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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8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운동 중에서 증거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부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급한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라는 위임장을 비롯하여 다종의 문건을 휴대하고 입국한 일일 것이다.(여기서는 ‘임명장’보다 ‘위임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경상남북도상주대표’에게 독립운동과 관련한 여러 가지 중요한 사항을 위임한 까닭이다.)

작성연도 중 제일 늦은 것이 1931년 11월 20일이니만큼 그의 입국은 상해에서 창원군 진전면까지의 거리나 교통 수단 등을 생각하면 빨라도 1932년 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교재가 국내에 가지고 들어온 이른바 ‘이교재임정문서’를 중심으로 그의 마지막 독립활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까지 필자가 조사해서 파악한 이교재임정문서 속의 문건은 9개이다.(여기서 문서는 상위개념, 문건은 하위개념이다. 다시 말해 문서는 범위가 넓고, 문건은 정해진 서식이나 규범에 맞춰 작성된 것으로, 기관의 규정 업무에 따라 생산된 기록물을 말한다(松世勤(中國人民大學 檔案學科), 「文書, 文件與公文有區別麽?」, 「檔案時空 1986年 01期, pp. 42~43). 따라서 ‘이교재임정문서’라는 의미는 임정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생산하여 이교재에게 건넨 문건의 조합이라는 뜻을 가지며, 각각의 문건은 그 문서에 포괄된다고 하겠다.)

문서에 포함된 문건의 명칭과 세부 사항은 <표 3>과 같다.

 

우선 이와 관련해서 검토해야 할 사항은 이 문서가 언제 국내에 들어왔으며 어떻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서에 대해 최초로 보도한 이는 마산일보의 김형윤 기자였다.

1954년 4월에 진전에 있는 이교재의 자택을 방문하였을 때 “洪老媼(이교재의 부인, 필자)은 우리를 맞아들이며 과거 상해 임정으로부터 선생이 군자금 모집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조완구·김구 두 사람 명의로 발부한 비밀지령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귀한 기념물”(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자)이라면서 문건을 소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그 문서를 이교재의 부인인 홍노온이 직접 소개하였다는 것, 두 번째로 그것은 김구·조완구의 명의로 발부된 비밀지령서로서 이교재가 군자금 모집이라는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휴대하였다는 것이다.

미루어 보건대 이 문건은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주요 임무를 위임하는 위임장이었을 것이다.

이 기사에는 다른 문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보다는 전체문서를 보존하기 위한 홍여사의 피나는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김기자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석양이 닥칠 때는 반드시 오리라는 신념으로 이 지령서를 굴뚝 속이 아니면 밧줄에 묶어서 우물 속에, 어떤 때에는 부녀자의 월경대로서 일각일분도 머릿속에 떠난 일 없이…” 숨기고 살아왔다고 전한다.

지령서를 갖가지 방식으로 숨겨왔다가 김형윤에게 털어놓았는데, 홍여사는 이 문서를 지령서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이교재를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몇가지 중요사항을 위임한 위임장(좌)와 상해격발문(우). 본래 두 개의 문건이지만 이어놓고 가운데에 임정의 국쇄를 찍었다.

<그림 2> 달성군 화원의 문장지에게 보낸 특발문(우)와 추조문(좌)

 

이보다 늦은 1963년에도 동아일보에서 이 문서의 일부를 소개하였다.(「32년 만에 주인 찾는 감사장」, 동아일보, 1963년 3월 16일자)

「32년만에 주인찾는 감사장」이라는 제하의 이 기사에는 임정에 자금을 제공한 3명의 애국지사에게 임정에서 발행한 감사장과 조문 석장이 33년 만에 주인을 찾은 사정을 소개하고 있다.

세 사람이라고 소개하였지만, 실은 진주의 ‘허만기’(허만정의 오기일 것이다.)와 경북 달성의 ‘문대호’(문장지의 아들인 문원만을 지칭함, 필자주)(‘대호’는 실명이 아니라 ‘대효’의 오기로서 5형제의 효도를 통칭하는 칭호라고 한다. 문원만이 대효의 대표로서 이 문서를 찾아간 것이다. 남평문씨의 이름이 조금 복잡한데, 임정에서 조문을 보낸 문장지는 문영박의 호이며, 아래에 나오는 문원만은 문영박의 다섯 아들 중에서 둘째인 시채의 가내 호칭이다-문영박의 손자인 문태갑의 증언이다. 2019년 3월 18일의 통화) 두 사람만 언급되고 있고 있을 뿐이다.

언급되지 않은 한 사람은 창녕의 성낙문이었을 것이며, 조문은 문장지(장지는 문영박의 호. 필자주)와 황상규에게 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기사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쓰여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연고자가 있다면 楊경남지사 또는 홍여사에게 제시하고 찾아가 주기를 바란다”는 부탁의 말도 곁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남도와 홍여사가 합동으로 문건들의 주인을 찾아주는 행사를 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여기서 말하는 양 경남지사는 1961년 8월 25일부터 1963년 12월 16일까지 재임한 양찬우 지사를 말한다.)

이 기사에 호응한 이는 달성의 문대호, 곧 문원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3년 4월 5일에 이교재의 양자인 이정순이 달성군에 있는 문영박의 아들 문원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순은 이 편지에서 “상별지후로 소식이 적적하여… 가지고 가신 서류를 조속히 부송하여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본인의 구호관계 수속을 취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이 편지는 달성의 남평문씨 세거지의 인수문고에서 보존하고 있던 것이다. 이곳에는 2017년 9월 12~13일, 2018년 9월 28일에 걸쳐 방문하였다. 이 편지와 두 개의 문건은 2017년 9월 13일에 확인하였다.)

문원만은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보고 진전면에 찾아와 문장지 관련 문서와 그 외의 문서를 빌려갔다고 한다. 필자가 달성의 남평문씨에서 운영하는 인수문고에 가서 확인한 결과, 그곳에서 보관 중인 문서에는 임정에서 보낸 추조문과 특발문 원본이 있으며 「상해격발문」과 「이교재위임장」은 복사본 형태로 소장되어 있었다.(「상해격발문」과 「이교재위임장」은 문원만이 붓글씨로 베껴 놓았다고 전해 주었다. 문건을 보여준 문태갑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이정순이 송부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뒤의 두 문건일 것이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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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9.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8 / 1954년 4월 22일 (목)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2

 

논둑 받아(?) 둑아 날 살리라 심의중(沈宜中)이 불콩이 날 죽인다!

