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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8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5 / 1954년 4월 18일 (일)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5

 

그러면 다른 말은 잠간(暫間, '잠깐'의 비표준어) 차정(次頂)에 미루어두기로 하고 정부에서는 무수한 순국열사에게 무엇으로 보답하였으며 무엇을 하려고 구상하고 있는가?

또 누구의 은덕으로 대한민국의 자모(慈母) 품안에서 평안히 행복 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를 한번이라도 돌이켜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현재 국가의 요직에 안如히 있는 자(者) 중에 진심으로 민족 전체의 이해(利害) 휴척(休戚,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일)을 염두에 두고 적성(赤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 국가를 걱정해본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는가?

8.15가 지난 기년(幾年, 몇 해) 후 정부에서는 각도(各道)를 통하여 애국자 병기(並其) 유가족의 업적을 조사 보고토록 행정 최말초(最末梢) 기관에 명하고 해(該)보고서에 준하여 각도(各道)에서 애국한 행로의 경중을 개량하는 소위 심사(?)회에 소위 ‘엄정’한 심의를 행한 것은 아주(원문에는 ‘아즉’) 가까운 사실이었다.

이러한 행사는 주권을 갖는 민족으로서는 매우 신선(新鮮)한 일이요 한 개의 생생한 교육이 아닐 수 없었든 것이다.

연(然)이나 소위 ‘엄정심의(嚴正審議)’라는 상자 속에는 진정한 애국열사의 혼이 구름이냐? 바람이냐? 혹은 유령이냐? 영자(影子, 불투명한 물체가 빛을 가려 나타나는 검은 형상)와도 같이 다시 사회에서 사라져버린 것은 말단기관의 실책인가? 체송(遞送) 중 도난인가? 당국의 사무적 착잡(錯雜,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뒤섞여 어수선함)의 과오이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심의해볼 일분의 가치가 없었더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애국한 비중이라든지 순국한 열사의 업적이 저울에 달아본 결과 보천하(普天下, 만천하)에 높이 선양할 공적은 크지마는 그들은 배경이 없고 사회에 두각이 나타난 인물이 없는 것을 따져서 심의하는 인물의 수지계산이 맞지 않다는 말 외 적중될 이유가 없지 않다고 본다.

심의 당사자가 여기에 항의할지 모르나 사실은 어디까지나 비인(非認)하지 못할 것이니 한 번 사리를 역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실례(實例)를 들면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교재 선생에 대해서 심의 담당자이든 도당국은 무슨 변명할 자료가 있거든 번듯하게 제시해 보아라.

독립열사를 표창한데 이의할 국민은 아마 한사람도 없을 것이고 쌍수를 들어서 환영하며 갈채를 아끼지 않을 것이나 그들 피표창자 중에 전부가 3·1정신과 그의 꿋꿋한 절개를 가졌던 자 몇 사람이나 있었는가를 엄밀하게 분석해 보았는가?

이 점이 매우 불쾌한 불순선(不純線)을 발견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설사 변절은 하였을지라도 제법 출세나 하고 세도깨나 있는 부류는 일약(一躍) 지사에 급재하고 이것도 저것도 없는 사람은 흙이나 재(灰) 속에 묻어버리고만 셈이라고 민족정기로 보아서 호령(號令)할 것이 아니냐?

당시 이규재 선생과 황교에서 전사한 팔열사의 전사(戰史)를 진전면장 박열주 씨가 보고(報告) 상신(上申)하였음에도 돌보지 않고 도에서 ‘넉아웃’을 하였음에 박 씨가 수(數) 이차(二次) 상도(上道)하여 역설한바 있었으나 그때의 양(梁) 경남지사는 코대답 정도로서 회피하여 오늘까지 묵살한 심정은 아무리보아도 선의(善意) 해석할 수 없는 일이다.

위정자가 이 모양이니 무의식한 백성이야 마음이 있은들 어찌 하리요.

이러한 일에도 일반 대(對) 위정자 간에 틈이 생기게 되니 책임은 누가 져야 될지 모르나 본래가 민중운동이라는 것은 민중 그 자신이 해결할 생각(원문은 ‘生意’)도 못하고 어(於) 천만사(千萬事)가 총망(悤忙, 매우 급하고 바쁨)한 위정자에게 의뢰하는 데에 우매(愚昧)한 민중의 비애가 생(生)하는 것을 더욱 계몽(啓蒙)하고 싶다.

어쨌든 지면이 용인(원문에는 ‘容入’)하는 대로 차항(次項)에 계속하기로 하거니와 금반(今般) 민간인 유지 제씨(諸氏)가 착안한 삼진지구의 선열제공(先烈諸公)의 기념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 성과 있기를 크게 기대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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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4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3 / 1954년 4월 16일 (금)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3

 

산협의 좁은 비렁(‘벼랑’의 방언)을 얼마쯤 나가니, 간데 마다 산은 백구질을 하여 황토만 노출(露出)한 독산인데 이 산 중복(中腹)쯤 되는 곳에 선생의 백골(白骨)이 묻혀있는 허물어진 분묘가 눈에 뜨이고 조금 아래 양지쪽에 두 봉(封)의 묘소가 있는데 이곳은 선생의 선친 선영이다.

노(老) 미망인은 여기서 시부모와 부군을 추억하는 듯 몇 개의 풀을 뽑고 있었다.

선생의 봉분 아래는 산이 급각도로 수직하며 묘소 정면은 협소하여 성묘하기에도 부자유하다.

선생이 지하에든지 봄바람 가을달이 몇 번이나 지났건만 찾는 사람 별로 없고 유족생계가 화급하여 그랬는지 봉축은 허물어져 황폐 그대로 이고 한 조각 표석조차 없으니 마음 없는 초동이야 지하의 고인이 어찌 누구인줄 알까보냐.

일행의 단심으로 묘전에 간단한 요핵(核)을 차려놓고 추념의 제를 지내게 되었으니 제문의 애절함에 전배자는 물론 유족의 단장애(斷腸哀)는 어느 누가 알아주랴.

오십 반평생 제물(祭物) 앞이나 무덤 앞에 절해본 일이 없는 기자가 뜻밖에도 이 날 제주(祭主)라는 직위로 초헌(初獻)을 올리고 절을 하게 된 것도 비망록에 기록하여 둘 일이다.

이어서 일행의 대표로 이(李) 마산시장이 아헌(亞獻), 다음으로 이 씨 문중 취객으로 허 금조(금융조합)이사의 순으로 정성껏 잔 들어 올리고 일동이 함께 재배하니 일행 중 백발이 휘날리는 윤치왕 군의학교 교장, 전 마산여고 교장 권영운 씨, 김형철 삼성병원장 등 삼노(三老)가 이날 특이한 채색(彩色)과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정성어린 추모의 제를 마치고 일행은 고인의 선영 앞 장방형으로 된 석축 위의 잔디에서 파제(罷祭) 제물을 벌려놓고 고인의 불타는 애국정신과 그 업적에 경탄과 찬양(讚揚)의 꽃을 피웠다.

