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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46. 보천교, 47. 김차랑 문고

by 허정도 2015. 9. 21.

46. 보천교(普天敎)

 

중성동 내에 소재(번지 미상)2층 목조건물은 전대미문의 총각회 사건으로 한때 전국적 화재가 되었지만 총각회 변고로 집 주인은 어디로인가 가버려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몇 달 동안 비어있던 이 집에는 회색 도복에 행근을 찬 상투쟁이들이 날이 갈수록 삼삼오오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대체 이들 3,40명 되는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하여 이런 차림의 사람들을 처음 보는 동네 어른 아니 할 것 없이 의아그럽고 기이하게도 여겨 구경꾼들이 뜰 안으로 붐비었다.

말하자면 장꾼보다 풍각쟁이가 많았다. 지식층은 대개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보천교 일명 태을교(太乙敎)라는 유사 종교의 교도들이다.

이 교의 요술에 걸려들면 깍가쟁이(삭발) 신사로 자처하던 자도 양모자발구식(養毛仔髮舊式)으로 돌아가며 전지가옥(田地家屋)이 탕진되어도 아까운줄 모른다고 한다.

교주 차천석(車天錫)은 정읍에 본궁(?)을 짓고 교세 확대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교도들에게 갈구리질을 용서 없이 하여 거부의 위치에 올랐으며,

때로는 대문짝 같은 명함을 가지고 당시 조선총독 제등실(齊藤實)을 항시 면회할 수 있었으니, 이것 보천교주 차천석은 호랑이 몸에 날개 달린 격이 되었다.

제등(齊藤)은 제등대로 고등정책이라 할까 이러한 교로서 조선인의 정신을 미혹케 하여 반일 사상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속셈으로, 이런 우매하고 사기적인 인물을 만나게 하니,

총독을 빙자하여 양민의 재산 약탈, 양민 부처녀(婦處女)의 정조를 멋대로 골라가면서 유린하는 자와는 멍군 아니면 장군인 꼴이다.

이리해서 교세는 욱일승천하기도 했는데 공중 높이 솟은 태양이 점점 이웃 서산으로 기울어가는 1923년경에 전기와 같이 포교소를 설치하고 밤이나 낮이나를 가리지 않고 주문만 암송하므로 인근 주민들에게 미음을 사고 있었는데, 그때 청년들 사이에는 한창 반종교 운동이 싹트기 시작한 때다.

더욱이 태을교나 보천교 등 혹세무민하는 유사 종교단체 두상(頭上)에 가일봉(加一棒)이 없을 수 없던 시기라 팽삼진 등의 총각단 외 김기호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직접 행동을 잠행하였으니 대항할 사람도 없이 패주하여 버리고 교()의 집기, 간판 그리고 교도 등이 혼비백산한 것도 시세(時勢)의 적의(適宜)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1926년에 간행된 보천교 전라북도 일반문서>

 

 

47. 김차랑(金次郞) 문고(文庫)

 

현재 동명으로 신창동 북서쪽 회전무대가 가설된 일인 극장 환서좌(丸西座) 건너편 목조 단층 아담한 곳에 소규모의 도서관이 있었으니 명칭은 김차랑 문고라 하였다.

비교적 한적한 위치에 있었고 공기가 맑아 독서자에게는 호적(好適)의 곳이다.

설립자의 씨명(氏名)은 잘 기억되지 않으나, 설립자에게는 독서를 좋아하던 귀한 자식이 불행히도 요절함에 따라 어린 자식을 추억하고 기념하는 정신으로, 노부부의 거실만 남겨놓고 주택 전부를 독서실로 개조하여 노후 은거 생활비 외의 남은 재산은 모조리 도서구입비에 충당하였다.

도서는 무료로 편람케 하였으며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을 영원히 그리고 다정하게 부를 수 있도록 긴지로오(金次郞) 문고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장서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소위 금서인 사상서적도 구비되어 있어 이해할 수 있는 자에게는 공람(供覽)케 하였고, 동경 삼성당 출판 후 대백과 사전이 평범사에서 발행되는 즉시 구입하여 빈한(貧寒) 서생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감회 깊은 일이다.

인구 3만 미달의 조그마한 도시에 개인 문고가 설치된 것도 타지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인데 하문려 이 문고에 비치된 서적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저 동경제대 헌법 교수 미농부달고(美濃部達告) 박사 저서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이란 케케묵은 책이 있었다.

내용은 학자 입장에서 타의 없는 학구적인 저술로 되어 있으며, 그 강의도 학생들은 그저 평범하게 들어 넘겼을 뿐이었는데 때마침 일본 귀족원(현 참의원)의회가 개회되자 국수파 우익의원들은 이것을 정사(政事) 도구로 삼아 진보 사상가들을 타도하게 되니

전국 각 일간지는 연일 대서특필로 보도함으로써, 일본 각지 고본상(古本商), 특히 신전구(神田區) 일대는 천황기관설을 찾는 학자, 지식인들로 길을 메웠으며 책대(冊代)도 고본(古本)이면 1, 2원에 불과하던 것이 10, 20원까지 뛰어 올랐다는 것이다.

그 인기 높던 문제의 서적이 이 김차랑 문고에 있었던 것이다.

이 문고도 설립자의 운영을 떠난 노년기의 무상과 허무를 느꼈음인지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문고는 마산부가 인수하여 종전까지만 해도 매년 평균 열람자 6천명 내외 중 아동이 4천명 정도였으며 장서는 약 35, 6백 권이었다.

부의 예산은 겨우 2백원(소화 13년경)이었으니 운영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예산이 풍족하였다 하더라도 때는 전쟁을 벌인 일본 군국주의 치하에서 별다른 진전은 볼 수 없었을 것이므로 부 당국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해방이 되자 부 직원 모씨와 그 친지들에 의하여 완전 폐허가 되고 만 것은 두고두고 원통한 일이다.<<<

<미농부 달고(美濃部 達告) /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 일본어:てんのうきかんせつ 덴노키칸세쓰)은 일본제국 헌법 하에서 확립된 일본의 헌법 학설이다. 통치권(주권)은 법인인 국가에 있으며, 일본 천황은 그러한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서 다른 기관의 도움을 얻어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독일의 공법학자 게오르크 옐리네크로 대표되는 국가법인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