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웠던 그날 저녁
지난 9월 19일 옛 서울 역 건물에서 열린 ‘대한민국 건축문화제’에 갔다가 역 광장에서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의사 동상을 처음 보았다.
세운지 오래되었겠지만 서울 갈 일이 자주 없는 나는 처음이었다.
마침 시간이 여유로워 천천히 동상을 감상한 뒤 설명문까지 차분히 읽었다.
기단부에 새겨진 설명문 사진이다.
기록문 중 생년(1859년)은 오기로 보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등 관련자료 다수에서는 18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로 잡아야할 일이다.
마침 외국인 여러 명이 동상 주변으로 와 ‘이게 누구 동상이지?’라는 표정으로 동상과 아래 설명문을 살폈다. 하지만 동상에는 한글 외에 아무 설명도 없었다.
실망하고 돌아서는 그들에게 미안했다. 외국어 설명문도 필요하다.
이 포스팅은 그날 이후 든 생각이다.
1855년생 강우규 의사께서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졌던 것은 1919년 9월 2일, 선생의 나이 65세 때였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60년 국민 평균 연령이 남자 52.1살, 여자 54.7살이었다.
그렇게 볼 때, 1919년 65살은 지금의 8~90과 다르지 않은 나이다.
1909년 안중근 의사 이등박문 저격 뒤부터 일경의 요인 경호가 심했지만, 강 의사께서 총독 사이토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워낙 연세드신 어르신이라 일경이 눈여겨 보지 않았서였다. 당시 65살은 그 정도였다.
그 연세에 적의 수괴를 치기 위해 폭탄을 던지다니,,
재산도 많았다는데 모두 조국의 독립과 민족교육을 위해 바치고, 나라가 망하자 만주와 러시아 벌판에서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위해 힘을 다했고, 이윽고 남은 몸까지 민족을 위해 던진 선생,,
재판에서도 "총독을 처단하고자 한 것은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기록된 강우규 의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선생의 마지막(사형)은 서대문형무소였다.
1920년 11월 29일 오전 10시 30분, 만주에서 온 장남 중건이 마련해 준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떠났다.
한많았던 생을 끝내며 시를 남겼다. 이른바 사세시(辭世詩), 남은 동족들에게 밝힌 선생의 심경이다.
사세시(辭世詩)
斷頭臺上 猶在春風 (단두대상 유재춘풍) / 단두대에 올라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有身無國 豈無感想 (유신무국 기무감상) / 몸은 있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선생의 그 치열했던 삶을 생각하니 목구멍 저 아래서 뭐가 올컥 치밀어 올랐다.
꼭 필요했던 일이지만 나이 탓하며 피한 적이 더러 있었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만큼 강우규 선생의 기개가 더 높게 느껴진다.
그것은 안일을 위한 핑계였을 뿐이라는 깨우침을 선생께서 주셨다.
2019년 9월 19일 그날 저녁,
선생께서 폭탄을 든지 100년 되는 그날 그 저녁, 그 부끄러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관련된 이야기>
왈우 선생 의거 두 달이 지난 1919년 11월, 상해 임시정부 외교위원장 직함으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일본 동경을 방문했다.
이 때 일본 정부가 마련한 환영행사에서 몽양이 당당하게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한 것은 널리 잘 알려진 일이다.
방문기간 동안 몽양은 일본의 정치가와 고급관료들을 만났는데, 이 중에는 미즈노 렌타로(水野 錬太郎, 1868~1949) 내무대신도 있었다.
미즈노 렌타로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문부대신 역임한 일본의 정치가인데, 강우규 의사 폭탄 투척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현직 일본 내무대신이었다.
여운형이 그를 만나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여운형 선생이 미즈노 렌타로에게 인사차 악수하면서 “경성 역에서 강우규의 폭탄에 얼마나 무서웠느냐”고 짓궂게 물었다.
그러자 미즈노가 얼굴이 시뻘게지고 고개를 어디로 돌릴지 몰라 당황하며 몸을 떨었다고 한다.
그날 강우규 의사 폭탄이 그만큼 무서웠다는 이야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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