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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김형윤의 <삼진기행> 4 / 1954년 4월 17일 (토)

by 운무허정도 2019. 11. 11.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4

 

이야기는 본선(本線)에서 조금 지났지만은 이교재 선생을 검거한 이만갑이라는 자(者)는 어떠한 자인가를 말 안할 수 없다.

기자(김형윤 선생 자신)와 이만갑은 (지금은 일반의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마산 간이농업학교 동기동창이며 재학 중에 성질이 못된 자로써 장성(長成)한 뒤 그의 의부(義父)?되는 황용석(이 자는 기자보다 1년 선배로 졸업 후 헌병보조원으로 또 그 후 고등계로 전환하여 자살직전까지 관부열락선 상무형사로 기자가 일본 경도에서 추방 귀국 시 미행한 자)의 소개로 순사에 응시하여,

독립운동자 체포에 날 완(腕, 솜씨)을 뽐내어서 그때 유명한 상해의열단 김시현 일파 검거에 실패된 벌(罰)로 경부도 못되고 순사부장으로 진주 밀양 마산 등 경찰서로 전전하여 상당수의 애국자를 검거투옥한 자이며,

고문으로 1920년경 마산서의 조선인 고등계 주임 김 경부(警部)라는 자의 백중(伯仲)을 다투든 자며, 일설에는 친모를 XXX취체(取締)로 구류(拘留)시킨 전무후무한 모범경관이며, 그 의부 황용석을 구타까지 범한 자

피차(彼此) 장성(長成)이라 나는 사회주의자로 그는 형사로서 갈 길은 확연하였지만은 내가 일인 구타 사건 시에는 이만갑은 나의 직접취조자-생각하면 기이하기도 한 이야기다.

이만하면 그자의 위인(爲人, 사람 됨됨이)은 알 수 있는 일이다.

8·15이후 흐지부지한 반민특위의 수배를 받았으나 바보 같은 [특위] 어릿광대 놀음에 탈면(脫免)과 함께 고비원주(高飛遠走, 종적을 감추려고 멀리 달아나다)하고만 자이다.

생각하면 삼진지방은 공자도 나고 도척이도 난 모양이다. 한화휴제(閑話休題) 이교재 선생을 투옥한 후 일경은 선생을 고초를 주어 범죄를 추가하고 선생의 애처되는 홍씨까지 구속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는 일방 초가지붕은 물론 온돌과 부엌까지 샅샅이 수색하였으나 쥐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특기하여 만천하에 소개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선생이 받았던 상해임정의 밀영서이다.

보통 심약한 인간 같으면 남편이 그 지경이요 자신이 피해를 입고 있는 이 불안하고도 가정이 망할 커다란 화근은 벌써 불살라버릴 것이지만은 선생의 미망인은 아무리 일본이 욱일승천의 세를 가지고 있지만은 석양이 닥칠 때는 반드시 오리라는 장한 뜻과 굳은 신념으로 이 불안한 지령서를 굴뚝 속이 아니면 밧줄에 묶어서 우물 속에 어떠한 때에는 부녀자의 월경대로서 일각일분(一刻一分)도 머릿속에 떠난 일 없이 심적 고통을 겪어오던 피눈물이 쏟아질 과거!

반드시 닥쳐올 조국독립의 강철 같은 신념 앞에 모든 사(邪)된 권력과 부귀가 어디 있으리오?

그러나 중생을 위하는 순도자의 가는 길은 언제나 박해가 따라다니는 모양으로 선생일거 후 기다(幾多)의 애국가는 변절하고 혹은 적진에 투항(投降)하고 주민과 친우는 자기 신변을 겁내어 접근하기 꺼려하여 설상가상으로 고리변업자(高利邊業者)는 맹호같이 달려들었으니 차귀(借鬼)는 선생의 문전에 낙역부절(絡繹不絶)되는 형편이라

그렇지 않아도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가 일시에 파산되어 적빈여세(赤貧如洗) 그대로 조석의 끼니까지 막연한 내락(奈落)에 빠지고 있었으나 그때는 일본의 악정이 있어 그렇다고 하고 자기의 생명을 조국에 바친 종적도 없이 8·15 해방된 후에는 선생의 집안에 누가 한번 따뜻이 찾아 주었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생에게 전달한 위임장. 이 위임장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 대표로 인정하여 ‘애국지사 연락에 관한 일,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적 지방조직을 행할 일’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