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5
그러면 다른 말은 잠간(暫間, '잠깐'의 비표준어) 차정(次頂)에 미루어두기로 하고 정부에서는 무수한 순국열사에게 무엇으로 보답하였으며 무엇을 하려고 구상하고 있는가?
또 누구의 은덕으로 대한민국의 자모(慈母) 품안에서 평안히 행복 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를 한번이라도 돌이켜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현재 국가의 요직에 안如히 있는 자(者) 중에 진심으로 민족 전체의 이해(利害) 휴척(休戚,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일)을 염두에 두고 적성(赤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 국가를 걱정해본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는가?
8.15가 지난 기년(幾年, 몇 해) 후 정부에서는 각도(各道)를 통하여 애국자 병기(並其) 유가족의 업적을 조사 보고토록 행정 최말초(最末梢) 기관에 명하고 해(該)보고서에 준하여 각도(各道)에서 애국한 행로의 경중을 개량하는 소위 심사(?)회에 소위 ‘엄정’한 심의를 행한 것은 아주(원문에는 ‘아즉’) 가까운 사실이었다.
이러한 행사는 주권을 갖는 민족으로서는 매우 신선(新鮮)한 일이요 한 개의 생생한 교육이 아닐 수 없었든 것이다.
연(然)이나 소위 ‘엄정심의(嚴正審議)’라는 상자 속에는 진정한 애국열사의 혼이 구름이냐? 바람이냐? 혹은 유령이냐? 영자(影子, 불투명한 물체가 빛을 가려 나타나는 검은 형상)와도 같이 다시 사회에서 사라져버린 것은 말단기관의 실책인가? 체송(遞送) 중 도난인가? 당국의 사무적 착잡(錯雜,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뒤섞여 어수선함)의 과오이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심의해볼 일분의 가치가 없었더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애국한 비중이라든지 순국한 열사의 업적이 저울에 달아본 결과 보천하(普天下, 만천하)에 높이 선양할 공적은 크지마는 그들은 배경이 없고 사회에 두각이 나타난 인물이 없는 것을 따져서 심의하는 인물의 수지계산이 맞지 않다는 말 외 적중될 이유가 없지 않다고 본다.
심의 당사자가 여기에 항의할지 모르나 사실은 어디까지나 비인(非認)하지 못할 것이니 한 번 사리를 역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실례(實例)를 들면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교재 선생에 대해서 심의 담당자이든 도당국은 무슨 변명할 자료가 있거든 번듯하게 제시해 보아라.
독립열사를 표창한데 이의할 국민은 아마 한사람도 없을 것이고 쌍수를 들어서 환영하며 갈채를 아끼지 않을 것이나 그들 피표창자 중에 전부가 3·1정신과 그의 꿋꿋한 절개를 가졌던 자 몇 사람이나 있었는가를 엄밀하게 분석해 보았는가?
이 점이 매우 불쾌한 불순선(不純線)을 발견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설사 변절은 하였을지라도 제법 출세나 하고 세도깨나 있는 부류는 일약(一躍) 지사에 급재하고 이것도 저것도 없는 사람은 흙이나 재(灰) 속에 묻어버리고만 셈이라고 민족정기로 보아서 호령(號令)할 것이 아니냐?
당시 이규재 선생과 황교에서 전사한 팔열사의 전사(戰史)를 진전면장 박열주 씨가 보고(報告) 상신(上申)하였음에도 돌보지 않고 도에서 ‘넉아웃’을 하였음에 박 씨가 수(數) 이차(二次) 상도(上道)하여 역설한바 있었으나 그때의 양(梁) 경남지사는 코대답 정도로서 회피하여 오늘까지 묵살한 심정은 아무리보아도 선의(善意) 해석할 수 없는 일이다.
위정자가 이 모양이니 무의식한 백성이야 마음이 있은들 어찌 하리요.
이러한 일에도 일반 대(對) 위정자 간에 틈이 생기게 되니 책임은 누가 져야 될지 모르나 본래가 민중운동이라는 것은 민중 그 자신이 해결할 생각(원문은 ‘生意’)도 못하고 어(於) 천만사(千萬事)가 총망(悤忙, 매우 급하고 바쁨)한 위정자에게 의뢰하는 데에 우매(愚昧)한 민중의 비애가 생(生)하는 것을 더욱 계몽(啓蒙)하고 싶다.
어쨌든 지면이 용인(원문에는 ‘容入’)하는 대로 차항(次項)에 계속하기로 하거니와 금반(今般) 민간인 유지 제씨(諸氏)가 착안한 삼진지구의 선열제공(先烈諸公)의 기념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 성과 있기를 크게 기대되는 바이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형윤의 <삼진기행> 7 / 1954년 4월 21일 (수) (0) | 2019.12.02 |
---|---|
김형윤의 <삼진기행> 6 / 1954년 4월 20일 (화) (0) | 2019.11.25 |
김형윤의 <삼진기행> 4 / 1954년 4월 17일 (토) (0) | 2019.11.11 |
김형윤의 <삼진기행> 3 / 1954년 4월 16일 (금) (0) | 2019.11.04 |
김형윤의 <삼진기행> 2 / 1954년 4월 15일 (목) (0) | 2019.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