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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43. 방앗간

by 허정도 2015. 9. 7.

43. 방앗간

 

지금은 모든 것이 기계화하여 옛날에는 상상도 못하던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옛날 우리 가정의 일상생활을 돌이켜 보면 하루 세 끼의 식생활 중에서도 주부들의 고통의 하나는 쌀과 보리를 찧는 일이었다.

절구통(石造, 木造)이 가정마다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웃집이 아니면 삯방앗간을 이용해야만 했다.

방앗간의 종류는 마산의 경우 전() 삼성의원 앞집에 쇠방앗간이 있었는데, 방아의 윗돌은 미끄럽고 대석(臺石)은 거친 요철(凹凸)형으로 깎아놓은 위에다가 보리 도는 벼를 깔아 놓은 원형의 절구 둘레를 소가 돌아가면서 찧게 되어 있었다.

다음은 남성동 천주교회 근처에 디딜방아(足踏式)가 있었는데, 중후한 목조로서 절굿대는 Y자형이며 천장에 달린 두 개의 줄을 잡고 두 사람이 밟도록 되어 있다.

또 완월동 동구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레방아가 있었는데, 종전 후 무학산의 울창한 수목들을 모조리 도벌해 버린 뒤로는 물이 줄어 수력을 이용하지 못하는데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4,5초 간격을 두고 쿵쿵 울려오는 디딜방아 소리, 쿵 소리와 함께 물수레에서 촬하고 쏟아지는 청아한 물소리, 유유히 돌아가는 쇠방앗간의 정경들은 실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인상을 남겨주었다.

 

꽁달콩 꽁달콩 찧는 방아

언제나 찧고서 모실(마슬) 갈까.

시어미 죽었다고 춤추었더니

보리방아 물줄 때 생각나네.

 

시집 온 젊은 며느리가 방아 찧기에 지쳐서 시어머니 넋두리를 하던 사설도 이제는 예 노래가 되었다.

60여년 전, 그러니까 1912~13년께부터는 하목(夏目)이라는 일인이 처음 전기 모터로 정미소를 만들었고, 조선 여아들을 선미공(選米工)으로 두었으며,

신마산에 일인 뢰완이정미(賴緩二精米), 구마산에 길촌정미(吉村精米), 그리고 중국인 양씨가 경영하던 지성동(志成東) 정미소 등이 족출(簇出)하였다.

그 뒤로는 대규모의 도정(搗精)공장으로 발전함으로써 방앗간들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석일(昔日)을 회상할 따름이다. <<<

<도정공장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