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해 드린 대로 오늘부터는 우리 지역 이야기,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馬山野話』를 포스팅하겠습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마산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도시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수록되어있어서 이 도시의 한 시대를 이해하기에는 이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초판본은 목발 선생이 돌아가신(1973. 8. 7 작고) 후인 1973년 말에 출판되었고, 재판은 1996년 ‘도서출판 경남’의 수고로 나왔습니다.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꾸었을 뿐 원문을 손대지 않아 초판과 재판의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글『馬山野話』는 재판본을 그대로 싣는 겁니다. 원문 그대로이며 혹 탈오자가 있으면 바로 잡겠습니다. 글이 모두 141꼭지라 짧으면 1년6개월, 길면 2년 정도 걸릴 분량입니다.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의 해방 이후 부분은 준비 중입니다. 이 글 연재 끝내고 포스팅 하겠습니다. 아래 사진은 『馬山野話』의 초판과 재판본입니다.
1. 수전노 2題
<第1題>
마산부 내 완월동 2구 전 마산 세무서 관사 건너편 골목길을 조금 들어가면 나지막한 초가집 부엌방에는 나이 40이 넘은 일본인 홀아비가 세들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 안 되나 직업은 마산부청(현재 창원군청) 사환이다. 그리고 공휴일은 물론이지만은 여기 있는 대로 조선인을 상대로 구차한 석유나 실, 빨래비누 같은 것을 자기 이웃과 가까운 촌으로 행상을 하며 믿음직한 집에는 외상 거래도 했다. 현금보다는 비싸게 준다. 그의 식생활을 보면 아침은 보리밥에 다꾸왕 몇 조각이며, 점심은 감자 두 개 내지는 세 개, 저녁밥은 죽 아니면 간혹 밥이다.
신문은 부청을 쉬는 날 마산역에 비치한 것을 보며, 자기가 거처하는 방이나 창문은 캘린더를 떼어 바를 뿐 아니라 밤에는 아무리 방이 어두워도 불을 켜지 않고, 외상장부를 볼 필요가 있을 때만 잠깐 호롱불을 켰다가 용건이 끝나면 꺼버린다.
술은 좋아하는 편이나 공짜가 아니면 어림도 없고, 마시기는 막걸리를 마시되 대단한 용기와 각오로 일전(一錢) 엽잔을 때로는 두 잔을 비우고 나면, 이것이 즉 그에게는 대용식이 된다. 이렇게 해서 먹을 것도 굶으며 의복도 내의 외는 사 입지 않는다. 그때는 관청이나 큰 기업체에 취직이 된 급사나 사환에게는 제복은 춘추 두 차례씩을 급부하는 은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사람이 이렇게 골똘한 검약의 표본 같은 생활을 하는데 저축이라도 하느냐 하면 그것은 신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돈이라도 있는 냄새가 외부에 풍기는 날이면 도독이 붙을까 염려인 듯 누가 보아도 거지와 사촌벌은 될 것 같다.
이리해서 몇 해를 한집에 지내던 그는 외상값 받으러 촌으로 갈 일이 있어서 이웃에 있는 조선 아이를 대신 보내기로 했다가 문득 머리에 번갯불같이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아뿔사! 아이를 촌에까지 심부름을 시키려면 삯돈을 주어야한다. 큰 손해가 날 뻔했구나 생각한 그는 날을 보낼 것을 취소하고, 자기가 가기로 하는데 그것도 왕복비용이 나니 석유 양철통에 실, 성냥 등을 싣고 행상을 하면 몇 십전이라도 남을 것이라고 주판질을 했다가 돌아오는 날 갑자기 급성폐렴에 걸려서 온 방 안이 그으름에 덮인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비참하게 숨졌다.
이렇게 철저한 수전노가 죽은 뒤 수사 당국에서 그의 유품을 샅샅이 뒤졌으나 고인을 위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직 남았다는 것은 헝겊 같은 의복 몇 벌이 버들상자에 있을 뿐이었다.
이내 낙담한 후견인 격인 수사원들이 그 의복을 주물럭거리니 뜻밖에도 그 속에서 마산우편국 저금통장이 발견되었는데 그 액수를 보니 놀라지 마라! 당시로 봐서, 대금 일만 몇 천원이 기입되어 있지 않겠는가?
