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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 5. 00:00

꿈의 도시


신년 연휴에 재미있는 책을 한권 읽었습니다.
『공중그네』로 유명한 일본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장편소설『꿈의 도시』였습니다.



한겨레신문 신간소개 란에
‘쇠락해가는 세 도시를 통합해 탄생한 도시「유메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라는 투의 기사 때문에 읽게 되었습니다.
저의 관심은 ‘세 도시 통합’이었습니다만 제 의도와 달리 아쉽게도 '세 도시 통합'은 이 책의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메노」는 인구 3-4만의 작은 군 세 개를 합쳐 시(市)로 만들면서 희망찬 꿈을 안고 탄생한 도시입니다만 희망은커녕 절망만 남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통합 전에는 이웃 간의 작은 정이라도 오갔지만 도시가 조금 커지자 그 정마저 어제 일이 되었습니다.

대형쇼핑센터에 밀려 셔터를 내려버린 도시의 상점가,
대도시로 떠났거나 떠날 기회만 엿보는 젊은이들,
공익은 아랑곳없고 사욕에만 눈 밝히는 지역 정치가,
높은 이혼율,
젊은 주부들의 원조교제 매춘,
정부 생활보조비에 기대어 사는 멀쩡한 사람들,
현실을 도피하고 내세를 쫓는 광신자들.

「유메노」는 이런 상황들이 뒤섞인 암울한 도시였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아내는 여러 차례,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힘들어”
“일본사회도 희망이 없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 뭐....” 라며 혀를 찼습니다.

이 책에는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부당한 생활보호비 수급자를 찾아내다 원조교제의 늪에 빠진 공무원,
도쿄의 대학생활을 꿈꾸다 사이코패스에게 납치되어 사육당하는 여고생,
노인들을 대상으로 사기 세일즈를 하는 전직 폭주족,
식품매장의 좀 도독 잡는 일을 하며 사이비종교에 빠진 사십대 후반 이혼녀,
오직 돈과 권력만 쫓아가다 패가망신하는 시의원이 그들입니다.

이들의 일상을 통해,
빠찡코, 인터넷 게임, 유부녀 매춘, 사이비종교, 노인 사기판매, 부패한 정치인, 대도시만 바라보는 청소년, 외국인 저임금노동자, 폭력 등 일본사회의 어두운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원작 제목이 『무리(無理)』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집중화된 자본에 의해 몰락해가는 지방경제의 실상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대형쇼핑센터의 문제점도 지적합니다.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고, 주차비도 받지 않고, 물건 값도 싸고, 원스톱으로 먹고 사고 놀기까지 할 수 있는 대형쇼핑센터가 바로 우리 도시를 무너뜨리는 주범이라고 말입니다.

지방도시를 소재로 일본사회의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었지만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아 책을 읽는 내내 찜찜했습니다.
작가의 눈에 보인 일본지방도시의 현실은 이 땅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우리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작가 ‘오쿠다 히데오’가 이 책을 내면서 한 말입니다.
“지방에 가면 똑같은 풍경을 본다. 시장경제가 널리 퍼져 지방은 붕괴됐다는 생각이 든다. 대기업에 휘둘려 특색이란 게 없어져버렸다. 일본은 이제야 시장 경제에서 떨어져나간 약자들이 사회문제로 되고 있다.”

한국사회에 적용해도 어디 한군데 수정할 곳이 없는 말입니다.

630쪽의 두꺼운 책이었지만 책장이 잘 넘어갔습니다.
이야기의 속도도 빨랐고, 작가 특유의 재기 넘치는 표현에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꼭지 바뀔 때 좀 쉬고 싶었지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아내의 성화에 느긋이 끊어 읽지도 못했습니다.

압권은 자동차연쇄충돌사고로 마무리되는 충격적인 라스트 신(Last scene)이었습니다.
유메노」를 황폐화시킨 주범 ‘드림타운’ 앞 거리에서, 숨길 것도 숨길 곳도 없이 폭발해버린 라스트 신이 마치 깜깜한 골방의 문 틈새를 찌르는 한줄기 강렬한 빛처럼 짜릿했습니다.<<<

    <원작『무리(無理)』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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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윤기 2011.01.05 09:13 address edit & del reply

    오쿠다 히데오 저도 좋아 하는 작가인데요... 공중그네도 재미있게 읽었고..연극 '닥터 이라부'도 흥미롭게 보았지요. 작은 군 세 개가 통합하여 시가 되었다는 대목에 관심이 가네요. ㅋㅋ~

  2. 2011.01.05 09:13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09. 11. 28. 08:34

시비(是非)는 가려야


시비(是非)를 던지다
제목이 좋았습니다.

