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돝섬의 전설
돝섬은 마산 앞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섬, 일명 월영도(月影島)라 부르기도 한다.(행정구역 상 월영동에 속해 있기 때문)
1910년경에는 인가가 불과 7,8호였으나 지금은 20여 호. 아동 10여 명의 초등학교 분교장이 있고, 주민은 대개 영세 어민으로 섬의 동남 비탈에 보리와 채소를 가꾸기도 한다.
멸치 어장막이 있어 신·구마산 어판장과의 사이에 배의 왕래가 잦고 여름 한 때는 낚시꾼들과 피서객들이 득실댄다.
섬의 형상은 서쪽에서 바라보면 오리(鴨)가 먹이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인도산 코브라가 염소(羊)를 삼킨 것과 흡사하다.
일본인들은 이 섬이 일본의 비파(琵琶)와 같다 하여 그 어음(語音)에 비겨 미화(美和)라 했으며 마산만의 공원지로 지정하고 매번 벚꽃 묘목을 심었으나 바다의 염풍(鹽風)관계(?)로 자라지 않아 실패한 적이 있다.
이 섬을 어찌하여 돝섬(猪島)이라 하였는지 이 섬에 얽힌 오랜 전설을 소개한다.
옛날 김해 가락왕의 총애를 받던 미희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홀연 그 흔적이 없어졌다.
왕은 낙담 번민한 끝에 사람을 사방에 파송하여 상금을 걸고 수색을 벌였는데, 우연히 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던 어부가 골포(骨浦, 마산의 古名) 앞바다의 조그마한 한 섬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절색 미녀를 봤노라 하기로 왕에게 상주했다.
왕은 급히 특사를 파견하였더니 과연 이 섬의 등(頂)에 미희가 배회하고 있음을 보고 환궁하기를 재촉하였으나, 미희는 눈을 부릅뜨고 홀연 금빛의 늙은 도야지로 화하더니 일성(一聲) 포효와 동시에 먹구름이 충천하는 가운데 두척산(무학산) 상봉의 큰 바위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특사는 기급하여 왕에게 자초지종을 상주했다. 왕은 의심이 덜컥 났다. 당시 백성 가운데 온데간데 없어지는 예가 자주 생겼는데 밤마다 금도야지가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가되, 특히 어린 계집아이나 젊은 부녀자를 좋아한다는 풍설이 퍼져서 왕의 귀에까지 들린 터였다.
왕은 느낀바 있어 군병을 동원하여 두척산의 바위를 포위했다.
활과 창을 비껴들고 일제히 산이 진동하는 고함을 지르며 포위망을 압축, 바위에 육박해 가자 홀연 암상(岩上)에 염연(艶姸)한 자태의 미희가 나타났다.
군병들은 엎드려 환궁할 것을 청하자 순간 늙은 도야지로 화하여 영악한 형상에 날카로운 이빨로 군병에게 달려들 기세라 군병들은 활, 창, 칼, 돌로써 쏘고 찌르고 내리쳤다.
드디어 도야지는 바위 밑으로 굴러 떨어졌고 한줄기 요운(妖雲)이 아지랑이 같이 그 섬으로 뻗어 사라지고 말았다. 바위 틈 굴 안에는 인골이 수북히 쌓여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케 했다.
그 후 그 섬 근방에는 밤마다 도야지 우는 소리와 함께 괴이한 광채가 일기 시작했다.
신라 거유(巨儒)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골포의 산수를 즐기려고 월영대에 향학(鄕學)을 설치하고 기거하던 무렵 어느 초승달 밤에 이 괴이쩍은 현상을 보고 그 섬을 향해 활을 쏘았더니 괴이한 광채는 별안간 두 갈래로 갈라져 사라지고 말았다.
이튿날 고운 선생이 그 섬에 건너가 화살이 꽂힌 곳에 제를 올린 뒤로는 그러한 현상은 없어졌다 한다.
이 섬이 바로 돝섬(猪島)인 것이며 고운 선생이 제를 올린 곳(위치 미상)에 기우제를 올리면 영험이 있다 하여 후세에 오랫동안 그 풍습이 이어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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