작성하여 상호 기명하여 조인하고, 이에 그 확실함을 증빙함.

대일본 명치 35년 5월 17일 특명전권 공사 임권조(林權助)

대한 광무 6년 5월 17일 외부대신 서리 최영하(崔榮夏)

 

신마산포가 개항장으로 되어서 및 본항으로 눈을 모으고 있는 러시아는 빈번히 자국민들을 이주시키고, 그들의 건축물은 점차 즐비해져 성황함을 드러내고 있지만, 일러 전쟁이 일어나 공히 모두 퇴거하였으며, 광무 9년(명치 38년) 10월에는 마산․삼랑진 간의 군용철도가 개통되고, 동년 11월 11일로부터 일반 여객화물의 유임편승(有賃便乘)이 개시되기에 이르렀으며, 내왕하는 일본인이 점점 많아짐에 더해 수출입 화물도 나날이 증진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본항의 항만설비는 구마산에서 옛날 축조와 관련한 조석(粗石)으로 둘러 싸인 소선류(小船溜)가 존재하고 있을 뿐이고, 신마산은 개항 후 간신히 해수면의 일부를 매립하여 그 땅에 우선 부두를 건축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한국재정고문시대에 이른 융희 2년(명치 41년) 사업으로서 공비 예산 1만 1천원(圓)을 계상하고, 다시 융희 4년도(명치 43년)에 1개년도에 한하여 예산 4천 4백 21圓을 추가하지만, 후에 790여圓의 감액을 하여 결국 예산 1만4천 6백 26圓 89錢으로서 예정된 계획을 수행하였다.

곧 예전부터 있던 부두에 대해 전체 길이 46間 5分 이내, 돌단(突端)의 전체길이 5間 5分을 보완수선하여 교대(橋臺)를 설치하고, 거기에 전체길이 72尺 2寸, 폭 5間 및 그 終端 길이 11尺 2寸, 폭 5間의 계단이 있는 목조 잔교(棧橋)를 가설하고, 해안 세관 구내지(構內地)를 간조면(干潮面) 위로 12척 5촌 및 19척의 높이로 땅을 고루었고, 그 지상에 목조 굴건평가아연인파철판즙(掘建平家亞鉛引波鐵板葺, 아연 골함석 박공지붕 건물) 50평의 창고 1동을 건설한 것이외 세관 주위에 철조책을 둘렀으며, 또 세관지서장 관사로 목조 2階 건잔와즙(建棧瓦葺, 박공기와지붕건물) 총 건평 23평 2홉 5작의 1동을 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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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9. 00:01

일제 강점기 신마산 혼마치(本町)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소개한다.

아래 것은 같은 장소에서 찍은 현재 사진이다. 위 사진을 현재와 비교하기 위한 사진이다.

 

 

191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산 월남동 1가(현 3.15대로) 사진이다. 당시에는 혼마치(本町)라 불렀던 중심거리였다.

현 경남은행 신마산지점 앞 쯤에서 월영광장 쪽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두 사진을 비교해보면 지난 100년간 얼마나 도시가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사진의 길 왼편이 바다인데, 지금의 해바라기 아파트가 앉아있는 블럭이다. 나중에는 일본인들이 저 해안가에 버드나무를 심기도 했다. 저 바다는 1926년 매립되어 사라진다.

오른쪽 도로변의 일본식 건물들은 규모가 상당히 크다. 대부분 목조였고 3층건물도 있다. 도로는 비포장이었다. 길 양쪽을 줄지어 선 나무 전봇대가 인상적이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뒷산은 무학산과 이어진 대곡산 줄기이다.

옛 사진에서 오른쪽 도로변으로 저 멀리 건물 한채를 자세히 보면 단층인데 층고가 높은 건물이 있다.(왼편 해안이 끝나는 지점 쯤. 벽체가 검게 보임) 지금 월남동 성당이 앉아 있는, 당시 일본제일은행 마산출장소 건물이다. 잘 생긴 건물이었다.

사진의 곳은 '신마산'이다.

조계지로 개항된 땅 신마산은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이었다. 자신들이 새로 건설한 마산이라는 의미였다. 

반면 전통도시 마산포는 구마산이라 불렀다. 낡고 오래되었다는 의미였다.

마산포 주민들은 이를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일이었다. 강점기 내내 그렇게 불리었고 그 관습이 지금에 왔다.

·(·) 속에 담긴 뜻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생명력 강한 지명은 아직 살아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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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30.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4. 야까이 일인 도가 어조

94. 야까이 도가(都家) 일인 어조(漁組)

 

신마산에는 일본인들의 조차한 곳이라 해서 대개 한인들은 신마산을 거류지 아니면 조계(租界)라고 하는데, 이곳이 일인들의 생활 중추지점이다.

 

<1920년대 신마산 일본인 거리인 경정(京町, 쿄마치>

 

모든 생활필수품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신마산 일인들끼리의 상거래로서 자족한 것이며, 지금 외교구락부라는 다실 근처에 아케트(염매시장 廉賣市場)’를 설치하여 그들끼리의 편리를 꾀하였으며, 신마산 발전소 근방 일대를 매립하기 전까지는 일인들의 생선 도매상이 있었다.

이 일본인 생선 도매상 즉 수산조합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면 한인 어민들을 세리에 가지 않고 대부분 구마산 어판장 위탁으로 하고, 이 때문에 일본 어상(漁商)들은 어로 현장에서 직접 매매 계약을 하는 식 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가장 근거리의 밤꾸미(栗九味) 어장이 단골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들 어판장을 어떻게 된 일인지 한인들은 야까이 도가라고 하였다.

대체로 야까이 도가란 어느 나라 말인가?

한어(韓語)는 물론 아니요, 중국 말이나 한문어도 아니며 또 일본말도 아니다. 그래서 일본 속어와 일본의 언어 사전에서 그런 비슷한 말을 들추어 보아도 찾을 길이 없다.

필경 야까이란 말은 입하된 선어(鮮魚)세리할 때 경매인이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말이 야가지(也賈之, 韓語로 사라는 뜻)’인데 일어를 모르는 한인들은 야가지야까이로 잘못 알아듣고 야까이한 것으로 된다.