이것은 누구의 창작인지 미상이나 지금도 산야엘 가면 나물 캐는 촌새악씨나 나무하는 목동이나 또는 소먹이는 어린 목동의 애절한 목소리와 가련한 입에서 구(舊)아리랑 곡으로 처량히 흘러내리는 민요라 한다.

이 민요는 누가 들어도 직해(直解)할 수 있는 것이니 삼진부락민이 기미년 독립운동 당시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러 진주(進駐)하여 가는 도중 황교교각에서 잠복하였던 일인 헌병과 협력한 보조헌병 심의중이라는 악도가 있었는데 일본헌병이 처음에는 공포(空砲)로 위협하고 일보 더 접근되자 적두(赤豆)로 유인하여 사정 내에 애국용사가 돌입하였을 때 최선두에서 제1발을 쏜 자가 심의중이라는 자라고 한다.

적탄은 간발도 없이 난사되었으나 맨주먹과 곤봉만 휘두르던 앞선 용사는 쓰러지고 용사의 시체를 넘어 다시 돌진하던 동지도 일보 더 전진하지 못하고 또한 비참하게도 전사의 시체 위에 쓰러져 열렬한 애국청년의 선혈은 대지에 물들었으니 김수동 김호현 고묘주 변갑석 김영환 홍두익 변상복 이기봉 씨 등이 즉 8열사들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서 이교재 선생이나 이들 팔열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초개에 파묻혀 있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닐 것이다. 이분들 대개가 순박한 농민이며 기이한 운명을 약속한 것 같이 순국 후 겨우 무덤에 벌초 정도나 해줄 양자들이 대부분이니 일가친척들인들 백사지(白沙地)같은 세도인심(世道人心)이라 오비(吾鼻)도 수삼 척에 순사(殉死)한 이들에게 마음만으로 어찌할 것인가?

일정시대에는 친일파와 밀정이 횡행하므로 자기신변이 위태로워 도와주지 못했고 8·15 후는 유상무상(有象無象)의 군맹(群盲)이 매관매직과 모리(牟利)에 분망하였으니 사욕에 실명한 자들이 이해득실이 없는 남의 일에 관심될 리가 만무하다.

총탄과 백인(白刃)에 몸은 사력(砂礫)에 폭쇄되어 지하삼 척(尺)에서 묵묵히 묻혀있고 혼백은 백학을 타고 구만리 장천으로 등(登)히 선(仙)하였으나 허구한 세월에도 시냇물은 유유자류(悠悠自流)하며 산용(山容)은 의구하니 팔열사의 고전장(古戰場)에 오고가는 나그네가 뉘라서 발을 멈추리요?

삼진방면의 애국열사가 사파(沙婆)를 떠난 지 근 사십년. 생시에는 조국광복에 일편적심이요, 몰(歿) 후에는 호국의 충혼이 되었으나 사자(死者) 이미 입을 굳게 닫았으니 은수(恩讐, 은혜와 원한) 가 누구인가 알 길이 바이없다.

이화(李華)의 글을 차용하면

鳥無聲兮山寂寂(조무성혜산적적 : 새들은 우짖지 않고 산은 고요하다)

夜正長兮風淅淅(야정장혜풍석석 : 밤은 참으로 긴데 바람 소리만 쓸쓸히 들린다)

魂魄結兮天沈沈(혼백결혜천침침 : 혼백이 서로 엉키어 하늘은 자욱하고)

鬼神聚兮雲冪冪(귀신취혜운멱멱 : 귀신이 모여들어 구름이 뒤덮인다)

日光寒兮草短(일광한혜초단 : 햇빛이 차가우니 풀조차 자라지 않고)

月色苦兮霜白(월색고혜상백 : 달빛은 처량한데 서리가 하얗다)

傷心慘目(상심참목 : 상처난 마음 처참한 눈이)

有如是耶(유여시야 : 이와 같은 곳이 또 있을까)

-(중략)

布奠傾觴(포전경상 : 마침내 제사상을 차려 술판에 술을 붓고)

哭望天涯(곡망천애 : 통곡하면서 하늘 끝을 바라보니)

天地爲愁(천지위수 : 하늘도 땅도 그를 위해 슬퍼하고)

草木凄悲(초목처비 : 초목도 처량하고 비통해 한다)

弔祭不至(조제불지 :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가 지극하지 않으면)

精魂無(본문은 何)依(정혼무의 : 혼령도 의탁할 곳이 없으리니)

-(하략)

실로 혼신을 울리던 8열사의 장렬한 최후. 공민(公民)된 자 누가 머리를 숙이지 않을 소냐?

누가 그 공적을 그대로 방치하고 묵살할 것인가?

그들 유족은 거의 산지사방(散之四方)하여 실낱같은 로명(露命, 이슬처럼 덧없는 목숨)을 겨우겨우 이어간다는 풍문만 들리니 선열에 대한 예의는 빠졌으나 후손이라도 찾을 수 없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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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2. 20:34

김형윤의 <삼진기행> 7 / 1954년 4월 21일 (수)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1

 

우리일행은 이교재선생의 묘소에 정중한 전배식(展拜式)을 마치고 산에서 마을까지 내려왔을 때에는 사양(斜陽)이 부락에 빚칠 때이다.

일행은 노부인과 작별인사를 할 때 굵은 눈물방울이 양 볼에 흘러내리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양친을 일찍 여읜 기자의 가슴속에 형상할 수 없는 만감이 충격한다.

기자는 다시 노부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후일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떠나면서 고개를 잠시 돌려보니 아직도 동구(洞口)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서있다.

마치 자식을 먼 길로 보내는 자모(慈母)와도 같다.

일행은 급급히 회로(回路)를 달리며 다시 한 번 황교 좌우를 돌려보며 1919년 삼일독립전투시를 회상해본다. 1919년이면 지금부터 손꼽아서 삼십육 년이라는 옛날이다.

그때 이 태황께서 승단하시고 인산(因山)을 기회로 국내외 동포들은 분연히 일어서서 독립만세를 절규하자 그 위세는 요원의 불길같이 급속도로 전토(全土)에 미만(彌滿, 널리 퍼지어 가득 참)하자 일부 호농(豪農)과 일본인에 아부하여 재산생명을 보호 받는 무리들 외 일제봉기(一齊蜂起)하여 방방곡곡이 타도일본 독립만세 소리가 하늘을 질렀다.

