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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58. 역대 마산부윤

by 허정도 2015. 11. 23.

58. 역대 마산부윤(歷代 馬山府尹)

 

마산포는 요새지로서 일로(日露) 양국의 각축지로 각광을 나타낸 유명한 곳이다.

일본은 재빠르게 선수를 뻗쳐 신마산 현 월영국민학교로부터 서편에 걸쳐 99개년 즉 1세기의 조차조약(租借條約)을 체결함으로써 그들의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영사(초대 三浦, 현 중화소학교), 헌병분견대, 경찰, 세관 등 중요기관을 설치하고 학교조합을 만들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때에 한인들은 신마산을 조계(租界) 혹은 거러지(거류지)로 천칭하였다. 1899(원문에는 1905) 51일에 소위 개항이라고 저희들 멋대로 개장하였던 것이다.

영사제(領事制)1907년 경에 이사로 하여 현 창원군청에 이사청을 구미식(歐美式)으로 건축하고 초대 이사에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이 취임하였는데 이와 전후하여 현 모 군부대에 육군중포병대를 설치하는 한편 자복포의 소부락을 강제 철거시켰다.(위치-현 한국철강 공장 오른편 산림록)

191431일 부군제(府郡制)가 선포되자 청진, 원산, 부산, 목포, 군산, 대구, 광주, 인천, 경성, 평양, 진남포, 신의주 등지와 함께 다른 군보다 인구 분포가 적은 마산포가 부()로 제정되어 말썽이 생겼는데 그로부터 마산부 행정수반은 다음과 같다.

초대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 2김곡 광(金谷 光, 착임전 사망, 원문에는 金谷 充으로 되어 있음), 3대 고진우보(高津友保, 東大 卒), 4대 사도리구(寺島利久, 프랑스 영사관 서기), 5대 판원지이(板垣只二, 원산검역소에서), 6대 문협묵일(門脇默一), 7대 진내리부(陣內利夫), 8대 우야우팔(宇野友八), 9대 등강기일(藤江崎一), 10대 총본태랑(塚本太郞).

1914년부터 1945년 종전까지 30년간 10명의 부윤이 이착(離着)된 데 비해 해방 후 26년간 25명의 부윤, 시장이 이·취임하였으니 1인 평균 수명이 1년에 불과한 단명이라 할 수 있다.

 

<약진 마산의 전모(1941)에 실려있는 3~6대 마산 부윤>

 

이들 부윤 재임 시 업적과 숨은 이야기를 소개하면,

초대 삼증(三增)은 마산만에 정박하는 군함에 탑승할 때면 21발의 예포로 특대함으로써 일인들은 삼증 이사를 재인식하였고, 구마산 조선인 음식점에 주표(酒票, 자가용 면허증)를 처음 발급한 것과 조선 백채(白菜) 김치를 좋아한 때문에 삼증 아래 판임관을 지낸 장재식(고 장지연 장남)은 퇴임한 그의 우거지(寓居地)인 동경에까지 김장 선사를 하였다.

2대 김곡 (金谷 光)은 발령 받고 착임 전 서울서 사망, 3대 고진(高津)은 동경제대 법과 출신이나 부윤으로서 남긴 일도 없고 평도 좋지 않은데다가 턱에 수염이 있었기 때문에 부 협의원(府 協議員) 시절에 염소수염으로 더욱 인기가 없었다.

4대 사도(寺島) 부윤은 구마산 도로확장과 발전에 주력하였고, 현 남성동(元町) 파출소 위치 문제로 경찰서장과 대립이 생겼으나 그의 선견지명은 적중되었다(詳報 別項). 인천 부윤으로 영전되고 6대 문협(門脇)은 착임 1주일 동안 행방불명되어 일반의 염우려(念憂慮) 각 신문은 추측기사로 지면을 성진(盛賑)케 했을 뿐이다.

7대 진내(陣內)는 술 담배는 일체 못하여 취미로는 톱으로 생나무 베기와 미장이 짓이 아니면 낚시질이며 마음에 드는 청년은 주저 없이 직원으로 채용했다는 것이다. 그의 업적은 현 마산여고와 제일여고 앞 도로라 한다.

8대 우야(宇野)는 소장파 인물로서 신의주 부윤으로 영전했는데, 침착하고 사교성도 좋아 기자들에게 매우 평이 좋았다.

9대 등강(藤江)은 대체로 수재형에다 선비형이며 대인관계가 친절하여 호평을 받았는데 재임 중 대일본 애국부인회 조선본부장으로 전출하였다.

10대 총본(塚本), 역대 부윤에 3대인 고진(高津)은 주책 방망이로 일인들의 지탄을 받았는가 하면 이 사람은 고등관이면서 당시 산구(山口)라는 경찰서장에게는 머리를 들지 못하면서 부 직원 중 특히 조선인에게 차별이 심했으며 취하면 파락호의 생동을 하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