양시(兩是), 양비(兩非)가 아니라, 옳고 그름(是非)을 따져본다는 의미의 제목이 좋았습니다.
저자는 한문학자 강명관 교수입니다. 젊었을 때는 민주화니 운동권이니 하며 한 가닥 했던 분인 듯했습니다.

서너 페이지가 한 꼭지로 된 조선시대생활풍속사를 엮은 책입니다.
글이 참 맛깔스러웠습니다.
조선시대의 이야기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삶과 연관시킨 점이 좋았습니다.

중앙의 지방 차별, 거짓과 허위, 허망한 권력, 모순된 착취구조, 왜곡된 역사 등 지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난마들이 줄줄이 엮여 나옵니다.
머릿속에는 있었지만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들을 낱낱이 밝혀낸 책이었습니다.

····································
지방에 대한 차별의식은 어느새 지방 사람인 나의 언어와 심성에까지 들어와 있다.
지방대학은 별 볼 일 없는 이류대학이란 말이요,
“지방방송 꺼라”는 말은 부질 없는 소리 하지 말란 말이요.
지방기업이란 보잘 것 없는 기업이란 것이다.
‘지방’은 모든 이류이고 보잘 것 없고 무시해도 좋을 것들의 대명사가 되었다.
····································
대한민국 지도에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부산, 울산이 있지만, 그건 지도상에만 있을 뿐이고, 실제로는 없다.
실제로 있는 것은 서울과 지방 뿐이고, 그 지방은 서울의 ‘식민지’일 뿐이다.
인재를 빼앗기고, 돈을 갖다 바치고, 서울의 물건과 문화를 소비하는 서울의 식민지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식민지 백성인 것이다.
···································

역사인식에 대한 이야기도 통렬했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며 흠모해 마지않는 광개토대왕에 대한 부분입니다.

····································
18세에 즉위하여 39세에 사망한 그가 20여 년간 한 일은 오직 전쟁이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힌 것이 그의 업적인 것이다.
그 영토는 비문에 나와 있다.
‘공격해서 격파한 성이 64개였고, 마을이 1천 4백 개’였다.
이 외에 다른 업적이랄 것은 없다.
비문을 읽지 않아도 우리는 국사교육을 통해 그가 ‘널리 땅을 확장한(廣開土)’ 왕이었음을 익히 알고 있다.
····································
이상하지 않은가.
왜 고구려는,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영토로만 기억 것인가.
기나긴 시간 동안 수많은 인간이 살았던 고구려 사회가 왜 국토의 넓이로만 기억되는 것인가.
····································
한국은 식민지를 경험했으되, 제국주의적 욕방을 근원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도리어 제국주의적 영토욕을 내면화했던 것이다.
····································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영토가 넓었다는 것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질타하는 이 부분에서는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바로 내가 그렇거든요.

공부라면 단 한 번도 남에게 뒤떨어본 적이 없는 친구.
최고에 최고의
학교를 거친 그 친구가 우리 학계의 좁고 왜곡된 벽을 넘지 못해 50이 넘은 지금도 대학 강사 신세를 못 벗어난 이야기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가짜와 위조를 싫어하지만, 졸업장이라는 종잇조각이 없으면 이 사회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사회구조는 더더욱 가증스럽다는 부분에서는 분이 끓었습니다.

대중을 선동해 관리의 잘못을 따지고 들었던 불평 많은 이계심을 두고 오히려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 역설한 다산의 모습을 읽을 때는 그가 우리 조상 중 한 분이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는 게 시비(是非)가리는 것일 터.
건강한 사회는 시비가 정확하게 가려져야 하는 법.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친일인명사전’과 ‘친북인명사전’을 둘러 싼 싸움과 싸움이 시비를 가리기 보다는 양시(兩是) 양비(兩非)에 익숙함을 잘 말해줍니다.

시비 가리지 못하게 하는 사회, 정상적인가?
시비 가리자는 사람더러 ‘골치 아픈 사람’ ‘말 많은 사람’ 한 걸음 더 나가 ‘반대만하는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사회, 정상인가?
윗사람에 그저 순종하고 힘에 굴종하고 제 목소리는 죽여야만 ‘된 사람’으로 칭찬 받는 사회, 정상인가?
이런 사회 정상인가, 망쫀가?