그때 도시에서는 단순한 비밀삐라 산포가 아니면 만세절규에 그쳤지마는 농촌에서는 이와 같은 서당 샌님들의 미온태도에 만족치 않고 감연(敢然)히 일헌(日憲)에게 직접 행동을 가하였음으로 그 때문에 피해정도가 극히 참혹하였다고 한다.

수원교회 학살 사건도 국내에서 가장 으뜸 될 일이니 이것은 불의의 피습으로 말미암아 하가(何暇, 어느 겨를)에 대항은 고사하고 피난할 겨를조차 없어 비참한 희생을 입었지마는 그 최후의 장렬함에 있어서는 삼진방면의 황교전투보다 오른편에 내세울 비극은 드물다는 것이다.

도시나 농촌이 모두 마찬가지지마는 음모 행동은 대부분이 시일(市日, 장날)을 택한 모양인데 삼진의 전투로 최고의 희생을 당한 날이 음력 2월 3일의 진북의 시일(市日)을 기하여 인근 부락민의 대거출동으로 일헌(日憲)에 일격을 가하고자함에 그 정신과 그 기세야말로 장할 지고!

그러나 어찌 꾀 하였으리요, 무기 없는 불행한 약소민족으로 범 앞에 둥지개 바람(?)이니 어찌 통분함을 금할 수 있으리오.

그 의지는 장하고 용(勇)하였으나 결국은 비극의 씨를 뿌리게 되었으니 후일의 민중운동에 커다란 교훈을 우리들에게 남겼다고 할 것이다.

그때 누구의 말인지 모르나 유아동포 유진무태(唯我同胞 有進無退) 라는 「모토」대로 이를 애국청년에게는 오직 전진이 있었을 뿐이고 조국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든 것이니 서반아(西班牙)혁명 때 부인(婦人)이 가슴을 내밀고 적의 권총 앞에 돌격하던 것을 연상케 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으냐?

비극의 황교 동편에는 일헌과 그의 주구되는 헌병 보조원이 총부리를 들고 대진(對陣)하고 있었고 오서리 방면에서 합류한 청년들은 이것을 격퇴코저 진군할 때 별안간 적측(敵側)에서 탄환이 발사되었다.

그러나 그 탄환은 팥(赤豆)이었으므로 그들이 유도작전을 하는 흉계에 속아서 일제히 선풍지세(旋風之勢)로 헌병을 포위하려고 할 찰나에 실탄은 소낙비와 같이 애국청년의 머리 위에 쏟아져서 유탄(流彈)으로 어린애가5명 청장년 8명이 일시에 절명되었든 것을 일행은 다시 한 번 돌이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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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25.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6 / 1954년 4월 20일 (화)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6

 

불우 순국열사들!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백년 일세기를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의 식민지로서 정치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치명상을 입고 경제적으로 약탈착취(掠奪搾取)를 완부(完膚, 흠이 없이 완전함) 없이 당(當)튼 남방아주(南方亞洲)의 태반에 걸쳐 반거하고 있는 인도보다 그 인구에 있어서 십분의 일에도 불과하며 피치(被治) 연월도 삼십육 년이지마는 약소민족 투쟁기록은 세계 독립운동사상 이 나라 우에 따라올 국가가 없다.

비폭력을 내세운 미약독립투쟁! 비협력인 「스와라지」운동(1906년 인도에서 전개되었던 반영 자치 운동)으로 도저히 주권탈환을 기약할 수 없는 일이므로 외국의 노예제도의「멍에」에서 벗어나는 데는 그 나라 민족전체가 선혈을 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오, 동시에 정신 육체 공히 숭고한 재단에 오르지 않으면 주권회복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자는 국민제위에게 죄송스러운 말이지마는 독립선언서라든지 33인의 그때 태도를 그리 감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언서 그 자체가 폭력을 부정하였고 이 선언을 발포하는 동시에 태서관(太西館)요리점에서 비장한 각오 아래 경기도 경찰부에 전화로써 자수 연락을 하였다.

얼핏 들으면 영웅 같기도 하나 이런 일은 「아라비안나이트」에나오는 이야기와도 같고 중세기 나이트(騎士)의 용감한 역사 인물도 같으니 냉철(冷徹)한 눈으로 비판하면 찬양(讚揚)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독립투쟁이나 사회운동이 어느 정도 성숙하기까지에는 심오한 계략과 엄히 비밀리에 잠입 침투한 후 상당한 정신무장을 장비한 연(然)에 그 행동이 전광석화적(的)으로 지상에 나타나서 적의 급소와 허를 무자비하게 격충(激衝)하여도 실패 뒤 오는 비경(悲境)이 왕왕(往往)함에도 불구하고 국민민족의 흥망성쇠가 좌우되는 최절정이며 중요한 인산(因山) 기회를 전후한 최단시간에 하등의 무장도 갖추지 못한 채 요리점에서 일정(日政)의 개들에게 이 중대한 음모를「제공」하고 「온순히 포승」을 받았는가?

생각해보면 심히 불유쾌하기 한이 없는 일이다.

냉정하면 염○의 영웅심리를 투매가로서 적에 제공함으로 그 영명(令名)은 고가(高價)로 국내에 선포된 것이 아닐까?

바로 말하면 가령 일본의 개들에게 전화 연락을 하였을지라도 체포하러왔던 개새끼들을 문전에서 격살쯤은 하여야 민족의 열혈이 용솟음쳤을 것이거늘 그 유유낙낙 끌려간다는 것은 아무리보아도 적진에 투항이 아니면 자살적 타협행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이럴 때 일수록 불란서혁명의 지휘자인 「마라, Jean-Paul Marat, 프랑스 혁명기 급진적인 산악당 지도자」 「탄론(?)」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 급진적 자코뱅당 지도자로 프랑스 혁명의 주요인물」들과 같이 료군(僚軍(?)) 최첨단에서 사기를 북돋우고 적을 호령하며 때로는 적진에 돌입하여야 할 것인바 자기들은 실내에서 비항거로 붙들려가고 기다(幾多, 수효가 많음)의 동포들만 피를 흘리게 한 것은 그리 찬성할 수가 없다.