이 야까이 도가도 1940년 경(추측) 현재 매립 후의 구마산 어조(漁組)와 합작하여 자연 해산이 되고 그들의 야망도 패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 특기할 일은 마산상업회의소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운영이 괄목하리만큼 활발하여 대한제국 정부에서 장려금조로 금 5백원을 전달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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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1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69. 도로의 변천

69. 도로의 변천

 

신마산 일대의 해군기지를 둘러싸고 일·로의 각축이 첨예화되어 가던 무렵 일본은 그들 거류민의 집단 거주지 지역에 대한 시가지 도로의 확충에 주력했다.

진해의 근대식 시가지 구획정리와 더불어 신마산 일인가(日人街) 도로 역시 미비하다고는 하나 그 당시로 봐서는 제법 제격을 갖춘 형태였다.

그러나 구마산 일대의 도로는 1913년까지 노폭이 겨우 3미터 정도(신마산에서 구마산으로 연결되는 길, 진주 방면으로 가는 길)를 가지고 소위 신작로로 불리었다.

그런데 1913년에 현재의 부림시장에서 해안으로 내려가는 도로와 제일은행 앞에서 남성동 쪽으로 동행(東行)하는 길이 확장됐으며, 192310월경에는 중성동에서 시민극장 앞으로 내려가는 길과 현 조흥은행 앞길이 현재의 폭으로 확장되었다(확정 전 3미터 폭).

그리고 어업조합에서 불종거리는 신작로가 없었던 곳이어서 선창에서 구마산역까지 어물을 운반하는 데는 겨우 지게나 작은 수레로써 전 삼각상점과 일신여관 골목길을 오르내렸다.

중성동에서 동으로 가는 길은 물론 없었고 오동동 성결교회 통로도 골목길이었다.

이처럼 구마산 주민(조선인)은 극심한 교통지옥을 겪어야 했다. 여기에 제4대 마산부윤으로서 사도리구(寺島利久)가 부임했다.

 

그는 한 때 프랑스 파리 주재 일본 영사관의 2등 서기관으로 있던 사람인데, 착임(着任) 미구(未久)에 구마산 도로의 확장에다 시정의 역점을 두었었다.

그는 신문기자들에게 마산은 오동동을 중심으로 하여 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예언을 했고, 그러한 전망 아래 구마산의 도로 확장에 관심이 대단했던 것이다.

신문기자들과 부회의원들은 그에게 구마산부윤’ ‘도로부윤등의 별명조차 붙였던 것이다.

현재의 구마산 시가의 형태는 사도(寺島) 부윤의 소신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1900년 초기부터 60여년간의 구마산 도로의 변천상황을 회고하여 보면

구마산-북마산-상남동 개통

오동동-창동-부림동 가로 대개수

오동동 해안을 좌절(左折) 창원군과의 연락도로 개통

합성-산호동 매축지 대로 직통

마산 본역 앞 해안도로 개통

등등으로 1940년의 통계로는 국도 5.8, 지방도 1.3, 시도 72.5, 오동교-시청-제일극장 간의 간이포장 등으로 되어 있었다.

끝으로 신마산-진주간 도로는 착공 4년만인 융희 2(1908)에 준공되었음을 알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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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19.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52. 돝섬의 전설

52. 돝섬의 전설

 

돝섬은 마산 앞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섬, 일명 월영도(月影島)라 부르기도 한다.(행정구역 상 월영동에 속해 있기 때문)

1910년경에는 인가가 불과 7,8호였으나 지금은 20여 호. 아동 10여 명의 초등학교 분교장이 있고, 주민은 대개 영세 어민으로 섬의 동남 비탈에 보리와 채소를 가꾸기도 한다.

멸치 어장막이 있어 신·구마산 어판장과의 사이에 배의 왕래가 잦고 여름 한 때는 낚시꾼들과 피서객들이 득실댄다.

섬의 형상은 서쪽에서 바라보면 오리()가 먹이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인도산 코브라가 염소()를 삼킨 것과 흡사하다.

 

일본인들은 이 섬이 일본의 비파(琵琶)와 같다 하여 그 어음(語音)에 비겨 미화(美和)라 했으며 마산만의 공원지로 지정하고 매번 벚꽃 묘목을 심었으나 바다의 염풍(鹽風)관계(?)로 자라지 않아 실패한 적이 있다.

이 섬을 어찌하여 돝섬(猪島)이라 하였는지 이 섬에 얽힌 오랜 전설을 소개한다.

옛날 김해 가락왕의 총애를 받던 미희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홀연 그 흔적이 없어졌다.

왕은 낙담 번민한 끝에 사람을 사방에 파송하여 상금을 걸고 수색을 벌였는데, 우연히 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던 어부가 골포(骨浦, 마산의 古名) 앞바다의 조그마한 한 섬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절색 미녀를 봤노라 하기로 왕에게 상주했다.

왕은 급히 특사를 파견하였더니 과연 이 섬의 등()에 미희가 배회하고 있음을 보고 환궁하기를 재촉하였으나, 미희는 눈을 부릅뜨고 홀연 금빛의 늙은 도야지로 화하더니 일성(一聲) 포효와 동시에 먹구름이 충천하는 가운데 두척산(무학산) 상봉의 큰 바위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특사는 기급하여 왕에게 자초지종을 상주했다. 왕은 의심이 덜컥 났다. 당시 백성 가운데 온데간데 없어지는 예가 자주 생겼는데 밤마다 금도야지가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가되, 특히 어린 계집아이나 젊은 부녀자를 좋아한다는 풍설이 퍼져서 왕의 귀에까지 들린 터였다.

왕은 느낀바 있어 군병을 동원하여 두척산의 바위를 포위했다.

활과 창을 비껴들고 일제히 산이 진동하는 고함을 지르며 포위망을 압축, 바위에 육박해 가자 홀연 암상(岩上)에 염연(艶姸)한 자태의 미희가 나타났다.

군병들은 엎드려 환궁할 것을 청하자 순간 늙은 도야지로 화하여 영악한 형상에 날카로운 이빨로 군병에게 달려들 기세라 군병들은 활, , , 돌로써 쏘고 찌르고 내리쳤다.

