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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45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by 운무허정도 2023. 4. 17.

 

10. 요새포병(要塞砲兵)의 임시 위수(衛戍)

명치 40년(1907) 즉 광무 11년 7월 21일 이척(李拓) 왕(王) 군방(君邦, 순종 황제의 자(字))폐하는 전 이재황(李載晃) 왕(王) 광무황제의 선양(禪讓)을 받아 제위에 올라가고 8월 3일 융희(隆熙)라고 개원하여 윤 씨 비를 황후로 진봉하고 아우인 은(垠) 왕 영친왕을 활태자로 삼았다.

이와 동시에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이 이루어져 한국통감의 권한은 확장되고, 통감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부통감에 소네 아라스케(曾根荒助), 총무장관에 츠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 외 기타 참여관 2명 외에도 한국 내각 및 각 관아에 차관으로 모두 일본인을 추천하고 경무고문부 및 이사청 경무관 1천여 명을 한국의 관직에 옮기고 재류(在留) 일본인에 대한 경찰권의 집행은 한국정부에 위임되어 국가로서 해야 할 경영 장치는 착착 완료되어 불평이 많은 무리가 곳곳에 출몰하여 일본인을 죽이고 그 재상 약탈을 목적으로 폭도로 봉기하니 우리 마산에서도 위험이 닥쳐온다는 소문이 났지만 가덕도에 있는 요새포병 1개 중대가 마산에 와서 임시로 위수하며 그 위험을 벗어날 때까지 한 달 동안 체진(滯陣)하였다.

 

11. 거류지 시가의 명명

마산의 각국거류지는 명치 39년(1906) 추석 무렵부터 바야흐로 발전의 단서가 보이기 시작해 동 41년(1908) 늦봄에는 간선도로변 러시아 소유지 이외에는 거의 빈터가 없을 정도로 집들이 들어섰다.

심하게는 한 소지역 내에 5,6동의 임대가옥이 있고, 대충 주소를 A구역 제 몇 호, B구역 제 몇 호로 포기하니 우편물의 배달, 경찰의 호구조사, 민단에 제 시책이 행해지는 데 신속함이 결여되는 등 여러 문제가 일어날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거류지회 회장인 미마스 이사관은 4월 23일 미야가와 경찰서장, 도조 겐타로(東條源太郞) 우편국장, 마에다 민장, 거류지에 있는 민회의원 유지 등과 거류지회 사무소에서 회동하여 바로 가로의 명명 안건을 협상하였다.

그 결과 거류지의 지세상 동서를 통하는 가로를 본선으로 하고 남북로를 부선으로 삼아 이를 양단하여 각 본선에 속하는 동네 이름을 짓도록 하고, 남복로라도 단독으로 본선에 속하지 않는 것은 따로 이름을 짓도록 하고 전 지역을 11개 동네로 구별하게 했다.

이에 대해 각각 한 개의 좋은 한자를 골라 동네가 넓은 곳은 정목(丁目, 초메)으로 다시 나누어 호번을 메기고 동네(町, 마치)는 마치라고 훈독하도록 결정했던 바, 그 동네 이름은 다음과 같다.

혼마치(本町, 월남동) 1~5정목, 교마치(京町, 두월동) 1~3정목, 하마마치(濱町, 창포동) 1~3정목, 아케보노마치(曙町, 청계동), 고토부키마치(壽町, 수성동), 도모에마치(巴町, 대외동), 미도리마치(綠町, 유록동), 사카에마치(榮町, 홍문동), 야나기마치(柳町, 신창동), 아사히마치(旭町, 평화동), 사쿠라마치(櫻町, 문화동)

<좌측의 현재 해바라기 아파트 부지가 매립되기 전의 월남동(혼마치, 本町)>

이 협정은 바로 실행되어 민단에서는 각 마치, 각 초메 경계를 적은 나무판을 못 박아 표시했다. 거류지회는 벚꽃 묘목 5천포기를 구입해 각 가로 4칸 간격으로 이식했는데 나무를 사랑할 마음이 없는 자는 물이나 비료도 주지 않아 시들게 했다.

또한 뿌리 내린 나무도 공덕심이 없는, 지나가는 사람에 의해 꺾어지고 지금 잔존하는 것은 대곡천(大谷川) 양안의 철책 안에 있는 것뿐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45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