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윤16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8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운동 중에서 증거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부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급한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라는 위임장을 비롯하여 다종의 문건을 휴대하고 입국한 일일 것이다.(여기서는 ‘임명장’보다 ‘위임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경상남북도상주대표’에게 독립운동과 관련한 여러 가지 중요한 사항을 위임한 까닭이다.) 작성연도 중 제일 늦은 것이 1931년 11월 20일이니만큼 그의 입국은 상해에서 창원군 진전면까지의 거리나 교통 수단 등을 생각하면 빨라도 1932년 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교재가 국내에 가지고 들어온 이른바 ‘이교재임정문서’를 중심으로 그의 마지막 독립활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까지 필자가 조사해서 파악한 .. 2020. 2. 10. 김형윤의 <삼진기행> 8 / 1954년 4월 22일 (목)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2 논둑 받아(?) 둑아 날 살리라 심의중(沈宜中)이 불콩이 날 죽인다! 이것은 누구의 창작인지 미상이나 지금도 산야엘 가면 나물 캐는 촌새악씨나 나무하는 목동이나 또는 소먹이는 어린 목동의 애절한 목소리와 가련한 입에서 구(舊)아리랑 곡으로 처량히 흘러내리는 민요라 한다. 이 민요는 누가 들어도 직해(直解)할 수 있는 것이니 삼진부락민이 기미년 독립운동 당시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러 진주(進駐)하여 가는 도중 황교교각에서 잠복하였던 일인 헌병과 협력한 보조헌병 심의중이라는 악도가 있었는데 일본헌병이 처음에는 공포(空砲)로 위협하고 일보 더 접근되자 적두(赤豆)로 유인하여 사정 내에 애국용사가 돌입하였을 때 최선두에서 제1발을 쏜 자가 심의중이라는 자라고 한다.. 2019. 12. 9. 김형윤의 <삼진기행> 7 / 1954년 4월 21일 (수)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1 우리일행은 이교재선생의 묘소에 정중한 전배식(展拜式)을 마치고 산에서 마을까지 내려왔을 때에는 사양(斜陽)이 부락에 빚칠 때이다. 일행은 노부인과 작별인사를 할 때 굵은 눈물방울이 양 볼에 흘러내리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양친을 일찍 여읜 기자의 가슴속에 형상할 수 없는 만감이 충격한다. 기자는 다시 노부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후일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떠나면서 고개를 잠시 돌려보니 아직도 동구(洞口)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서있다. 마치 자식을 먼 길로 보내는 자모(慈母)와도 같다. 일행은 급급히 회로(回路)를 달리며 다시 한 번 황교 좌우를 돌려보며 1919년 삼일독립전투시를 회상해본다. 1919년이면 지금부터 손꼽아서 삼십육 년이라는 옛날이다... 2019. 12. 2. 김형윤의 <삼진기행> 6 / 1954년 4월 20일 (화)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6 불우 순국열사들!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백년 일세기를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의 식민지로서 정치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치명상을 입고 경제적으로 약탈착취(掠奪搾取)를 완부(完膚, 흠이 없이 완전함) 없이 당(當)튼 남방아주(南方亞洲)의 태반에 걸쳐 반거하고 있는 인도보다 그 인구에 있어서 십분의 일에도 불과하며 피치(被治) 연월도 삼십육 년이지마는 약소민족 투쟁기록은 세계 독립운동사상 이 나라 우에 따라올 국가가 없다. 비폭력을 내세운 미약독립투쟁! 비협력인 「스와라지」운동(1906년 인도에서 전개되었던 반영 자치 운동)으로 도저히 주권탈환을 기약할 수 없는 일이므로 외국의 노예제도의「멍에」에서 벗어나는 데는 그 나라 민족전체가 선혈을 뿌리.. 2019. 11. 25. 김형윤의 <삼진기행> 5 / 1954년 4월 18일 (일)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5 그러면 다른 말은 잠간(暫間, '잠깐'의 비표준어) 차정(次頂)에 미루어두기로 하고 정부에서는 무수한 순국열사에게 무엇으로 보답하였으며 무엇을 하려고 구상하고 있는가? 또 누구의 은덕으로 대한민국의 자모(慈母) 품안에서 평안히 행복 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를 한번이라도 돌이켜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현재 국가의 요직에 안如히 있는 자(者) 중에 진심으로 민족 전체의 이해(利害) 휴척(休戚,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일)을 염두에 두고 적성(赤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 국가를 걱정해본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는가? 8.15가 지난 기년(幾年, 몇 해) 후 정부에서는 각도(各道)를 통하여 애국자 병.. 2019. 11. 18. 