약소민족운동은 정치적 타협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투쟁이며 피를 요구한다. 그렇지 못하면 외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치운동은 될지 모르나 그것은 완전독립운동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와라지」운동을 역설하는 「마하트마 간디즘」을 조소하였고 국민협회의 민원식 시중회(時中會)의 최린 일파의 친일적 자치운동을 타○ 매장(埋葬)하였던 것은 국민의 기억에 새로운 일이다.

유차관지(由此觀之)컨대 불행한 이 나라에 나서 이 나라 운명을 바로잡고자 생명을 홍모나 초개(草芥) 같이 조국에 바친 불우한 열혈애국지사가 지금은 풀잎사이에서 이슬과 서리를 맞으며 이 세상과 시국을 한탄하는 유명무명의 수많은 백골들도 생시에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견적필살(見敵必殺)의 굳고 굳은 결심으로 직접행동을 아끼지 않은 때문에 세계사에 희생된 수가 시간적으로 계산하여 으뜸이며 약소국가에 용명(勇名)이 휘날렸으며 구역(逆)날 말이나 총독정책도 다소 달라졌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호기로 삼십삼인 중 보따리를 소초(小礎, 小礎國昭, 고이소 쿠니아키, 제8대 조선총독)나 남차랑(南次郞, 미나미 지로, 제7대 조선총독)에 팔아먹던 자도 생겼고 밀정이 잠행하였고 매국친일도당이 횡행하였으며 어제의 친일범죄를 해결치 않고 오늘은 일본 놈의 사무를 받은 듯이 국가사회에 군림하고 선열을 무시하는 현상을 볼 때 영혼이 구천에 그 자들 두상에 낙뢰 없는 것이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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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18.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5 / 1954년 4월 18일 (일)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5

 

그러면 다른 말은 잠간(暫間, '잠깐'의 비표준어) 차정(次頂)에 미루어두기로 하고 정부에서는 무수한 순국열사에게 무엇으로 보답하였으며 무엇을 하려고 구상하고 있는가?

또 누구의 은덕으로 대한민국의 자모(慈母) 품안에서 평안히 행복 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를 한번이라도 돌이켜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현재 국가의 요직에 안如히 있는 자(者) 중에 진심으로 민족 전체의 이해(利害) 휴척(休戚,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일)을 염두에 두고 적성(赤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 국가를 걱정해본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는가?

8.15가 지난 기년(幾年, 몇 해) 후 정부에서는 각도(各道)를 통하여 애국자 병기(並其) 유가족의 업적을 조사 보고토록 행정 최말초(最末梢) 기관에 명하고 해(該)보고서에 준하여 각도(各道)에서 애국한 행로의 경중을 개량하는 소위 심사(?)회에 소위 ‘엄정’한 심의를 행한 것은 아주(원문에는 ‘아즉’) 가까운 사실이었다.

이러한 행사는 주권을 갖는 민족으로서는 매우 신선(新鮮)한 일이요 한 개의 생생한 교육이 아닐 수 없었든 것이다.

연(然)이나 소위 ‘엄정심의(嚴正審議)’라는 상자 속에는 진정한 애국열사의 혼이 구름이냐? 바람이냐? 혹은 유령이냐? 영자(影子, 불투명한 물체가 빛을 가려 나타나는 검은 형상)와도 같이 다시 사회에서 사라져버린 것은 말단기관의 실책인가? 체송(遞送) 중 도난인가? 당국의 사무적 착잡(錯雜,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뒤섞여 어수선함)의 과오이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심의해볼 일분의 가치가 없었더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애국한 비중이라든지 순국한 열사의 업적이 저울에 달아본 결과 보천하(普天下, 만천하)에 높이 선양할 공적은 크지마는 그들은 배경이 없고 사회에 두각이 나타난 인물이 없는 것을 따져서 심의하는 인물의 수지계산이 맞지 않다는 말 외 적중될 이유가 없지 않다고 본다.

심의 당사자가 여기에 항의할지 모르나 사실은 어디까지나 비인(非認)하지 못할 것이니 한 번 사리를 역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실례(實例)를 들면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교재 선생에 대해서 심의 담당자이든 도당국은 무슨 변명할 자료가 있거든 번듯하게 제시해 보아라.

독립열사를 표창한데 이의할 국민은 아마 한사람도 없을 것이고 쌍수를 들어서 환영하며 갈채를 아끼지 않을 것이나 그들 피표창자 중에 전부가 3·1정신과 그의 꿋꿋한 절개를 가졌던 자 몇 사람이나 있었는가를 엄밀하게 분석해 보았는가?

이 점이 매우 불쾌한 불순선(不純線)을 발견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설사 변절은 하였을지라도 제법 출세나 하고 세도깨나 있는 부류는 일약(一躍) 지사에 급재하고 이것도 저것도 없는 사람은 흙이나 재(灰) 속에 묻어버리고만 셈이라고 민족정기로 보아서 호령(號令)할 것이 아니냐?

당시 이규재 선생과 황교에서 전사한 팔열사의 전사(戰史)를 진전면장 박열주 씨가 보고(報告) 상신(上申)하였음에도 돌보지 않고 도에서 ‘넉아웃’을 하였음에 박 씨가 수(數) 이차(二次) 상도(上道)하여 역설한바 있었으나 그때의 양(梁) 경남지사는 코대답 정도로서 회피하여 오늘까지 묵살한 심정은 아무리보아도 선의(善意) 해석할 수 없는 일이다.

위정자가 이 모양이니 무의식한 백성이야 마음이 있은들 어찌 하리요.

이러한 일에도 일반 대(對) 위정자 간에 틈이 생기게 되니 책임은 누가 져야 될지 모르나 본래가 민중운동이라는 것은 민중 그 자신이 해결할 생각(원문은 ‘生意’)도 못하고 어(於) 천만사(千萬事)가 총망(悤忙, 매우 급하고 바쁨)한 위정자에게 의뢰하는 데에 우매(愚昧)한 민중의 비애가 생(生)하는 것을 더욱 계몽(啓蒙)하고 싶다.

