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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44. 마산의 풍물첩, 45. 국어상용의 가

by 허정도 2015. 9. 14.

44. 마산의 풍물첩(風物帖)

 

풍신제

정월 대보름이 논 깜박하는 사이에 지나가고 정월 그믐날 밤이 오면 내일은 영등제(靈登祭)-속언에 바람 올리는 날이라 하여

각 가정의 규수들은 깨끗한 그릇을 가지고 인근 공동샘에서 정화수와 사람 발에 밟히지 않은 황토를 치마폭에 싸가지고 와서 주방 선반, 붉은 베조각 앞에 촛불을 켜고 정화수와 황토를 얹어놓고 별도로 술과 음식을 베풀어 그 해 풍년을 비는 것을 말해서 풍신제라고 한다.

이들 처녀들이 정성 모아 길어오는 정화수에다 마을의 짓궂은 머슴애들이 불결한 손이나 픍을 길어서 순진한 처녀들을 울리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여기 이들 처녀애들이 길어오는 물은 은상이샘, 수통골샘, 통샘, 광대바위샘, 자산동샘, 그 외 깔방샘 등이었다.

 

단오절 

오월 단오절은 시내 놀이터로 전통이 있는 속칭 자산동 놀음터(놀이터)와 추산공원(射亭) 그리고 상남동의 숲에서 그네뛰기 행사를 하는데

이날은 주로 신혼한 색시나 미혼 처녀들이 판을 치며 남자의 그림자는 극히 드물고 이북의 단오놀이에는 비견도 할 수 없으리만치 빈약하다.

 

칠월 백중놀이 

6월 보름날의 유두날은 별로 행사가 없는 듯하나 7월 보름이 되면 마산 시내와 근교의 농민들이 반룡산(盤龍山, 현 팔용산) 동부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어복골(魚伏谷-현재 마산 제1 수원지)에 모여 농악과 주식으로 하루해를 유쾌하게 보내는 것이다.

이날은 그해의 오곡백과가 풍양(豊穰)하였다는 의미로 백종(百種)이라고 하는데 일설에는 농민들이 한여름 내내 논바닥의 진흙만 밟고 그해 농사의 풍작을 점친 이들은 이날부터 진흙밭을 깨끗하게 씻고 나서 발뒤꿈치가 희어졌다고 해서 백종(白踵)날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토속 행사는 시대 변천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45. 국어(國語) 상용(常用)의 가()

 

 

극동의 도국(島國) 일본이 1910년 대한제국을 지도에서 삭제한 뒤로부터 민족혼과 언어말살 음모의 제1단계로서 소학교과서 역사를 변조하고 교내에서 생도들의 조선어 사용을 엄격히 단속했다.

그들의 국어를 강제 사용케 하되 만약에 이를 준수치 않는 생도에게는 생도 자치회라는 것이 린치를 가하기도 하여 부모들을 분격케 한 일이 성호국민학교에서 있었다.

이때 피해 아동은 오동동 최 모이며 담임선생은 김 모라는 여 선생으로 되어 있으나, 린치까지 하게 된 것은 역시 동직(同職)인 국어 상용 운동자로 널리 알려진 김병운(金丙云) 선생의 명령이라고 하였다.

김병운 선생은 학교-직장에서는 주위의 안목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가정에 돌아가서도 가족 전원에게 철저한 국어 상용 실천가로서 충선을 다했는데 그 증거로 그 당시 무산일보(日文) 기사로써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동지(同紙) 사회면 좌편 내리다지 기사 중단(中段)에 가족사진까지 게재했는데 그 기사 내용을 요약 소개하면 이러했다.

우리 조선인은 숭고한 국어(일어)를 아무리 권장해도 잘 실천이 안되는 것은 크게 잘못이다. 하루라도 빨리 조선어를 없애고 국어로 통일되어야 할 일이다. 우리 가족기리만은 조선어를 쓰는 일은 절대로 없으나 내외간에 간혹 말승강이를 할 때는 깜짝 잊어버리고 엉겁김에 조선어를 쓰는 때가 있다. 이런 때는 아, 아뿔싸, 잘못되었구나 하고 후회한다 고 했다.

이 기사가 보도된 후로 일인들이나 일인 아닌 그들 동조자들로부터 국어 상용의 집으로 그 가정에는 찬사와 영광이 집중되었고, 동시에 그 가장들은 이 명예스러운 일이 영세불후의 장한 일이라고 하였으나 영고무상(榮枯無常)한 세태라 일본은 패하였다.

그 후의 국어 상용의 여왕은 아직도 미련을 가졌는지 그 사람이 아닌 제3자는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