수사 당국은 고인의 고향으로 조회를 해보았으나 가까운 일가 친척이라곤 없고 천애 고독으로 먼 친척뻘로는 조카 되는 자가 북해도 모처에서 석탄광부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 피맺힌 돈 일만 몇 천원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 조카에게로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계산이 어긋난 수전노의 검약이라고나 해둘까.
<김형윤(왼쪽) 당시 마산일보 사장과 변광도 편집국장. ‘지방신문의 편집자’ 캡처 화면. 경남신문 인터넷 자료. 마산일보는 경남신문의 전신>
<第1題>
아무도 모르게 마산우편국에 대금 일만 수 천원을 한푼 안 쓰고 고스란히 남겨둔 채 죽은 마산부청 수전노 행적이 일본 전국의 주간 잡지를 장식케 한 6,7년이 지난 뒤 그와 유사한 인물이 역시 완월동에 살고 있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어서 이름은 中村 某로서 마산고등학교 입구 도로 왼편에 있던 양철집이 그의 거처하던 곳이다.
그가 어떻게 마산으로 굴러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절도죄인가 사기죄로 마산 형무소에 복역하던 중 옥칙을 잘 준수한 모범죄수로서 가출옥과 동시에 재수자(在囚者)의 제2작업장인 완월동 벽돌공장 관리자로 지정된 것이 인연이 되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 같다.
그가 입옥 전에 약간의 전답이 근교 농촌에 있었는데 이 사람 또한 생명보다도 돈을 소중히 여긴 때문에 벽돌공장 관리자로서의 수당은 한 푼 쓰지 않고 모아서 재산은 날로 늘어나기만 했다.
게다가 고리대금을 해서 추수 때면 농촌에서 상당한 수곡이 있었고, 부내에서도 들어오는 금리로 식생활을 하고도 남았지만 그 식생활인 것이 극히 제약되어 있어서 반은 굶는 상태였다.
홀아비가 되어서 그런지 부엌에서 연기나는 것을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물욕에 정신이 혼미한 그인지라 원금 환납 기일이 하루라도 늦어지는 경우에는 연체 이자는 물론이고 가차 없이 지불명령을 띄운다. 소작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소작료 계약이 너무 가혹하므로 소작인들은 감세(減稅)를 해서 남과 같이 해달라고 호소를 하면 연기는 해주되 감세는 어림없다는 것이다.
이리해서 많은 소작인과 채무자들을 울리곤 하였다. 게다가 그의 홀아비 신세를 동정하기 보다 가엾은 조선 여자의 빈공을 면해주기 위해서 그에게 중신을 해 준 일도 수차례 있었으나 오래 동서를 하지 않고 헤어지고 만다.
원인이란 별 것이 아니다. 쫓겨난 2,3명 여자의 경우가 똑 같다. 문제는 밥을 많이 먹기 때문이란 것이다. 즉 식량을 소비하는 게 아깝다는 것이다.
모든 생활필수품을 배급제로 하던 2차 전시 때만 해도 배급 1인분 식량이 너무나 적고 귀해서 목구멍에 넣기가 아까웠던지, 배급 쌀은 큰 자루에 모아 두고 가까운 탁주 양조장을 찾아가는데, 공장에서는 공짜로 막걸리 몇 사발이 통하는지라 얻어 마셔 놓고는 돌아올 때 두서너 되를 사가지고 와서는 막걸리를 대용식으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점약을 해 오는 동안 홀아비로는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없었지만 다만 없는 것이 꼭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곧 사람, 친구도 이웃도 없었다.
그가 인사를 나누고 지내는 사람이라고는 소작인 상대의 법적 대리인인 소출(小出)이란 변호사 한 사람 뿐이었으나 이웃은 아니었다. 결국은 외로웠다.
세월은 흘러갔고, 그가 병들어 누었을 때도 약 심부름을 할 사람조차 없었다. 이리해서 극도로 인생의 허무와 재행 제행(諸行)이 무상함을 느끼고 탄식함이었든지 자기 집 복도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들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고 말았다.
창문을 연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의 무언의 죽음을 보이고 싶어서였을까?<<<
아래 사진은 산호공원에 있는 김형윤 선생의 불망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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