어쨌든 지면이 용인(원문에는 ‘容入’)하는 대로 차항(次項)에 계속하기로 하거니와 금반(今般) 민간인 유지 제씨(諸氏)가 착안한 삼진지구의 선열제공(先烈諸公)의 기념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 성과 있기를 크게 기대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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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4.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3 / 1954년 4월 16일 (금)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3

 

산협의 좁은 비렁(‘벼랑’의 방언)을 얼마쯤 나가니, 간데 마다 산은 백구질을 하여 황토만 노출(露出)한 독산인데 이 산 중복(中腹)쯤 되는 곳에 선생의 백골(白骨)이 묻혀있는 허물어진 분묘가 눈에 뜨이고 조금 아래 양지쪽에 두 봉(封)의 묘소가 있는데 이곳은 선생의 선친 선영이다.

노(老) 미망인은 여기서 시부모와 부군을 추억하는 듯 몇 개의 풀을 뽑고 있었다.

선생의 봉분 아래는 산이 급각도로 수직하며 묘소 정면은 협소하여 성묘하기에도 부자유하다.

선생이 지하에든지 봄바람 가을달이 몇 번이나 지났건만 찾는 사람 별로 없고 유족생계가 화급하여 그랬는지 봉축은 허물어져 황폐 그대로 이고 한 조각 표석조차 없으니 마음 없는 초동이야 지하의 고인이 어찌 누구인줄 알까보냐.

일행의 단심으로 묘전에 간단한 요핵(核)을 차려놓고 추념의 제를 지내게 되었으니 제문의 애절함에 전배자는 물론 유족의 단장애(斷腸哀)는 어느 누가 알아주랴.

오십 반평생 제물(祭物) 앞이나 무덤 앞에 절해본 일이 없는 기자가 뜻밖에도 이 날 제주(祭主)라는 직위로 초헌(初獻)을 올리고 절을 하게 된 것도 비망록에 기록하여 둘 일이다.

이어서 일행의 대표로 이(李) 마산시장이 아헌(亞獻), 다음으로 이 씨 문중 취객으로 허 금조(금융조합)이사의 순으로 정성껏 잔 들어 올리고 일동이 함께 재배하니 일행 중 백발이 휘날리는 윤치왕 군의학교 교장, 전 마산여고 교장 권영운 씨, 김형철 삼성병원장 등 삼노(三老)가 이날 특이한 채색(彩色)과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정성어린 추모의 제를 마치고 일행은 고인의 선영 앞 장방형으로 된 석축 위의 잔디에서 파제(罷祭) 제물을 벌려놓고 고인의 불타는 애국정신과 그 업적에 경탄과 찬양(讚揚)의 꽃을 피웠다.

아울러 허물어진 봉분의 수축, 유족의 생활대책 문제가 화제에 올라 즉석에서 선열의 기념사업 추진 발기인으로 권영운 김상용 양씨 외 기자 3명이 지명을 받고 단시일 내에 이 사업의 구체안을 구상하여 유종의 결실을 보도록 하였다.

각설(却說), 이교재 선생은 어떠한 경로를 밟고 어떠한 결과를 맺었는가 우선 윤곽만을 소개하고 상보(詳報)는 기념사업추위에 있을 것을 믿고 미루어 두기로 한다.

선생은 1919 독립운동이 전국 우내(宇內, 온 세계)에 창일하였을 때 감연(敢然)히 상해로 망명하여 당시 대한임시정부의 동지와 규합하고 굳은 결심과 사(死) 서(誓)하고(죽음을 맹세하고) 중대 밀명을 띈 밀사로 국내에 잠입 활약하였다함은 이미 소개한 바이나

국내 험의(험疑, ?) 처음 군자금 징모 사건으로 지명 수배되어 동지 이병수씨(현존)와 통영 마산 진주 방면으로 전전 피신하던 중 김도산 일행의 신파연극을 변장 관람 중 동(同) 고향인 오서리 출신 이만갑이라는 진주서 고등형사(부장)에게 발각 피검되어 혹독한 고문을 겪었으며 종시(終始) 일관(一貫) 굳게 입을 다물고 자백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치장 혹은 감방에서도 다만 동지들에게 「수구여병(守口如甁)」의 구호로써 동지들을 경고 하였다고한다.

5년 언도 후 공소심에서 3년형을 마치고 출옥 즉시 초지일관 백절불굴 조국광복의 열혈은 촌흐(寸?)도 냉(冷, 식다)함이 없이 상해 임정과 더욱 긴밀한 연락을 하다가 다시 혈고서파부(血告書播付, ?)사건이 발각되어 부산형무소에서 2년 언도를 받고 복역 중 일차 피검당시 전신 타박의 어혈병과 야만적 생식기 고문 여독의 화로 드디어 사십구 세를 일기로 열혈 심장의 고동도 장한을 품은 채 옥중에 정돈(停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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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8.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2 / 1954년 4월 15일 (목)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2

 

일행은 이(李) 열사가 생전에 생장하셨다는 봉곡 부락 길가에 정차를 하고, 좁다란 밭 기슭을 타서 가면 신작로에서 불과 3·4분 만에 선생의 구거에 당도된다.

가옥은 농촌의 공통으로, 나지막한 토장(土墻, 흙담)과 싸리(柴, 시 / 산야에 절로 나는 왜소한 잡목)문을 들어서니 선생이 거처하던 노후하였던 집은 전항(前項)의 말과 같이 소실되고 소나무 향기와 흙냄새가 나는 새(新)집으로 변하였다.

이름과 외관만은 새집이지만 찬바람이 스며드는 쓸쓸하기 한량없으니 생계야말로 과반사(過半思)가 아닐까?

선생의 계보를 들어보면 수대를 두고 독자(獨子)로서 백숙형제(伯叔兄弟)가 없었고 원척(遠戚, 먼 일가) 외에는 혈혈 고독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으며 장(長)하여는 조국광복에 침식을 돌보지 않았으니 담석지저(儋石之儲, 얼마 되지 않는 액수의 저축)가 있을 리 없다.

불행한 혁명가의 후일은 천하의 통례인가?

선생이 순(殉, 목숨을 바침)한 후 유족으로서 금년 칠순의 홍태출 노온(老媼, 늙은 여인)과 일점혈육으로 당년 27세의 독녀 이태순 씨(현, 한철수 창원상공회의소 회장 모친)가 있을 뿐!

