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줄다리기
정월 대보름날, 마산의 자랑일 수 있는 행사는 부산과 마산의 줄다리기(색전, 索戰)라고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부산은 줄다리기가 끝나기만 하면 으레 불상사를 야기시킴으로써 중간에 와서 당국이 중지 시켰으나 마산 같은 소도시로서는 그런 일이 시종 없었다.
줄다리기 시초는 동부 소년과 서부 소년들이 좁은 골목길에서 시작하여 구마산 우편국 앞길이 신작로로서는 그 위치가 줄다리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으므로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몇 해가 지난 뒤 바다가 매축되어 공지가 1만2천 평이나 되었으므로 이곳에서 여러 가지 체육행사가 벌어졌다.
제1차로 하목(夏目)이라는 일인 미곡 창고(현재 尙存, 지금은 없어짐)가 들어섰을 뿐 대중을 수용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는 곳이었다.
대규모의 색전장(索戰場)은 이곳으로 결정이 되어 이 날이 오면 좌청룡(동), 우백호(서)의 기치가 충천하고 동서 각 군부(郡部) 주민과 응원병이 늠름한 차림으로 지축을 울리며 진군하는 광경이야말로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지방 군부(郡部)의 응원 위치도 동서로 갈라지지만 김해, 창원, 진해 등지는 동부로 구산면, 삼진, 함안 등 주민은 서부로 합류하였다.
더욱이 서부에는 모든 관공서가 있었고, 또 일인 주민이 집중되어 있어 대회 전부터 본부를 찾아와서 경비 일단(一端)을 희사하기도 하며 참전을 하는데 중포병대와 철도감청(鐵道監廳)에서는 마니라 로오프의 대여와 병사까지 출동시켜 주었다.
이리하여 승리자는 개선군으로 미희를 담가(擔架)위에 태우고 패자의 부락에 시위를 하면 패자 측은 상여를 앞세우고 상복으로써 패한 것을 진사했다.
여기에 승리측의 시위 때의 구호가 우렁차고 멋이 있다.
내용인즉 ‘이겼네! 이겼네! 서성 양반 이겼네. 썩었네! 썩었네! 대빈밀게가 썩었네’
이렇게 해서 밤이 지새도록 놀이를 벌인다. 이러는 동안 매축지에 건물들이 들어서자 장소는 부득이 식은(殖銀)-남성동 파출소 도로를 분기점으로 동서 대전장(對戰場)으로 정했던 것이다.
그때 동측에서는 급경사지가 있어서 서부에 퍽 유리한 여건이 되었지만 승부 성적 통계를 보면 동부가 패한 기록이 많았다.
줄다리기에 수만 명이 운집하는 데는 반드시 보통인보다 일당천(一當千)의 숨은 역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교어(鮫魚)를 방불케 하는 줄대가리 밑에 수십조의 다리가 붙어 한 다리에 평균 백여 명의 청장년이 붙어 분전하다가 가지줄이 끊어지면 이것을 재빨리 끌어 들여 이어주는 숨은 장사도 있었다고 한다.
근대 도로가 나기 전은 이 도로가 간선도로였는데 대회 준비 중 일체의 차량이 차단되고, 미신이지만 여성은 요사하다해서 아무리 바쁜 일이라도 현장을 우회해야 했고, 잘못하여 줄에 저축하거나 줄을 넘는 경우 여성 군중의 징계를 받아야 하는 율법이 있었다.
진군 신호가 내리기 앞서 여성들은 꽤 무거운 돌을 치마폭에 싸서 적군이 끌어당기는 힘을 저지하는 전략도 썼다는 것이며, 노변의 2층과 지붕은 관중들이 온통 점유해도 이 날만은 가주(家主)들이 친절을 베푼다고 했다.
이렇듯 부민의 연중 행사는 우리 고장 단합정신의 요체가 되었지만, 국내 유일한 토속의 명물도 불어 닥치는 세파의 변천에는 어찌하는 수 없이 1925년 이루로는 완전 종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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