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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편

시비(是非)는 가려야

by 허정도 2009. 11. 28.


시비(是非)를 던지다
제목이 좋았습니다.

양시(兩是), 양비(兩非)가 아니라, 옳고 그름(是非)을 따져본다는 의미의 제목이 좋았습니다.
저자는 한문학자 강명관 교수입니다. 젊었을 때는 민주화니 운동권이니 하며 한 가닥 했던 분인 듯했습니다.

서너 페이지가 한 꼭지로 된 조선시대생활풍속사를 엮은 책입니다.
글이 참 맛깔스러웠습니다.
조선시대의 이야기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삶과 연관시킨 점이 좋았습니다.

중앙의 지방 차별, 거짓과 허위, 허망한 권력, 모순된 착취구조, 왜곡된 역사 등 지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난마들이 줄줄이 엮여 나옵니다.
머릿속에는 있었지만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들을 낱낱이 밝혀낸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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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대한 차별의식은 어느새 지방 사람인 나의 언어와 심성에까지 들어와 있다.
지방대학은 별 볼 일 없는 이류대학이란 말이요,
“지방방송 꺼라”는 말은 부질 없는 소리 하지 말란 말이요.
지방기업이란 보잘 것 없는 기업이란 것이다.
‘지방’은 모든 이류이고 보잘 것 없고 무시해도 좋을 것들의 대명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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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지도에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부산, 울산이 있지만, 그건 지도상에만 있을 뿐이고, 실제로는 없다.
실제로 있는 것은 서울과 지방 뿐이고, 그 지방은 서울의 ‘식민지’일 뿐이다.
인재를 빼앗기고, 돈을 갖다 바치고, 서울의 물건과 문화를 소비하는 서울의 식민지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식민지 백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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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식에 대한 이야기도 통렬했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며 흠모해 마지않는 광개토대왕에 대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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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에 즉위하여 39세에 사망한 그가 20여 년간 한 일은 오직 전쟁이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힌 것이 그의 업적인 것이다.
그 영토는 비문에 나와 있다.
‘공격해서 격파한 성이 64개였고, 마을이 1천 4백 개’였다.
이 외에 다른 업적이랄 것은 없다.
비문을 읽지 않아도 우리는 국사교육을 통해 그가 ‘널리 땅을 확장한(廣開土)’ 왕이었음을 익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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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지 않은가.
왜 고구려는,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영토로만 기억 것인가.
기나긴 시간 동안 수많은 인간이 살았던 고구려 사회가 왜 국토의 넓이로만 기억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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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식민지를 경험했으되, 제국주의적 욕방을 근원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도리어 제국주의적 영토욕을 내면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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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영토가 넓었다는 것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질타하는 이 부분에서는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바로 내가 그렇거든요.

공부라면 단 한 번도 남에게 뒤떨어본 적이 없는 친구.
최고에 최고의
학교를 거친 그 친구가 우리 학계의 좁고 왜곡된 벽을 넘지 못해 50이 넘은 지금도 대학 강사 신세를 못 벗어난 이야기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가짜와 위조를 싫어하지만, 졸업장이라는 종잇조각이 없으면 이 사회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사회구조는 더더욱 가증스럽다는 부분에서는 분이 끓었습니다.

대중을 선동해 관리의 잘못을 따지고 들었던 불평 많은 이계심을 두고 오히려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 역설한 다산의 모습을 읽을 때는 그가 우리 조상 중 한 분이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는 게 시비(是非)가리는 것일 터.
건강한 사회는 시비가 정확하게 가려져야 하는 법.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친일인명사전’과 ‘친북인명사전’을 둘러 싼 싸움과 싸움이 시비를 가리기 보다는 양시(兩是) 양비(兩非)에 익숙함을 잘 말해줍니다.

시비 가리지 못하게 하는 사회, 정상적인가?
시비 가리자는 사람더러 ‘골치 아픈 사람’ ‘말 많은 사람’ 한 걸음 더 나가 ‘반대만하는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사회, 정상인가?
윗사람에 그저 순종하고 힘에 굴종하고 제 목소리는 죽여야만 ‘된 사람’으로 칭찬 받는 사회, 정상인가?
이런 사회 정상인가, 망쫀가?

강명관 교수가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