강명관 교수가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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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은진 2009.11.28 11:05 address edit & del reply

    옳고 그름의 기준이 속세에서 잘살고, 권력을 갖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내면적인 자기 도덕성의 기준, 또는 공동체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기여한 것이 옳은 것인가?

    오랜 된 질문이지만, 이웃을 되돌아 보지 않으니, 도덕 자체에 대한 생각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이웃, 기억, 그리고 평가를 하는 것이 옳은 것을 만드는 일차적인 출발이 아닐까 싶습니다.

    • 허정도 2009.11.28 11:56 address edit & del

      어제 수고가 많았습니다.
      생활방법, 사고방식 등에 대해 너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아서 올려보았습니다.

2009. 10. 27. 23:13

[동영상] KBS 아침마당 (2009년 10월 20일 방송분) "책 읽어주는 남편 허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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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0. 24. 06:00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


안녕하십니까? 허정도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지상에 숟가락 하나』라는 책은,
제주도가 낳은 소설가 현기영 선생이 자신의 유년기 성장과정을 기억해가며 쓴 글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유년으로 돌아가,
작가 자신이 나고 자란 제주도를 배경으로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재현해냈습니다.

때로는 배꼽을 쥐고 웃다가,
때로는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역사 속에 묻혀간 군상들의 삶을 처연히 엿볼 수도 있는 책입니다.

누구나 소설 한 권씩 쓰며 사는 게 인간 삶이라고는 하지만,
한 사람의 성장기가 이토록 아프고 아름답고 다채로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낸 뒤,

글을 쓰는 내내 무척 설레었다고,
행복했다고,
잊었던 유년의 기억을 좇는 시간여행에서 인생을 다시 산 느낌이었다고 하면서,
자신을 키운 것은 부모님만이 아니라 제주도의 자연과 유년의 친구들과 중학시절 독서였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 친구들 별명이 재미있습니다.

국수 가락처럼 입 밑까지 흘러내리는 누런 코를 단숨에 들이키는 누렁코,

옷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물에서 놀다가 여자애들 부끄러워 불알만 잡고 뛰는 똥깅이,

키 큰 먹구슬나무를 원숭이처럼 타고 오르는 나무타기도사 웬깅이……….

별명만으로도 모습이 그려지는 이 개구쟁이들이 사춘기 소년이 되기까지 겪은 이야기.

혼자만 아는 비밀이야기일 수도 있는 어릴 때 우리들의 모습,
바로 그 이야깁니다.

「허기」라는 제목의 글 한 대목입니다.

‘배고픈 나는 게를 잡으면, 그 당장 산 채로 입에 넣어 아삭아삭 씹어 먹었다.
깅이는 게의 사투리이자 내 별명이니까, 말하자면 깅이가 깅이를 잡아먹은 셈이다.

고동이나 바위에 붙은 군부, 뱀고동은 돌로 쪼아 바닷물에 헹궈서 먹었다.

게, 고동은 밥이 아니어서 뱃속을 흐뭇하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라도 없었다면 그 모진 흉년을 어찌 견뎌냈을까.’


본능과 지혜가 만들어 낸 섬 아이의 생존방식아니겠습니까?

어렸을 때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비록 어리긴 했지만 지금보다 순수했고 진실했을 겁니다.

오늘 저녁에는 어린 시절로 달려가 옛 친구들을 만나볼 생각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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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0. 19. 13:00

책읽어주는 남편, KBS 아침마당 출연

<책 읽어주는 남편>의 저자이자 팀블로그 '허정도와 함께 하는 도시이야기' 대표 블로거인 허정도씨가 내일(20일) KBS1 TV 아침마당(오전 8시 30분) <화요 초대석>에 출연합니다.

<책 읽어주는 남편>을 쓴 허정도씨는 건축가이자 경남도민일보 대표를 지낸 언론인, 그리고 한국YMCA 전국연맹 이사장을 지낸 시민운동가이이기도 합니다.