아울러 허물어진 봉분의 수축, 유족의 생활대책 문제가 화제에 올라 즉석에서 선열의 기념사업 추진 발기인으로 권영운 김상용 양씨 외 기자 3명이 지명을 받고 단시일 내에 이 사업의 구체안을 구상하여 유종의 결실을 보도록 하였다.

각설(却說), 이교재 선생은 어떠한 경로를 밟고 어떠한 결과를 맺었는가 우선 윤곽만을 소개하고 상보(詳報)는 기념사업추위에 있을 것을 믿고 미루어 두기로 한다.

선생은 1919 독립운동이 전국 우내(宇內, 온 세계)에 창일하였을 때 감연(敢然)히 상해로 망명하여 당시 대한임시정부의 동지와 규합하고 굳은 결심과 사(死) 서(誓)하고(죽음을 맹세하고) 중대 밀명을 띈 밀사로 국내에 잠입 활약하였다함은 이미 소개한 바이나

국내 험의(험疑, ?) 처음 군자금 징모 사건으로 지명 수배되어 동지 이병수씨(현존)와 통영 마산 진주 방면으로 전전 피신하던 중 김도산 일행의 신파연극을 변장 관람 중 동(同) 고향인 오서리 출신 이만갑이라는 진주서 고등형사(부장)에게 발각 피검되어 혹독한 고문을 겪었으며 종시(終始) 일관(一貫) 굳게 입을 다물고 자백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치장 혹은 감방에서도 다만 동지들에게 「수구여병(守口如甁)」의 구호로써 동지들을 경고 하였다고한다.

5년 언도 후 공소심에서 3년형을 마치고 출옥 즉시 초지일관 백절불굴 조국광복의 열혈은 촌흐(寸?)도 냉(冷, 식다)함이 없이 상해 임정과 더욱 긴밀한 연락을 하다가 다시 혈고서파부(血告書播付, ?)사건이 발각되어 부산형무소에서 2년 언도를 받고 복역 중 일차 피검당시 전신 타박의 어혈병과 야만적 생식기 고문 여독의 화로 드디어 사십구 세를 일기로 열혈 심장의 고동도 장한을 품은 채 옥중에 정돈(停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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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2 / 1954년 4월 15일 (목)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2

 

일행은 이(李) 열사가 생전에 생장하셨다는 봉곡 부락 길가에 정차를 하고, 좁다란 밭 기슭을 타서 가면 신작로에서 불과 3·4분 만에 선생의 구거에 당도된다.

가옥은 농촌의 공통으로, 나지막한 토장(土墻, 흙담)과 싸리(柴, 시 / 산야에 절로 나는 왜소한 잡목)문을 들어서니 선생이 거처하던 노후하였던 집은 전항(前項)의 말과 같이 소실되고 소나무 향기와 흙냄새가 나는 새(新)집으로 변하였다.

이름과 외관만은 새집이지만 찬바람이 스며드는 쓸쓸하기 한량없으니 생계야말로 과반사(過半思)가 아닐까?

선생의 계보를 들어보면 수대를 두고 독자(獨子)로서 백숙형제(伯叔兄弟)가 없었고 원척(遠戚, 먼 일가) 외에는 혈혈 고독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으며 장(長)하여는 조국광복에 침식을 돌보지 않았으니 담석지저(儋石之儲, 얼마 되지 않는 액수의 저축)가 있을 리 없다.

불행한 혁명가의 후일은 천하의 통례인가?

선생이 순(殉, 목숨을 바침)한 후 유족으로서 금년 칠순의 홍태출 노온(老媼, 늙은 여인)과 일점혈육으로 당년 27세의 독녀 이태순 씨(현, 한철수 창원상공회의소 회장 모친)가 있을 뿐!

적적황요(寂寂荒寥, 매우 외롭고 쓸쓸함)한 이 애국가의 가정은 글자 그대로 모녀 단 두 사람이 형영상조(形影相吊, 의지할 곳 없이 몹시 외로움)로 슬픈 일 즐거운 일 무슨 일이고 간에 아무리 둘러보아도 두 사람 외에 논하고 의지할 곳이 없었다.

3·1운동 후 애국하는 열혈열사의 탄압이 그(其) 극에 달하자 옛날 친근자(親近者)도 종기가 다치는 듯 전부가 이들 유가족을 기피하고 소원(疎遠)이하였다.

이런 일을 지금 애국자로서 기세 올리는 자는 한번 자야(子夜, 밤 12시경의 한밤중) 사방이 고요할 때 남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 살펴 보아라.

양심 있는 자면 똥물에라도 빠져 죽어야할 것이어늘 어찌하여서 이 자들이 감히 두천족지(頭天足地)하는가?

지금 원척(遠戚)의 이정순 군이 양자로 입가하여 노부인을 돕고 있으나 부락민들까지도 선생의 구거(舊居)에 위문한 일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섭섭한 일이다.

왕년 백범 김구 선생이 일차 고(故) 동지의 유족을 위문한 외 사회·민간할 것 없이 금반 우리 일행이 최초인 모양이다.

홍 노온(老媼)은 우리 일행을 맞아들이며 과거 상해 임정으로부터 선생이 군자금모집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가졌든 조완구·김구 양 선생의 명의로 발부한 비밀지령서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귀한 기념물이다. 노부인은 감격과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종시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일행 중 마산 금조(金組, 금융조합) 허기중 씨로부터 우리를 일일이 소개하고 위문금으로써 윤 군의교장(軍醫校長), 최 65육군병원장, 유 항공수리창장, 김 동양주정사장, 이 마고교장, 손 마산교육감, 주 창원교육감, 이 마산시장 제씨로부터 각기 금일봉을 드리고 곧 이어서 열사가 고이 잠든 오서리 오리허(許, 오리쯤 떨어진)에 있는 대실골(竹谷山, 죽곡산) 묘지로 향하였다.

묘소로 향할 제(際)에 고인과 청년시절에 막역하였던 친우 오륙 명과 미망인 그리고 양자인 이 군 등의 길안내로 굽은 밭길을 지나 산기슭을 둘러서 안치된 분묘 앞에 도착되었을 시에는 시간은 벌써 4시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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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1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1 / 1954년 4월 14일 (수)

오늘부터의 포스팅은 창원지역에서 평생 언론인으로 살다간 목발(目拔) 김형윤(金亨潤) 선생이 남긴 기행문이다.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실렸고, 기고자는 본명 대신 ‘H 생’이라 되어 있다. 제목은 「삼진기행」이며 1954년 4월 14일부터 23일까지 9회 실렸다.

