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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편

꿈의 도시

by 허정도 2011. 1. 5.

신년 연휴에 재미있는 책을 한권 읽었습니다.
『공중그네』로 유명한 일본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장편소설『꿈의 도시』였습니다.



한겨레신문 신간소개 란에
‘쇠락해가는 세 도시를 통합해 탄생한 도시「유메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라는 투의 기사 때문에 읽게 되었습니다.
저의 관심은 ‘세 도시 통합’이었습니다만 제 의도와 달리 아쉽게도 '세 도시 통합'은 이 책의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메노」는 인구 3-4만의 작은 군 세 개를 합쳐 시(市)로 만들면서 희망찬 꿈을 안고 탄생한 도시입니다만 희망은커녕 절망만 남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통합 전에는 이웃 간의 작은 정이라도 오갔지만 도시가 조금 커지자 그 정마저 어제 일이 되었습니다.

대형쇼핑센터에 밀려 셔터를 내려버린 도시의 상점가,
대도시로 떠났거나 떠날 기회만 엿보는 젊은이들,
공익은 아랑곳없고 사욕에만 눈 밝히는 지역 정치가,
높은 이혼율,
젊은 주부들의 원조교제 매춘,
정부 생활보조비에 기대어 사는 멀쩡한 사람들,
현실을 도피하고 내세를 쫓는 광신자들.

「유메노」는 이런 상황들이 뒤섞인 암울한 도시였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아내는 여러 차례,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힘들어”
“일본사회도 희망이 없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 뭐....” 라며 혀를 찼습니다.

이 책에는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부당한 생활보호비 수급자를 찾아내다 원조교제의 늪에 빠진 공무원,
도쿄의 대학생활을 꿈꾸다 사이코패스에게 납치되어 사육당하는 여고생,
노인들을 대상으로 사기 세일즈를 하는 전직 폭주족,
식품매장의 좀 도독 잡는 일을 하며 사이비종교에 빠진 사십대 후반 이혼녀,
오직 돈과 권력만 쫓아가다 패가망신하는 시의원이 그들입니다.

이들의 일상을 통해,
빠찡코, 인터넷 게임, 유부녀 매춘, 사이비종교, 노인 사기판매, 부패한 정치인, 대도시만 바라보는 청소년, 외국인 저임금노동자, 폭력 등 일본사회의 어두운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원작 제목이 『무리(無理)』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집중화된 자본에 의해 몰락해가는 지방경제의 실상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대형쇼핑센터의 문제점도 지적합니다.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고, 주차비도 받지 않고, 물건 값도 싸고, 원스톱으로 먹고 사고 놀기까지 할 수 있는 대형쇼핑센터가 바로 우리 도시를 무너뜨리는 주범이라고 말입니다.

지방도시를 소재로 일본사회의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었지만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아 책을 읽는 내내 찜찜했습니다.
작가의 눈에 보인 일본지방도시의 현실은 이 땅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우리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작가 ‘오쿠다 히데오’가 이 책을 내면서 한 말입니다.
“지방에 가면 똑같은 풍경을 본다. 시장경제가 널리 퍼져 지방은 붕괴됐다는 생각이 든다. 대기업에 휘둘려 특색이란 게 없어져버렸다. 일본은 이제야 시장 경제에서 떨어져나간 약자들이 사회문제로 되고 있다.”

한국사회에 적용해도 어디 한군데 수정할 곳이 없는 말입니다.

630쪽의 두꺼운 책이었지만 책장이 잘 넘어갔습니다.
이야기의 속도도 빨랐고, 작가 특유의 재기 넘치는 표현에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꼭지 바뀔 때 좀 쉬고 싶었지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아내의 성화에 느긋이 끊어 읽지도 못했습니다.

압권은 자동차연쇄충돌사고로 마무리되는 충격적인 라스트 신(Last scene)이었습니다.
유메노」를 황폐화시킨 주범 ‘드림타운’ 앞 거리에서, 숨길 것도 숨길 곳도 없이 폭발해버린 라스트 신이 마치 깜깜한 골방의 문 틈새를 찌르는 한줄기 강렬한 빛처럼 짜릿했습니다.<<<

    <원작『무리(無理)』의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