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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삼진기행> 1 / 1954년 4월 14일 (수)

by 운무허정도 2019. 10. 21.

오늘부터의 포스팅은 창원지역에서 평생 언론인으로 살다간 목발(目拔) 김형윤(金亨潤) 선생이 남긴 기행문이다.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실렸고, 기고자는 본명 대신 ‘H 생’이라 되어 있다. 제목은 「삼진기행」이며 1954년 4월 14일부터 23일까지 9회 실렸다.

당시 마산일보 사장이었던 김형윤 선생이 15명의 벗들과 함께 1933년 순국한 독립지사 '죽헌 이교재 선생'의 유족을 찾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을 찾았던 기록이다.

 

<죽헌 이교재 선생>

 

이 글의 가치는 이교재 선생과 유족에 대한 내용과 함께,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당시의 삼진지역(진동, 진전, 진북)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다.

김형윤 선생의 기고문에 맞추어 모두 9회에 걸쳐 포스팅할 예정이다. 원문 그대로 옮기지만 일부 고문(古文)은 읽기 편하게 고쳐 쓰고, 설명이 필요한 경우 푸른 글로 첨가한다.

 

먼저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수록된 김형윤 선생(아래 우측 사진)을 소개한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에서 태어난 김형윤(金亨潤, 1903~1973)은 1915년 마산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21년 귀국하여 창원 산업 조합에서 근무했다.

1923년 조선일보 마산 지국 기자 생활을 시작으로 『남선 신문』, 『동아 일보』에서도 활동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아나키즘에 몰두하여 무정부 활동에 가담했으며, 1945년 12월 신탁 통치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종로 경찰서에 구금되어 1947년 봄에 석방되었다.

1947년 『남선 신문』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1948년 제호를 변경한 남조선 일보 사장 대리가 되었다. 1950년 『남조선 일보』를 『마산 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여 1966년 사직 때까지 편집과 경영 전반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73년 12월 5일 유작으로 『마산 야화(馬山野話)』가 발간되었고, 1974년 8월 18일에 마산 산호 공원에 불망비가 건립되었다.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1

4월 10일 천랑기청(天朗氣淸)한 오후 2시 반, 기자는 3·1 독립운동 시 순국하신 이교재 선생의 묘소 전배차 일행 15명과 더불어 자동차 다섯 대로 분승하고 마산일보 정문을 출발, 일로 창원군 진전 방면으로 향발하였다.

이번 전배하는 일행에는 과거 일정 시 변절 혹은 매절한 분자를 제외한 것이 마음 가운데 통쾌함을 금치 못한 것이다.

우산(牛山) 고개를 넘어 예곡을 거쳐 통칭 옛날 군도(群盜)가 출몰하던 ‘동전이 재’까지 가는 도중에는 농민 부역군들이 도로개수공사에 여념이 없어 우리 일행을 흔히 보는 시찰이나 유람객으로 아는 모양인 듯 본체만체 차 지난 뒤 사진(沙塵, 모래먼지) 속에서 꾸준히 일들만 하고 있다.

이윽고 진동읍내를 일관하여 서(西)로 달리는데 눈에 뜨이는 것은 6·25사변 당시 소개(疏開) 후 파괴되었던 집들이 모두 다 개축되어 각기 영세한 생을 개탁하여 조선(祖先)의 뼈 묻힌 고장에 깊이 뿌리를 박고 지상의 낙도로 삼고 있는 것은 무한히 아름다운 광경이다.

도로 우측 평야 저 편에 깎은 듯이 직하(直下)된 험한 산이 즉 사변 당시 적과 격전한 각드미산(여항산, 갓데미산)이라 한다.

만약에 적군이 침공하였을 때 이 산이 없었더라면 마산은 병풍 무학산도 존재의 가치를 보전하였을까 아닐까가 의심날 일이다.

적들의 중요한 거점인 이 각드미산이야말로 적들의 최후 운명을 결정한 방채선(防砦線)으로서 길이 기념하여야 할 곳이다.

구치사방 산정수정(驅馳四方 山程水程, 산길 물길 할 것 없이 사방으로 떠돌아 다님)식 19세기의 나그네가 아니니 한가히 고개로 이리저리 돌려볼 수 없을 터인데 삼진 방면을 소개하시던 마산서중 이기재 선생의 선도로 일행은 진전면 입구에서 일시 정지하였다.

장소는 다르지마는 노변석벽(路邊石壁)에는 3.1의거 시 동면(同面) 황교 교반에 공봉(棒)과 적권(赤拳)으로 무장한 왜적의 폭재(暴材)하는 진중으로 돌격하다 장렬한 호국의 신(神)으로 순한 김수동(원문에는 김동수로 되어 있음) 이기봉 씨 외 6선열의 창의비(진북면 지산리에 있는 팔의사 창의탑. 지금은 인근에 이전) 앞에서 잠시 묵례를 드리고 다시 황교의 고전장(古戰場)을 거쳐 목적하였던 이교재 선생의 유족이 계시는 봉곡리 도산부락에 도착한 것이 세 시를 훨씬 지나 30분 경이었다.

이 부락도 역시 적색분자가 침투할 것이라는 추측 아래 소개 명령을 받고난 뒤 연합군의 폭격례를 받고 전 부락 50여 호가 소실되었던 곳으로 가옥이야 태어난 팔자대로 일간 모 옥(屋)으로 신축하여 쓰라린 기억도 잊은 듯이 생기발랄한 것을 볼 때 파탄에 빠진 현재 농촌에도 언제나 영원한 봄 서광이 비쳐 오리라는 희망을 던져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 우리가 경(敬)공히 찾아뵈올 이교재 선생 유족의 가정과 생계는 어떠한가? 일행은 마음 초급히(焦急-, 시간 여유 없이 아주 급하게) 이(李) 선열 미망인의 주택을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