김형윤의 <삼진기행> 3 / 1954년 4월 16일 (금)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3 산협의 좁은 비렁(‘벼랑’의 방언)을 얼마쯤 나가니, 간데 마다 산은 백구질을 하여 황토만 노출(露出)한 독산인데 이 산 중복(中腹)쯤 되는 곳에 선생의 백골(白骨)이 묻혀있는 허물어진 분묘가 눈에 뜨이고 조금 아래 양지쪽에 두 봉(封)의 묘소가 있는데 이곳은 선생의 선친 선영이다. 노(老) 미망인은 여기서 시부모와 부군을 추억하는 듯 몇 개의 풀을 뽑고 있었다. 선생의 봉분 아래는 산이 급각도로 수직하며 묘소 정면은 협소하여 성묘하기에도 부자유하다. 선생이 지하에든지 봄바람 가을달이 몇 번이나 지났건만 찾는 사람 별로 없고 유족생계가 화급하여 그랬는지 봉축은 허물어져 황폐 그대로 이고 한 조각 표석조차 없으니 마음 없는 초동이야 지하의 고인이 어찌.. 2019. 11. 4. 김형윤의 <삼진기행> 2 / 1954년 4월 15일 (목)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2 일행은 이(李) 열사가 생전에 생장하셨다는 봉곡 부락 길가에 정차를 하고, 좁다란 밭 기슭을 타서 가면 신작로에서 불과 3·4분 만에 선생의 구거에 당도된다. 가옥은 농촌의 공통으로, 나지막한 토장(土墻, 흙담)과 싸리(柴, 시 / 산야에 절로 나는 왜소한 잡목)문을 들어서니 선생이 거처하던 노후하였던 집은 전항(前項)의 말과 같이 소실되고 소나무 향기와 흙냄새가 나는 새(新)집으로 변하였다. 이름과 외관만은 새집이지만 찬바람이 스며드는 쓸쓸하기 한량없으니 생계야말로 과반사(過半思)가 아닐까? 선생의 계보를 들어보면 수대를 두고 독자(獨子)로서 백숙형제(伯叔兄弟)가 없었고 원척(遠戚, 먼 일가) 외에는 혈혈 고독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으며 장(長)하여.. 2019. 10. 28. 김형윤의 <삼진기행> 1 / 1954년 4월 14일 (수) 오늘부터의 포스팅은 창원지역에서 평생 언론인으로 살다간 목발(目拔) 김형윤(金亨潤) 선생이 남긴 기행문이다.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실렸고, 기고자는 본명 대신 ‘H 생’이라 되어 있다. 제목은 「삼진기행」이며 1954년 4월 14일부터 23일까지 9회 실렸다. 당시 마산일보 사장이었던 김형윤 선생이 15명의 벗들과 함께 1933년 순국한 독립지사 '죽헌 이교재 선생'의 유족을 찾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을 찾았던 기록이다. 이 글의 가치는 이교재 선생과 유족에 대한 내용과 함께,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당시의 삼진지역(진동, 진전, 진북)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다. 김형윤 선생의 기고문에 맞추어 모두 9회에 걸쳐 포스팅할 예정이다. 원문 그대로 옮기지만 일부 고문(古文)은 읽기 편하게 고쳐 쓰고,.. 2019. 10. 21. 김형윤의 <마산야화> - 마지막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2015년 3월 23일 시작해 이번 회까지 만 2년 동안 포스팅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馬山野話)」143꼭지가 이번 회로 끝납니다. 지나간 시절 마산사회와 마산 사람들을 추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부터 연재될 포스팅은 신삼호 건축사가 준비합니다. (주)유에이건축사사무소 대표 신삼호 건축사는 건축작품활동도 활발하지만 도시와 건축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부산대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논문 준비 중입니다. 블로그에 포스팅하게 될 내용은 논문 준비과정에서 접하게된 여러가지 자료들을 소개하고 해석하는 형식이 될 것이며 분량은 약 20여 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마지막 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조병기(趙秉基) 김형윤 공은 1903년 마산시 서성동에서 김양수.. 2017. 3. 27. 김형윤의 <마산야화> - 90. 국농소의 소작권 쟁의 90. 국농소(國農沼)의 소작권 쟁의 밀양군 하남면 수산리 소재 국농소(國農沼) 전답 수백 두락을 둘러싸고 한일 반동분자와 소작인 간에 불씨가 튀는 쟁의가 벌어진 일이 있었다. 국농소(國農沼, 옮긴 이 / 송산서원 카페에서 인용) 수산(守山)의 국농소(國農所)는 조선시대 초기의 수산국둔전(守山國屯田)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조 후기에는 수산지(守山池) 또는 국농호(國農湖)라 불렀으며 그 제언(堤堰=물을 가두어놓기 위한 둑)을 수산제 혹은 대제(大堤)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지형이 모두 바뀌고 비옥한 수전 경작지로 화하여 당초의 경역(境域)을 분간하기 곤란하나 하남읍 수산리와 초동면 김포리(金浦里) 사이의 광활한 들판을 아직도 국농호 또는 ‘궁노수’라 부르고 있으며 댓섬(竹島), 자라목(鼈山) 등의 유적도 남.. 2016. 5. 2. 김형윤의 <마산야화> - 88. 법원과 검찰, 89. 제1차 공산당 사건 88. 법원과 검찰 현재 장군동 4가(통정 4정목)에 자리잡 고 있는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지청)과 부산 지방검찰청 마산지청(검사분국)은 당초에는 구마산 시장입구 근처였던 속칭 ‘아래학교’(여자보통학교-현 白洸燒酎工場) 언덕에 소재하고 있었던 것인데 1910년(명치43년)에 현위치에 신축 이전했다. 초대 상석판사(上席判事)는 대우가차(大友歌次), 상석검사(上席檢事)는 복산장병위(福山長兵衛)였으며 조선인 초대 판사는 고某 씨로 이분이 두 자제는 신마산 소재 일인의 심상소학교에 입학하였다. 89. 제1차 공산당 사건 소위 101명 조선공산당 사건이 신의주에서 변호사를 하던 심유정이란 친일파를 습격한 것이 발단이 되어 경찰은 이들 청년들의 가택을 수사한 결과 사건은 발로(發露)되고 말았다. 