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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47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by 운무허정도 2023. 5. 1.

14. 개항 10년 기념 축하회

 

마산 거류민단은 제도 실시 이래 겨우 일 년 반 정도가 지났을 뿐, 소햑교 신축 이외에는 별로 특기할 만한 사업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간 착실히 정비를 가다듬어 여유를 가지게 되어, 명치 41년(1908) 5월 1일에 성대한 개항 10주년 기념축하회를 개최하였다. 이보다 앞서 마에다 민장이 지명한 준비위원 10명은 전체 항구를 세 지역으로 나누었다.

오타니천(大谷川) 이남 치바마을까지는 남조(南組), 이동(以東) 지역 장군천까지를 중조(中組), 장군천 동쪽을 동조(東組)로 한 것이다. 각조에는 사무소를 마련하여 조마다 십수 명의 위원을 뽑아 기부, 장식, 취향이란 세 부문으로 나누고 서로 취향, 장식 등 기타에 빠짐이 없도록 노력하고 전심, 전념토록 하였다.

 

4월 27일 마에다 민장은 제17호 고시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마산의 개항일인 5월 1일을 개항기념일보 정하고 지금부터 거류민단 내의 공휴일로 정함”

  축하회장은 신축된 소학교 앞뜰에 15칸 4면으로 홍백의 단막을 치고 안쪽에는 동나무를 모조해 자줏빛 꽃송이를 단 곳에 연회석을 설치하고, 교문은 장기판의 말 모양의 초록색 대문으로 만들고 꼭대기에 뛰는 말 그림을 붙였다. 이는 마산의 발전을 뜻한 것이겠다.

그 기둥 양쪽에는 ‘마산개항’ ‘십년기념’이란 네 글자씩 금색을 입혀 반짝이는 것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당일은 개항일이라 그러한지 날씨가 아침부터 아주 좋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으며 날이 밝기 전부터 아이들은 기뻐하면서 이리저리 달리기도 하였다.

쓰시마의 다케시키(竹敷) 요항부가 기증한 불꽃을 수뢰정(水雷艇)이 마산세관 부두 앞에서 계속 쏘아 올리기도 했다. 우선 시중에 나온 것은 중조(中組) 청년들이 헌납한 야와타(八幡)와 스미요시(住吉)란 두 신바시라(神柱)를 모신 미코시(神興) 가마였다.

중조(中組) 공동의 취향으로서는 진구코오고(神功皇后)의 정한(征韓)에서 나온 스미요시 춤이며 그 장식된 대차(옥대 屋臺, 제례나 축제 행진 때에 사용되는 작은 집 모양의 수레)에는 모치즈키(望月), 이로하 두 군데 요정의 예기(藝妓)들이 고깔을 쓰고 타 있고 흰옷 정장을 한 대군중이 당겨서 펴게 한 꽃 양산은 1장반(丈半, 1丈은 약 3미터, 1장반은 4.5미터)이나 되는 크기였다.

서조(西組)의 취향은 충신 다카노리 사쿠오(高德削櫻)의 장식대차에 등나무로 장식하여 쇼리(勝利), 산수이(山水), 호오텐(奉天)의 세 군데 요정의 예기를 태우며 한층 더 화려한 도미(鯛, 조) 모양의 작업 옷을 입은 치바(千葉) 마을의 어부들이 끌고 나왔다.

마산포의 동조(東組)는 창원부청 구내의 가설회장에서 축배를 들며 가게츠(花月), 미하라시(浪花), 마산테이(馬山亭) 등의 예기들이 미리 연습한 개항 춤과 노래를 계속하여 실연하면서 소학교 회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축하식은 마에다 민장의 식사로 시작하여 미마스 이사관, 미야오카(宮岡) 방비대사령관, 제일은행 마산출장소 지배인 니시카와 다로이치(西川太郞一) 씨 등 제씨의 축하 인사가 끝나자 바로 연회가 열리게 되었다.

참가자 수는 470여 명, 마산의 관공리는 물론 해육군 군인부터 진주, 함안, 웅천, 창원, 진해(현 진동) 등 각 방면의 유지들이 적지 않았으며 건배는 미마스 이사관의 천황페하 만세, 해육군 만세 삼창 후에 이루어졌다.

당시 진해만에는 우리 제1함대가 정박 중이며 이 축하회에 대해 해군에 의한 악단 연주가 있었다. 그 악대는 오전 10시 반에 이미 축하회장에 도착하여 식이 시작함과 동시에 국가를 연주하며 향연이 끝날 때까지 계속 웅장한 악곡을 연주해 만장을 도취케 했다. 연회가 끝난 것은 오후 3시 반이었는데 미코시의 왕래, 장식대차의 순회는 밤까지 이어졌다.

거류지 각 동네마다 준비한 임시 가게(屋臺)도 길가에 있었다. 미친 듯이 춤을 추대는 사이 집집마다 사람들이 다 나와 다들 “씩씩하네(핫초하마, 八丁濱)”라고 외치며 왔다 갔다 하면서 밤을 세웠다.

원래 축하 여흥은 사흘 동안 계속할 예정이었으나 다음 날은 일찍부터 비가 많이 와서 종일토록 그치지 않고 밤이 되었다.

사흘째도 비가 계속해 더 많이 와서 길가에는 사람들이 없을 줄 알았는데 비 오는 날에 생명을 씻는 격으로 대낮부터 들떠 길에 나오는 기발한 사람들이 있었다.

핫초하마에서 석유 깡통을 당겨 뽑아내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같은 자, 기름종이를 덮어 쓰고 춤추는 자, 도롱이를 쓰고 유명한 공주 차림으로 돈 달라는 시늉을 하는 자, 춤추면서 “씩씩하네 핫초하마”라며 왔다 갔다하는 자 등 실소를 자아내는 장면들이 펼쳐진 것이다.

“씩씩하네 핫초하마”라는 말은 그 유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히데요시(豊太閤)가 오사카성을 지을 때 제창된 것을 되살려 미친 듯 읊조리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 4일은 간밤 중에 비가 그쳐 해가 뜰 무렵에는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씨로 우선 가마(神興, 미코시, 제례 때 신위를 모시고 메는 가마)가 마산포로 가 장식된 대차가 그 뒤를 이어 저녁때까지 모든 순회를 다 마쳤다.

하지만 그날 밤은 전날 밤보다 사람들이 더 들떠 나와서 평소 근엄하던 관공리로부터 의사, 신사, 상인과 그 자제들까지 다 여장으로 분장해 길에 나오고, 평소 집안에만 박혀 있던 내실, 낭자와 하녀까지도 양복이나 노동복의 남자 차림으로 분장하여 “씩씩하네 핫초하마”를 연호하면서 밤늦도록 서성거렸으며 그것이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를 축하할 때 부르는 소세이부시(書生節, 메이지 6년(1873) 무렵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유행가. ‘서생 서생이라고 경멸하지 말라, 대신 참의도 다 서생이네’ 하는 노래가 원곡)를 부탁 받아 저자가 지었던 노래는 다음과 같다.

〔마산개항 10년 기념 축하의 쇼세이부시 (요지)〕

암담한 나날을 보내다가 일본이 마침내 러시아를 꺾은 지 손꼽아 헤어보니 어언 10년

논과 밭의 변두리 마을이 변하여 지금은 마산포가 되어 그 바다의 앞날이 창창하여라

무학산의 모습 우아하고 산과 바다에 명승지도 많아 한국 최고의 명소로다

휘날리는 일장기에 춤추세 노래하세 경하하세

개항 10년…  <<<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47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