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55, 두 의사의 순직

by 허정도 2015. 11. 2.

55. 두 의사의 순직

 

1943년 일본인 태평양 서전(序戰)에서 까불던 것과는 달리 아이러니컬한 패전 기색이 결정적으로 흘러가던 318-.

이날 오후 마산 중앙동에 있는 도립병원 격리병사에 누더기를 걸친 50 가까운 조선인 남자 진객(珍客)을 칼 찬 순사가 호송해 왔다.

남자는 행로에 쓰러져 있는 성명, 주소 미상인 거지요, 순사는 정복을 입은 마산서에 외근하는 판본친차(坂本親次, 36)라는 청년이다. 보고를 받은 삼구미일랑(森久彌一郞) 원장은 이 거지를 곧 장질부사 환자로 진단하고 즉각 격리 병사에 수용하면서 원장 자신은 주치의가 되고 무산애자(茂山愛子) (19)을 주임 간호원으로 임명했다.

수용되었던 행려병자는 날이 갈수록 회복이 빨라 만 27일 만인 412일 퇴원했다. 그러나 주치의 삼구(森久) 박사와 무산(茂山) 주임 간호원은 49일 행려병자로부터 병이 감염되어 드러눕게 되고, 호송한 판본(坂本) 순사 역시 발병 날짜는 알 수 없으나 이들과 함께 격리 병사에 수용됐다.

병원의 전문의사들의 성의 있는 치유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주치원장은 발병 23일 만인 421일 오후 3시 정각에, 무산(茂山) 간호원은 발병 13일 만인 421일 오후 1110, 그리고 호송한 판본(坂本) 순사도 이날 오후 45분에 각각 숨졌다.

<1927년 건축한 도립마산병원 / 현 도립마산의료원>

 

존귀한 희생은 의료계의 귀감이 되었다. 이렇게 도립병원에서 한 명의 걸인 환자를 치료하다 원장 이하 한 명이 뜻 아닌 순직 후 1,2개월 뒤 또 다시 의사 한 사람도 길거리에 쓰러진 걸인 환자를 치료하다가 환자는 회복되었으나 의사 자신이 희생된 일이 생겼다.

현재 성업 중인 마산시 중성동 14번지에 있는 후생의원은 1939~40년 경 경성제대 출신 이병익이 개업을 하려고 강 모에게 병원 사옥 신축을 청부케 했었다.

준공기일이 몇 번이나 지연되므로 이() 의사는 완비된 약품과 의료도구를 사장해 두는 것보다 개업일까지 궁핍한 대중에게 시료하기 위하여 우선 자전거 한 대를 구입하였다.

무의촌 혹은 치료를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순회 치유의 길에 나선지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창원군 웅천부락 어귀에서 걸인 환자를 발견한 것이다. 진단 결과 이것 역시 도립병원 사건과 같은 장질부사로 판명됐다. 얼마간 치료한 결과 완치되어 이웃 부락민들의 칭찬이 대단햇다.

이병익 의사는 환자로부터 감염된 장질부사로 준공이 안 된 병원 사택에서 사망하였는데 운명 전까지도 청부업자가 준공 계약을 어긴 것을 한없이 원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