무산자신문(無産者新.. 2016. 4. 25. 김형윤의 <마산야화> - 2. 변태성 고리업자, 3. 포주의 횡포 2. 변태성 고리업자 시내 서성동(幸町) 일인 간수(看守)부락에 천기(川崎) 모(某)라는 60대 고리대금 업자가 있었다. 집에는 6개월 혹은 길면 1년마다 젊은 여자가 교체된다. 직업은 조선인을 상대하는 고리대금업이다. 일본 은어(隱語)로 고리업이나 창기업(娼妓業) 혹은 호색자(好色者)를 시계의 4시 40분 혹은 8시 20분이라 하여 위의 눈꺼풀이 좌우로 처진 때문에 그들을 꼬집어서 하는 말이라고 한다. 천기(川崎)의 눈도 그러하였다. 피부 빛깔은 검붉어서 고리업자로서 일목(一目) 직감된다. 고리업자나 전당업자는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음음(陰陰)함은 상통하여 채무자가 기일을 어길 때는 인정사정 헤아리지 않고 즉각 법적 행동을 취한다. 그런데 천기(川崎)의 경우는 다르다. 채무자가 이자나 원금을 환.. 2015. 3. 3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 수전노 2제 예고해 드린 대로 오늘부터는 우리 지역 이야기,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馬山野話』를 포스팅하겠습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마산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도시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수록되어있어서 이 도시의 한 시대를 이해하기에는 이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초판본은 목발 선생이 돌아가신(1973. 8. 7 작고) 후인 1973년 말에 출판되었고, 재판은 1996년 ‘도서출판 경남’의 수고로 나왔습니다.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꾸었을 뿐 원문을 손대지 않아 초판과 재판의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글『馬山野話』는 재판본을 그대로 싣는 겁니다. 원문 그대로이며 혹 탈오자가 있으면 바로 잡겠습니다. 글이 모두 141꼭지라 짧으면 1년6개월, 길면 2년 정도 걸릴 분량입니다. 의 .. 2015. 3. 23. 마산·창원 역사 읽기 (14) -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7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1876년 조선이 강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원래 마산은 개항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했던 까닭으로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잠식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의 소굴로 변해 갔다. 1911년 일제는 마산항의 개항(開港)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마산은 조선의 쌀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 2014. 8.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합방 2년 후인 1912년 4월 8일 당시 양산 통도사 주지인 천보(天輔) 김구하(金九河) 큰 스님이 마산지역의 포교를 위해 사답(寺畓)을 팔아 현 추산동 포교당(정법사) 터에 설법전(說法殿)을 창설한 것이 근대 마산불교의 시초입니다. 1년 후인 1913년 서울 각황사에서 전국 30본사(本寺) 주지들이 조직한 ‘불교진흥회’의 발기 간사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년-1921년)이 진주에서 마산으로 이주하여 8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 때 위암은 마산불교진흥회를 조직하여 불교 발전에 진력을 다했으며 천보(天輔)스님과 자주 교류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1912년에 건축한 추산동 포교당입니다. 새 건물을 짓는다고 최근 헐었습니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건축이 사라진 겁니다. 우리 지역 불교사의 상.. 2011. 7.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개항 이후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외국자본의 경제 침식에 맞서 지역 상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전국개항장의 객주와 여각 등 상인들이 자위적으로 상인 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이러한 조직체를 통괄하여 외세로부터 민족 상권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5년 11월 10일「상무회의소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 규례가 우리나라에서 제정된 근대적 상공회의소에 관한 최초의 법령입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5월 12일에는 칙령 제19호로 전 조항을 개정했는데 이로써 근대적 면모를 갖춘 상무회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이 개정규례가 발포된 5월 12일을「상공의 날」로 정해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2010. 10. 25.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