당시 마산일보 사장이었던 김형윤 선생이 15명의 벗들과 함께 1933년 순국한 독립지사 '죽헌 이교재 선생'의 유족을 찾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을 찾았던 기록이다.

 

<죽헌 이교재 선생>

 

이 글의 가치는 이교재 선생과 유족에 대한 내용과 함께,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당시의 삼진지역(진동, 진전, 진북)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다.

김형윤 선생의 기고문에 맞추어 모두 9회에 걸쳐 포스팅할 예정이다. 원문 그대로 옮기지만 일부 고문(古文)은 읽기 편하게 고쳐 쓰고, 설명이 필요한 경우 푸른 글로 첨가한다.

 

먼저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수록된 김형윤 선생(아래 우측 사진)을 소개한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에서 태어난 김형윤(金亨潤, 1903~1973)은 1915년 마산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21년 귀국하여 창원 산업 조합에서 근무했다.

1923년 조선일보 마산 지국 기자 생활을 시작으로 『남선 신문』, 『동아 일보』에서도 활동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아나키즘에 몰두하여 무정부 활동에 가담했으며, 1945년 12월 신탁 통치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종로 경찰서에 구금되어 1947년 봄에 석방되었다.

1947년 『남선 신문』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1948년 제호를 변경한 남조선 일보 사장 대리가 되었다. 1950년 『남조선 일보』를 『마산 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여 1966년 사직 때까지 편집과 경영 전반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73년 12월 5일 유작으로 『마산 야화(馬山野話)』가 발간되었고, 1974년 8월 18일에 마산 산호 공원에 불망비가 건립되었다.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1

4월 10일 천랑기청(天朗氣淸)한 오후 2시 반, 기자는 3·1 독립운동 시 순국하신 이교재 선생의 묘소 전배차 일행 15명과 더불어 자동차 다섯 대로 분승하고 마산일보 정문을 출발, 일로 창원군 진전 방면으로 향발하였다.

이번 전배하는 일행에는 과거 일정 시 변절 혹은 매절한 분자를 제외한 것이 마음 가운데 통쾌함을 금치 못한 것이다.

우산(牛山) 고개를 넘어 예곡을 거쳐 통칭 옛날 군도(群盜)가 출몰하던 ‘동전이 재’까지 가는 도중에는 농민 부역군들이 도로개수공사에 여념이 없어 우리 일행을 흔히 보는 시찰이나 유람객으로 아는 모양인 듯 본체만체 차 지난 뒤 사진(沙塵, 모래먼지) 속에서 꾸준히 일들만 하고 있다.

이윽고 진동읍내를 일관하여 서(西)로 달리는데 눈에 뜨이는 것은 6·25사변 당시 소개(疏開) 후 파괴되었던 집들이 모두 다 개축되어 각기 영세한 생을 개탁하여 조선(祖先)의 뼈 묻힌 고장에 깊이 뿌리를 박고 지상의 낙도로 삼고 있는 것은 무한히 아름다운 광경이다.

도로 우측 평야 저 편에 깎은 듯이 직하(直下)된 험한 산이 즉 사변 당시 적과 격전한 각드미산(여항산, 갓데미산)이라 한다.

만약에 적군이 침공하였을 때 이 산이 없었더라면 마산은 병풍 무학산도 존재의 가치를 보전하였을까 아닐까가 의심날 일이다.

적들의 중요한 거점인 이 각드미산이야말로 적들의 최후 운명을 결정한 방채선(防砦線)으로서 길이 기념하여야 할 곳이다.

구치사방 산정수정(驅馳四方 山程水程, 산길 물길 할 것 없이 사방으로 떠돌아 다님)식 19세기의 나그네가 아니니 한가히 고개로 이리저리 돌려볼 수 없을 터인데 삼진 방면을 소개하시던 마산서중 이기재 선생의 선도로 일행은 진전면 입구에서 일시 정지하였다.

장소는 다르지마는 노변석벽(路邊石壁)에는 3.1의거 시 동면(同面) 황교 교반에 공봉(棒)과 적권(赤拳)으로 무장한 왜적의 폭재(暴材)하는 진중으로 돌격하다 장렬한 호국의 신(神)으로 순한 김수동(원문에는 김동수로 되어 있음) 이기봉 씨 외 6선열의 창의비(진북면 지산리에 있는 팔의사 창의탑. 지금은 인근에 이전) 앞에서 잠시 묵례를 드리고 다시 황교의 고전장(古戰場)을 거쳐 목적하였던 이교재 선생의 유족이 계시는 봉곡리 도산부락에 도착한 것이 세 시를 훨씬 지나 30분 경이었다.

이 부락도 역시 적색분자가 침투할 것이라는 추측 아래 소개 명령을 받고난 뒤 연합군의 폭격례를 받고 전 부락 50여 호가 소실되었던 곳으로 가옥이야 태어난 팔자대로 일간 모 옥(屋)으로 신축하여 쓰라린 기억도 잊은 듯이 생기발랄한 것을 볼 때 파탄에 빠진 현재 농촌에도 언제나 영원한 봄 서광이 비쳐 오리라는 희망을 던져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 우리가 경(敬)공히 찾아뵈올 이교재 선생 유족의 가정과 생계는 어떠한가? 일행은 마음 초급히(焦急-, 시간 여유 없이 아주 급하게) 이(李) 선열 미망인의 주택을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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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마지막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2015323일 시작해 이번 회까지 만 2년 동안 포스팅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馬山野話)」143꼭지가 이번 회로 끝납니다.

지나간 시절 마산사회와 마산 사람들을 추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부터 연재될 포스팅은 신삼호 건축사가 준비합니다.

(주)유에이건축사사무소 대표 신삼호 건축사는 건축작품활동도 활발하지만 도시와 건축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부산대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논문 준비 중입니다.

블로그에 포스팅하게 될 내용은 논문 준비과정에서 접하게된 여러가지 자료들을 소개하고 해석하는 형식이 될 것이며 분량은 약 20여 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산야화> 마지막 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조병기(趙秉基)

 

김형윤 공은 1903년 마산시 서성동에서 김양수 씨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공의 성장과 수학 과정에 대하여서는 소상하지 않으나, 일생을 통하여 소년기에 돈을 번 일이 꼭 두 번 있었다 하는데 18세 때 진영 대목장에서 조장수를 한 일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창원산업조합에 가마니 검사원으로 취업을 하여 월봉 10원이란 대금을 벌어 쓴 일이 있었다고 자랑삼아 얘기하곤 하였었다.

