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마산의 전기약사(電氣略史)
※ 『마산야화』 원문의 ‘한일와사전기주식회사’는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를 오기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원문을 고쳐 ‘일한와사’로 적습니다.
1898년(광무 2) 1월 18일 한성전기주식회사가 미국인 골부란에 의하여 수도 한성에 창설되고 1904년 7월 18일 이를 한미전기주식회사로 개칭, 1908년 7월 30일 일본인 삽택영일(澁澤榮一)에 의하여 일한와전주식회사가 창설되더니 다음해 1909년 6월 24일에 한미전기를 일한와전이 매수하고 이어 명칭을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日韓瓦斯電氣株式會社)로 변경하였다.
마산에 전기회사의 지점이 설치된 것은 와전(瓦電)의 지점 개설이 그 효시인데 금일까지의 경과를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11년(명치 44) 3월 16일 일한와전(日韓瓦電) 마산지점 설치 인가
동년 3월 30일 마산발전소 신축 낙성
동년 5월 23일 마산지점 영업개시
1915년 9월 1일 경전(京電)마산지점으로 개칭
1937년 3월 10일 남선합동 *주:부산지점 마산영업소로 격하
* 주 ; 전기사업의 통제로 남선의 6개 전시회사(천안전기, 대흥전기, 대전전기, 조선와사, 군산전기, 목포전기)를 합병 발족.
1946년 5월 29일 남선합동을 남선전기로 개칭, 마산영업소를 부산지점으로부터 분리하여 지점으로 승격.
1961년 7월 1일 전기 3사 통합, 한국전력주식회사로 개칭, 부산지점을 경남지점으로 하여 마산지점과 진영변전소를 이에 편입, 따라서 마산지점을 영업소로 다시 격하.
1970년 7월 부산지점에서 분리, 현재의 지점으로 되다.
<창원시 마산합포구청(옛 마산시청) 구내에 설치된 일한와전 마산지점(마산 최초의 전기회사) 터 기념석 / 이 표지판에 기록된 '한일와전 마산지점'도 '일한와전 마산지점'의 오기이다.>
마산에 일한와전의 지점이 설치되고 전기가 들어오게 된 것은 모두 일본인의 손으로 이룩된 것인데, 그 당시 마산에 전기가 필요하다는 일본인의 주장의 일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909년 11월)
마산항은 조선 반도 내에서 기후가 가장 온난하며 풍경이 절가(絶佳)한 천연의 양항(良港)으로서 구시가(구마산을 칭함) 및 신시가(신마산을 칭함)로 구성되어 동쪽은 바다에 접하고 서쪽은 장군산맥 두척산(일명 무학산)을 배경으로 남북 약 1리(韓里 10리)로 해안에 뻗어 있으며 그 남북일대는 군사상의 추요지대(樞要地帶)이다.
즉 월영동 일부에 중포병대가 위치하고 있으며 신월동의 일부까지의 주변은 각국 거류지로 형성되었다. 해빈(海濱)의 시가로서 마산항의 수요지(首要地)에 해당되며 구획정연(區劃整然) 고가(高賈)는 즐비하다.
기온은 극서(極署) 90도 이하(화씨) 극한(極寒)은 0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일본인 수는 1909년 현재 4,321인, 조선인 약 5천인(단 거류지 근린) 정도, 러시아인 1인, 지나(支那)인 60인이다.
출입 선박은 매월 범선 500소(艘), 기선 600톤 내외이며, 일 년간 무역액은 수출 736,973원, 수입 372,680원이다.
석탄 연간 수입량은 11,450톤(당시 톤당 시가 628원), 석유 연간 수입량은 11,100상(箱, 당시 箱當 시가 2원 83전)이며 전화 가입자는 198명이다.
