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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by 허정도 2011. 5. 23.

<개항 종료와 신마산의 정체>



         <1910년대 신마산 전경입니다.
           마산을 소개하는 그림엽서 두장을 연결했으며 사진 속 선착장은 노란표식점에 있었습니다>


1910년대의 마산은 1911년 1월 1일을 기해 진해군항을 일제의 해군요새로 보호한다는 구실로 마산항을 폐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합방 일주일 후인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발표한「일한병합에 관한 선언」제4호에서 「종래의 개항장은 마산포를 제외하고는 종전대로 이를 개항으로 하며 다시 신의주도 개항에 추가하여 내외선박의 출입 및 이에 의한 화물의 수출입을 허한다」함으로써 마산의 개항은 종료되었습니다.

이로써 마산개항의 역사는 11년 8개월 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합방이후 사실상 형식적으로만 남아있던 각국공동조계지도 해제되고(1914. 3. 31) 마산부(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등 제도적으로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개항이 종료되어 마산항이 대외적으로는 폐쇄되었으나 일제가 필요로 하는 외항선에 대해서는 세관장의 특별허가로 출입항을 허용하였습니다. 때문에 식민지 경제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찾아드는 일본 선박은 개항기와 달라진 것이 없었고 오히려 늘었습니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의 도시변화특징은 '신마산의 정체기'입니다.
개항기 동안 급속하게 형성되었던 신마산의 변화가 갑자기 답보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정체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변화가 적었습니다.
인구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로도 개설되지 않았고 개항기에 비해 건물도 많이 짓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이런 상황은 개항기의 급격한 확장과 성장을 겪은 이후였기 때문에 도시 정체에 대한 체감효과는 더욱 심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정체(停滯)는 신마산 지역에 국한되었을 뿐, 마산포(원마산)에는 대규모 매립이 시작되고 폭 8m의 근대식 도로가 개설되는 등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에 포스팅하겠습니다.

오늘은 1910년대 전후기, 일본인이 펴낸 두 권의 책에 나오는 마산관련 글을 소개합니다.
내용을 재구성할 수도 있지만 원본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겠다 싶어서 번역만 하여 그대로 올립니다.
일본인에 의해 작성된 자료이기 때문에 조사와 비교의 대상, 그리고 상황을 바라보는 입장과 관점에 일정한 편견이나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이 펴낸 책이나 한국인에 의해 직접 만들어진 자료 중 사용할만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찾은 것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남궁준의『新朝鮮全誌 (唯一書館, 1913)』였습니다만 마산에 대한 부분이 너무 짧고 평범하여 인용할만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朝鮮誌』, 吉田英三郞, 1911년, p.587, 町田文林堂 

마산부(府)
․․․․시가(市街)는 신마산과 구마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순수한 일본풍으로서 가로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고 모든 관아 및 일본인은 대부분 이곳에 있다.

구마산도 지금은 거의 신마산과 인가가 연접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이 잡거하면서 거리의 외관은 신마산에 필적하면서 항구의 주변은 번성하여 매월 5일되는 날을 기해 시장을 열고 상업이 매우 활발하다.

산업은 상업을 주로하며 그 다음이 어업이다. 공업은 아직 초보적 단계이며 정미업․비누․금물․기와제조․술․양조 등이다.

일본인이 1,656호에 인구가 6,310명이고 조선인이 1,570호에 7,100여명 거주한다.

주요 산물은 쌀․콩․우피․연초․목죽세공․어류․수산제조물 등이고 부청․진해만사령부방비대․지방재판소․구(區)재판소․헌병분대․경찰서․우편국․감옥분감․소학교․공립보통학교․지방금융조합․세관감시서․조선해수산조합지부․기타회사조합 등이 있고 구마산 및 신마산에 정거장이 있다.

『最新朝鮮地誌(中)』, 1918, pp.19-22, 朝鮮及滿洲社出版部

(1) 교통운수(交通運輸)
마산에는 외국으로 통하는 선박은 없지만 일본과의 항로는 대판상선회사의 대판-인천 간 정기선이 매월 4회 기항하고 있다. 그 외 연안 항로로서는 조선우선(郵船)회사의 부산-여수선, 부산-거제선의 정기선이 매월 2회 발착하는 것과 진해기선조합이 경영하는 마산-진해간의 1일 7회 왕복하는 작은 기선 3척이 있다.

육상운수는 철도를 이용해 삼랑진에서 경부선으로 접속하여 남북 각 도읍과의 교통이 편리하고 도로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인 진주에 통하는 2등도로, 칠원 및 창원으로 통하는 3등도로가 있다. 무엇보다도 차마(車馬)의 통행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특히 마산-진주 간에는 매일 자동차편있는데 거리는 17리(里, 1리 4km) 22정(丁, 1정 109.1m)이며 4시간이 소요된다.

(2) 시가(市街)
신마산과 구마산의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산록이 수려하고 가로의 구획이 정연하면서 시가지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다. 철도에서 동쪽으로 약 1리의 거리에 구마산으로 연결된다. 개항 후 거류지(신마산)를 설치하였으며 신시가지는 대부분 전부 일본인 상가(商街)로서 이루어져있다.

구마산은 옛날부터 군읍으로 알려진 소위 조선 마을로서 시구(市區)의 체제는 협소하고 불결하다. 그러나 조선인과 일본인이 혼거하면서 일반 상업은 신마산에 비해 번성한 편이다.

(3) 시장
신마산에는 어시장․식료품시장이 있고 구마산에는 잡화시장인 세 개의 시장이 있다.
어시장은 마산수산회사의 경영에 의해 수산물의 위탁 판매를 한다. 식료품시장은 생과(生果)․야채류의 위탁판매를 하지만 무엇보다도 매일 개시하는데 비해 구마산 시장은 매월 음력 5일․10일을 기해 개시하고 시장의 일일 판매고는 어시장 약 200원, 식료품시장 약 70원, 구마산 시장은 약 1,600원이다.

(4) 호수(戶數)
3,490호에 인구는 15,890인이다. 그 중 일본인은 1,135호에 4,497명이며 조선인은 2,341호에 11,351명이고 중국인 11호에 36인, 구미인 3호에 6명이 살고 있다.

(5) 관아 및 학교
마산부청․창원군청․마산경찰서․마산지방헌병분대․마산우체국․부산세관마산지서․부산지방법원마산지청․부산감옥마산분감․진해만중포병대대․조선주차군(駐箚軍)경리부마산파출소․마산지방금융조합․동척마산출장소․마산상업회의소․마산부립병원․마산학교조합․공립보통학교․공립마산심상고등소학교 등이 있다.

마지막 부분의 공립보통학교는 지금의 성호초등학교이며 공립마산심상고등소학교는 지금의 월영초등학교입니다. 그리고 이 학교의 고등부는 지금의 마산중학교 전신입니다.

이 두 자료는 전국규모로 한국을 소개하는 문헌 중 마산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숫자와 금액 등에서 사실과 약간의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에 접어든 1910대 마산은 위 책의 짧은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식민지성과 근대성이 혼재되고 있었고 그것이 이 도시의 정체성으로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