드디어 도야지는 바위 밑으로 굴러 떨어졌고 한줄기 요운(妖雲)이 아지랑이 같이 그 섬으로 뻗어 사라지고 말았다. 바위 틈 굴 안에는 인골이 수북히 쌓여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케 했다.

그 후 그 섬 근방에는 밤마다 도야지 우는 소리와 함께 괴이한 광채가 일기 시작했다.

신라 거유(巨儒)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골포의 산수를 즐기려고 월영대에 향학(鄕學)을 설치하고 기거하던 무렵 어느 초승달 밤에 이 괴이쩍은 현상을 보고 그 섬을 향해 활을 쏘았더니 괴이한 광채는 별안간 두 갈래로 갈라져 사라지고 말았다.

이튿날 고운 선생이 그 섬에 건너가 화살이 꽂힌 곳에 제를 올린 뒤로는 그러한 현상은 없어졌다 한다.

이 섬이 바로 돝섬(猪島)인 것이며 고운 선생이 제를 올린 곳(위치 미상)에 기우제를 올리면 영험이 있다 하여 후세에 오랫동안 그 풍습이 이어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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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20.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32. 벚꽃

32. 벚꽃

 

마산의 자랑으로서 벚꽃을 뺄 수 없다. 더욱 밤의 벚꽃 말이다.

타지방의 벚꽃나무 위치를 살펴보건대, 대개가 내()를 끼지 않은 평지로서 진해가 그렇고, 서울 근교의 우이동 같은 곳도 그러하며, 창경원이나 진해 해군 통제부 영내의 벚꽃 터널도 또한 평지다.

이런 곳들에 비하면 마산은 신마산 경교교반(京橋橋畔)을 중심한 천변양안(川邊兩岸)에 즐비한 벚꽃나무와 장군천 양안(兩岸) 및 마산 신사 앞 급경사 진 표리삼도(表裏參道 /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원문 그대로 옮긴다)의 벚꽃나무들은 4월 중순경이면 만개된다.

이 외에 마산 중포병대대 영내 전역과 마산 부청(창원군청, 지금의 경남대 평생교육원) 경내와 부윤관사(마산시립 보육원, 지금의 마산종합사회복지관) 주변 등에 하루밤 사이의 기온에 따라 개화가 늦어지고 빨라지는데 수백 주의 벚꽃을 멀리서 조망하면 아무리 청징(淸澄)한 날이라도 아지랑이 같기도 하고, 저녁노을이 아니면 산 넘어 화재 같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의 신마산 경교교반(京橋橋畔, 지금의 대곡천변) 벚나무>

 

마산은 대체로 지세가 바다로 향해서 경사진 관계로 지방에서 오는 사람과 마산만으로 입항하는 상춘객들은 요염한 벚꽃에 황홀하다.

천변(川邊)의 벚꽃 장에는 일인들이 자기들 공장에서 생산하는 특주의 직매장을 설치하여 마치 주류 품평회를 연상케 하는데, 이 시기에는 출장식 음식점은 물론 이동식 흥행장이 가설되어 도비(都鄙)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앵객(觀櫻客)과 더불어 안비막개(眼鼻莫開)로 붐빈다.

한때는 경부선 특별 전세 열차편으로 약 8백여 관객이 하루 코스로 들이닥쳐 교반천변(橋畔川邊) 꽃밭에서 직매한 마산 명주와 가져온 도시락으로 담소화락(談笑和樂), 번잡을 이룬 때도 있었다.

벚꽃 구경은 뭐라고 해도 밤이다.

꽃철이 되면 주변에 사는 동민들은 각색 작은 전등을 가설하는데 일인들은 한자로 설등(雪燈)이라 하여 본보리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신마산 밤 벚꽃>

 

야경은 참으로 백화요란(百花燎爛)하여 남녀 마음도 요란하게 된다. 만개기의 밤 천변에는 아무리 도학자요, 금주론자일지라도 퍼져 앉아서 한 잔 않을 수 없으리만치 흥에 취하게 되는데,

개화해서 하루 이틀 지나면 바람 한 점 없건마는 한잎 두잎 떨어지기 시작한다.

으레 술자리나 어깨 너머로 꽃이 붙는데 어쩌다 술잔에 떨어지면 술 흥취는 더욱 솟구친다.

경교(京橋) 옆에 자리 잡은 동운(東雲), 망월루(望月樓), 탄월(呑月)같은 고급 요정 예기(藝妓)들의 가냘픈 가요에 애조를 담뿍 실은 삼매선(三昧線) 소리가 기루(妓樓)에서 흘러나릴 때 마음 없는 길손들에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한다.

한편 천변 북쪽에는 이와 정반대로 벚꽃나무 대신 실실 늘어진 수양버들가지가 냇물에 뻗었는데 이곳은 전등이 없는 덕(?)으로 이때를 놓칠세라 밤 어둠을 타서 남녀 쌍쌍이 밀회를 즐기는데 행인들은 냉소를 머금고 통과한다.

이렇듯 즐기고 상춘객들로부터 상탄(賞歎)을 받던 꽃도 불과 며칠 지나면 차차 추한 빛을 띠우면서 낙화시가 닥쳐오면 애완객들의 발길에 짓밟히며 쓰레기로서 천대를 받는다.

유독 벚꽃만은 다른 종류의 꽃과 같이 개화 낙화의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동일 동시에 피었다가 거의 같은 시간에 떨어지는 꽃이라서 일본인들이 일인(日人) 국민성이라고 자칭하는 자도 있지만 어쩌다가 일진의 바람이나 일조(一條)의 비에 흔들리면 수만우(數萬羽)의 호(/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원문 그대로 옮긴다)이가 마치 광무하는 듯한 광경을 보여준다.

이때에 경교천(京橋川)으로 낙화하는 꽃잎은 냇물의 등에 업혀 쏜살같이 멀리 또 멀리 바다로 흘러간다.

