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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90. 국농소의 소작권 쟁의

by 허정도 2016. 5. 2.

90. 국농소(國農沼)의 소작권 쟁의

 

밀양군 하남면 수산리 소재 국농소(國農沼) 전답 수백 두락을 둘러싸고 한일 반동분자와 소작인 간에 불씨가 튀는 쟁의가 벌어진 일이 있었다.

 

국농소(國農沼, 옮긴 이 / 송산서원 카페에서 인용)

수산(守山)의 국농소(國農所)는 조선시대 초기의 수산국둔전(守山國屯田)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조 후기에는 수산지(守山池) 또는 국농호(國農湖)라 불렀으며 그 제언(堤堰=물을 가두어놓기 위한 둑)을 수산제 혹은 대제(大堤)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지형이 모두 바뀌고 비옥한 수전 경작지로 화하여 당초의 경역(境域)을 분간하기 곤란하나 하남읍 수산리와 초동면 김포리(金浦里) 사이의 광활한 들판을 아직도 국농호 또는 궁노수라 부르고 있으며 댓섬(竹島), 자라목(鼈山) 등의 유적도 남아 있다.

국농소(國農沼)의 위치

 

이 사건이 법적 문제가 되어 원고(소작인)의 법정 대리인 서기홍, 피고(이덕이)의 법정 대리인 박지영, 중촌 모()란 일인 변호사, 그리고 주심판사 석촌(石村) 지청장으로 선정, 부산지법류산지청()에서 1927년부터 동 30년까지 격쟁(擊錚)했다.

이때 지주는 경성부 관훈동 민병석(閔丙奭), 자작(子爵) 사음(舍音) 차해성(車海星)이었으며 토착 소작인들은 소작권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당당한 연고자들이었고, 피고 이덕이는 일본에서 상애회(相愛會) 박춘금의 최말단 깡패로서 일자 무식꾼인데,

 

<상애회(相愛會) / 옮긴 이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20 일본 동경(東京)에서 조직된 친일 단체로 박춘금(朴春琴)이 만들었으며, 이기동(李起東)이 총본부 회장을 맡았다. 3·1운동을 전후해 일본으로 노동 인구가 물밀듯이 몰려들자, 그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단속할 목적으로 일본 정부 및 총독부가 사주하여 조직한 노동 단체이다. 일본 각지에 지부를 결성하여 한때 회원수가 10수만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 작자가 수십 년 동안 일본에서 깡패 생활을 하는 동안에 축재한 돈을 가지고 고향인 수산(守山)으로 돌아왔으나 농촌에서 할 일은 없고 이때 옥답 수백 정보가 되는 국농소(國農沼)에 대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즉 국농소에 대하여 적당히 교섭하면 이의 소작권을 받을 수 있다는 풍문을 듣고 이것을 탈취코자 암암리에 사음(舍音) 차해성(車海星)과 공작을 하는 일방, 순진한 소작인들에게는 경찰의 권력을 발판으로 하여 노골적인 위협도 사양치 않았으나,

소작인들도 그에 못지않게 한 덩어리가 되어 은산(수산) 농민조합(위원장 이종하)에서도 조선 농민총동맹(대표 안준)을 비롯하여 각 지방 사회단체에 격문을 발송하는 등 이덕이 파와 대항하기 위하여 포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것을 봉쇄코자 이덕이는 직계 낭당(郞黨)은 물론 부산 방면에 우글거리는 깡패들을 동원한다는 소문을 냄으로써 수산의 거리는 살벌한 분위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때가 본답(本畓) 이앙시기인 6월을 기하여 소작인 측을 지원하고자 인접 밀양, 함안, 김해, 양산, 마산 등지에서 좌경 청년 4,50명이 속속 운집하여 동네는 일촉 즉발의 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각처에서 모여든 청년들은 정수(精粹)분자들로서 담력이나 완력에 있어서 자신을 과시, 양양한 의기는 자못 충천하였다.

짧은 여름밤은 밝았다.

적군은 수리(水利) 제방에, 반군은 회전장(會戰場)인 소답(沼畓) 언덕에 진을 치고 자웅을 결판코자 대치하고 있을 때 별안간 이덕이의 직계 부하 5,6명이 이종하를 포위 피차 격투가 벌어지고, 한편에서 단도를 가진 부산 깡패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자가 있자, 용감무쌍한 좌경 청년들은 재빨리 패주하고 충돌한 현장에는 마산의 김모(金某)만이 분전하였을 뿐이었다.

돌이켜 보건데 이 사건이 발생되도록 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지주의 불분명한 태도와 사음(舍音) 차해성(車海星)이 쌍방에 두 다리를 걸친 탓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겠다.

국농소 사건의 후일담으로 수년 전 부산일보의 르포 연재물에는 이덕이를 지방의 지도자로 치켜 올려 세우면서 소작쟁의에 분전한 사람은 깡패 두목이라고 기자 멋대로 보도하였다.

재판 결과 원고의 패소, 승소한 이덕이는 농지개혁 때까지 지주로 뻐기었으나 지금은 원수도 요우우(僚又友)도 살과 같이 흘러가는 세파에는 하는 수 없이 모두가 한줌 흙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상 쟁의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된 사람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李執中(이집중, ), 박남용(), 朴濟(박제, ), 김형윤(編者註·著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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