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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49. 공동우물 순역

by 허정도 2015. 10. 5.

49. 공동 우물 순역(巡歷)

 

마산은 옛날부터 산수가 좋아 술맛을 가로되 제호미(醍醐味, 우유를 정제하여 만든 고급음료)라는 정평이 있다.

이것은 오로지 양조장 경영주의 인격이라 할 수 있으며, 술을 빚는 杜氏(두씨 상용일어)심오한 기술이기도 하지만 근본을 따져보면 이 지방의 물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산 전체를 감싸돌고 있는 두척산(일인이 명명한 무학산)의 청정한 지하수가 혹서(酷暑)에 한랭하고 심동(深冬)에 미온(微溫)하여 과연 이곳의 모든 서민(棲民)의 생활 주변이 이웃과 돈목(敦睦)하여 상호부조하는 정신이 구현되어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 고을의 식수가 나쁘면 인심도 거칠다는 것은 즉 물이 나쁘면 모든 양조장, 간장, 된장 특히 술이 나쁘게 되는 것이며 술이 나쁘면 음주자의 주벽이 거칠게 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두척산 서편 산하, 감천이라는 소부락에서는 아직까지 주정뱅이나 범법자가 없다는 것을 보더라도 사람의 됨됨과 성격은 산세와 수세의 영향에 좌우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점은 미루어 마산의 모든 주질(酒質)이 다른 곳보다 단연 우수하다는 것이며, 특히 마산 일주(日酒)가 국내는 물론 일본 내지(內地)와 만주 대륙에까지 침투되었다는 것과 마산의 일인 양조장 총수 15개소(2개소는 귀국 관계로 폐업)가 집중해 있다는 것이 마산 물맛을 웅변(雄辯)하는 것인바 시내에 산점(散点)하고 있는 공동 우물을 한번 둘러보기로 한다.

지산(咫山, 玆山洞 소재 或稱 尺山洞) 동사 앞과 윗 동의 두 개 우물인데 세칭 몽고정(속칭 광대바위샘)과 은상이골 샘 등 4개처 우물은 고려연합군이 굴착한 것이며 오동동 해변에 있는 갈밭샘은 어느 때 생긴 것인지 불명하다.

<광대바위샘이라고도 불렸던 몽고정 표지판과 표지석>

 

그리고 각 가정이나 각 양조장에도 으레 우물이 있지만 필자로서는 이것가지 통계할 수는 없고, 오직 마산포 시절의 여명기에 발굴한 공동 우물만 들면 다음과 같다.

통샘(명치 41, 서기 1908, 원문은 1909) 마산 본역으로 제1철교 촤측에는 수통샘(연대는 )이 있고, 보통학교 우물(지금은 매몰)과 박석(礴石)거리 혹은 비()집 옆에 있는(성남병원 좌하) 박석거리샘(매몰)과 서성동 동사(洞舍)(매몰, 시민외과 하측), 서성동에 있는 논샘(연대 미상 현재 尙存)과 오동동 파출소 건너편의 공동정(公同井), 장군천변의 사중(沙中), 월영초등학교 정문 철도관사 위 직원 전용의 공동정, 신월동의 신월정, 일본헌병분견대 전용정(專用井)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지하 오수를 막기 위해서 우물 벽에서부터 시멘트 토관을 사용하였으며, 명치 44(1911)에 조선총독부에서는 합병 후 처음으로 각 지방의 공동 우물 수질검사를 실시한 결과

마산은 통샘, 보통학교정, 몽고정의 수질이 가장 우수하다 하여 그 성적 결과를 보통학교 3학년 교실에서 발표하였던 바

그 소문이 퍼져 시내 양조장은 물론 진해읍에서까지 화차로 급수해 가기도 했는데 소화 3(1928, 원문은 1927) 수도 개설 이후로는 공동 우물 이용자가 급감했고, 우물 정수작업이 없는 관계로 식수로써 형무소 재소자 외 수도시설이 없는 소수 동민들만 이용하였고,

비상시의 방화수로서 필요하였던 우리의 공유재산인 공동우물을 어느 일개 몰지각한 자가 불하 사유하여 두터운 방벽을 둘러 쌓았으므로 전 부민의 격노를 샀다고 한다. 

글쓴이 ; 무학산의 명칭을 일본인이 지었다는 설에는 여러 견해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