실로 낙화유정 유수무의(落花有情 流水無意) 그것이 아닌가. 나는 그대를 정이 있어 왔건마는 그대는 어이하여 무심하게 흘러 가노

한때 유명했던 마산의 벚꽃도 수령 근 50에 접어든 노목들로 약품을 뿌려 가꾸는 사람조차 없이 해방의 여독으로 무지한 폭한들의 도끼()질에 지금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

※ 아래는 지금의 문화동 대곡천변 벚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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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20.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8. 말띠 여성의 수난 9. 극장 순례

8. 말띠 여성의 미신

 

본시 우리 민족 간에는 없던 미신 하나가 이 땅의 여성계에 정착했으니 말띠 여성의 숙명론이다. 이것이 일본에서 건너온 미신인데, 그 근원을 캐어보면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다.

일본 여성들이 크게 기(忌)하는 이 ‘말띠’는 ‘병오생(丙午生)’에 한한 것이지 다른 말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인데, 이 병오생의 처녀가 시집을 가면 신랑을 잡아먹든지 아니면 결혼 얼마되지 않아서 상부(喪夫)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숙명론이 퍼지게 된 근원을 캐어보면 이러하다.

일본 강호(江戶, 지금의 동경)의 한 반찬 가게 집에 오시찌(於七)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이 방화범이 되어 강호(江戶)의 군데 군데에 불을 질러 주민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 일이 있었다.

이 오시찌가 병오생이었는 데서 미신의 실마리는 시작되었다.

점장이, 판수, 무당들이 위에서 말한 소문을 퍼뜨려서 부치질을 하여 민심을 현혹하게 했던 것이다.

미신에 혹하지 않는 사람도 이런 말을 듣고 보면 꺼림칙하게 되는 것이 사람인지라 그로부터 병오년에 낳은 딸자식을 정미생으로 출생계를 하여 호적법 위반으로 과료 처분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한다.

이 미신은 수백 년을 두고도 사라지지 않아 1906년(병오년)생의 처녀들 중에는 결혼 적령기가 지난 1925년∼28년 사이에 화산의 분화구에 투신하는 자가 속출하여 당시 결찰관, 소방서원 그리고 지방청년 단원까지 동원되어 그 방비에 골몰했고, 신문들은 대서특필로 보도하는 바람에 병오생 딸을 가진 부모들의 신경을 곤두세운 일이 있었다.

이 되어 먹지 않은 일본제 미신이 박래(舶來)라여 병오생도 아닌 말띠 계집아이까지 들떠서 마산에서만도 이 숙명(?)을 비관, 무단가출하여 소식이 없는 자, 윤락의 길에서 헤매고 있는 자 등 공연히 신세를 망친 예가 많았다.

마산에서 일본 여성이 병오생임을 비관하고 자살한 예가 있었다.

현재 김완길 의원 자리에서 총포화약상 겸 치과의를 경영하던 흥창(興倉, 요꾸라)이라는 자의 장녀(마산여고 3회 졸업)가 바로 그다.

<말띠 임을 비관하고 자살한 학생의 아버지가 경영했던 치과  / 해방 후 김완길 의원>

 

9. 극장 순례

 

마산의 극장은 신마산 구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의 별장 정면에 일인들이 경영하는 목조 2층의 환서좌(丸西座)가 처음 생긴 것인데, 주로 신마산에 거주하는 일인 본위로서 일본의 가무기좌(歌舞伎座)를 본뜬 것으로 구조는 적지만 그래도 5,6백 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었다.

환서좌 건립이 명치 42년(1909년)경, 구마산 수좌(壽座)는 8년 뒤인 1917년에 생겨진 것이다.

수좌 건립 전후해서 일인 본전퇴오랑(本田五郞) 개인으로 현재의 마산극장을 마산좌로, 그리고 다음은 신마산 제일극장을 그 근린(近隣) 일인의 요정업자와 택시회사(崔鳳時의 昭和택시) 등이 합자로 앵관(櫻館, 지금 제일극장)이 생긴 것이다.

수좌는 10년 기한 만료로 폐쇄하고, 1936년 10월에 마산좌 경영자 본전(本田)이 공락관(共樂館)을 신축한 것이다.(공락관은 소화 16년 1월 3일 화재로 그 해 가을에 개축함 / 전 시민극장)

구마산에 수좌나 공락관이 생기기 전만해도 조선인의 흥행물은 전부 창고 아니면 광장에 장막을 둘러서 흥행을 하였다.

마산 최초의 활동사진은 지금의 뉴스인 실사(實寫)라 하여 1905년경(?)에 발생한 대판 대화재 광경은 서성동 해안의 일인 숯(炭) 창고에서, 그리고 1913년에는 희극영화 「新馬鹿大將」(日語)을 박간(迫間) 창고광장(현, 경남은행 본점)에서 대정천황(大正天皇) 등극사실(登極實寫)를 상영한 외에 마산에서 처음 흥행한 신파연극 유일단(唯一團)(단장 이세기)일행이 일인 신축 창고에서 첫날 명호천명(鳴呼天命)을,

다음해엔 원정(元町) 매축지 매립 직후 현재 KTC 화물차 회사 옆 광장에서 조선 신파극 개척자 임성구 일행의 혁신단이 육혈포 강도를 공연하였다. 손에 땀을 뺀 관객들은 육혈포 소리에 놀라 장외로 달아나는 소동이 있었다.

1916년에는 김도산 일행의 개량좌(改良座)가 김병선 도정공장 광장(현재 시민내과)에서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란 예제로 종래의 것보다 몇 배의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하여 수좌가 생기고 김도산 일행이, 다음은 김소랑(金小浪, 본명 顯) 일행의 중성좌(衆星座) 등이 뒤를 이었는데 그때는 여우(女優)가 없어 여장남우(女裝男優)로서 유명한 독부형의 고수철, 주부형의 김영덕, 소위 소역(小役)으로 안종화, 악한의 양성환, 희극에 이모, 강도 역에 현성완, 소녀로서 홍일점의 김소진 양, 방정맞은 역 최여환, 버릇 없는 역에 백완종, 미남 이경환 등이 활약하였다.

이경환은 진짜 미남으로 여타의 배우도 그러려니와 흥행이 끝날 때면 극장 문 앞에는 이들에 혹한 여기(女妓)들이 줄을 이어서 중국 요리집이 아니면 저희들 집으로 납치하는 등 진풍경이었다.

