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1. 5. 3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인구 변화>

일제강점기 마산의 인구 통계는 마산부가 자체적으로 간행한 몇몇 자료에 남아 있는 기록과 국세조사 등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기간을 단위로 조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전반에 걸친 인구변화의 추이를 알아보기 위한 자료로서는 부적당합니다.
그러나 병합 이후에 매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해서 출판한『조선총독부 통계연보』는 조사
방법이나 조사시기의 간격이 일정합니다.
여기서는 이 자료를 이용해 마산의 인구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1910년대 마산의 인구변화추이입니다.

         연도      한국인       일본인       외국인        합계 일인 비율(%) 
    1910년     10,664       5,941        52     16,657       35.7
    1911년       9,847       6,199        46     16,092        38.5
    1912년         5,672      
    1913년      9,494       5,262        41     14,797        35.6
    1914년      9,626       4,684        59     14,369        32.6
    1915년    11,424       4,677        44     16,145       29.0
    1916년    11,351       4,497        42     15,890        28.3
    1917년    11,450       4,225        46     15,721        26.9
    1918년    10,932       3,795        49     14,776        25.7
    1919년    12,054       3,831        82     15,967       24.0
    1920년    11,923       4,172        70     16,165        25.8
 10년간변화    111.8%       70.2%      134.6%      97.0%  

(
1913년까지의 마산부 경계는 1914년 이후의 경계와 달리 상당히 넓었기 때문에 1911년부터 1913년까지의 마산인구는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1911년과 1913년의 통계연보에는 ‘마산’ ‘구마산’ ‘창원’ ‘진해’ ‘웅천’을 각각 별도로 구분해 놓았으므로 ‘마산’과 ‘구마산’만을 본 표에서 적용하였습니다. 하지만 1912년에는 이런 구분 없이 인구의 합계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총인구수가 무려 138,294명이어서 착오를 막기 위해서 표에서 제외시켰습니다.
1912년 일본인 수는 馬山府에서 1913년 간행한『馬山府勢一覽』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

에서 알 수 있듯이 1910년 마산의 인구는 16,657명이었는데 다음해인 1911년에는 16,092명으로 약간 줄어들었다가 1910년대 내내 14,000여 명에서 16,000여 명에 머뭅니다.

그 중 일본인은 1910년 합방 당시 5,941명이었다가 다음해인 1911년에는 6,199명으로 강점기 중 가장 많았습니다. 하지만 개항 종료 후 조금씩 감소하여 1912년에는 5,672명으로 줄어들었고 그 후 1910년대 내내 3,800-4600여명 사이에서 약간의 변화만 보였습니다.
당시 줄어드는 일본인의 정황을『馬山港誌』에서는 ‘퇴거자가 속출하고․․․․․건물을 해체하여 부산과 대구 등지로 이축도 많이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인의 수는 합방 당시 10,664명이던 것이 합방 직후 약간 줄었다가 해가 거듭될수록 미미한 증가추세를 보여 1920년에는 11,923명으로 약간 늘어납니다.

이를 비율로 보면 1910년과 1920년까지의 10년 동안 한국인은 111.8%로 다소 늘어난 반면 일본인은 70.2%로 대폭 줄었고 마산의 총 인구도 97.0%로 줄었습니다.
이처럼 1910년대는 마산부의 전체 인구 중 일본인이 차지한 비율이 시간이 서서히 낮아졌던 시기입니다.


<당시 신마산의 정경입니다. 오른쪽 노란표식점의 건물이 당시 마산부청입니다.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자리입니다>


1913년을 기준으로 볼 때, 마산의 전체 인구 중 일본인이 차지한 비율은 35.6%였습니다.

인천(43.2%)․군산(51.2%)․목포(43.2%)보다는 낮았지만 전국12부(府, 전국12도시) 평균비율이 25.4%였던 것을 감안하면 마산의 일본인 비율이 약간 높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1915년 이후 1920년까지 점차 줄어들어 1910년대 말 경에는 연평균 25% 정도로 낮았습니다.