 

20대에 손문기 씨가 경영하던 조선일보 기자를, 30대에 고교(高橋) 씨가 사장이던 남선일보 기자를, 40대에는 창산(蒼山) 이형재(李瀅宰) 씨가 경영하던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하였으며, 1947년에는 김종신 씨가 경영하던 남조선민보를 인수하여 마산일보로 개제(改題)한 후 현 경남매일(경남신문)로 넘어가기까지 최근 20여 년간을 경영하였으니 공의 일생은 그야말로 언론에 모조리 몸을 바친 거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공의 진면목은 유우머와 해박한 풍자에 있는 것이며, 가지가지의 기행과 괴벽(怪癖)은 김립(金笠)이나 정수동(鄭壽銅)을 방불케 하였고, 특히 방랑벽이 있어 국내는 물론, 일본 만주 등지를 바람처럼 편력(遍歷)하다가 서울에 돌아와서 조국 해방을 맞았다.

 

해방 그 해 1230일 신탁통치 반대시위에 선봉으로 나섰다가 검거되어 1947년 봄에 석방, 마산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공의 모든 언행의 근원이 되는 인생관이나 사회관을 이해하려면 먼저 공의 사상적(무정부주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공은 끝까지 부정, 불의를 증오하였고,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투쟁하였고, 권력에 굴하지 않았고,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많은 곤욕과 박해가 노상 뒤를 따랐으며 일정 때는 옥고도 수없이 치렀다. 3년 전 봄에 공은 필자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미력이나마 마산 사회를 위하여 뭔가를 기여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마산시사를 편찬하는 일을 시작하자고 하기에 쾌락(快諾)를 하고 발족하였던 것이나 오늘날까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오직 죄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끝으로 공을 애칭 또는 별명으로 목발(目拔)’이라 부르게 된 일화를 여기 소개하면서 공의 약전(略傳) 겸 회고담을 공을 추모하는 유우머로써 맺을까 한다.

 

우금(于今) 50년 전 마산 앵정(櫻町)의 벚꽃이 만개(滿開)일 때 일인 요정에서는 가설무대를 지어놓고 일인 게이샤(기생)’들이 삼미선(악기)을 통기며 일남(日男)들과 어울려 가무가 한찬 무르녹고 있었다.

 

한 조선인 지게꾼이 흥에 겨워 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일() 헌병이 민족적 모역을 주며 그를 끄집어 내었다. 이를 본 김 공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비호 같이 일() 헌병에게 달려들어 그의 한쪽 눈을 뽑아 버렸던 것이다. 공의 용기도 용기려니와 당시 힘이 또한 장사였었다.

 

목발(目拔)’이란 이 무용담에서 비롯한 것이나 유래를 모르는 사람들은 절름발이로 오단(誤斷)을 하여 빚어지는 희화(戲話)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끝

 

  <마산야화 초판본(1973)과 재판본(1996)>

 

 

-김형윤 선생을 회고한 조병기(趙秉基) 선생은 창원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였다.

 

창원공립보통학교 훈도였던 조병기 선생은 1928년 핵심회원 6명과 비밀결사체 흑우연맹(黑友聯盟)’을 조직하였다.

흑우연맹은 창원.마산의 열혈청년들로 구성되었다. 면면을 보면 창원공립보통학교 동료교원이었던 손조동(23), 창원 북동출신 박창오(朴昌午.20)와 박순오(朴順五.19), 창원 북면의 김두봉(金斗鳳.20), 창원 동면의 김상대(金相大.20), 창원 북동의 김두석(金斗錫.21)이었다.

이들은 나라사랑과 겨레번창의 유일한 길은 민중계몽과 혁명적 투쟁에 진력하는데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애국심도 강력한 정신적 기반이 없으면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입장에 따라 조병기 선생은 청년.학생들이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고취하는데는 오로지 민중계몽밖에 없다고 본 것이었다.

1927<청년에게 고함(크로포드킨 저)>이란 책자를 비밀리에 출판 보급하려다 일경에게 발각,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출판법 위반으로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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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진섭 2017.03.29 13:20 address edit & del reply

    수고하셨습니다. 고향 마산의 숨은 역사를 이렇게 조감해 주시니 평범한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언젠가는 많은 마산 시민들이 역사의 깊음을 음미하면서 인생의 깊이를 더하는 날이 오겠지요. 지금은 일부 일급 교양인들만이 음미하는 듯합니다.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왜 물질적 풍요와는 정반대로 정신은 황폐해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2016.05.02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0. 국농소의 소작권 쟁의

90. 국농소(國農沼)의 소작권 쟁의

 

밀양군 하남면 수산리 소재 국농소(國農沼) 전답 수백 두락을 둘러싸고 한일 반동분자와 소작인 간에 불씨가 튀는 쟁의가 벌어진 일이 있었다.

 

국농소(國農沼, 옮긴 이 / 송산서원 카페에서 인용)

수산(守山)의 국농소(國農所)는 조선시대 초기의 수산국둔전(守山國屯田)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조 후기에는 수산지(守山池) 또는 국농호(國農湖)라 불렀으며 그 제언(堤堰=물을 가두어놓기 위한 둑)을 수산제 혹은 대제(大堤)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지형이 모두 바뀌고 비옥한 수전 경작지로 화하여 당초의 경역(境域)을 분간하기 곤란하나 하남읍 수산리와 초동면 김포리(金浦里) 사이의 광활한 들판을 아직도 국농호 또는 궁노수라 부르고 있으며 댓섬(竹島), 자라목(鼈山) 등의 유적도 남아 있다.

국농소(國農沼)의 위치

 

이 사건이 법적 문제가 되어 원고(소작인)의 법정 대리인 서기홍, 피고(이덕이)의 법정 대리인 박지영, 중촌 모()란 일인 변호사, 그리고 주심판사 석촌(石村) 지청장으로 선정, 부산지법류산지청()에서 1927년부터 동 30년까지 격쟁(擊錚)했다.

이때 지주는 경성부 관훈동 민병석(閔丙奭), 자작(子爵) 사음(舍音) 차해성(車海星)이었으며 토착 소작인들은 소작권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당당한 연고자들이었고, 피고 이덕이는 일본에서 상애회(相愛會) 박춘금의 최말단 깡패로서 일자 무식꾼인데,

 

<상애회(相愛會) / 옮긴 이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20 일본 동경(東京)에서 조직된 친일 단체로 박춘금(朴春琴)이 만들었으며, 이기동(李起東)이 총본부 회장을 맡았다. 3·1운동을 전후해 일본으로 노동 인구가 물밀듯이 몰려들자, 그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단속할 목적으로 일본 정부 및 총독부가 사주하여 조직한 노동 단체이다. 일본 각지에 지부를 결성하여 한때 회원수가 10수만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 작자가 수십 년 동안 일본에서 깡패 생활을 하는 동안에 축재한 돈을 가지고 고향인 수산(守山)으로 돌아왔으나 농촌에서 할 일은 없고 이때 옥답 수백 정보가 되는 국농소(國農沼)에 대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즉 국농소에 대하여 적당히 교섭하면 이의 소작권을 받을 수 있다는 풍문을 듣고 이것을 탈취코자 암암리에 사음(舍音) 차해성(車海星)과 공작을 하는 일방, 순진한 소작인들에게는 경찰의 권력을 발판으로 하여 노골적인 위협도 사양치 않았으나,