지금은 대본으로 몇 달이나 연습을 하여도 흥행 시에는 막후에서 연출자가 있기 마련인데, 그들 신파배우들은 대본도 없이 단장이 배우들에게 1, 2차 강독을 하면 훌륭히 무대에서 극을 진행할 수 있었다.

흥행 초일(初日) 선전할 때면 맨 앞에는 초립 쓴 일행이 통소, 정, 북, 장고, 날라리, 꽹과리 등 순 국악으로 취군(聚群)을 하고 다음은 배우 전원은 인력거로써 시내 방방곡곡을 일주한다.

이 시기를 지난 얼마 후에는 신극의 바람이 일게 되어 마산에도 민중극단, 동방예술단(신일선 소속), 박승희가 이끄는 동경 유학생들의 토월회, 이경설의 여우(女優)들만의 극단, 최승희 무용단 등 무수히 지나갔다.

무성판(無聲版) 영화시절에는 가장 대중적이요, 가장 유명했던 변사로서 서상호, 김번성, 김영환(마산 출신)이었는데 서상호는 한때 세계적 명화인 유니버샬 회사 작품 더-부로킹(40권)을 매야(每夜) 희극물 한편을 붙여서 1주일간 상연의 변사를 했다.

서상호의 실제(實弟)인 서상철 변사가 나운규 주연의 「아리랑」을 맡았다. 아리랑의 민요는 옛날부터 있던 애조 띤 노래이지만 현행 아리랑 곡은 누가 편곡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오직 서상철 변사 때의 악대에서 처음 퍼진 듯한데 이 곡이 삽시간에 퍼져나가 8개월이 채 못 되어 일본 동경 방송국에서 방송되어 일인들까지 감흥하였다는 것도 어제 같은 일이다.

발성영화로서는 환서좌에서 등원의강(藤原義江)을 주연으로 한 「고향」과 수좌에서 관옥민자(關屋敏子)가 주연한 「자장가(子守唄)」를 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인이 처음 상영된 발성영화는 김파영 변사가 가져온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처음이다.

극장 무대를 말하면 다른 곳은 모르되 부산 대흑좌(大黑座)와 마산 환서좌가 지금도 보기 드문 회전무대였고, 그것도 앵관이 신축됨과 동시에 없어졌다.

앵관은 시가에서 서쪽으로 너무 편재한 관계로 관객이 희소하여 경영하기 급급하였으나 그 당시로서는 다른 극장에 비해 다소 넓고 내부 장치가 적의(適宜)한 관계인지 일본 테너 대가인 등원의강(藤原義江)의 독창회와 그 후 꾀꼬리 소리라는 평을 받은 소프라노 관옥민자(關屋敏子)의 독창회 때는 대만원을 이루었다.

이보다 더 성황을 이룬 것은 최승희 무용회라고 할 것이다.

이때는 하동, 삼천포, 진주 등지에서 택시로 마산까지 원정 오는 등 개장 전에 벌써 앵관 앞에서 현재의 외교구락부 근처의 다리까지 장사진을 치는 등 일대 성황이었다.<<<

<1919.10. 27(영화의 날),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구토'가 상영된다는 광고>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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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2)

지금까지 올렸던 글에 대한 요점과 관점 그리고 성과를 정리한 글입니다.

 

마산은 오래 전부터 존속해왔던 조선인 집촌의 원마산(마산포) 지역과 개항 이후 인위적으로 조성된 신마산 지역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각각의 영역을 확산시키면서 마침내 하나의 도시로 연담화되어 가는 변화과정을 겪었습니다.

마산의 도시구조가 지금과 같은 틀을 갖춘 것은 이 시기였으며, 이 때 형성된 도시구조는 이후에 규모만 확장되었을 뿐 큰 변화 없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용 중 과거에 존재했던 도시공간의 복원은 그 자체로서 해당 시기에 지니고 있던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익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구조의 물적 형태를 시계열적으로 설명하였기 때문에 도시사학(都市史學)의 관점에서도 약간의 성과가 있다고 봅니다. 이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이후 계속적으로 전개된 도시의 변화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올린 제 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근대기에 진행된 도시 전체의 변화과정을 지도와 서지 등 각종 자료를 통해 분석하여 그 변화과정을 시기별로 밝혔고

둘째, 마산의 중심부인 원마산 지역에 대해서는 지적도를 이용하여 4시기에 걸친 토지이용도를 복원한 후, 각 시기에 이 지역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았으며

셋째, 위의 두 결과를 이용하여 마산 도시변화의 특성을 밝힌 것입니다.

내용 중 마산관련 지도와 자료를 이용하여 각 시기별 도시구조의 변화과정을 밝힌 작업은 마산이 지금과 같은 도시구조의 틀을 갖추게 되는 과정을 가시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는 개항부터 해방 때까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관심을 가진 시간의 범위를 이 시기로 택하였습니다.

이 작업을 통하여 자연취락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통 도시로서의 원마산과 개항 직후 각국공동조계지에서 시작되어 인위적으로 조성된 신마산이라는 두 도시가 하나의 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일본인들의 마산 이주 단계와 신마산의 형성과정 및 일본인들에 의해 경영되었던 마산 도시의 사회와 산업 및 도시 시설의 변화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원마산과 신마산의 사이에 중앙마산이라고 하는 제3의 도시공간을 의도적으로 형성하였다는 사실과 마산의 해안을 무차별적으로 매립한 사실에 대해서도 비교적 소상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해방 이전까지 24회에 걸쳐 실시된 해안의 매립 시기와 규모 그리고 그 위치까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었습다. 이를 통해 마산의 지형 변화뿐만 아니라 지질구조의 단편까지 파악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제에 의해 도시내부공간구조가 변화되기 전의 원마산(마산포) 원형을 복원한 작업은 제가 크게 공을 들인 부분입니다.

