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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4. 선교사의 박애심 5. 사기 비행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4. 6.

4. 선교사의 박애심

앞(지난 주)에서 말한 도변(渡邊)이란 포주의 창녀 최모 양이 포주와 항쟁하여 자신이 해방되기 12년 전의 얘기다.

역시 같은 동네에 명월루(明月樓)라는 유곽이 있었는데, 이 포주는 명치 41년 경에 구마산 서성동(町名 시행 전) 해변에 목조 2층을 짓고 일본에서 창기(娼妓)를 모집해 온 젊은 청년으로서 이름을 길천(吉川)이라 하였다.

이 길천이는 불시에 화재를 당하여 유곽을 날려버리고 다시 남성동에다가 덩그렇게 2층 화식(和式) 건물을 지어 창녀업을 운영해왔으나 이번에는 부채로 실패,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격으로 이번에는 다시 수성동에 규모를 축소, 목조 단충으로 소자본에 알맞게 가난한 농촌 여식들을 싸게 사서 운영을 해보니 과연 지출은 적고 수입은 느는 편이었으며 이곳을 찾아오는 창녀 후보자들에게는 계약 기한을 짧게 해주고 용모 위주로 하여 한때 호평이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길천 포주의 창녀 가운데 미인이 있어 참혹한 인간 함정에 빠져 허덕이는 것을 동정은 커녕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유야랑(遊冶郞)들이 많았고, 그러므로 동료 창녀들의 시기 질투도 많이 사고 있었는데 이 소문을 어떻게 들었던지 신성하고 엄숙한 성직자인 선교사가 자기 심복 몇 사람을 거느리고 명월주 포주 길천을 찾았다.

선교사는 문제의 미녀를 만나 몇 마디 얘기를 주고받고는 4,5일 후 일금 오백 원을 가지고 다시 찾아와서는 깨끗이 그녀의 몸값을 갚아주고 해방해 주었으며, 그 후 선교사가 경영하는 여학교에 그녀의 앞날을 위해서 입학, 교육을 시키려 하였으나 그 여학교 재학생들의 반대에 부닥쳐 말썽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후일담은 듣지 못하여 오직 궁금할 뿐이다.

<일제강점기 마산지역에 온 호주선교사들. 현재 진동공원묘원의 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위에 나오는 선교사가 혹시 이 중 세분 남자 선교사 가운데 한 분 아닐까요? / 옮긴이> 

 

5. 사기 비행사 

소화 8년 늦은 봄이던가 초여름께의 일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비행기 보기가 마산 같은 곳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大正 6년 이른 봄에 미국인 스미스가 부산에 와서 공중곡예 같은 재주를 부린 것이 일본이나 조선에서는 처음 본 비행기일 것이요, 다음 다음 해인 대정 10년에 일본 항공학교를 졸업한 일등 비행사 안창남이 고국 방문 비행을 한 것이 민간인으로서는 최초의 일이다.

이래서 자전거 선수로 엄복동이 일본 대판에서 개최된 전국 자전거 대회에서 1등을 한 때문에,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이요, 내려 굽어 보아라 엄복동이라’라는 굿거리 장단의 노래까지 유행한 뒤 근 10년 뒤인 전기(前記)한 해에 마산에 비행 흥행을 하겠다는 비행사가 나타나 한때 흥미를 끈 일이 있었다.

흥행 장소는 중포병대 연병장(현 한국철강 자리)이라 했다.

그때 필자는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평양 일일신문(?)의 보도만 보았을 뿐 당자의 얼굴을 알 턱이 없었으니 그 후문을 들어보면 미남형인데 멋진 비행복을 입고 자동차를 자수(自手)로 몰고 시가를 마구 돌아다님으로써 몇몇 가정부인, 양가의 처녀들까지 들떴으며 여러 곳에서는 이 진객(珍客)을 위해서 향응을 베풀고 용돈도 주어 크게 명예롭게 여긴 위선가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행사의 수족이 된 이×영 군이 각처에 초(招)함으로써 상당한 금품의 수확이 있었으며 지금은 고인이 된 권번의 윤 모는 배우나 음악가 혹은 예술가 등 소위 모던 보이만 보면 맥을 못추는 성벽이 있는 터라 더욱이 미남에 비행사라는 버젓한 겹참봉을 놓칠세라 자진해서 자선을 베풀었다는 것은 당연하고도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흥행 일자가 2,3일 후로 박두하자 이 친구는 금품거두기에 바빴으며, 자진해서 계집과 술과 돈을 제공하는 자 부지기수였다.

흥행을 하루 앞두고 부민(府民)들 중 호사가들은 날 새기가 삼추같이 초조하였다. 드디어 비행할 날은 밝았다.

호기심에 취한 관객들은 이른 아침부터 연병장으로 홍수처럼 몰려 들었다. 물론 일인, 조선인 할 것 없었다.

시간이 되어도 비행사는 고사하고 비행기조차 마련돼 있지 않았다. 비행사는 전날 오후에 무슨 부속품을 구하러 간다고 수족에게만 한 마디 하고 종적을 감춰버렸으니, 속담대로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허황하게 된 것은 부민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 여파는 상당한 모양이었다. 상부에 보고나 연락도 없고 조사도 하지 않은 헌병대가 견책을 당하고 시말서를 쓰게 되었다.

이런 것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진가를 판단할 수 있는 보통 상식이 아닌가. 비행장에는 활주로가 있어야 하는데, 그때는 매축 전(공장부지)인 그리 넓지도 않은 연병장임에랴!

둘째로, 교외 사진에도 헌병대의 검열을 받는데 배후에 산만 나와도 전부 삭제하는 등 요새지 기밀을 철저하게 지키던 헌병대가 더욱이 조선인으로 그들이 말하는 불령선인이 상공 몇백 몇천 피트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의 본적, 주소, 직업, 사상 등 일정 구비되어야 할 조사 서류 한 장 없이 직업의식을 뒷전에 두고 관객으로 제3자의 입장에 있다가 무능이라는 결론이 내리고만 것이다.<<<

<당시 중포병대 연병장과 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