<책 읽어주는 남편>은 안부대상포진으로 외출도 못하고, 눈조차 제대로 뜨기 못하는 아내를 위하여 책을 읽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씌어진 책 입니다. 아픈 아내를 위하여 우연히 읽기 시작한 책 읽기가 부부간의 대화를 풍부하게 해주고, 살아 온 날들을 되돌아 보는 유익한 시간이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한국의 남편들을 위하여 "일찍 퇴근하고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책을 읽어주라고 합니다." 책을 함께 읽으면 대화가 깊어지고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며 유익한 놀이가 되기도 한다고 강조합니다.

허정도, 정미라부부는 요즘도 매주 1권씩 책을 함께 읽는다고 합니다. 남편 허정도씨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40분 정도 소리 내어 책을 읽고 주말에는 좀 더 긴 시간 아내를 위해 책을 읽어준다고 합니다. 이들 부부가 요즘 읽는 책은 저희 블로그를 통해서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KBS 아침마당은 KBS 1TV에서 매주 월요일~금요일 아침 8:25 토요일 아침 8:30에 방송되고 있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입니다. 1991년 5월 20일  첫 방송을 시작하여 2007년 9월 1일에 5000회 방송을 한 인기 있는  시사, 교양 프로그램입니다.

아침마당 출연을 계기로 그의 책 <책 읽어주는 남편>이 더 많은 독자들과 만나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독서의 계절 가을입니다.  KBS 아침마당에서 책 읽어주는 남편 허정도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KBS1 TV  생방송 아침마당 - 화요 초대석
10월 20일(화) 오전 8시 25분 - 9시 30분
               (8시55분 경부터 방영될 것 같습니다)

많은 시청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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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괴나리봇짐 2009.10.20 09:28 address edit & del reply

    방금 인터넷으로 방송 봤습니다.
    흐뭇하고 뿌듯하게 잘 봤습니다.
    저희 부부도 닮고 싶네요.^^

    • 허정도 2009.10.20 14:45 address edit & del

      비밀이 탄로난 것 같아 머쓱하네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2. 실비단안개 2009.10.20 11:30 address edit & del reply

    티비 시청이 물론 어렵지만, 늦게 기사를 읽었습니다.
    축하드리구요,
    건강한 가을 되셔요.^^

    • 허정도 2009.10.20 14:46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조금 전 마산에 도착했습니다.

2009. 10. 15. 06:00

집에 일찍 들어가 아이와 함께 놉시다


과레스키의 <까칠한 가족>

안녕하십니까? 허정도입니다.

오늘은 이탈리아의 저술가 과레스키가 쓴 ‘까칠한 가족’이라는 재미있는 책 한권 소개하겠습니다.

저자인 과레스키의 가족을 모델로 쓴 연작소설입니다.

1954년에 출판되었으니 이미 반세기가 지난 글들입니다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과레스키는 사회에서 제법 잘나가는 작가이자 언론인이었지만 가족들에게는 직업도 없는 사람처럼 불쌍하게 취급당하는 아버지로 등장합니다.
이 시대의 보통 아버지 모습입니다.

아내는 현실감각이 조금 모자라지만 착한 전업주부이고,
아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소년이며,
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는 귀엽고 영리한 아이입니다.

이 네 가족이 펼치는 갈등과 화해와 진한 사랑을 예리하면서도 풋풋하게 그려내고 있어 읽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책입니다.

아버지 과레스키가 딸과 나누는 까칠한 대화입니다.

“딸은 최소한 아빠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 너는 내가 세탁실의 수도꼭지나 전등 스위치를 고치는 것 이외에도 신문에 글을 쓰고 책을 쓴다는 것을 모르니?”

“물론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목수나 의사, 기술자, 변호사 같은 직업이 아니에요.”

“직업이 아니면?”

“그냥 그런 거예요. 모든 사람은 무슨 글이든지 쓸 수 있어요. 하지만 의사가 아닌 사람은 다리를 자를 수 없어요.”

“그러니까 너 아빠는 직업이 없는 불쌍한 사람에 불과하구나!”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을 할 때 직업이라고 말해요. 옷이 필요할 때는 재봉사를 부르고, 약이 필요할 때는 의사를 부르고, 식탁을 만들어야 할 때는 목수를 불러요. 하지만 슬프거나 웃기는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작가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하,, 어떻습니까.

방송 듣는 분들 중 한참 커가는 열 살 전후의 아이를 둔 분도 계실 겁니다.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시나요?