적적황요(寂寂荒寥, 매우 외롭고 쓸쓸함)한 이 애국가의 가정은 글자 그대로 모녀 단 두 사람이 형영상조(形影相吊, 의지할 곳 없이 몹시 외로움)로 슬픈 일 즐거운 일 무슨 일이고 간에 아무리 둘러보아도 두 사람 외에 논하고 의지할 곳이 없었다.

3·1운동 후 애국하는 열혈열사의 탄압이 그(其) 극에 달하자 옛날 친근자(親近者)도 종기가 다치는 듯 전부가 이들 유가족을 기피하고 소원(疎遠)이하였다.

이런 일을 지금 애국자로서 기세 올리는 자는 한번 자야(子夜, 밤 12시경의 한밤중) 사방이 고요할 때 남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 살펴 보아라.

양심 있는 자면 똥물에라도 빠져 죽어야할 것이어늘 어찌하여서 이 자들이 감히 두천족지(頭天足地)하는가?

지금 원척(遠戚)의 이정순 군이 양자로 입가하여 노부인을 돕고 있으나 부락민들까지도 선생의 구거(舊居)에 위문한 일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섭섭한 일이다.

왕년 백범 김구 선생이 일차 고(故) 동지의 유족을 위문한 외 사회·민간할 것 없이 금반 우리 일행이 최초인 모양이다.

홍 노온(老媼)은 우리 일행을 맞아들이며 과거 상해 임정으로부터 선생이 군자금모집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가졌든 조완구·김구 양 선생의 명의로 발부한 비밀지령서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귀한 기념물이다. 노부인은 감격과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종시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일행 중 마산 금조(金組, 금융조합) 허기중 씨로부터 우리를 일일이 소개하고 위문금으로써 윤 군의교장(軍醫校長), 최 65육군병원장, 유 항공수리창장, 김 동양주정사장, 이 마고교장, 손 마산교육감, 주 창원교육감, 이 마산시장 제씨로부터 각기 금일봉을 드리고 곧 이어서 열사가 고이 잠든 오서리 오리허(許, 오리쯤 떨어진)에 있는 대실골(竹谷山, 죽곡산) 묘지로 향하였다.

묘소로 향할 제(際)에 고인과 청년시절에 막역하였던 친우 오륙 명과 미망인 그리고 양자인 이 군 등의 길안내로 굽은 밭길을 지나 산기슭을 둘러서 안치된 분묘 앞에 도착되었을 시에는 시간은 벌써 4시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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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1.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1 / 1954년 4월 14일 (수)

오늘부터의 포스팅은 창원지역에서 평생 언론인으로 살다간 목발(目拔) 김형윤(金亨潤) 선생이 남긴 기행문이다.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실렸고, 기고자는 본명 대신 ‘H 생’이라 되어 있다. 제목은 「삼진기행」이며 1954년 4월 14일부터 23일까지 9회 실렸다.

당시 마산일보 사장이었던 김형윤 선생이 15명의 벗들과 함께 1933년 순국한 독립지사 '죽헌 이교재 선생'의 유족을 찾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을 찾았던 기록이다.

 

<죽헌 이교재 선생>

 

이 글의 가치는 이교재 선생과 유족에 대한 내용과 함께,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당시의 삼진지역(진동, 진전, 진북)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다.

김형윤 선생의 기고문에 맞추어 모두 9회에 걸쳐 포스팅할 예정이다. 원문 그대로 옮기지만 일부 고문(古文)은 읽기 편하게 고쳐 쓰고, 설명이 필요한 경우 푸른 글로 첨가한다.

 

먼저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수록된 김형윤 선생(아래 우측 사진)을 소개한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에서 태어난 김형윤(金亨潤, 1903~1973)은 1915년 마산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21년 귀국하여 창원 산업 조합에서 근무했다.

1923년 조선일보 마산 지국 기자 생활을 시작으로 『남선 신문』, 『동아 일보』에서도 활동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아나키즘에 몰두하여 무정부 활동에 가담했으며, 1945년 12월 신탁 통치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종로 경찰서에 구금되어 1947년 봄에 석방되었다.

1947년 『남선 신문』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1948년 제호를 변경한 남조선 일보 사장 대리가 되었다. 1950년 『남조선 일보』를 『마산 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여 1966년 사직 때까지 편집과 경영 전반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73년 12월 5일 유작으로 『마산 야화(馬山野話)』가 발간되었고, 1974년 8월 18일에 마산 산호 공원에 불망비가 건립되었다.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1

4월 10일 천랑기청(天朗氣淸)한 오후 2시 반, 기자는 3·1 독립운동 시 순국하신 이교재 선생의 묘소 전배차 일행 15명과 더불어 자동차 다섯 대로 분승하고 마산일보 정문을 출발, 일로 창원군 진전 방면으로 향발하였다.

이번 전배하는 일행에는 과거 일정 시 변절 혹은 매절한 분자를 제외한 것이 마음 가운데 통쾌함을 금치 못한 것이다.

우산(牛山) 고개를 넘어 예곡을 거쳐 통칭 옛날 군도(群盜)가 출몰하던 ‘동전이 재’까지 가는 도중에는 농민 부역군들이 도로개수공사에 여념이 없어 우리 일행을 흔히 보는 시찰이나 유람객으로 아는 모양인 듯 본체만체 차 지난 뒤 사진(沙塵, 모래먼지) 속에서 꾸준히 일들만 하고 있다.

이윽고 진동읍내를 일관하여 서(西)로 달리는데 눈에 뜨이는 것은 6·25사변 당시 소개(疏開) 후 파괴되었던 집들이 모두 다 개축되어 각기 영세한 생을 개탁하여 조선(祖先)의 뼈 묻힌 고장에 깊이 뿌리를 박고 지상의 낙도로 삼고 있는 것은 무한히 아름다운 광경이다.

도로 우측 평야 저 편에 깎은 듯이 직하(直下)된 험한 산이 즉 사변 당시 적과 격전한 각드미산(여항산, 갓데미산)이라 한다.

만약에 적군이 침공하였을 때 이 산이 없었더라면 마산은 병풍 무학산도 존재의 가치를 보전하였을까 아닐까가 의심날 일이다.

적들의 중요한 거점인 이 각드미산이야말로 적들의 최후 운명을 결정한 방채선(防砦線)으로서 길이 기념하여야 할 곳이다.