소작인들도 그에 못지않게 한 덩어리가 되어 은산(수산) 농민조합(위원장 이종하)에서도 조선 농민총동맹(대표 안준)을 비롯하여 각 지방 사회단체에 격문을 발송하는 등 이덕이 파와 대항하기 위하여 포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것을 봉쇄코자 이덕이는 직계 낭당(郞黨)은 물론 부산 방면에 우글거리는 깡패들을 동원한다는 소문을 냄으로써 수산의 거리는 살벌한 분위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때가 본답(本畓) 이앙시기인 6월을 기하여 소작인 측을 지원하고자 인접 밀양, 함안, 김해, 양산, 마산 등지에서 좌경 청년 4,50명이 속속 운집하여 동네는 일촉 즉발의 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각처에서 모여든 청년들은 정수(精粹)분자들로서 담력이나 완력에 있어서 자신을 과시, 양양한 의기는 자못 충천하였다.

짧은 여름밤은 밝았다.

적군은 수리(水利) 제방에, 반군은 회전장(會戰場)인 소답(沼畓) 언덕에 진을 치고 자웅을 결판코자 대치하고 있을 때 별안간 이덕이의 직계 부하 5,6명이 이종하를 포위 피차 격투가 벌어지고, 한편에서 단도를 가진 부산 깡패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자가 있자, 용감무쌍한 좌경 청년들은 재빨리 패주하고 충돌한 현장에는 마산의 김모(金某)만이 분전하였을 뿐이었다.

돌이켜 보건데 이 사건이 발생되도록 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지주의 불분명한 태도와 사음(舍音) 차해성(車海星)이 쌍방에 두 다리를 걸친 탓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겠다.

국농소 사건의 후일담으로 수년 전 부산일보의 르포 연재물에는 이덕이를 지방의 지도자로 치켜 올려 세우면서 소작쟁의에 분전한 사람은 깡패 두목이라고 기자 멋대로 보도하였다.

재판 결과 원고의 패소, 승소한 이덕이는 농지개혁 때까지 지주로 뻐기었으나 지금은 원수도 요우우(僚又友)도 살과 같이 흘러가는 세파에는 하는 수 없이 모두가 한줌 흙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상 쟁의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된 사람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李執中(이집중, ), 박남용(), 朴濟(박제, ), 김형윤(編者註·著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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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5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88. 법원과 검찰, 89. 제1차 공산당 사건

88. 법원과 검찰

현재 장군동 4(통정 4정목)에 자리잡 고 있는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지청)과 부산 지방검찰청 마산지청(검사분국)은 당초에는 구마산 시장입구 근처였던 속칭 아래학교’(여자보통학교-白洸燒酎工場) 언덕에 소재하고 있었던 것인데 1910(명치43)에 현위치에 신축 이전했다.

초대 상석판사(上席判事)는 대우가차(大友歌次), 상석검사(上席檢事)는 복산장병위(福山長兵衛)였으며 조선인 초대 판사는 고씨로 이분이 두 자제는 신마산 소재 일인의 심상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신축 이전 뒤의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

 

89. 1차 공산당 사건

소위 101명 조선공산당 사건이 신의주에서 변호사를 하던 심유정이란 친일파를 습격한 것이 발단이 되어 경찰은 이들 청년들의 가택을 수사한 결과 사건은 발로(發露)되고 말았다.

무산자신문(無産者新聞) 경성지국장 임원근(이 신문은 일본 공산당 좌야학佐野學이 주재한 것)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거물급들이 속속 검거, 신의주로 압송되었다가 사건을 경기도경으로 이송한 중대 사상사건이다.

신의주 사건보다 몇 해 앞질러서 구마산 객선부두 앞 원동회사 출장사무소에서 김상주, 김형선, 윤윤삼 등이 공산당을 비밀 조직하였던 것을, 경찰은 전연 감지하지 못하였다가 101명 사건 때 비로소 발로된 것인데 이것이 전국 최초의 공산당 사건이다(당시 일본조일朝日신문 호외에 보도됨).

신의주 사건은 1925(대정 14) 121일부터 검거 선풍이 불기 시작했는데,

마산에서는 김상주가 1차로 검거되고, 그 다음에 김명규가, 그리고 다음 해 7월경에 이봉수, 황수룡, 김직성, 김기호, 김용찬(이발업), 윤윤삼, 팽삼진, 김종신, 강모 등이 일망타진되어 경성으로 압송, 세정(世情)을 소연케 하였다.

이들은 1년 이상 2년의 실형을 받았으며 당원 중 김형선은 삭발하고 학생복 차림을 하고 상해로 탈출하였으며,

팽삼진과 김종신은 그들과 교우관계로 피검, 2년간 예심의 고초를 받다가 무협의로 면소(免訴) 출감되었다.<<<

<위 사건 후 1926년 상해로 탈출한 김형선이 7년 뒤 국내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아래 사진은 1933년 7월 16일자 김형선 체포관련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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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0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2. 변태성 고리업자, 3. 포주의 횡포

2. 변태성 고리업자

시내 서성동(幸町) 일인 간수(看守)부락에 천기(川崎) 모(某)라는 60대 고리대금 업자가 있었다.

집에는 6개월 혹은 길면 1년마다 젊은 여자가 교체된다. 직업은 조선인을 상대하는 고리대금업이다.

일본 은어(隱語)로 고리업이나 창기업(娼妓業) 혹은 호색자(好色者)를 시계의 4시 40분 혹은 8시 20분이라 하여 위의 눈꺼풀이 좌우로 처진 때문에 그들을 꼬집어서 하는 말이라고 한다.

천기(川崎)의 눈도 그러하였다. 피부 빛깔은 검붉어서 고리업자로서 일목(一目) 직감된다.

고리업자나 전당업자는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음음(陰陰)함은 상통하여 채무자가 기일을 어길 때는 인정사정 헤아리지 않고 즉각 법적 행동을 취한다.

그런데 천기(川崎)의 경우는 다르다. 채무자가 이자나 원금을 환불하려고 하여도 출입구가 밤낮 밀폐되어 있으므로 자연히 기일이 초과된다. 이자가 하루만 늦어도 노발대발이다.

그의 마음보를 아는 채무자들은 이웃 일본인에게 물어보아도 아무도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문은 잠겨 있어도 실내에는 천기(川崎) 노(老)와 40대의 여자가 운우의 극치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자기들의 흥분에만 몰입한다.

40대의 여성으로서 70대의 노옹(老翁)에게 최대의 봉사를 하고 사지가 굴신도 못할 정도로 늘어졌건만 그 자는 매양 부족을 참지 못하여 궁리 끝에 기머리등(성호동)에 사는 조선인 홀어미를 알게 되었으나 홀어미도 처음에는 억지 봉사를 하였다.