이 복원도를 통해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해온 마산포의 천연 해안선과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을 전국에 널리 알린 마산포 선창과 굴강, 그리고 수백 년 전에 형성된 좁은 길들을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현재의 도시 공간 속의 어느 곳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마산의 도시 공간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이는 차후에 다른 영역의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복원한 결과를 통하여, 전통적 도시와 근대적 도시의 대비뿐만 아니라 두 공간의 절충 및 구조적 변화를 가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시기별 복원도를 비교․분석한 시계열적 연구를 통해 원마산이라는 전통공간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면서 도시의 중심성을 강화해 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이 식민도시에서 행한 경제적 침투, 즉 토지 소유권 침투에 대하여 그 소유량과 시기별 변화, 소유토지의 규모 및 소유 주체, 그리고 상권 변화에 따른 소유토지의 이동 등을 계량적으로 증명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개항 이전까지 한국인만의 공간이었던 원마산은 개항 이후부터 한․일 양 민족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바뀌었으며, 일본인의 지배력은 강점 후기로 갈수록 점점 대형화․집중화되어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배력은 도시지역의 범역이 확산되면서 전역화(全域化)되어 갔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흘렀던 마산의 도시변화가 일제의 강점이 끝난 시점에 이르자 전통 공간이었던 원마산의 도시구조는 새로 건설된 도로와 항만․매립 등으로 인하여 크게 변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변형된 데에는 식민지 행정 체계와 일본인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마산이 근대도시로 변하기 전의 지도와 1945년 해방되었을 때의 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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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2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2) - 강점제3시기

<토지 이용>

토지 이용이란 도시 내 각 지역의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실상의 용도지역 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지나간 시기의 토지이용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가지 범역을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토지이용과 건물에 관한 자료가 없으면 입증이 곤란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자료를 찾아 도시 전체의 토지이용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비록 정확도가 떨어지더라도 각종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의 일편들을 총 망라하는 등 현 상황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나. 공간구조․소유상태를 통한 추정

다. 토지가격에 의한 추정

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접근해보도록 하는데 이 글에서는 ①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중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마산 도시 현황’ 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 이용

1) 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마산 도시 현황

각종 문헌에서 마산의 도시 현황을 소개하는 글귀의 일편을 종합하는 방법으로서 추상적인 분석이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용은 토지이용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에 한하여 인용하도록 합니다.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市街(p.311)

각국거류지에 거주하는 사람은 거의가 일본인이고 가끔 중국인, 러시아인, 독일인 등이 체류하고 있으며 이들은 거류지 남쪽 모퉁이 쪽의 러시아 영사관 부근에 살고 있다. 거류지의 총 호수는 50호에 불과하고 가옥도 조밀하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로서 간신히 처마를 이어서 시가의 모양을 갖춘 것이 10여 호 뿐이다. 참으로 느리긴 하지만 발전하는 모습은 보인다.

도로는 근래 새롭게 개설하기 시작했다. 도로의 폭은 3間(1間은 1.8m)에서 8間이고 남북이 길어 거의 20여丁(町, 109.1m)에 이르고 동서는 좁아 7-8丁에 불과하며 舊 馬山浦와의 교통이 빈번하여 상거래가 점점 발달할 기미를 보인다.

舊 馬山浦(p.322)

각국 거류지를 지나 약 10리 거리의 昌原街道에 있고 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한 곳이다. 戶數는 2,000여戶이며 監理署(감리는 창원군수가 겸임), 경찰서 등이 있고 시가는 해변에 면하여 선박화물의 폭주가 매우 빈번하다.

옛날에는 이곳이 일본상인(행상)의 근거지였지만 마산개항에 즈음하여 신마산으로 이전하였다. 지금도 20여 호가 있고 대부분 조선가옥에 기거하고 있다. 

『韓國新地理』 田淵友彦, 1908년, p.254, 博文館

韓人家는 마산만 안쪽의 북쪽에 각국거류지로부터 20여정(町)에 있으며 구마산이라고도 칭한다.

수 천 여호에 인구가 약 4,500에 이르는데․․․․․․ 

『韓國總覽』 德永勳美, 1908년, pp.58-59, 아세아문화사

․․․․마산만에 위치한 구 월영대 부근에 면적 15여 만평에 도로가 종횡으로 관통하고 있고 시가가 정연하고․․․․

한인가는 각국거류지에서 20정 거리의 구마산포에 있고 시가는 창원가도에 면하여 마산만의 북쪽 중앙에 있으며 인가는 2,000여 호이다. 

『馬山と鎭海灣』 平井斌夫․九貫政二, 1911년, p.3, 濱田新聞店

․․․․․신마산과 구마산 사이는 20町(1정은 109.1m, 60간)이며 구마산은 창원가도에 위치, 인가가 즐비하게 남북으로 연하여 조밀하고 해안을 따라 조선인 상가들이 늘어서 있음, 일인도 혼재, 선박화물의 집결과 흥성함이 극을 이룸, 신마산과 구마산의 사이에는 광대한 철도와 군용지가 놓여있음, 두 시가 곧 연결될 것으로 보임, 

『朝鮮誌』 吉田英三郞, 1911년, p587, 町田文林堂

․․․․․경부철도 마산선은 군의 서부를 관통하고 정차장 세 개가 있는 것 외에 마산을 중심으로 하여 도로로 각지에 통하고 특히 마산 진주간 및 창원간은 길이 좋아 교통이 편리하다.

․․․․․시가는 신마산과 구마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순수한 일본풍으로서 가로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고 모든 관아 및 일본인은 대부분 이곳에 있다. 구마산도 지금은 거의 신마산과 인가가 연접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이 잡거하면서 거리의 외관은 신마산에 필적하면서 항구의 주변은 번성하여 매월 5일되는 날을 기해 시장을 열고 상업이 매우 활발하다.  

『最新朝鮮地誌』 日韓書房編輯部, 1912년, p.444, 日韓書房

․․․․․도로는 근래 현저하게 개량되었다. 부근 내륙과의 교통은 도착하는 곳에 차와 말이 연결된다. 또 가까운 마산 진주간 중심가로가 개수되고 있고 교통은 새로운 면을 열어가고 있다. 

『新朝鮮全誌』 南宮濬, 1913년, p.146, 唯一書館

․․․․․市街는 신구 두 도시로 나누어져 신마산은 일본인이, 구마산은 주로 조선인의 부락이며 또 그 북쪽에 昌原舊邑이 있으니 모두 상업의 요충지이다. 

