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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46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by 운무허정도 2023. 4. 24.

12. 신구(新舊) 마산의 공칭

명치 40년(1907) 말부터 거류지 사람 중에 마산포를 가리켜 구마산(舊馬山)이라고 부르는 이가 있었는데 거류지에 동네 이름을 붙이고 난 뒤에는 거류지인은 공공연히 스스로 거류지를 신마산(新馬山)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명칭은 한국의 전도(全道)에서 거의 반공칭(半公稱)으로 되어 버렸는데 최근에 와서 마산포 방면에 사는 사람은 ‘구(舊)’자를 갖다 붙이게 되니 참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다.

흔히들 이곳을 마산포가 부르는 사람이 있으며 저자도 ‘구’자를 사용하기보다는 의연히 이곳을 마산포라 하는 것에 흥취를 느껴 이 책에서도 모두 마산포로 표기하기로 했다.

따라서 그 중간의 거류지 경계인 신월천 이동(以東)부터 장군천을 지나 마산포의 입구인 척산교(尺山橋)에 이르는 철도용지 내 시가지를 자주 중앙부라 지칭하는 것도 우편물의 집배 관계상 중앙부는 마산국의 관할에 속하니 신마산에 들어감이 타당하다고 되어 있다.

만약 굳이 신구마산의 구분을 한다고 하면 현재의 마산부의 거의 중간인 장군천을 그 경계로 해야 할 것이며 우편물의 집배도 연시 그 이동지역은 모토마치(元町, 남성동) 우편소 소관으로 함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앙부의 대부분이 철도용지와 국유지라 훗날 일반 민중이나 학교조합에 불하되어 도시계획의 첫걸음으로서 현재 시가지 외에 도로가 가로 세로로 만들어질 것이니 신구 외 호칭은 철도정거장 이름에만 스고 딴 데는 쓰이지 않게 될 것이다.

왕년의 오산진 즉 현재 창원군 내서면 산호리에 있었던 원래의 본거지를 구강(舊江)이라 부르며 스스로 신마산포라 자랑하던 마산포가 지금에 거류지 출현과 아울러 도리어 구마산이라 일컬어지게 되니 시세의 변천이라 해도 세상 부침의 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13. 박영효(朴泳孝) 씨의 내항(來港)

박영호 씨는 한말의 영웅이며 이조의 정치가로서 황실의 인척으로 금릉위(錦陵尉)라는 높은 신분이었다. 오랫동안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융희 원년(1907) 6월에 귀한하여 이토 통감의 양해를 얻어 궁내대신(宮內大臣)이 되었다.

전 황제의 선위에 반대한 현직의 각 대신을 죽이고 배일의 깃발을 날리려 기획했으나 음모가 누설되어 체포되었다. 심리 결과 정치상 불온한 움직임을 할 조짐이 보인다며 보안법 제5조에 의해 그 후 일 년 동안 제주도 이외 땅에 거주하기를 금한다는 명령을 받은 것이 그해 8월 26일이었다.

9월 3일, 그는 딸 묘옥(妙玉), 신랑 한신현(韓申鉉), 조카 박대완(朴大完)과 기타 종자 몇 명과 기선 센가마루(千賀丸)를 타고 소수의 친척, 친지의 전송을 받으며 남해의 별천지 제주도로 떠나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근신을 하는 일 년 동안 그 자연 산수간에 옛날 상처를 씻고 한라산에 뜨는 달에 야심을 깨뜨렸다. 만기가 되자 마산에 와 마산포에 살게 되었는데 경찰관의 경계 속에 술과 붓을 즐겼다.

그 당시 호오치신문(報知新聞) 기자로서 북경에 주재하던 한잔(半山) 이시카와 야스지로(石川安二郞) 씨는 저자의 지우(知遇)로서 자주 마산에 와서 요시카와(吉川) 여관에 북으면서 정양을 하고 있었다.

이시카와 씨는 영효 씨와 도쿄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인지라 그와 같이 영효 씨 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거친 붓놀림을 하기도 했다.

영효 씨 역시 저자의 교마치 집을 방문해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두 달 후에 그가 경성으로 돌아갈 때는 왕년의 야심을 채울 시기는 이미 지났고 금릉위라는 늠름한 자태는 영영 정계에서 매장되었을 그런 때였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46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