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인단(仁丹)과 유성기
일본 대판에 제조공장과 본점을 둔 국내 향료로서 발매된 ‘仁丹’은 경영을 ‘森下 博’이 처음에 근소한 자금으로 시작한 것이 의외에도 동남아와 조선은 물론 얼마 안가서 만몽(滿蒙) 전역에까지 판매망을 석권하였다.
초기에는 글자 그대로 녹두만한 크기에 붉은 색이며 백립(百粒)에 10전이었다. 이것을 집시풍의 일본인들이 이 나라에 돌아다니며 가두 선전은 않고 밤을 이용하여 각 가정을 방문코 유성기(축음기)를 틀어 손님을 모은다.
음반은 조선인으로 제일 먼저 취임했다는 박춘재 재담에 몇 종의 조선노래를 틀어서 이런 신기한 것을 처음 듣는 중년 남녀의 마음을 흥겹게 한 뒤에 본격적으로 거짓말 투성이의 효능을 시부렁거린다.
두통, 치통, 위장병, 신경통, 피로 회복, 악역(惡疫) 예방 등등에 백발백중이라고 떠벌린다. 실로 만병통치라 이리하여 선전용으로 몇 알씩 준다.
보리밥티로 잉어 낚아치는 수법이다. 이리하여 다소 이익이 된 돈으로 이번에는 살구씨로서 여우 잡는 수법으로 온정을 베푸는 듯한 대금업을 한다.
이리하여 정한 날짜에 금리 혹은 원금을 갚지 못한 경우는 차압 정도를 넘어서 약탕행위도 사양치 않는다.
이런 화를 당하는 조선인은 호소할 곳이 없다. 경관이라는 자는 유랑하는 일인을 변호하면서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강압이 있을 뿐이니 울면서 겨자 먹는 꼴이다.
그리하여 이들 유랑 일인들은 정식 고리대금업이 아니면 농촌 빈한한 집 딸을 가장 헐값으로 장기 기한으로 가업(稼業)을 시키는 흡혈귀와 조금도 다름없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 흘러간 옛 이야기로서 잊을 일이 못된다.
仁丹 뒤에 나온 것이 검은 빛으로 좁쌀크기의 카오루가 나왔다. 인단과 카오루는 현존하고 있다.
인단은 초기에 붉은 빛인 때문에 지금 은색이라도 상호를 견지하고 있지만 국산 상호는 납득이 안 간다.
금은 백금 외에도 대개 누렇고 붉지만 은이 어찌해서 붉은가 말이다.
<1924년 8월 15일자 조선일보 인단광고 및 은단 / '인단 만큼 효력있는 약은 없습니다. 댁에도 인단은 준비하여 두셔요'라는 광고 문구가 눈에 띈다>
7. 창가(娼街)
일본은 일찍부터 양가 부녀자의 정조의 방파제로서 산창(散娼)들을 단속하며 집창(集娼)제도를 실시하였으므로 시내의 풍속을 정화하는 한편 대개의 범죄자를 여기서 용이하게 검거하는, 말하자면 꿩 먹고 알 먹는 격이었다.
일본에는 대표적으로 길원유곽(吉原遊廓)을 비롯하여 대판의 송도를 손꼽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는 이런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사창이나 색주가의 고용녀는 돈푼이나 있는 사람에게 이용되는 것이고 무산독신자나 농사집 머슴들은 소위 남사당패에 의해서만 성문제를 일시 해결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남사당이란 좋게 말해서 동성애요, 바로 말하면 계간(鷄姦)인바 이것은 구약시대부터 전래한 것인 듯 프랑스의 오스카 와일드, 독일의 헤스, 구한말의 중국 원세개(袁世凱) 등 유명 인물도 무던히 좋아했던 모양인데 또한 한 때 일본 육군유년의 강제 계간사건으로 크게 사회 문제화된 일도 있었다.