흔히 부모들은 ‘아이들이 어려서 함께 놀아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이들이 부모와 놀아주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에게도 부모와 함께 노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 시기가 지나면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부모도 아이와 함께 놀 수 있을 때를 놓치지 말고 한껏 놀아야 합니다. 아이가 그렇듯 부모에게도 그 즐거움은 잠깐 뿐입니다.

오늘 저녁 일찍 집에 들어가서 아이와 함께 시간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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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0. 8. 07:00

고혜정의 <친정 엄마>

고혜정의 <친정 엄마>

안녕하십니까? 허정도입니다.

오늘은 방송작가 고혜정의『친정엄마』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모녀간의 이야기입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난생 처음 집 떠난 후 새삼 느낀 어머니의 사랑, 세월이 흘러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 어머니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딸의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난 책입니다.

모녀이기 때문에 느끼는 갈등과 불만, 모녀이기 때문에 생기는 조건 없는 사랑, 모녀이기 때문에 담아둔 비밀스러운 감정.
이 모든 것들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가슴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파헤치는 책입니다.

보따리 보따리 온갖 것들을 싸가지고 서울 딸네에 어머니가 올라왔을 때 딸은 별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느냐고 짜증을 냅니다.

그 소리에 어머니는 서운했던지 한마디 합니다.

“너는 모를 것이다. 엄마 맘을. 너도 나중에 새끼 나서 키워봐. 그때 엄마 생각 날 것인 께. 나, 너 서울로 올라간 후로는 한 번도 니가 좋아허는 반찬은 안 히먹었어야. 내 새끼 좋아허는 거, 차마 내 새끼 빼놓고 못 먹겄데. 나, 너 서울 올라간 후로는 내 손으로 한 번도 과일 안 사먹었어야. 너랑 같이 먹을라고. 새끼는 다 그런 것이다.”


딸이 서울로 떠나갈 때 엄마는 그 동안 콩나물 값 두부 값 깎아서 모은 50원 100원짜리 심지어 5원짜리 동전까지 가득 든 불룩한 라면봉지를 내어 놓았습니다.
울면서 그 봉지를 집어넣은 고혜정이 기차역에서 엄마와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엄마와 나는 그날, 서로 눈길을 피해 먼 곳을 보며 울고 또 울었다. 나중에 서울행 기차가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는 그 때까지 서로를 위로하지도, 자신들의 감정을 추스르지도 못한 어머니와 나는 참았던 울음들이 북받쳐 엉엉 울었다. 그렇게 엄마를 역에 남기고 엄마가 꽁꽁 싸준 동전들을 들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던 나.
결혼 해 살면서, 더 엄마가 그리워진다. 남편과 생활하며, 아이를 낳아 기르며, 나는 더 엄마를 이해하게 되고 엄마 때문에 눈물이 난다.’

예,
이 책을 읽고 난 뒤, 뉴스메이커 편집장인 유인경 씨는,


“친정엄마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그 무슨 말로 친정엄마의 노고를 치하할까? 흐르는 눈물만이 그 해답을 안다.”
고 했습니다.

아낌없이 준다, 가슴이 먹먹하다, 억장이 무너진다……….

왜 우리의 어머니들은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요.



* 책 읽어주는 남자  10월6일 방송입니다.


친정 엄마 - 10점
고혜정 지음/나남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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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0. 2. 19:00

광란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공지영의 『도가니』〉

폭포처럼 글을 쏟아내고 있는 공지영의 소설입니다.

주인공 강인호는 남쪽 도시 무진(霧津)에 있는 청각장애인학교 ‘자애학원’의 기간제교사로 취직됩니다.
그가 차를 몰고 무진시로 들어오는 첫날, 지독하게 깔려있는 안개를 만납니다.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강인호가 자신의 승용차에 간단한 이삿짐을 싣고 서울을 출발할 무렵 무진시(霧津市)에는 해무(海霧)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흰 짐승이 바다로부터 솟아올라 축축하고 미세한 털로 뒤덮인 발을 성큼성큼 내딛듯 안개는 그렇게 육지로 진군해왔다.
안개의 품에 빨려 들어간 사물들은 이미 패색을 감지한 병사들처럼 미세한 수증기 알갱이에 윤곽을 내어주며 스스로를 흐리멍덩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 첫 문장에서 소설의 분위기가 예고되었습니다.
책 읽는 내내 안개가 주위를 뒤덮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앞이 흐릿하고 답답했습니다.