구치사방 산정수정(驅馳四方 山程水程, 산길 물길 할 것 없이 사방으로 떠돌아 다님)식 19세기의 나그네가 아니니 한가히 고개로 이리저리 돌려볼 수 없을 터인데 삼진 방면을 소개하시던 마산서중 이기재 선생의 선도로 일행은 진전면 입구에서 일시 정지하였다.

장소는 다르지마는 노변석벽(路邊石壁)에는 3.1의거 시 동면(同面) 황교 교반에 공봉(棒)과 적권(赤拳)으로 무장한 왜적의 폭재(暴材)하는 진중으로 돌격하다 장렬한 호국의 신(神)으로 순한 김수동(원문에는 김동수로 되어 있음) 이기봉 씨 외 6선열의 창의비(진북면 지산리에 있는 팔의사 창의탑. 지금은 인근에 이전) 앞에서 잠시 묵례를 드리고 다시 황교의 고전장(古戰場)을 거쳐 목적하였던 이교재 선생의 유족이 계시는 봉곡리 도산부락에 도착한 것이 세 시를 훨씬 지나 30분 경이었다.

이 부락도 역시 적색분자가 침투할 것이라는 추측 아래 소개 명령을 받고난 뒤 연합군의 폭격례를 받고 전 부락 50여 호가 소실되었던 곳으로 가옥이야 태어난 팔자대로 일간 모 옥(屋)으로 신축하여 쓰라린 기억도 잊은 듯이 생기발랄한 것을 볼 때 파탄에 빠진 현재 농촌에도 언제나 영원한 봄 서광이 비쳐 오리라는 희망을 던져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 우리가 경(敬)공히 찾아뵈올 이교재 선생 유족의 가정과 생계는 어떠한가? 일행은 마음 초급히(焦急-, 시간 여유 없이 아주 급하게) 이(李) 선열 미망인의 주택을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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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2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마지막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2015323일 시작해 이번 회까지 만 2년 동안 포스팅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馬山野話)」143꼭지가 이번 회로 끝납니다.

지나간 시절 마산사회와 마산 사람들을 추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부터 연재될 포스팅은 신삼호 건축사가 준비합니다.

(주)유에이건축사사무소 대표 신삼호 건축사는 건축작품활동도 활발하지만 도시와 건축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부산대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논문 준비 중입니다.

블로그에 포스팅하게 될 내용은 논문 준비과정에서 접하게된 여러가지 자료들을 소개하고 해석하는 형식이 될 것이며 분량은 약 20여 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산야화> 마지막 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조병기(趙秉基)

 

김형윤 공은 1903년 마산시 서성동에서 김양수 씨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공의 성장과 수학 과정에 대하여서는 소상하지 않으나, 일생을 통하여 소년기에 돈을 번 일이 꼭 두 번 있었다 하는데 18세 때 진영 대목장에서 조장수를 한 일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창원산업조합에 가마니 검사원으로 취업을 하여 월봉 10원이란 대금을 벌어 쓴 일이 있었다고 자랑삼아 얘기하곤 하였었다.

 

20대에 손문기 씨가 경영하던 조선일보 기자를, 30대에 고교(高橋) 씨가 사장이던 남선일보 기자를, 40대에는 창산(蒼山) 이형재(李瀅宰) 씨가 경영하던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하였으며, 1947년에는 김종신 씨가 경영하던 남조선민보를 인수하여 마산일보로 개제(改題)한 후 현 경남매일(경남신문)로 넘어가기까지 최근 20여 년간을 경영하였으니 공의 일생은 그야말로 언론에 모조리 몸을 바친 거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공의 진면목은 유우머와 해박한 풍자에 있는 것이며, 가지가지의 기행과 괴벽(怪癖)은 김립(金笠)이나 정수동(鄭壽銅)을 방불케 하였고, 특히 방랑벽이 있어 국내는 물론, 일본 만주 등지를 바람처럼 편력(遍歷)하다가 서울에 돌아와서 조국 해방을 맞았다.

 

해방 그 해 1230일 신탁통치 반대시위에 선봉으로 나섰다가 검거되어 1947년 봄에 석방, 마산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공의 모든 언행의 근원이 되는 인생관이나 사회관을 이해하려면 먼저 공의 사상적(무정부주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공은 끝까지 부정, 불의를 증오하였고,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투쟁하였고, 권력에 굴하지 않았고,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많은 곤욕과 박해가 노상 뒤를 따랐으며 일정 때는 옥고도 수없이 치렀다. 3년 전 봄에 공은 필자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미력이나마 마산 사회를 위하여 뭔가를 기여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마산시사를 편찬하는 일을 시작하자고 하기에 쾌락(快諾)를 하고 발족하였던 것이나 오늘날까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오직 죄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끝으로 공을 애칭 또는 별명으로 목발(目拔)’이라 부르게 된 일화를 여기 소개하면서 공의 약전(略傳) 겸 회고담을 공을 추모하는 유우머로써 맺을까 한다.

 

우금(于今) 50년 전 마산 앵정(櫻町)의 벚꽃이 만개(滿開)일 때 일인 요정에서는 가설무대를 지어놓고 일인 게이샤(기생)’들이 삼미선(악기)을 통기며 일남(日男)들과 어울려 가무가 한찬 무르녹고 있었다.

 

한 조선인 지게꾼이 흥에 겨워 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일() 헌병이 민족적 모역을 주며 그를 끄집어 내었다. 이를 본 김 공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비호 같이 일() 헌병에게 달려들어 그의 한쪽 눈을 뽑아 버렸던 것이다. 공의 용기도 용기려니와 당시 힘이 또한 장사였었다.

 

목발(目拔)’이란 이 무용담에서 비롯한 것이나 유래를 모르는 사람들은 절름발이로 오단(誤斷)을 하여 빚어지는 희화(戲話)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끝

 

  <마산야화 초판본(1973)과 재판본(1996)>

 

 

-김형윤 선생을 회고한 조병기(趙秉基) 선생은 창원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였다.

 

창원공립보통학교 훈도였던 조병기 선생은 1928년 핵심회원 6명과 비밀결사체 흑우연맹(黑友聯盟)’을 조직하였다.

흑우연맹은 창원.마산의 열혈청년들로 구성되었다. 면면을 보면 창원공립보통학교 동료교원이었던 손조동(23), 창원 북동출신 박창오(朴昌午.20)와 박순오(朴順五.19), 창원 북면의 김두봉(金斗鳳.20), 창원 동면의 김상대(金相大.20), 창원 북동의 김두석(金斗錫.21)이었다.

