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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39. 미기 인기대회 40. 축산여담

by 허정도 2015. 8. 24.

39. 미기(美妓) 인기대회

 

1917년 초하(初夏) 지방신문 일문(日文) 남선일보사(南鮮日報社) 주최 재마산 현역 예기(藝妓) 인기투표 대회가 있었다.

물론 투표로 결정하는 것인데, 투표용지는 관제엽서에다 11인으로 제한한바 그것은 당연한 절차요 상식이다.

처음 발표에는 신마산에 산재한 망월루, 탄월 등의 일본 예기들이 판을 쳤으나 1, 2일 뒤에는 구마산에 있는 모 권번 재적자인 배학희가 경쟁을 물리치고 단독 등장, 조선 예기의 후보자가 되었고 일인 예기 후보 3명도 도중에 낙오되어 구마산 대 신마산, 조선인 대 일본인으로 획연히 대립,

매일 신문 발표를 보면 막상막하, 보는 자로 하여금 가슴을 졸이게 한 것은 요사이의 선거운동과는 근본 유추가 현저하게 달라서 여기에도 민족적 흥분을 일게 하였던 것이다.

이 격렬한 미기 선발 게임의 여덕(餘德)으로 우편국 창구에 폭주한 손님과 소인(消印)하는 계원은 진땀을 뺄 정도요, 엽서의 매점전(買占戰)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일본인들도 상당히 활약하였으나 이것은 성인층 이상 인물들의 움직임에 반해서 조선 인물에서는 17,8세 정도 이상의 인물들이 동원된 것과 후보자의 자태와 용모가 발군(拔群)한 것이 주효하여

결승 투표에서 조선인 미기가 4만 몇 천표로써 2만여 표차로 단연 압승하였던 것이다.

 

 

40. 축산여담(畜産餘談)

 

도수장(屠獸場) 

명치 말기만 해도 일정한 도수장(屠獸場)이 없고 노상이나 빈터(광장)에서 소를 도살하여 한 개의 생명을 처치하게 처치하는 광경이 공개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의 경향 각처가 같았을 것이다.

마산은 부조례(府條例)에 따라 자산동 민가와 거리를 두어 현 마산중학교 근처에 도살장을 두고 전임도부(專任屠夫)는 복전(福田)이라는 일인이었고, 일일 평균 1두 혹은 2두 그리고 돼지 정도를 처치하여 오다가 소화 11(1936)35천원을 들여 현재 장소로 신축 이전한 것이나 시세(市勢)의 팽창으로 이것도 불원 근교로 다시 이전돼야 될 형편이라 한다.

그때 소 한 마리 시세는 80원 내지 90원 내외였다.(소화 15,6년 현재)

 

축산조합 

오동동 순사 파출소 앞에 일인들이 축산조합을 만들어(명치45, 대정 5,6) 마산서 처음으로 바크샤와 요크샤 종돈(種豚)5,6필 가량 사육했다.

사료는 중포병대의 군일들 잔반(殘飯)을 운반하였는데 왜소한 토종만 본 부민들은 이 비대한 박래(舶來)의 진객(珍客)을 보고 놀랬다는 것이다.

 

 

양계장 

양계장은 뭐라해도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국민학교)가 효시였다.

한일 합방 기념으로 소위 은사수산양계장(恩賜授産養鷄場)이라는 간판을 붙인 이 양계장은 연못 곁에 세운 계사(鷄舍) 2동으로, 사육정(飼育庭)은 서남으로 분리하여 백색 레구홍, 한편에는 백색 부리마우스를 각각 20()씩 길렀다.

닭이 노는 뜨락 위에는 청포도 나무가 덮여 여름에는 그늘지게 하고 사욕처(沙浴處)도 있었는데 계란은 교사들이 점심 때 먹기도 하고 생도들이 팔아오기도 했다.

계사 소제 때 잘못하여 레구홍과 부리마우스가 교접되는 때가 있는데 부화된 병아리는 같은 백색임에도 검은 털이 생기는 일도 있어 미물들에도 혈통과 정조가 없이 혼혈이 되면 잡종이 생기는 모양 같기도 하다.

보통학교 외에도 양계가나 애호가 집에는 투계(鬪鷄) 마레 종(일명 한또닭)과 중국 양자강 이남 소산인 쿠오친(1무게 9근이라는 중국어 발음), 칠면조 등도 한때는 사육하였으나 지금 거의가 백색 레구홍 일색이며 완상용 장미계(長尾鷄)는 본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