장애 아이들을 십 수 년 간 성폭행해오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존경받고 호의호식하는 거짓 교육자들의 폭력과 위선, 그 광란의 ‘도가니’ 한복판에 주인공 강인호가 뛰어들면서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마치 우리 공동체가 깊숙이 감추어놓은 밑바닥을 헤집는 것 같았습니다.

교육자, 그것도 장애인을 가르치고 키우는 사회사업가이자 교육자이어서 사회로 부터 존경 받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존경받고 있는 사람들이 내뱉는 쓰레기 같은 말들과 인간이하의 짓거리들을 리얼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가식과 편견과 왜곡된 권위로 가득 찬 세상살이를 드러내 놓았습니다.

적나라한 표현 한 군데를 소개합니다.
장애 아이들을 성폭행한 이강복의 아내가 법정에서 자신의 남편을 고발한 무진인권센터소장 서유진에게 일갈하는 장면입니다.
 

이 쌍년아, 니가 그 년이구나.
어디 상판 좀 보자, 이 마귀 같은 년아! 
니가 내 남편 잡아 먹으려고 이런 누명을 씌운 그년이구나, 너 남편도 없이 산다더니 그 짓을 오래 못해 환장을 했구나.
그래서 너 빼고 다 그 짓만 하고 사는 줄 알았니?
이년아,
내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니 씹을 갈아 마시고야 말테다, 이년!


책을 읽는 동안 아내와 몇 번이나 “이럴 수가, 정말 이 정도일까” 놀라면서 읽었습니다.
우리 주변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상상 속의 픽션이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뒤에 붙은 ‘작가의 말’을 보니 이 나라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지금도 벌어지는 현실이었습니다.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한번 씩 듣긴 합니다만, 해도 해도 너무해서 사람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지는 소설입니다.

꺼림칙해서 읽기 힘든 소설입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뿌예지는 아픈 소설입니다.
‘다른 세상 이야기겠지’ 라며 못 본 척 피하고 싶은 소설입니다.
우리의 치부가 너무 적나라해서 아내와 나는
 ‘우리가 과연 국민소득 2만 달러 국가 맞나?’ 라고 서로 물었습니다.


책장을 덮고 난 뒤 ‘누가 장애인인가?’ 라는 질문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가난과 폭력과 무관심 속에 버려진 청각장애의 선량한 아이들과, 사회적 지위와 부와 명예를 갖춘 사악한 어른들 중 ‘누가 진정 장애인인가?’ 라며 작가가 묻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아예 날 향해 ‘왜 사니? 넌 무슨 생각하며 사니?’라고 대드는 것 같았습니다.

공지영은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장애 아이들을
‘발톱 없이 태어난 사자, 다리 없이 태어난 사슴, 귀먹어 태어난 토끼, 팔 잘린 원숭이·········’ 라고 했습니다.
‘발톱 없이 태어난 사자’ ‘다리 없이 태어난 사슴’ 이 밀림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추석입니다.
집 주변을 정리하다보니 그리도 푸르싱싱하던 담쟁이가 누렇게 물들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책, 『책 읽어주는 남편』 때문에 여성잡지 몇 군데와 인터뷰하면서, 그림이 좋아 담쟁이 앞에서 아내와 사진을 찍었던 게 생각났습니다.
지난7월이었습니다.


7월의 담쟁이.
정말 세차고 거침없었습니다.
온 담벼락이 자기 터 인양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놈들이 어느새 힘을 잃고 가을햇빛에 천천히 삭아들고 있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 7월 아내와 담쟁이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추석 전날 찍은 사진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누런 잎 떨어내는 우리 집 담쟁이를 본 것도 벌써 스무 두 번째입니다.
한 번 보면 그새 깜빡 일 년인데,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요?
올림픽 했던 88년도에 처음 봤을 때는 나도 ‘7월 담쟁이’ 같았는데 이젠 내 나이도 수월찮습니다.

"하아- 오늘은 잎 떨어지는 담쟁이가 내게 인생을 가르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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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웅 2009.10.04 00:55 address edit & del reply

    담쟁이 앞에서 찍은 사진 참 좋네요^^
    컴퓨터 바탕화면 사진을 이 사진으로 바꿔야겠네요
    건강하세요.

