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변태성 고리업자
시내 서성동(幸町) 일인 간수(看守)부락에 천기(川崎) 모(某)라는 60대 고리대금 업자가 있었다.
집에는 6개월 혹은 길면 1년마다 젊은 여자가 교체된다. 직업은 조선인을 상대하는 고리대금업이다.
일본 은어(隱語)로 고리업이나 창기업(娼妓業) 혹은 호색자(好色者)를 시계의 4시 40분 혹은 8시 20분이라 하여 위의 눈꺼풀이 좌우로 처진 때문에 그들을 꼬집어서 하는 말이라고 한다.
천기(川崎)의 눈도 그러하였다. 피부 빛깔은 검붉어서 고리업자로서 일목(一目) 직감된다.
고리업자나 전당업자는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음음(陰陰)함은 상통하여 채무자가 기일을 어길 때는 인정사정 헤아리지 않고 즉각 법적 행동을 취한다.
그런데 천기(川崎)의 경우는 다르다. 채무자가 이자나 원금을 환불하려고 하여도 출입구가 밤낮 밀폐되어 있으므로 자연히 기일이 초과된다. 이자가 하루만 늦어도 노발대발이다.
그의 마음보를 아는 채무자들은 이웃 일본인에게 물어보아도 아무도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문은 잠겨 있어도 실내에는 천기(川崎) 노(老)와 40대의 여자가 운우의 극치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자기들의 흥분에만 몰입한다.
40대의 여성으로서 70대의 노옹(老翁)에게 최대의 봉사를 하고 사지가 굴신도 못할 정도로 늘어졌건만 그 자는 매양 부족을 참지 못하여 궁리 끝에 기머리등(성호동)에 사는 조선인 홀어미를 알게 되었으나 홀어미도 처음에는 억지 봉사를 하였다.
도수가 한이 없어서 실증을 내자 즉석에서 지게꾼을 불러 자기가 사준 쌀과 나무를 뺏아갔다는 이야기다.
그 후에 들려온 말은 천기(川崎)에 시달리다 못견디어서 떠나는 여자가 “여자로서 도저히 배겨낼 수 없는 것은 반구속 상태로 잠만 깨면 행동을 개시하는데 일일 평균 5회 내지 6회 그것도 부족하여 외식(外食) 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변태더라”고 이웃 일녀(日女)들에게 울면서 실정을 토로하였다는 것이니 이 때문에 채무 기일이 일실(逸失)되고 담보한 가옥전지(家屋田地)를 경매당한 피해자가 꽤 많았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고리대금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래 그림의 국내 대부업계 1, 2위가 일본 기업이다 / 아이엠피터 자료)
(대부업체의 이자율도 우리나라가 최고 수준이다 / 아이엠피터 자료)
3. 포주의 횡포
구마산 수성동(壽町) 일대에 1915년 경부터 일본에서 가장 하급층에 속하는 자들이 동네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농촌 빈민촌의 딸자식을 마구 싸구려 식으로 사들여 년계(年季)를 제멋대로 정해 가지고는 창루업(娼樓業)을 시작했는데 이 딸아이들의 대부분은 방직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배짱 검은 뚜쟁이 놈에게 속아서 따라가 보면 인육시장이란 함정이었다.
이곳에 한번 몸을 빠뜨리면 몸을 움직일수록 점점 나락으로 빠져들어 갈 분 영 헤어나지를 못한다.
부채라는 것도 화장품대, 의복대, 검진비 등등을 공제한 나머지를 가지고 3, 1제로 분배를 하니 상환할 길이 요원한 것이다.
최초에 젊어지게 되는 몸값이라는 것도 용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6,7세로부터 35,6세까지의 여인들로서 평균 150원에서 200원이 제격이고 많은 것은 7,8천원 짜리도 있다고 한다.
계약 연한은 3년에서 5년인데 이것이 대충 인육시장의 시세라고나 할까?
그런데 여기에 흡혈귀인 포주를 상대로 단연 분기, 각성한 18세의 소녀가 있었으니 도변(渡邊)이란 일인이 경영하는 수루(壽樓)란 청루(靑樓)에 속아서 팔려온 최모 양은 몇 푼 안되는 몸값으로 5년 계약을 강요당한 채 고통을 겪어오다가 용감히 포주에게 선언을 하고 마굴(魔窟)을 버리고 나와 버렸던 것이다.
도변(渡邊) 포주는 창기 取締(취체)규칙을 가지고 경찰에 고발함으로써 최 양은 즉결 구류처분으로 10일간 구속이 되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조선인 식자(識者)는 물론 일인 유지들까지 여론이 분분하였다.
당시 가등(加藤)이란 일본 서장도 일선 여론을 무시할 수 없어 대차관계로 인신구속을 못한다는 일본 최고재판소인 대심원 판례에 따라 최 양을 석방, 이상 아무런 제재도 가할 수가 없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당시 조선인 유곽 여성이 포악한 포주와 항쟁하여 승리를 거둔 첫 케이스라고 하였다.<<<
공인된 창기업(매춘업)의 집단 지역이 곧 유곽이다. 최초의 유곽은 일본 부산영사관에 의해 부산에서 처음 생겼다. 1905년 생긴 신정 유곽(현재 필동과 쌍림동 사이)은 서울의 대표적 유곽으로서 그 영업은 해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대부분의 도시에 유곽이 생겼으며 서울에는 신정 유곽과 더불어 용산 彌生町 유곽(현 용산 도원동 주변)이 유명하였다. 위 사진은 서울의 신정 유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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