도수가 한이 없어서 실증을 내자 즉석에서 지게꾼을 불러 자기가 사준 쌀과 나무를 뺏아갔다는 이야기다.

그 후에 들려온 말은 천기(川崎)에 시달리다 못견디어서 떠나는 여자가 “여자로서 도저히 배겨낼 수 없는 것은 반구속 상태로 잠만 깨면 행동을 개시하는데 일일 평균 5회 내지 6회 그것도 부족하여 외식(外食) 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변태더라”고 이웃 일녀(日女)들에게 울면서 실정을 토로하였다는 것이니 이 때문에 채무 기일이 일실(逸失)되고 담보한 가옥전지(家屋田地)를 경매당한 피해자가 꽤 많았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고리대금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래 그림의 국내 대부업계 1, 2위가 일본 기업이다 / 아이엠피터 자료)

(대부업체의 이자율도 우리나라가 최고 수준이다 / 아이엠피터 자료)

 

3. 포주의 횡포

구마산 수성동(壽町) 일대에 1915년 경부터 일본에서 가장 하급층에 속하는 자들이 동네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농촌 빈민촌의 딸자식을 마구 싸구려 식으로 사들여 년계(年季)를 제멋대로 정해 가지고는 창루업(娼樓業)을 시작했는데 이 딸아이들의 대부분은 방직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배짱 검은 뚜쟁이 놈에게 속아서 따라가 보면 인육시장이란 함정이었다.

이곳에 한번 몸을 빠뜨리면 몸을 움직일수록 점점 나락으로 빠져들어 갈 분 영 헤어나지를 못한다.

부채라는 것도 화장품대, 의복대, 검진비 등등을 공제한 나머지를 가지고 3, 1제로 분배를 하니 상환할 길이 요원한 것이다.

최초에 젊어지게 되는 몸값이라는 것도 용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6,7세로부터 35,6세까지의 여인들로서 평균 150원에서 200원이 제격이고 많은 것은 7,8천원 짜리도 있다고 한다.

계약 연한은 3년에서 5년인데 이것이 대충 인육시장의 시세라고나 할까?

그런데 여기에 흡혈귀인 포주를 상대로 단연 분기, 각성한 18세의 소녀가 있었으니 도변(渡邊)이란 일인이 경영하는 수루(壽樓)란 청루(靑樓)에 속아서 팔려온 최모 양은 몇 푼 안되는 몸값으로 5년 계약을 강요당한 채 고통을 겪어오다가 용감히 포주에게 선언을 하고 마굴(魔窟)을 버리고 나와 버렸던 것이다.

도변(渡邊) 포주는 창기 取締(취체)규칙을 가지고 경찰에 고발함으로써 최 양은 즉결 구류처분으로 10일간 구속이 되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조선인 식자(識者)는 물론 일인 유지들까지 여론이 분분하였다.

당시 가등(加藤)이란 일본 서장도 일선 여론을 무시할 수 없어 대차관계로 인신구속을 못한다는 일본 최고재판소인 대심원 판례에 따라 최 양을 석방, 이상 아무런 제재도 가할 수가 없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당시 조선인 유곽 여성이 포악한 포주와 항쟁하여 승리를 거둔 첫 케이스라고 하였다.<<<

 

공인된 창기업(매춘업)의 집단 지역이 곧 유곽이다. 최초의 유곽은 일본 부산영사관에 의해 부산에서 처음 생겼다. 1905년 생긴 신정 유곽(현재 필동과 쌍림동 사이)은 서울의 대표적 유곽으로서 그 영업은 해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대부분의 도시에 유곽이 생겼으며 서울에는 신정 유곽과 더불어 용산 彌生町 유곽(현 용산 도원동 주변)이 유명하였다. 위 사진은 서울의 신정 유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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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 수전노 2제

예고해 드린 대로 오늘부터는 우리 지역 이야기,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馬山野話』를 포스팅하겠습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마산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도시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수록되어있어서 이 도시의 한 시대를 이해하기에는 이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초판본은 목발 선생이 돌아가신(1973. 8. 7 작고) 후인 1973년 말에 출판되었고, 재판은 1996년 ‘도서출판 경남’의 수고로 나왔습니다.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꾸었을 뿐 원문을 손대지 않아 초판과 재판의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글『馬山野話』는 재판본을 그대로 싣는 겁니다. 원문 그대로이며 혹 탈오자가 있으면 바로 잡겠습니다. 글이 모두 141꼭지라 짧으면 1년6개월, 길면 2년 정도 걸릴 분량입니다.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의 해방 이후 부분은 준비 중입니다. 이 글 연재 끝내고 포스팅 하겠습니다. 아래 사진은 『馬山野話』의 초판과 재판본입니다.

 

 

 

1. 수전노 2題

<第1題>

 

마산부 내 완월동 2구 전 마산 세무서 관사 건너편 골목길을 조금 들어가면 나지막한 초가집 부엌방에는 나이 40이 넘은 일본인 홀아비가 세들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 안 되나 직업은 마산부청(현재 창원군청) 사환이다. 그리고 공휴일은 물론이지만은 여기 있는 대로 조선인을 상대로 구차한 석유나 실, 빨래비누 같은 것을 자기 이웃과 가까운 촌으로 행상을 하며 믿음직한 집에는 외상 거래도 했다. 현금보다는 비싸게 준다. 그의 식생활을 보면 아침은 보리밥에 다꾸왕 몇 조각이며, 점심은 감자 두 개 내지는 세 개, 저녁밥은 죽 아니면 간혹 밥이다.

신문은 부청을 쉬는 날 마산역에 비치한 것을 보며, 자기가 거처하는 방이나 창문은 캘린더를 떼어 바를 뿐 아니라 밤에는 아무리 방이 어두워도 불을 켜지 않고, 외상장부를 볼 필요가 있을 때만 잠깐 호롱불을 켰다가 용건이 끝나면 꺼버린다.

술은 좋아하는 편이나 공짜가 아니면 어림도 없고, 마시기는 막걸리를 마시되 대단한 용기와 각오로 일전(一錢) 엽잔을 때로는 두 잔을 비우고 나면, 이것이 즉 그에게는 대용식이 된다. 이렇게 해서 먹을 것도 굶으며 의복도 내의 외는 사 입지 않는다. 그때는 관청이나 큰 기업체에 취직이 된 급사나 사환에게는 제복은 춘추 두 차례씩을 급부하는 은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사람이 이렇게 골똘한 검약의 표본 같은 생활을 하는데 저축이라도 하느냐 하면 그것은 신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돈이라도 있는 냄새가 외부에 풍기는 날이면 도독이 붙을까 염려인 듯 누가 보아도 거지와 사촌벌은 될 것 같다.

