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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91. 제등만의 참사

by 허정도 2016. 5. 9.

91. 제등만(齊藤灣)의 참사

 

진해 해군통제부 앞 부두 있는 곳을 일인들은 제등만(齊藤灣)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경성에 죽첨(竹添) 일본공사가 있던 곳을 죽첨정(竹添町), 장곡천정(長谷川町), 마산의 까치나루(작진, 鵲津 - 지금 발전소 있는 곳 / 현 남부터미널)를 일본 귀족원의장 근위(近衛)가 상유(賞遊)한 곳이므로 일인들은 하마(近衛濱)라 한 것과 마찬가지로

원조선총독(元朝鮮總督) 제등 실(齊藤 實)이 과거 진해 요항부(要港部) 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을 인연해서 제등만(齊藤灣)이라 명명한 것이다.

대한민국 수립 후로 일반 민간선박은 일체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나 그 당시에는 통제부 앞 솔섬 사이와 날부리(비봉, 飛鳳) 현동으로 작은 배들은 관통하였다.

 

<아래 지도는 1945년 미군에서 발행한 것인데, 제등만이라고 적혀있다. 지금은 매립되어 만이 깊지는 않지만 아직도 이곳을 제등만이라 부르는 사람이 많다>

 

1928년 창원-진해선 철도(일본 千葉공병대 병사들에 의해 완공)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412일 벚꽃 시기를 점쳐서 진해읍 주체로 공진회(共進會)를 개최하고, 철도 당국은 이날 하루만은 손님들에게 무임승차로써 봉사하게 되었다.

원근 주민들이 떼를 지어 진해로 몰려들었으며 먼 곳은 진주에서, 통영, 고성 방면 주민들로, 떠 마산만을 완상(玩賞)코자 하는 사람은 기차보다 배를 이용하는 수가 폭주하여 진해를 왕래하는 배는 초만원이었다.

이날 천신호회조점(天神號廻漕店)은 제1부터 제3호까지의 발동선은 다른 항로는 결항하고 진해에만 총집중케하였다. 물론 타 회사와 유객(誘客) 경쟁도 여간이 아니었다.

마침 정오 조금 전에 제3 천신병환(天神並丸)은 정원의 수배를 싣고 출항했는데, 이 배를 탄 사람들 중에는 자기 배가 먼저 가는 것이 기뻐 춤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이 기뻐하고 춤추던 것이 불과 한 시간 뒤에 커다란 악마에게 휩쓸릴 줄은 신이 아닌 그들이 꿈엔들 어찌 알았으랴!

3 천신환(天神丸)이 해군부두에 접안 준비로 로프를 격류봉(擊留棒)에 던지고 있을 때 승객들은 서로가 먼저 상륙하려고 덤볐다.

배의 좌우현으로 돌며 무질서하게 서로가 찧고 까불고 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접안되는 쪽으로 몰렸다. 배는 중력을 잃고 일시에 기울어지면서 승객들을 모조리 바다로 쏟아버렸다.

이날 수병들은 만일에 대비해서 있었지마는 너무나 돌발적이라 다소의 시차는 있었으나 구조 작업은 신속했다.

결국 이 날 부녀자 25명만은 불행하게도 불귀의 객이 되어 시체로 인양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소녀 3명과 진주 강모라는 부호 부인과 가족 2명 일가 3, 그리고 고향에서 며칠 후면 화혼을 올릴 마산시내 사탕 도매상의 장녀 24세의 하야(河野) 모 양도 있었다.

이때만 해도 지방 기자들의 센스도 둔하여서 시체 구경만 하는 기자도 있었는가 하면, 조선일보 마산주재 기자 같은 사람은 다중이 모이면 사건이 날 것이라는 선입관 때문인지 전보 패스를 소지하였던 덕으로 즉각 기사 송고를 했다.

조선일보 본사에서는 사건 당일 석간 발행 전 장문의 호외를 발행하였다.

경쟁지인 동아일보를 압도하였으므로 적체지대(積滯紙代)를 도무 상쇄해 주는 은전을 입은 일도 기억에 새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