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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8. 말띠 여성의 수난 9. 극장 순례

by 허정도 2015. 4. 20.

8. 말띠 여성의 미신

 

본시 우리 민족 간에는 없던 미신 하나가 이 땅의 여성계에 정착했으니 말띠 여성의 숙명론이다. 이것이 일본에서 건너온 미신인데, 그 근원을 캐어보면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다.

일본 여성들이 크게 기(忌)하는 이 ‘말띠’는 ‘병오생(丙午生)’에 한한 것이지 다른 말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인데, 이 병오생의 처녀가 시집을 가면 신랑을 잡아먹든지 아니면 결혼 얼마되지 않아서 상부(喪夫)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숙명론이 퍼지게 된 근원을 캐어보면 이러하다.

일본 강호(江戶, 지금의 동경)의 한 반찬 가게 집에 오시찌(於七)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이 방화범이 되어 강호(江戶)의 군데 군데에 불을 질러 주민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 일이 있었다.

이 오시찌가 병오생이었는 데서 미신의 실마리는 시작되었다.

점장이, 판수, 무당들이 위에서 말한 소문을 퍼뜨려서 부치질을 하여 민심을 현혹하게 했던 것이다.

미신에 혹하지 않는 사람도 이런 말을 듣고 보면 꺼림칙하게 되는 것이 사람인지라 그로부터 병오년에 낳은 딸자식을 정미생으로 출생계를 하여 호적법 위반으로 과료 처분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한다.

이 미신은 수백 년을 두고도 사라지지 않아 1906년(병오년)생의 처녀들 중에는 결혼 적령기가 지난 1925년∼28년 사이에 화산의 분화구에 투신하는 자가 속출하여 당시 결찰관, 소방서원 그리고 지방청년 단원까지 동원되어 그 방비에 골몰했고, 신문들은 대서특필로 보도하는 바람에 병오생 딸을 가진 부모들의 신경을 곤두세운 일이 있었다.

이 되어 먹지 않은 일본제 미신이 박래(舶來)라여 병오생도 아닌 말띠 계집아이까지 들떠서 마산에서만도 이 숙명(?)을 비관, 무단가출하여 소식이 없는 자, 윤락의 길에서 헤매고 있는 자 등 공연히 신세를 망친 예가 많았다.

마산에서 일본 여성이 병오생임을 비관하고 자살한 예가 있었다.

현재 김완길 의원 자리에서 총포화약상 겸 치과의를 경영하던 흥창(興倉, 요꾸라)이라는 자의 장녀(마산여고 3회 졸업)가 바로 그다.

<말띠 임을 비관하고 자살한 학생의 아버지가 경영했던 치과  / 해방 후 김완길 의원>

 

9. 극장 순례

 

마산의 극장은 신마산 구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의 별장 정면에 일인들이 경영하는 목조 2층의 환서좌(丸西座)가 처음 생긴 것인데, 주로 신마산에 거주하는 일인 본위로서 일본의 가무기좌(歌舞伎座)를 본뜬 것으로 구조는 적지만 그래도 5,6백 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었다.

환서좌 건립이 명치 42년(1909년)경, 구마산 수좌(壽座)는 8년 뒤인 1917년에 생겨진 것이다.

수좌 건립 전후해서 일인 본전퇴오랑(本田五郞) 개인으로 현재의 마산극장을 마산좌로, 그리고 다음은 신마산 제일극장을 그 근린(近隣) 일인의 요정업자와 택시회사(崔鳳時의 昭和택시) 등이 합자로 앵관(櫻館, 지금 제일극장)이 생긴 것이다.

수좌는 10년 기한 만료로 폐쇄하고, 1936년 10월에 마산좌 경영자 본전(本田)이 공락관(共樂館)을 신축한 것이다.(공락관은 소화 16년 1월 3일 화재로 그 해 가을에 개축함 / 전 시민극장)

구마산에 수좌나 공락관이 생기기 전만해도 조선인의 흥행물은 전부 창고 아니면 광장에 장막을 둘러서 흥행을 하였다.

마산 최초의 활동사진은 지금의 뉴스인 실사(實寫)라 하여 1905년경(?)에 발생한 대판 대화재 광경은 서성동 해안의 일인 숯(炭) 창고에서, 그리고 1913년에는 희극영화 「新馬鹿大將」(日語)을 박간(迫間) 창고광장(현, 경남은행 본점)에서 대정천황(大正天皇) 등극사실(登極實寫)를 상영한 외에 마산에서 처음 흥행한 신파연극 유일단(唯一團)(단장 이세기)일행이 일인 신축 창고에서 첫날 명호천명(鳴呼天命)을,

다음해엔 원정(元町) 매축지 매립 직후 현재 KTC 화물차 회사 옆 광장에서 조선 신파극 개척자 임성구 일행의 혁신단이 육혈포 강도를 공연하였다. 손에 땀을 뺀 관객들은 육혈포 소리에 놀라 장외로 달아나는 소동이 있었다.

