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48, 일류 요정들

by 허정도 2015. 9. 28.

48. 일류 요정들

 

국치병합 전만해도 요정이란 이름은 없고 오직 점잖은 측에서 한담이다 혹은 밀담을 하려면 소위 들어앉은 집이란 곳을 찾는다.

그런 곳은 거의 은군자(隱君子)나 노기(老妓)라는 중년층 여자가 손님을 영접하고 손님의 청에 의해서 기녀를 불러 주효(酒肴)를 벌이며 여기에 북, 장고, 가야금, 거문고 등이 따른다.

말하자면 매우 우아한 현상이다.

차차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화류의 격조가 저질로 흐르기 시작했다. 인육을 현금과 직접 거래하는 청루(靑樓)가 생기고, 게다가 격을 조금 올린 니마이모찌(이중이란 말인데 연회장 작부도 되고 매춘도 할 수 있다는 의미) 감찰제도도 있었다. 이것은 기녀의 자유 여하로 행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권번이니 조합으로 일본 화류계 풍습이 반도 산하로 물려 닥쳐 도시란 도시에는 기생권번이 없는 곳이 별로 없었으니 자연 요정이라 것도 생기게 되었다.

<신윤복의 청루소일>

 

마산을 말하면 신마산에는 개인 위주의 망월루, 탄월, 이예옥(伊豫屋), 동운과 구마산 시장 입구에는 지금은 상포(商鋪)가 즐비해 있어 석일(昔日)의 면모는 없어졌으나 일인 요정(목조 2) 기미노도(君乃都)가 상당히 광역(廣域)을 점하고 있었고 전 남선인쇄소 자리에 일복(一福)이라는 한소(閑少)한 곳도 있었다.

한편 구마산의 조선인이 경영하는 요정은 현재 오동동의 춘추원 자리에 1914년경부터 여관 겸업을 하던 목조 2층의 산해관이 있었을 뿐이다.

8,9년 뒤 1921년경에는 서울 이영석이라는 사람이 행정(幸町, 수성동) 해안에 초가를 세 얻어 한양관이라는 옥호로 영엄을 개시한 것이 손수 서울 요리점의 최초인 것이다.

숙수(熟手, 지금의 쿠크)의 솜씨가 좋았던 관계로 손님이 일약 성시를 이루어, 중성동 손 삼찰 댁(고 손문기 先考 직명) 2층 집으로 이전하였다가 영업이 은진(殷賑)함에 따라 해방 후까지 계속하던 현 반도여관 자리로 이전한 것이 한 때 유명한 한양관이다.

현재 제일은행 담 뒤 고무신 도매상 근처에 강옥진이란 여자가 경영하던 고급 요정이 있어 인기는 한양관과 쌍립되었으나 불행히도 변태적 성생활에 탐닉되어 축적한 재산은 그 남자에게 사기당하고 파산하고 말았다.

한양관주(漢陽館主) 이씨도 사망하고 강옥진 여사도 없어졌으나 한양관은 성업이고 요정 이용도가 늘어지니 동성동 건너편에는 장춘관, 그리고 현 동양여관 자리에는 천해장이, 그리고 현재 오동동 해동의원 자리에 대동관을 이어 군소 요정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겼다.

중화요정은 전 일본 요정 기미노도가 서방(緖方)여관과 대도(大渡)여관으로 변한 자리에 아세루(亞細樓)가 생기고 오동동에 봉래관(蓬萊館), 시민극장 건너편에 삼합루(三合樓) 그리고 대유루(大有樓) 등이 있었다.

아세루 주인은 중국무술 18괘에 능숙했던 인격자이며 붕래관 주인은 마산서 사망, 시체는 본국으로 송장(送葬)했으며, 두 형제는 일중전쟁 발발 직전 국민당 정부 소환으로 귀국했는데 그 후 풍문에 들리는 말에는 왕조명(汪兆銘) 정권의 반대파에 가담, 활약하더란 것이다.

아세루는 없어지고 봉래관은 박삼조가 194610월 폭동 때까지 경영하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