이리해서 몇 해를 한집에 지내던 그는 외상값 받으러 촌으로 갈 일이 있어서 이웃에 있는 조선 아이를 대신 보내기로 했다가 문득 머리에 번갯불같이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아뿔사! 아이를 촌에까지 심부름을 시키려면 삯돈을 주어야한다. 큰 손해가 날 뻔했구나 생각한 그는 날을 보낼 것을 취소하고, 자기가 가기로 하는데 그것도 왕복비용이 나니 석유 양철통에 실, 성냥 등을 싣고 행상을 하면 몇 십전이라도 남을 것이라고 주판질을 했다가 돌아오는 날 갑자기 급성폐렴에 걸려서 온 방 안이 그으름에 덮인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비참하게 숨졌다.

이렇게 철저한 수전노가 죽은 뒤 수사 당국에서 그의 유품을 샅샅이 뒤졌으나 고인을 위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직 남았다는 것은 헝겊 같은 의복 몇 벌이 버들상자에 있을 뿐이었다.

이내 낙담한 후견인 격인 수사원들이 그 의복을 주물럭거리니 뜻밖에도 그 속에서 마산우편국 저금통장이 발견되었는데 그 액수를 보니 놀라지 마라! 당시로 봐서, 대금 일만 몇 천원이 기입되어 있지 않겠는가?

수사 당국은 고인의 고향으로 조회를 해보았으나 가까운 일가 친척이라곤 없고 천애 고독으로 먼 친척뻘로는 조카 되는 자가 북해도 모처에서 석탄광부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 피맺힌 돈 일만 몇 천원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 조카에게로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계산이 어긋난 수전노의 검약이라고나 해둘까.

<김형윤(왼쪽) 당시 마산일보 사장과 변광도 편집국장. ‘지방신문의 편집자’ 캡처 화면. 경남신문 인터넷 자료. 마산일보는 경남신문의 전신>

 

<第1題>

아무도 모르게 마산우편국에 대금 일만 수 천원을 한푼 안 쓰고 고스란히 남겨둔 채 죽은 마산부청 수전노 행적이 일본 전국의 주간 잡지를 장식케 한 6,7년이 지난 뒤 그와 유사한 인물이 역시 완월동에 살고 있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어서 이름은 中村 某로서 마산고등학교 입구 도로 왼편에 있던 양철집이 그의 거처하던 곳이다.

그가 어떻게 마산으로 굴러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절도죄인가 사기죄로 마산 형무소에 복역하던 중 옥칙을 잘 준수한 모범죄수로서 가출옥과 동시에 재수자(在囚者)의 제2작업장인 완월동 벽돌공장 관리자로 지정된 것이 인연이 되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 같다.

그가 입옥 전에 약간의 전답이 근교 농촌에 있었는데 이 사람 또한 생명보다도 돈을 소중히 여긴 때문에 벽돌공장 관리자로서의 수당은 한 푼 쓰지 않고 모아서 재산은 날로 늘어나기만 했다.

게다가 고리대금을 해서 추수 때면 농촌에서 상당한 수곡이 있었고, 부내에서도 들어오는 금리로 식생활을 하고도 남았지만 그 식생활인 것이 극히 제약되어 있어서 반은 굶는 상태였다.

홀아비가 되어서 그런지 부엌에서 연기나는 것을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물욕에 정신이 혼미한 그인지라 원금 환납 기일이 하루라도 늦어지는 경우에는 연체 이자는 물론이고 가차 없이 지불명령을 띄운다. 소작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소작료 계약이 너무 가혹하므로 소작인들은 감세(減稅)를 해서 남과 같이 해달라고 호소를 하면 연기는 해주되 감세는 어림없다는 것이다.

이리해서 많은 소작인과 채무자들을 울리곤 하였다. 게다가 그의 홀아비 신세를 동정하기 보다 가엾은 조선 여자의 빈공을 면해주기 위해서 그에게 중신을 해 준 일도 수차례 있었으나 오래 동서를 하지 않고 헤어지고 만다.

원인이란 별 것이 아니다. 쫓겨난 2,3명 여자의 경우가 똑 같다. 문제는 밥을 많이 먹기 때문이란 것이다. 즉 식량을 소비하는 게 아깝다는 것이다.

모든 생활필수품을 배급제로 하던 2차 전시 때만 해도 배급 1인분 식량이 너무나 적고 귀해서 목구멍에 넣기가 아까웠던지, 배급 쌀은 큰 자루에 모아 두고 가까운 탁주 양조장을 찾아가는데, 공장에서는 공짜로 막걸리 몇 사발이 통하는지라 얻어 마셔 놓고는 돌아올 때 두서너 되를 사가지고 와서는 막걸리를 대용식으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점약을 해 오는 동안 홀아비로는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없었지만 다만 없는 것이 꼭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곧 사람, 친구도 이웃도 없었다.

그가 인사를 나누고 지내는 사람이라고는 소작인 상대의 법적 대리인인 소출(小出)이란 변호사 한 사람 뿐이었으나 이웃은 아니었다. 결국은 외로웠다.

세월은 흘러갔고, 그가 병들어 누었을 때도 약 심부름을 할 사람조차 없었다. 이리해서 극도로 인생의 허무와 재행 제행(諸行)이 무상함을 느끼고 탄식함이었든지 자기 집 복도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들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고 말았다.

창문을 연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의 무언의 죽음을 보이고 싶어서였을까?<<<

아래 사진은 산호공원에 있는 김형윤 선생의 불망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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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5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4) -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7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1876년 조선이 강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원래 마산은 개항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했던 까닭으로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잠식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의 소굴로 변해 갔다.

1911년 일제는 마산항의 개항(開港)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마산은 조선의 쌀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창구로 변질되어 갔다.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쌓아둔 인천항의 쌀가마니>

 

또한 일제는 과거 일본인 조계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식민도시를 건설하기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는 마산사람들의 저항도 점차 그 강도를 더해가게 되었는데, 시장권과 매축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과 어용단체 신상회사(紳商會社) 철폐 및 국채보상운동 등이 그 한 예이다.

또한 마산의 토착 상인들은 일본상인들과 대결하기 위해 민의소와 조선인 상업회의소를 만들어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천황만세’를 거부한 창신학교 학생들-

1910년 조선을 완전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조선인의 저항을 막고 영구적인 지배를 위해 무단통치라는 극악무도한 지배방식을 택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은 의병전쟁의 패배로 그 힘이 약화되어 본격적인 투쟁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점차 독립에의 꿈을 버리고 일제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산의 민의소와 조선인상업회의소에 관계하였던 많은 조선인 자본가들도 자신들의 입지를 위하여 일제에 굴복하였으며, 일제를 칭송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대표적 친일단체 마산교풍회를 설립하고 민중들을 통제하는 앞잡이 역할을 하였는데, 김병선, 손덕우, 김선집, 옥기환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한말 이후 교육과 계몽을 통해 마산의 근대화에 앞장선 점도 있지만, 또한 친일의 길을 걸어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들에 비해 같은 자본가였지만, 비밀결사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한 조선인 상인들도 있었다.