  2. 도야지 2009.10.04 12:13 address edit & del reply

    책읽기를 좋아하는데 공지영 소설은 한번도 못읽어본 것 같네요..
    베스트셀러보다는 손에 가는 책을 먼저 읽다보니...
    공지영이 쓴 책은 신문기사나 이렇게 블로그를 통해서만 접했는데...읽어봐야겠어요..

    • 허정도 2009.10.04 13:17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장애인들에 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하는 소설입니다.
      꼭 권하고 싶습니다.

  3. 푸른옷소매 2009.10.06 13:27 address edit & del reply

    '누가 장애인일까?' 두렵고도 아픈 물음입니다.

    사진속 두분의 미소가 너무 보기 좋아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2009. 9. 30. 06:00

법정 스님이 남긴 '좋은 말씀'은?



안녕하십니까, 허정도입니다.

오늘은 유명한 법정스님의『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산사에서 생활하는 법정 스님이 그때그때 드는 생각과 삶의 모습을 담아낸 글입니다.

수레바퀴의 자취는 수레를 따르고 말과 행동은 마음을 따른다고 스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배인 글입니다.


‘무소유 정신’으로 상징되는 스님의 글이라 전체 분위기가 잔잔합니다.

스님이 가르칩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일의 과정에서 길의 과정에서 잃어버린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끝없는 소유욕을 버리라는 말씀도 합니다.

 

‘………부는 욕구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차지하거나 얻을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할 때 우리는 가난해진다. 그러나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한다면 실제로 소유한 것이 적더라도 안으로 넉넉해질 수 있다.’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손대지 않고 쓰지 않는 물건이 쌓여 있다면 그것은 내게 소용없는 것들이니 아낌없이 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정말 '좋은 말씀' 아닙니까?

‘좋은 말씀’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법정스님이 길상사 봄 법회를 끝내고 나오는데 중년 남자 한 분이 책을 한 권 들고 다가오더니 ‘좋은 말씀’ 한마디를 책 첫 페이지에 적어달라고 하더랍니다.

순간 스님은,

조금 전 법회에서 좋은 말 다해주었는데 다시 좋은 말을 달라하니 씁쓸한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렇지만 거절할 수가 없어서 법정스님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미심장한 화두를 써 주었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그 글이 성에 안 찼던지 ‘간단한 이런 글 말고 더 좋은 말씀을 써 달라’고 졸라댔답니다.

어이가 없어진 스님은 하는 수 없이 그 남자의 요구대로 큰 글씨로 ‘좋은 말씀’이라고 종이에 꽉 찰만큼 써 주었답니다.

 
어떻습니까?

‘좋은 말씀’이 필요하신 분들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책 읽어주는 남자 9월 26일 방송입니다.


아름다운 마무리 - 10점
법정(法頂) 지음/문학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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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ontreal florist 2010.03.16 00:49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아름다우신 말씀이시네여

2009. 9. 27. 08:03

현기영의 '누란'을 읽었습니다

《현기영의 ‘누란’을 읽었습니다》

‘책 읽어주는 남편’이란 책을 낸 뒤 여기저기서 만나는 사람마다 “요즈음도 아내에게 책을 읽어주나요? 지금은 무슨 책 읽어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지난 17일에는 CBS 라디오 전국방송에 출연하여 개그우먼 장미화 씨와 1시간가량 생방송을 했는데 거기서도 ‘지금은 무슨 책을 읽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최근 읽었거나 읽고 있는 책을 시간 날 때마다 소개해 볼까합니다.


지난주에는 소설가 현기영 선생이 쓴 ‘누란’을 읽었습니다.
자전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 이후 10년 만에 접한 그의 소설입니다.

현기영 선생의 작품에는 언제나 그의 고향 제주도가 빠지지 않았는데 이번 작품은 제주도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늘 보듬고 고민하던 한국현대사의 고통과 질곡에 대한 내용이란 점은 다른 작품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80년대의 극렬 운동권이었던 소위 386세대 주인공 허무성이, 구속된 뒤 참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동지들을 감옥에 보낸 후 겪는 심리적 갈등을 주제로 한 소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으로 한국사회가 민주화되었지만 물신주의와 배금주의에 지배당해버린 오늘의 현실을 질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소설은 첫 장부터 허무성이 당하는 끔직한 고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 까무러칠 수만 있다면!
아니, 차라리 죽을 수만 있다면!
이 저주의 육체를 포기해버릴 수만 있다면!
푸아, 푸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희생물 앞에 얼굴을 바싹 들이댄 포식자 김일강. 이 위로 입술이 잔인하게 말려 올라가 있다.