『最新朝鮮地誌(中)』 朝鮮 및 滿洲社, 1918년, p.19, 朝鮮 및 滿洲社出版部

․․․․․신마산과 구마산의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산록이 수려하고 가로의 구획이 정연하여 시가지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며․․․․․ 개항 후 거류지를 설치하였으며 신시가지는 대부분 전부 일본인의 상가로서 이루어져있다.

구마산은 옛날부터 군읍으로서 알려진 소위 조선 마을로서 市區의 체제는 협소하고 불결하다. 

『朝鮮鐵道旅行便覽』 朝鮮總督府, 1923년, p.10, 조선인쇄주식회사(경성)

․․․․․구마산은 상업이 발달해 있으며 신마산 쪽은 많은 일본인들이 활동하는 곳으로서 특히 서쪽의 구 외국인 거류지였던 곳은 순 주택지로 사용되고 있다. 무학산을 배경으로 하여 진해만을 앞에 두고 경사가 완만한 시내에 시가가 형성되어 있다.

․․․․․상업이 매우 번성했던 적도 있었지만 1911년에 군사요충지로서 개항을 폐쇄한 이후부터 약간 침체된 상태다. 그리하여 근래에는 인구도 늘지 않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진주로 가는 경남선이 군북까지 만 개통되어 있는데 장래에는 한 번 더 성황을 이룰 것으로 본다. 

『馬山港誌』 諏方史郞, 1926년, pp.74-81, 朝鮮史談會

천엽촌(千葉村)이라는 것은․․․․․1905년 봄 40여 호의 어가단(漁家團)이 오고 하나의 어촌을 구성하여 이 속칭을 불렀다.(p.81)

1905년 11월 마산선 철도를 개방하고 일반 공중의 편리를 자유롭게 하면서부터 이주자는 갑자기 격증하고 특히 1906년 봄이 오면서 거류지, 마산포 및 그 중앙부에 모두 건축공사가 크게 일어나서 일본인의 여관은 한 집도 빈 곳이 없다. 한인 객사에도 4-5인의 일본인이 섞여 숙박하는 등․․․․․(p.74)

1906년 대곡하(大谷河)에 걸쳐 놓은 반룡교 서남 모퉁이에는 복옥(福屋)이라 이르는 음식점만 있었지만 북측으로는 요정․양복점 등 가게가 여러 채있었으며 망월루 서쪽 즉, 홍문동․청계동․월남동3가와 4가, 이사청에서 세관에 이르는 도로에는 상가가 즐비하여 마산의 긴자(銀座)거리라 불렀다(p.75)

․․․․․ 마산포 방면은 韓人을 상대하는 상점이 많으며․․․․․ 신마산은 정비된 가로와 좋은 가옥이 많고 군인 관리를 상대로 하는 상점이 대부분이며 중앙부는 관아․학교․사원․철도소재지가 있기 때문에 그 곳 관계자의 주택이 많이 있는데 중앙부 중 일부 신마산에 접한 곳은 商況이 오히려 신마산을 능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앙부 대부분은 철도용지를 빌린 전답들이다(p.3)

․․․․․장군교 부근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중앙동에 이르는 가로는 1906년 초겨울에 개통되어 당시 거류지인 마산포의 유일한 연락도로가 되었고 1910년에 마산, 진주 간 일등도로가 마산 역전까지 개통을 보게 되면서 두 개의 길을 얻어 척산교에서 서로 만나 한 도로가 되어 마산포로 들어가게 되었다(pp.202-203)

마산부청이 서북 모퉁이에 위치한 것은 반드시 府治를 건전히 발달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수의 공무원이 이전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안 된다는 것은 治者의 생각인데 府民의 입장에서는 과연 어떠한지․․․․․․․․

․․․․․․형무지소 소재는 옛날 논밭이었던 한가로운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큰 가로에 접하여 상점이 즐비하고 크게 발한 지역이 되었다(pp.222-223) 

 

『朝鮮と建築』 朝鮮建築會, 1929년 3월호, p.39

현 마산의 시가는 바다에 면한 무학산록 일대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남북으로 길어 마치 띠의 모양을 하고 있다.

마산부청의 위치는 남방 신마산의 구석에 치우쳐 있음과 동시에 약간 높은 언덕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특히 구마산 방면은 매우 불편을 느끼고 있다. ․․․․․ 부청이전문제가 대두하여 그 위치를 중앙부에 선정한다는 것은 부민의 편리에는 이 이상 좋은 일은 없고 나아가 시가의 발전에도 커다란 이익이 있을 것이라․․․․․․․․ 

『馬山現勢錄』 長田 純․高須瑪公, 1929년, p.156, 馬山現勢錄刊行部

마산의 市街區 구성은 종래 新舊 兩 마산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자연스런 市街區의 연결이 좋지 않았다. 마산 발전의 암과 같았던 중앙 마산의 耕地(철도용지)가 府에 불하되어․․․․․․

이 中央馬山市街區 構成과 관련해서는 뭐니뭐니해도 中央馬山地先의 공유수면 매축사업을 간과할 수 없다․․․․본 사업의 완성은 더욱 마산항 발전의 기폭제를 이루는 것으로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 표기한 연도는 당 내용이 실린 문헌의 발간연도이므로 시기를 너무 제한적으로 받아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신마산과 중앙마산 지역〉

1902년. 조계지 건설 초기, 건축물은 조계지의 최남단인 현재의 월남동 5가와 월남동 4가의 최남단, 즉 현재의 경남대학교 정문 앞 광장 부근에서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1902년. 초기 조계지 건설규모는 남북으로 2㎞, 동서로 약 0.8㎞ 정도의 규모였다.

1906년. 율구미에 일본인 어촌이 형성되었다.

1906년. 전 창원군청(현 경남대학교 대학원) 아래의 홍문동, 청계동, 월남동3․4가 일대가 「마산의 긴자(銀座)」로 까지 불릴 정도로 번화하였다.