다음 표는 이 시기 동안의 전국 주요도시 인구증가율 비교입니다.
이 표에 의하면 병합된 해인 1910년부터 1915년까지의 전국 평균인구증가율 18.2%와 도시 평균인구증가율 -0.6%에 비해 마산의 인구증가율은 -3.1%로 비교적 낮았습니다. 1915년부터 1920년까지도 전국평균 6.2%, 도시평균 17.5%에 비해 마산은 0.1%로 매우 낮았습니다.

  증
  가
  율
  순
  서
   1      2     3     4     5     6     7     8    9  10  11  12   전
 국
 평
 균 
  도
  시
  평
  균 
1910
 -

1915
  목
  포

285
  청
  진

236
  신
  의
  주
75.2
  군 
  산
48.7
  진
  남
  포
40.7
  원
  산
31.9 
  평
  양
18.6
  인
  천
16.8
  대
  구
6.6
 
  마 
 산
  -  3.1
 
  서
  울
  -13.4
 
  부
  산
-14.8
18.2  -0.6
1915
 -1920
  신
  의
  주
1126
  청
  진
72.9 
  평
  양
56.6 
  대
  구
36.6 
  목
  포
30.7 
  군
  산
28.9 
  원
  산
23.0 
  부
  산
21.5 
  인
  천
16.7 
 서  

3.8
 
  산
 0.1
 
  진
  남
  포
 -3.8 
 6.2  17.5 


도시사학자 손정목 선생은 이러한 마산부의 현상에 대해 진해의 군항화로 개항장이 폐쇄되고 세관의 사전허가가 없는 일체의 선박 출입이 금지된 때문이며, 이때부터 마산의 산업은 어업․양조업 등을 중심으로 한 상업도시로 전환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1910년대 마산은 당시 비슷한 조건의 다른 도시에 비해 인구 성장률이 낮고 합방 이전까지 몰려들었던 일본인들도 더 이상 이주해 오지 않는 등 개항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진행된 도시의 성장이 정체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개항 이후의 꾸준한 투자와 개항기 때 나타난 고도의 인구증가가 어느 정도 일단락된 결과라고 볼 수 있으며, 마산이 경제적으로 투자하기에 더 이상 큰 매력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때 6천명까지 되었던 마산의 일본인들이 거품이 빠지듯 줄어들었지만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내내 마산에는 약 4천명의 일본인 들이 거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이곳 마산을 떠나지 않고 머물렀을까요?
그 이유를 다른 각도로 살펴보았습니다.

당시 펴낸 여러 자료들을 보면 당시 마산의 자연조건을 극찬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朝鮮誌』, 吉田英三郞, 1911년, p.589, 町田文林堂
산수의 경관이 뛰어나고 특히 달구경이 유명하니 조선 제일의 건강지라고 부른다.

『最新朝鮮地誌』, 日韓書房編輯部, 1912년, p.446, 日韓書房
기후가 온화하고 풍광도 밝고 아름다운데 그 위에 생선과 채소가 신선하고 또한 값도 싸기 때문에 그저 살기 좋은 땅으로서 조선에서 흔해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新朝鮮全誌』, 南宮濬, 1913년, p.133, 唯一書館
․․․馬山浦는 馬山府南端의 良港이라 灣內가 深潤하고 風浪을 避하기 최의(最宜)한 故로․․․

『朝鮮鐵道旅行便覽』, 朝鮮總督府, 1923년, p.10, 朝鮮印刷株式會社
자연이 맑고 깨끗한 위에 기후도 온화하고 풍광이 밝고 아름답기에 조선 제일의 별장(別莊)지로 불린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산업과 무역의 정황만으로 보면 1910년대의 마산이 경제적으로 매력을 끌만한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마산을 떠나지 않고 눌러 앉아있었던 4,000여 명 전후의 일본인들 중에는 위의 글처럼 마산의 기후와 풍광, 그리고 자연조건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식품 때문에 머물렀던 것 아닐까요?
사람살기 좋은 곳이라 판단하여 눌러 앉았던 것 아니었나는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물 좋고 공기 좋은 아름다운 마산’이 지금도 이 도시의 경쟁력인데 그걸 살리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도시의 경쟁력은 공장 숫자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Trackback 0 Comment 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5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4) 그렇다면 이교재와 함께 형무소에 갇힌 위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순서대로 적힌 인물들을 검토해 보자. 沈相沅에 관한 기록은 재판 기록 이외에서는 신상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4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3) 이교재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뛰어든 것은 3.1운동 때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의 동지와 더불어 선언서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문..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3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2) 이교재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조선조 말기와 대한제국시기에 진전면 일대에는 몇몇 서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마을 단위이자 문중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문중 중에서도 ..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2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1) 이교재(사진)는 1887년(고종 24년) 7월 9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가 부농의 아..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 1