이렇듯 마산항은 일로(日露) 전쟁 후 그 중요성을 아제국(我帝國, 일본)이 인정하는 바 되고 군사 요새지로서 각종 시설을 갖추게 되어 방인(邦人, 일본인)의 이주하여 오는 자 점증(漸增)함으로서 바야흐로 도시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등사업의 필요를 느끼게 되어 이사관(당시 마산주재 일본 영사관 대표)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 마산부 초대부윤)이 경성(서울) 출장시 와전(瓦電) 본사 강기(岡崎) 전무에게 초업(超業)을 종용한 바 1909년(명치 42) 동사(同社) 지배인 심득(心得, 서리) 증책관치(曾柵寬治), 석외(石隈)과장 양씨를 파견, 조사한 결과 전도유망하다는 보고가 있었고, 다시 다음해(1910년) 봄 마산 일본 거류민 단장 전전영일(前田榮一)이 동사를 방문하고 마산의 장래 발전 예상을 개진하여 초업을 절망(切望)함에 강기(岡崎) 전무는 문서로써 동사 고송(高松) 회장과 협의하여 중역 회의의 결의를 거쳐 마산지점 설치를 결정하고, 1910년(명치 43) 5월 16일자로써 마산 이사관에게 전기사업의 인가 신청을 제출하도록 통지, 1911년(명치 44) 1월 20일자 인가 신청에 대하여 동년 3월 16일자로 조선총독부의 마산지점 설치 인가가 내렸던 것이다. (위 사진 설명문 참조)
이와 같이 마산에 전기를 도입하기 위하여 당시 재마 일보인의 꾸준한 노력과 와전(瓦電) 본사 간부들의 협력도 컸거니와 일이 쉽게 결실된 막후에는 이사관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의 숨은 공이 있었다 한다.
삼증 이사는 마산만에 투묘(投錨)하는 군함에 예방할 때에는 군함에서 예포를 쏘아 예우하는 인물로서 마산만에 입만(入灣)한 연합함대 사령관 동향평팔랑(東鄕平八郞)과의 대화에 있어서도 너, 나 식의 평교간(平交間)으로 대하는 것을 본 막료와 동석한 재마 일본인 유지들을 놀라게 했다는 숨은 이야기가 있거니와, 그가 공용으로 상경한 틈을 타서 전기회사를 설득한 것이 마산에 전기를 도입하는데 적지 않은 힘이 되었으리라는 일반 시민의 여론은 인가 신청 불과 2년 미달에 성취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수긍이 갈 만하다.
이웃 진해시의 경우, 적요한 한 어촌에 불과한 현동(진해의 舊名)이 일로(日露) 전쟁 후 일본 해군의 군항으로서 각광을 받게 되고,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들게 되어 일약 마산에 비견할 만한 도시의 여건을 갖추게 되자 재진(在鎭) 일본인들은 전기 도입에 맹운동을 벌인 결과 1922년 11월 7일 마산발전소의 송전으로 지점을 설치하게 되었다.
우리 땅에 전기가 도입된 이래로 삼십여 한리(韓里)를 격(隔)한 거리에 6,600 볼트의 전력을 송전한 것은 마산발전소가 진해에 송전한 것이 처음이라 한다.
끝으로 마산지점 개설 당시의 상황(규모, 운영상태 등)은 다음과 같다.
지점(발전소)의 위치
마산부 도정(都町, 중앙동) 3정목 4의 11
마산부 도정(都町, 중앙동) 3정목 4의 18
(현재의 마산시청 전역 / 마산합포구청)
가(假)사무소 마산부 본정(本町, 월남동) 3정목 27
초대 지점장 령목 량(鈴木 亮)
발전로점화(發電爐占火) 1911년(명치 44) 5월 23일
연돌 고(高) 90피이트, 동철제(銅鐵製), 직경 36피이트
용수(用水) 장군천 상류 축제(築堤)
전주(柱) 303본, 지주(支柱) 18본
고압선로 6리(里) 23정(丁) 46간(間)
저압선로 1리(里) 32정(丁) 12간(間) 9척(尺)
업적 5월 23일 점화 및 업무 개시일로부터 동년 7월 31일까지 70일간
업무 수입 3,632원 36전, 전등 사용 274호, 총등수 966등
전기요금액(1911년 5월 23일 현재)
용도별 |
촉광별 |
월간요금(1등) |
용도별 |
촉광별 |
월간요금(1등) |
헌등용(軒燈用) |
5촉광 |
70전 |
실내용 |
30촉광 |
2원 90전 |
실내용 |
5촉광 |
90전 |
실내용 |
50촉광 |
4원 50전 |
실내용 |
10촉광 |
1원 40전 |
실내용 |
80촉광 |
6원 50전 |
실내용 |
16촉광 |
1원 80전 |
실내용 |
200촉광 |
15원 |
실내용 |
20촉광 |
2원 |
실내용 |
200촉광 |
22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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