“이 빨갱이 새끼, 허무성! 항복해! 뭐, 더 이상 자백할 게 없다고? ·········
이 새끼, 자백할 게 없으면 소설이라도 써봐, 픽션이라도 만들란 말이야.
네가 항복할 때까지 고문은 멈추지 않을 거야. ·········
알았어? 이 새끼 다시 물에 처박아!”

너무 끔찍하여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안경 쓴 박종철의 선한 눈매가 떠올랐고 회색 빛 그 시절의 추억이 이것저것 떠올랐습니다.
고문장면을 들으면서 아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쁜 놈들, 아휴 나쁜 놈들”을 연신 되뇌었습니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그 시절에는 흔히 있었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일류 대학을 나와 사법고시를 거친 검사출신의 그 고문기술자는 문민정부 이후에 국회의원으로 버젓이 활동합니다.
주변에서 흔히 듣고 본 일이었지만 이 책을 읽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공 허무성은 모진 고문 끝에 친구들을 배신한 후, 바로 그 고문기술자의 도움으로 일본에 유학했고, 다시 그의 도움으로 대학교수가 됩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 트라우마를 앓으며 고통 속에 빠져 살다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노숙자가 됩니다.
이런 줄거리 속에서,
80년대를 관통했던 민족과 국가 그리고 민주와 자유라는 무거운 주제에 대한 고뇌보다는 물신숭배의 소비와 향락에 빠져 사회문제에는 아무런 의식조차 없는 세태에 대한 작가의 한탄과 절망이 그려져 있습니다.

요즈음 대학생들을 빗댄 재미있는 글 한 줄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진주의 논개가 왜장의 목을 껴안고 인당수에 몸 던지면서 하는 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낄낄낄’


- 우리 시대 물신숭배에 대한 깊은 우려와 절망이 곳곳에 배여있어 -


책을 읽기 전에는 책의 제목 ‘누란’이 그저 ‘위태로운 상황(累卵)’이라고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읽다보니 ‘누란’이 그 ‘누란’이 아니라 고대국가 ‘누란(楼蘭, Loulan)’임을 알았습니다.

책을 읽다가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보니
‘누란’은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 사이, 즉 지금 중국의 신장-위그로 자치주에 있었던 고대도시국가로 실크로드의 중계거점이기도 했던 오아시스였는데 1,600여 년 전 주변 국가들의 침입과 자연의 변화로 멸망하여 지금은 옛 성터만 유적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주인공 허무성이 서울 한복판에 불어 닥친 짙은 황사를 보면서,
무풍의 고요한 오아시스 ‘누란’국의 하늘에 돌연 폭풍이 몰아치며 청천하늘을 가리면서 누런 모래가루들이 초록의 땅을 순식간에 무(無)로 만들어버렸던 사실을 떠올립니다.
벼랑 끝으로 질주하는 듯한 참담한 한국사회의 물신숭배주의에 대한 절망을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막 사이에 한때 크게 번창했던 옛 왕국 누란을 삼켜버린 그 가없는 모래바다,
모든 것이 죽고 모래폭풍과 인광들만이 살아 움직이는 곳이었다.
폭풍이 몰아쳐 거대한 바퀴 모양의 깊은 궤적을 파놓으면 흰 뼈들이 드러나고, 밤에는 무수한 인광들이 불티처럼 날아다녔다.’

이 시대 최고의 가치인 돈,
그 돈의 마력과 물신숭배가 결국 우리 사회를 타락으로 멸망으로 끌지 않을까 한탄하는 우리 시대 대작가의 깊은 우려와 절망이었습니다.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오래 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우리 부부야 나이 들었으니 별 걱정은 없지만, 살아갈 길이 먼 아이들을 생각하며 아내와 긴 한숨을 나누었습니다.

책을 읽으니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복도 끝의 창이 없는 방이었습니다.
그 방 한쪽 벽 아래에는 욕조를 뜯어낸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게 뭔지 알아? 욕조 뜯어낸 자국이야, 박종철도 저런 욕조에서 죽었어,
여기는 그런 곳이야, 얌전히 굴고 순순히 응해!”
윽박지르던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예전에는 생생했는데 오래되어 그런지 흐릿했습니다.





누란 - 10점
현기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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