앞서 9회에 걸쳐 1954년 김형윤 선생이 마산일보에 기고한 '이교재 선생 생가 기행문' 「삼진기행」을 포스팅했다. 오늘부터는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

김형윤의 <삼진기행> 9 / 1954년 4월 23일 (금)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3 이 황교전투로 말하면 삼진방면의 만세의거로서는 제3회째라고 하는데 제1회가 현동 제2회가 진북의 순으로 황교전이야말로 규모를 확대하였든 만큼 피해가 우심(尤甚, 정도가 더욱 ..

김형윤의 <삼진기행> 8 / 1954년 4월 22일 (목)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2 논둑 받아(?) 둑아 날 살리라 심의중(沈宜中)이 불콩이 날 죽인다! 이것은 누구의 창작인지 미상이나 지금도 산야엘 가면 나물 캐는 촌새악씨나 나무하는 목동이나 또는 소먹이는..

김형윤의 <삼진기행> 7 / 1954년 4월 21일 (수)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1 우리일행은 이교재선생의 묘소에 정중한 전배식(展拜式)을 마치고 산에서 마을까지 내려왔을 때에는 사양(斜陽)이 부락에 빚칠 때이다. 일행은 노부인과 작별인사를 할 때 굵은 눈물..

김형윤의 <삼진기행> 6 / 1954년 4월 20일 (화)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6 불우 순국열사들!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백년 일세기를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의 식민지로서 정치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치명상을 입고 경제적으로 약탈착취(掠奪搾取..

김형윤의 <삼진기행> 5 / 1954년 4월 18일 (일)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5 그러면 다른 말은 잠간(暫間, '잠깐'의 비표준어) 차정(次頂)에 미루어두기로 하고 정부에서는 무수한 순국열사에게 무엇으로 보답하였으며 무엇을 하려고 구상하고 있는가? 또..

김형윤의 <삼진기행> 4 / 1954년 4월 17일 (토)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4 이야기는 본선(本線)에서 조금 지났지만은 이교재 선생을 검거한 이만갑이라는 자(者)는 어떠한 자인가를 말 안할 수 없다. 기자(김형윤 선생 자신)와 이만갑은 (지금은 일반..

김형윤의 <삼진기행> 3 / 1954년 4월 16일 (금)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3 산협의 좁은 비렁(&lsquo;벼랑&rsquo;의 방언)을 얼마쯤 나가니, 간데 마다 산은 백구질을 하여 황토만 노출(露出)한 독산인데 이 산 중복(中腹)쯤 되는 곳에 선..

김형윤의 <삼진기행> 2 / 1954년 4월 15일 (목)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2 일행은 이(李) 열사가 생전에 생장하셨다는 봉곡 부락 길가에 정차를 하고, 좁다란 밭 기슭을 타서 가면 신작로에서 불과 3&middot;4분 만에 선생의 구거에 당도된다...

김형윤의 <삼진기행> 1 / 1954년 4월 14일 (수)

오늘부터의 포스팅은 창원지역에서 평생 언론인으로 살다간 목발(目拔) 김형윤(金亨潤) 선생이 남긴 기행문이다.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실렸고, 기고자는 본명 대신 &lsquo;H 생&rsquo;이라 되어 있다. 제목은 「삼진기..

총독에게 폭탄 던진 65세 강우규 의사

부끄러웠던 그날 저녁 지난 9월 19일 옛 서울 역 건물에서 열린 &lsquo;대한민국 건축문화제&rsquo;에 갔다가 역 광장에서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의사 동상을 처음 보았다. 세운지 오래되었겠지만 서울 갈 일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