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산왕대신(山王大神)
구마산 추산동 공신당산(公神堂山) 산정직하(山頂直下)에는 거대한 고목이 있고 그 고목 밑에 산제당(山祭堂)이라는 조그마한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약 2,3백년쯤 될 것이라고한 고로(古老)들 말이 기억된다.
이곳은 부녀자들이 장수식재(長壽息災)를 산신에게 제사하는 곳으로 무당들의 돈벌이에 가장 적지라고 했다.
대개 보면 제당(祭堂) 밑 조그마한 정화수 옆에서 제(祭)에 필요한 재료를 요리하는데, 솥은 흙으로 만든 지괴솥을 사용하며 제 올리기 전에 제 나이대로 대잎(竹葉)을 따서 제단 앞에 놓고는, 무당의 지시대로 몇 번이고 예배를 올림으로써 복을 받으며, 화를 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랜 전통을 이어 왔던 것인데 뜻밖에도 수성동에 거주하는 지학삼(池鶴三)이라는 사람이 제멋대로 점유하고는 산왕대신(山王大神)이라는 큰 글을 써 붙여 놓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읽으면서 어리석은 부녀자 신도를 모으고 있다.
이 사람은 어떠한 종파에 속한 교인이 아니라 그 실교(實敎)와는 극히 거리가 먼 사람이며, 직업은 착실한 재목(材木) 상인인데 밤 사이 궁리 끝에 미신에 심취하기 쉬운 유사 샤머니즘에 눈을 뜬 것이,
즉 공짜로 산제당을 점유하여 왈(曰) 산왕대신을 만들어 놓고 축재할 꿈을 설계하고 있었으나 이것마저 출발 수개월 만에 청년들의 미신 타파의 회오리 바람에 휩쓸려서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1930년대 산제당>
38. 세 가지의 기형상(畸型相)
마산은 세 가지의 자랑거리와 세 가지의 기형상(畸型相)이 있었다.
세 가지의 자랑거리란 것은, 신마산 천변(川邊) 벚꽃과 마산의 청주(정종)이며 화재사건이다.
다음 세 가지의 기형상은 공동묘지이며, 각 주택 틈틈이 점재(点在)한 청루이며, 시가지 중심지에 용립(聳立)한 붉은 장벽의 형무소라는 것이다.
셋째로 유명했던 화재, 특히 구마산 한인상가에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화재가 연발했는데 이유인즉 화재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이 방화한 소행이라는 것이 나중에사 발로된 것이다.
다음 세 가지 기형상은 각종 상선들이 마산만으로 입항할 때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공동묘지로서 불쾌감을 준다.
당초에 일인들은 이곳에 형무소를 건립코자 하다가 오동동 703번지를 택한 것인데 대단한 애국자들은 일인들이 고의로 조선인 밀집처에다 그 음산한 건물을 둔 것이라 하여 불평도 한 것이었다.
<붉은 벽돌 담의 마산교도소 정문>
사실은 그 당시 마산의 현황을 돌이켜 볼 때 그 근처에는 인가가 없는 돌자갈 뿐으로 일인 당국자들로 그 방면의 발전 전망을 참작한 점에서 선견지명이 결여되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리하여 1924년 4월 12일에는 추산정 근처에서 상기한 공동묘지, 형무소, 유곽 아닌 집창가(集娼街) 이전을 촉구하는 부민대회를 열고 취지서를 당국에 전달하였으나 예상했던 그대로 예산 사정 운운하며 간단명료한 답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해방 덕으로 청루는 자연 없어지고 형무소는 내서면 벽지로 이전했고, 공동묘지도 시대 진전의 추세로 교외로 물색되어 불원장래(不遠將來)에 이장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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