현재 유곽없는 일본에는 게이 보이(藝 BOY = 남자 기생)란 것이 3백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1차 희롱대가 보통 일화로 3천 원(현재는 등세(騰勢)된지도 모르지만)을 오르내리는 정도라고 하지만 잠깐 객고를 풀고자 하다가 여성 아닌 남자에 걸려드는 것은 고사하고 잘못하면 소지금액을 전부 비거서산(飛去西山)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또 한 가지 문제로 대관절 한국에는 유곽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짐작컨대 일본인들이 개척사업으로 한국에 발을 붙이게 될 때 일본의 이동 창녀들이 따라붙어 점점 그 수가 늘어짐으로써 집창의 효시가 된 게 아닐까.
그러나 이들의 거주 제한으로서 유곽설치가 필요하게 되자 각 도시마다 유곽설치를 관허(官許)하였으니 평양의 진정(賑町) 경성의 신정(新町), 부산의 녹정(綠町) 등으로 상당한 범위를 점하였는데 마산은 해방되기까지도 현재의 수성동 일대에 소위 청루라고 한 것이 주민 가옥 사이사이에 10여 개나 산재하게 되어 자녀 교육과 풍기 문제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조선총독부가 일정한 구역에 관허라는 명목으로 인간시장-유곽을 인정하기 전에는 돈 있는 일부 파락호들이 경영하는 유곽 아닌 청루가 지금의 자산동 몽고간장 바로 뒤 터에 자리 잡고 조선인 창녀 7, 8명이 판을 친 것이 멀리 명치 40년 전후였으며 3, 4년 후에는 현 미도식당 동쪽 입구 골목에 조선인 창녀 5,6명이 창궐하였다.
이렇게 해서 인육시장은 수성동(당시 幸町 壽町)으로까지 뻗쳤는데 그 당시 일인 파락호들은 대좌부(貸座敷)라는 청루업을 하면서 고리대업까지 겸하고 농촌에서 고리채를 환불치 못하는 경우는 재산 차압과 심지어는 딸자식을 상품으로 연행하기가 일쑤였다.
그 당시 청루라는 푸줏간에 팔려가는 계집애의 나이는 주로 16,7세로부터 23,4세이며 값은 최저 80원에서 쌍판이라도 반반한 것은 3백원 안팎까지였다.
그 계약기간은 최단 2년, 최장 5년이었으나 명색이 얼굴이 요사하여 손님이 하루 밤도 빠지지 않고 하루 밤에 수차에 걸쳐 손님을 맞이하게 되는 인기 있는 계집애라도 의복, 화장비와 고향에 간간이 보내는 생활비의 돈은 포주에게서 결국 빌리게 되는데, 이때의 돈은 보통 대금과 달리 고리(高利)가 새끼 쳐서 쌓이는 원리금에 일평생 청춘시절을 무기수와 같이 청루귀신이 되고 마는 신세가 된다.
이때의 청루 상황을 살펴보면 대정 3,4년경만 해도 일본인이 조선인 계집애를 헐값으로 사들여 시작한 것이 불과 서너 곳 밖에 안 되었는데 종전(終戰)까지만 해도 구마산 일대에 산재한 것이 다음과 같다.
산월정(山月亭, 한인), 명월루(明月樓, 일인), 영남루(嶺南樓, 한인), 醉仙亭(취선정, 한인), 수루(壽樓, 일인 후 한인), 마산정(馬山亭, 한인), 일선정(日鮮亭, 일인), 오처정(吾妻亭, 일인), 복정(福町, 일인), 산해루(山海樓, 한인), 해월루(海月樓, 한인).
(복정은 현재 도로학장 전 동성동 불종거리에 있었고, 마산정은 동성동 돌다리 건너에 있었다. 그 외에 루명(樓名)이 기억되지 않은 것은 주로 현재 황실 다방 근처에 河 모가 경영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신마산에는 일인들이 경영하던 것이 헌병분견대 근처의 이예옥(伊豫屋)을 비롯해서 망월루, 동운(東雲), 탄월(呑月), 일복(一福) 등 고급 요정이 있어 이곳은 대소 연회장소로 이용되었다 (망월루는 현재 자동차 학원으로 탄월은 고아원으로 전용되고 있음).<<<
<일본 최초의 유곽인 동경 길원유곽과 길원유곽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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