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치과의(齒科醫)
마산에 치과의가 어느 때 들어왔는지 알 길이 없으나 일본인으로서 신마산에 총포화약상 겸 광산업을 하던 여창(與倉) 모(某)라는 자와 구마산에 고목(高木) 모(某)라는 자가 있었다.
이들은 정규의 치의(齒醫)가 아니라 일본인 당국자의 묵인 아래 버젓이 한글로 ‘병든 니(齒) 빼고 곤치고 새로 해 방은 병원이요’라는 말목을 문 앞에 세워 놓고 성업(?)을 했지만 사실인즉 그들은 구강위생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단순한 입치업자(入齒業者)에 불과해서 전문의가 없었던 때라 충치, 풍치 등의 발취(拔取) 정도도 일반 개업의들에게 의존하곤 했다.
그들 외에도 가짜들이 횡행하던 무렵, 조선인으로서 일본 동경에서 오랜 수업을 닦고 정규의 절차를 거쳐 온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등장한 사람이 약관의 고상목(高相穆) 뿐이었다.
그는 순수한 마산 토착문중 출신으로서 1921년 12월 10일을 기하여 현재의 창동 오생당 약국의 2층을 임시진료소로 하여 개업했다.
종래 무자격자이며 불친절하던 일본인에게 불평 불만을 품은 환자들(조선인, 일본인을 막론하고)은 목마른 자 물을 반기듯 원근 각처에서 그의 진료소에 모여들어 그야말로 락역(絡繹), 부절(不絶), 문전성시의 성황을 이루어 당년 22세였던 청년 의사에게 인기가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4년 후인 1925년에는 윤기학(尹騏學)이 동경치전(東京齒專)을 거쳐 구 삼성병원에서 개업함으로써 고상목과 더불어 구강 치료에 있어서 쌍벽을 이루더니 그 뒤를 이어 1938년에는 이한철, 1941년에는 박수경 등 해방 전까지는 조선인으로서는 단 4명이었으며 일본인으로서는 장로급의 야촌친준(野村親俊)을 위시하여 대석(大石), 복전(福田), 편강(片岡), 삼륜(三輪), 관(管), 촌전(村田) 그리고 일본 사족(士族) 출신이며, 소장(少壯) 야촌정미(野村正美) 등이 삼만 부민과 군민의 구강 질환을 담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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