1916년에는 김도산 일행의 개량좌(改良座)가 김병선 도정공장 광장(현재 시민내과)에서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란 예제로 종래의 것보다 몇 배의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하여 수좌가 생기고 김도산 일행이, 다음은 김소랑(金小浪, 본명 顯) 일행의 중성좌(衆星座) 등이 뒤를 이었는데 그때는 여우(女優)가 없어 여장남우(女裝男優)로서 유명한 독부형의 고수철, 주부형의 김영덕, 소위 소역(小役)으로 안종화, 악한의 양성환, 희극에 이모, 강도 역에 현성완, 소녀로서 홍일점의 김소진 양, 방정맞은 역 최여환, 버릇 없는 역에 백완종, 미남 이경환 등이 활약하였다.

이경환은 진짜 미남으로 여타의 배우도 그러려니와 흥행이 끝날 때면 극장 문 앞에는 이들에 혹한 여기(女妓)들이 줄을 이어서 중국 요리집이 아니면 저희들 집으로 납치하는 등 진풍경이었다.

지금은 대본으로 몇 달이나 연습을 하여도 흥행 시에는 막후에서 연출자가 있기 마련인데, 그들 신파배우들은 대본도 없이 단장이 배우들에게 1, 2차 강독을 하면 훌륭히 무대에서 극을 진행할 수 있었다.

흥행 초일(初日) 선전할 때면 맨 앞에는 초립 쓴 일행이 통소, 정, 북, 장고, 날라리, 꽹과리 등 순 국악으로 취군(聚群)을 하고 다음은 배우 전원은 인력거로써 시내 방방곡곡을 일주한다.

이 시기를 지난 얼마 후에는 신극의 바람이 일게 되어 마산에도 민중극단, 동방예술단(신일선 소속), 박승희가 이끄는 동경 유학생들의 토월회, 이경설의 여우(女優)들만의 극단, 최승희 무용단 등 무수히 지나갔다.

무성판(無聲版) 영화시절에는 가장 대중적이요, 가장 유명했던 변사로서 서상호, 김번성, 김영환(마산 출신)이었는데 서상호는 한때 세계적 명화인 유니버샬 회사 작품 더-부로킹(40권)을 매야(每夜) 희극물 한편을 붙여서 1주일간 상연의 변사를 했다.

서상호의 실제(實弟)인 서상철 변사가 나운규 주연의 「아리랑」을 맡았다. 아리랑의 민요는 옛날부터 있던 애조 띤 노래이지만 현행 아리랑 곡은 누가 편곡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오직 서상철 변사 때의 악대에서 처음 퍼진 듯한데 이 곡이 삽시간에 퍼져나가 8개월이 채 못 되어 일본 동경 방송국에서 방송되어 일인들까지 감흥하였다는 것도 어제 같은 일이다.

발성영화로서는 환서좌에서 등원의강(藤原義江)을 주연으로 한 「고향」과 수좌에서 관옥민자(關屋敏子)가 주연한 「자장가(子守唄)」를 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인이 처음 상영된 발성영화는 김파영 변사가 가져온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처음이다.

극장 무대를 말하면 다른 곳은 모르되 부산 대흑좌(大黑座)와 마산 환서좌가 지금도 보기 드문 회전무대였고, 그것도 앵관이 신축됨과 동시에 없어졌다.

앵관은 시가에서 서쪽으로 너무 편재한 관계로 관객이 희소하여 경영하기 급급하였으나 그 당시로서는 다른 극장에 비해 다소 넓고 내부 장치가 적의(適宜)한 관계인지 일본 테너 대가인 등원의강(藤原義江)의 독창회와 그 후 꾀꼬리 소리라는 평을 받은 소프라노 관옥민자(關屋敏子)의 독창회 때는 대만원을 이루었다.

이보다 더 성황을 이룬 것은 최승희 무용회라고 할 것이다.

이때는 하동, 삼천포, 진주 등지에서 택시로 마산까지 원정 오는 등 개장 전에 벌써 앵관 앞에서 현재의 외교구락부 근처의 다리까지 장사진을 치는 등 일대 성황이었다.<<<

<1919.10. 27(영화의 날),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구토'가 상영된다는 광고>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