191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해방운동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의 지부장 안확, 이형재, 김기성, 배중세 등이 그러하였다.

뿐만 아니라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그리고 마산노동야학교에 관계했던 많은 사람들도 1910년대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독립에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11년에 일어난 창신학교 학생들의 항거사건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있다.

1911년 조선침략의 우두머리였던 일본국왕 명치(明治)가 죽고 대정(大正)이 즉위하자 일제는 이를 기념한다는 명목 하에 각급 기관과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천황만세를 소리 높이 외칠 것을 주문한 일제에 대해 당시 행사에 동원되었던 창신학교 학생들은 호응하지 않고 일제에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기마경찰과 충돌한 학생들은 일제 경찰들을 공격하여 자산천(지금의 무학초등학교 옆 개울)에 밀어넣어 버렸다. 이 일로 창신학교는 많은 곤욕을 치룬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에 강점당한 이후 국내에서는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대부분의 투쟁은 일회적인 것이었고 조직적으로는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러19193월 만세시위는 그 사정이 달랐다. 그 시위는 일제를 놀라게 하였고 독립을 위한 조선인의 기개를 만방에 드높인 것이었다.

당연히 마산에서도 시위는 조직되고 시도되었다. 마산의 3·1운동은 기독교 계열과 연계되어 있던 이갑성(민족대표 33가운데 1인)과 임학찬 등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지만,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세력과 연결이 되고 있었던 김용환, 이형재 등 전투적 민족주의자들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창신학교와 의신학교의 교사였던 이상소와 박순천 등도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하였다.

만세 시위의 주 참가자는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마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마산 시민과 인근 지역의 농민 등 광범위한 대중들이 참가하였다.

특히 마산의 시위는 33일 두척산(무학산) 시위를 필두로 321일, 325일, 331일 등 4차례 이상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4월에는공립보통학교의 학생들도 만세시위를 감행하는 등 어느 지역 못지 않게 그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일제는 김용환, 이상소, 박순천 등 48명을 감옥살이를 시켰으며, 특히 김용환은 일제의 심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옥사할 정도로 그 기개가높았다.

3·1 운동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민족적인 민족해방과 독립에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지만, 민족해방운동 진영에서는 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운동세력들이 나뉘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개 실력양성을 통해 점진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과 일제에 대한 전면적인 항쟁을 통해 즉각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그러한 상황은 마산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마산지역에서도 3·1동 이후 실력양성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른바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19206월경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점으로‘마산구락부’를 창립하고 교육·체육·계몽·교류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마산구락부를 만든 사람들은 과거 마산 민의소의 회원들이 많았으며, 손덕우, 옥기환, 김치수 등 대개가 상인을 비롯한 지주 출신의 자본가들이었다.

이들은 마산학원과 마산여자야학을 설립하여 정규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또한 조선인 전용의 운동장을 만들어 각종 체육행사를 열었으며, 강연회, 토론회 등도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문화운동에 나섰다.

밖에도 마산지역의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단체로 기독교 계통의 면려청년회와 면려청년회를 지원하던 문창예배당(교회)도 큰 역할을 하였다.

 

<1901년 설립된 마산문창교회의 1919년 모습>

 

그러나 마산지역의 문화운동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922년 이후에는 극심한 침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1920년 이후의 경제공황과 더불어 조선인 자본가들의 자금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며, 또 일반 대중을 조직과 사상면에서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 부족하여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집회장소로 자주 이용되던 문창예배당을 교회측이 더 이상 집회장소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은 문화운동이 대중과 분리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사회주의가 주도한 노동·농민 운동-

한편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이탈할 즈음 마산지역에서는 사회주의사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었다.

김명규, 김형두, 손문기, 이주만, 이근우 등은 19221111일 ‘신인회’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하였다.

사상단체란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사상을 연구하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을 지도했던 단체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인회는 19238월 조직을 확대하여 혜성사(살별회)로 개편되었는데, 신인회와 혜성사의 초기 회원 중에는 민족해방과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고유한 목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혜성사의 조직 이후 혜성사의 주요 조직원들은 사회주의 사상의 본격적 연구와 전파, 그리고 성장하는 노동·농민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을 지도하려고 하였다.

 

<1921년 준공된 마산 경찰서>

 

1924년 마산노동 동우회를 통하여 경남지방의 노동·농민운동 단체를 ‘조선 노동 총동맹’에 가입시킨 것은 이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컸다.

또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각종 강습회를 개최하였으며, 동경대지진 학살 동포에 대한 추도 및 기근 구제활동 그리고 지역내부의 파업활동에 대한 지원 등 여러가지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1925년 건설되는‘조선공산당’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공산당 마산 야체이카(세포 -당원)가 되었다.

특히 김영규와 김형선은 1926년 조선공산당의 경상남도 집행위원회의 당과 공산청년회의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신인회와 혜성사 출신의 민족해방운동가들이 경남지역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나 1926년 조선공산당이 계획하고 주도한 6·10만세운동의 준비과정에서 김명규, 김기호 등 10명이 검거되고 김형선은 상해로 탈출을 하게 되는데, 지도부가 검거되자 마산지역의 조선공산당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게 되었다.

이것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당원의 대부분이 일제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대중단체의 간부직에 있었던 그들 자신들의 잘못된 활동 때문이기도 하였다.

일제하 마산지역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외에도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계열의운동도 존재하였다. ‘마산 아나키스트 그룹’이 바로 그들이다.

마산 아나키스트 그룹은 1925년 김형윤을 중심으로 조한응, 김계홍 등이 최초로 시작하였는데, 본격적 활동은 1927년 서울에서 ‘김산’이라는 무정부주의자(직업은 목사)가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외국인 선교사나 일제로부터 벗어난 자주적인 독립교회 활동을 전개하여 대중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마산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창원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창원 흑우연맹’과 연계하여 무정부주의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반제국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8년 상해에서 개최된‘동방 무정부주의자 연맹 결성대회’에 회원인 이석주를 파견하여 국제단체와 연계하기도했다.

그러나 마산과 창원에서 활동하던 이석주가 일제에 체포되면서 김형윤 등 다른 조직원들도 검거되어 마산아나키스트 그룹의 활동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일제하 마산지역에서는 이후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29년 조선전역을 강타한 광주학생운동의 여진 속에서 발생한 ‘친일교사 배척운동’ 시위사건과 1937년 신사참배거부를 주도했던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은 폐교가 될 때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노동자·농민 등 생산대중의 일제에 대한 투쟁도 일제하 마산지역의 민족해방운동에서 당당히 그 역할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로자리잡은 마산의 역사적 위상은 바로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마산인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이미 예고되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신춘식 / 당시 동아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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