1906년. 중앙중심가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진주가도(현 크리스탈호텔 앞 도로)를 이용해 원마산과 신마산이 연결되었다.

1908년. 합방 직전, 조계지에는 격자형의 도로가 정연하게 개설되어 있었다.

1911년. 시가(두월동 가로로 추정됨)는 순수한 일본풍으로서 상점이 즐비했다.

1923년. 조계지의 서쪽 경사지는 대부분 주택지로 활용되고 있었고 상가는 평지인 중심가로에 형성되어 있었으며 폐항 이후부터는 도시가 정체되었다.

1926년. 신마산의 남쪽(조계지방향)에는 고급주택이 많았으며 북쪽(중앙마산방면)에는 관아․종교시설․교육시설이 많았다.

1926년. 철도용지 때문에 도시발전에 지장이 많았고 관공서 건물이 부(府)의 최남단에 위치한 것에 대한 부민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중앙마산 개발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1929년. 중앙마산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원마산 지역〉

1902년. 원마산의 인가(人家)는 조밀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상점도 많았는데 특히 창원가도 주변이 번화했고 해변도로변에는 어업과 관련한 상권이 발달하였다.

1911년. 일본인들의 상점이 진출하면서 거리의 외관이 더 번화해졌다.

1918년. 도로는 협소했으나 상업은 발달하였다.

1926년. 교도소 부근(현․삼성생명 빌딩 일대)지역도 상점이 많이 들어선 거리로 변했다. 

이와 같은 문헌의 일편으로 도시의 토지이용 현황을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많고 또한 소개한 문헌의 저자가 대부분 일본인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용이 신마산에 지우쳐 있어서 시기와 내용면에서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당시의 현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는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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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1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6) - 강점기 정리

<시가지 확산 양상>

어느 도시건 시가지의 확산은 사회경제적 조건과 인구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진행됩니다. 확산과정에서 나타나는 양상, 즉 방향성․속도․형태 등은 자연적 조건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 위치를 비롯한 강약과 완급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런 현상은 원마산(마산포)과 신마산 두 도시로 나누어져 있었던 마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마산과 신마산을 나누어 설명해보겠습니다.

1) 원마산(마산포)

현 남성동과 동성동 해안일대에 밀집하여 조성되어 있던 자연취락 형태의 전통도시였던 원마산은 개항이후 일본인에게 토지의 소유권이 넘어가고 상권 침범을 당했습니다. 특히 원마산에서 볼 때 신마산 방향(남쪽)인 수성동 일대는 1910년 경 무려 66%의 토지가 일본인의 소유가 되어버리는 큰 변화를 겪습니다.

비록 도시구조의 변화는 없었지만 이와 같은 일본인의 토지소유권 이전을 통한 상권침투는 합방 이후 원마산 도시구조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일본인에 의해 남성동 해안 일대가 매립되면서 11,640여 평 규모의 시가지가 새로 조성되었으며, 1910대 동안 원마산의 시가지는 북쪽으로 교방천까지 건축물이 들어서는 등 대폭 확산되었습니다.

이미 말한 바 있듯이 마산은 동 시대의 타 도시에 비해 철도교통이 일찍 발달했으며 이로 인해 도시화의 속도도 빨랐습니다. 마산 역에 이어 1910년 개설된 구마산 역(현 육호광장 위치)은 원마산의 인구와 물량 유통을 급속히 증가시키면서 진영․밀양 등 경남 북동부지역과의 교류를 촉진하였습니다.

특히 1920년대 이후부터는 구마산 역이 원마산 상업의 중심기능을 하게 되면서 원마산의 시가지가 북쪽 상남동 일대로 확산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원마산의 또 다른 철도역, 북마산 역은 마산의 인구가 늘어가기 시작하던 1920년대 중반, 철도 경남선 개설 때 설치되어 함안․군북․반성 및 진주 등 서부경남지역과의 교류를 넓혔습니다.

이와 같이 구마산 역과 북마산 역은 시가지가 확산되고 있던 원마산 북쪽지역의 도시 부심(副心)역할을 함으로써 원마산의 시가지가 두 역까지 이어졌고, 이 시기에 서쪽 성호동쪽으로도 시가지가 확산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에 힘입어 1930년대 이후 원마산은 북마산 역과 구마산 역 주변 취락인 북쪽의 교방동․회원동․상남동 일대까지 시가지가 넓어졌고, 남쪽 신마산 방향으로는 중앙마산이 형성되어 신마산과 연결되었습니다. 또한 동쪽 해안에는 무차별 전개된 매립으로 인해 시가지가 크게 확산되어 원마산 천연해안이 시가지 내부에 묻혀버리고 해안선은 새로 조성된 직선호안으로 바뀌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2) 신마산 (중앙마산지역도 포함해서 설명하겠습니다)

1899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각국공동조계지는 철도 마산선의 건설과 함께 마산 역이 위치한 북쪽방향으로 시가지가 뻗어 나오기 시작하여 1910년경에는 초기의 정주 공간인 조계지에 비해 상당한 규모로 시가지가 확산되었습니다.

그렇지만 1910년대는 폐항 등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이로 인한 일본인의 인구감소 등의 이유로 신마산 시가지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1920년대는 원마산과 신마산의 중간지역인 중앙마산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원마산 방향으로 세장형의 시가지가 조성되었습니다. 해안에는 최초로 일본인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이 토지 투자를 목적으로 매립을 시행하는 등 시가지가 북쪽과 동쪽 방향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 이후에는 중앙마산지역의 시가화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어 도시공간의 범위가 크게 변화했습니다.

조계지의 서쪽 사면지(斜面地)는 물론 서남쪽도 시가지화 되었고, 전 해안에 매립이 집중 시행되어 도시의 범역이 급격히 확장되었는데 도시지역에만 무려 22회 총 21만여 평 규모가 매립되어 시가화되었고 그 결과 해안선은 모두 직선으로 변했습니다.

이렇게 변한 원마산과 신마산의 시가지 확산을 방향 및 강도로 개념화한 것이 다음의 그림입니다. <<<

시가지 확산의 방향 및 강도 (상부의 도시 핵이 원마산, 하부가 신마산이며 그림 위쪽이 북방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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