이들은 나라사랑과 겨레번창의 유일한 길은 민중계몽과 혁명적 투쟁에 진력하는데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애국심도 강력한 정신적 기반이 없으면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입장에 따라 조병기 선생은 청년.학생들이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고취하는데는 오로지 민중계몽밖에 없다고 본 것이었다.

1927<청년에게 고함(크로포드킨 저)>이란 책자를 비밀리에 출판 보급하려다 일경에게 발각,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출판법 위반으로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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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진섭 2017.03.29 13:20 address edit & del reply

    수고하셨습니다. 고향 마산의 숨은 역사를 이렇게 조감해 주시니 평범한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언젠가는 많은 마산 시민들이 역사의 깊음을 음미하면서 인생의 깊이를 더하는 날이 오겠지요. 지금은 일부 일급 교양인들만이 음미하는 듯합니다.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왜 물질적 풍요와는 정반대로 정신은 황폐해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2016. 5. 2.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0. 국농소의 소작권 쟁의

90. 국농소(國農沼)의 소작권 쟁의

 

밀양군 하남면 수산리 소재 국농소(國農沼) 전답 수백 두락을 둘러싸고 한일 반동분자와 소작인 간에 불씨가 튀는 쟁의가 벌어진 일이 있었다.

 

국농소(國農沼, 옮긴 이 / 송산서원 카페에서 인용)

수산(守山)의 국농소(國農所)는 조선시대 초기의 수산국둔전(守山國屯田)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조 후기에는 수산지(守山池) 또는 국농호(國農湖)라 불렀으며 그 제언(堤堰=물을 가두어놓기 위한 둑)을 수산제 혹은 대제(大堤)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지형이 모두 바뀌고 비옥한 수전 경작지로 화하여 당초의 경역(境域)을 분간하기 곤란하나 하남읍 수산리와 초동면 김포리(金浦里) 사이의 광활한 들판을 아직도 국농호 또는 궁노수라 부르고 있으며 댓섬(竹島), 자라목(鼈山) 등의 유적도 남아 있다.

국농소(國農沼)의 위치

 

이 사건이 법적 문제가 되어 원고(소작인)의 법정 대리인 서기홍, 피고(이덕이)의 법정 대리인 박지영, 중촌 모()란 일인 변호사, 그리고 주심판사 석촌(石村) 지청장으로 선정, 부산지법류산지청()에서 1927년부터 동 30년까지 격쟁(擊錚)했다.

이때 지주는 경성부 관훈동 민병석(閔丙奭), 자작(子爵) 사음(舍音) 차해성(車海星)이었으며 토착 소작인들은 소작권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당당한 연고자들이었고, 피고 이덕이는 일본에서 상애회(相愛會) 박춘금의 최말단 깡패로서 일자 무식꾼인데,

 

<상애회(相愛會) / 옮긴 이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20 일본 동경(東京)에서 조직된 친일 단체로 박춘금(朴春琴)이 만들었으며, 이기동(李起東)이 총본부 회장을 맡았다. 3·1운동을 전후해 일본으로 노동 인구가 물밀듯이 몰려들자, 그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단속할 목적으로 일본 정부 및 총독부가 사주하여 조직한 노동 단체이다. 일본 각지에 지부를 결성하여 한때 회원수가 10수만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 작자가 수십 년 동안 일본에서 깡패 생활을 하는 동안에 축재한 돈을 가지고 고향인 수산(守山)으로 돌아왔으나 농촌에서 할 일은 없고 이때 옥답 수백 정보가 되는 국농소(國農沼)에 대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즉 국농소에 대하여 적당히 교섭하면 이의 소작권을 받을 수 있다는 풍문을 듣고 이것을 탈취코자 암암리에 사음(舍音) 차해성(車海星)과 공작을 하는 일방, 순진한 소작인들에게는 경찰의 권력을 발판으로 하여 노골적인 위협도 사양치 않았으나,

소작인들도 그에 못지않게 한 덩어리가 되어 은산(수산) 농민조합(위원장 이종하)에서도 조선 농민총동맹(대표 안준)을 비롯하여 각 지방 사회단체에 격문을 발송하는 등 이덕이 파와 대항하기 위하여 포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것을 봉쇄코자 이덕이는 직계 낭당(郞黨)은 물론 부산 방면에 우글거리는 깡패들을 동원한다는 소문을 냄으로써 수산의 거리는 살벌한 분위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때가 본답(本畓) 이앙시기인 6월을 기하여 소작인 측을 지원하고자 인접 밀양, 함안, 김해, 양산, 마산 등지에서 좌경 청년 4,50명이 속속 운집하여 동네는 일촉 즉발의 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각처에서 모여든 청년들은 정수(精粹)분자들로서 담력이나 완력에 있어서 자신을 과시, 양양한 의기는 자못 충천하였다.

짧은 여름밤은 밝았다.

적군은 수리(水利) 제방에, 반군은 회전장(會戰場)인 소답(沼畓) 언덕에 진을 치고 자웅을 결판코자 대치하고 있을 때 별안간 이덕이의 직계 부하 5,6명이 이종하를 포위 피차 격투가 벌어지고, 한편에서 단도를 가진 부산 깡패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자가 있자, 용감무쌍한 좌경 청년들은 재빨리 패주하고 충돌한 현장에는 마산의 김모(金某)만이 분전하였을 뿐이었다.

돌이켜 보건데 이 사건이 발생되도록 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지주의 불분명한 태도와 사음(舍音) 차해성(車海星)이 쌍방에 두 다리를 걸친 탓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겠다.

국농소 사건의 후일담으로 수년 전 부산일보의 르포 연재물에는 이덕이를 지방의 지도자로 치켜 올려 세우면서 소작쟁의에 분전한 사람은 깡패 두목이라고 기자 멋대로 보도하였다.

재판 결과 원고의 패소, 승소한 이덕이는 농지개혁 때까지 지주로 뻐기었으나 지금은 원수도 요우우(僚又友)도 살과 같이 흘러가는 세파에는 하는 수 없이 모두가 한줌 흙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상 쟁의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된 사람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李執中(이집중, ), 박남용(), 朴濟(박제, ), 김형윤(編者註·著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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