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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33. 마산 명주

by 허정도 2015. 7. 27.

33. 명주(銘酒)

 

마산의 미각이라면 으레 술을 첫째로 꼽을 수 있다.

이 명주(銘酒)를 양조하는 두() 씨의 비법도 비법이려니와 우선 마산의 물이 좋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흘러가는 냇물이나 공동정수까지 감로수하고 해도 과장은 아닐 듯하다. 마산근교의 감천리(甘泉里)에 세차게 흘러내리는 냇물로써 술을 빚어놓은 탁주 맛은 흡사 청량사이다 맛이다.

완월 폭포수 역시 수세가 거창해서 기관차에 그 물을 넣으면 오르막길도 능률을 올린다고 한다.

공동우물 중에도 광대바위 샘물(통칭 몽고정), 구 형무소 앞 통샘물 그리고 지금은 매몰된 성호초등학교 샘물은 1911년 조선총독부의 기술원들이 수질 검사를 한 결과 가장 우수하다고 발표한 일이 있다.

이 물은 형무소 재소자들의 음료수로서 상용(常用)하였고, 몽고정 물은 구마산 석교(石橋)양조장(후에 문삼찬 경영의 부용 양조장)과 원거리인 신마산 김촌(金村)레몬공장에서 급수하여 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진해에서 양조장을 하는 일인 청주공장에서도 십 석()짜리 술통을 무개화차에 십 수개씩 수송하기도 했다.

<석교(石橋)양조장(후에 문삼찬 경영의 부용 양조장)>

 

한국이 세계 지도에서 말살되기 전후해서 시내에는 벌서 그들의 청주공장이 십 수개 처가 설치되고, 계림팔도(鷄林八道)에는 그들의 시판(市販) 시장이 한국의 청주계에 단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총 생산고 6할을 점유하였으며, 멀리는 만주대륙에까지 침식하였다.

마산의 기후와 수질이 양조에만 최적합할 뿐 아니라 결핵요양지로서도 동양 유수의 한 곳이라고 마산을 통과한 독일인 모 의사가 50년 전에 술회한 것을 볼 때 마산 주민은 보건도시의 혜택을 받고 있으면서도 감각치 못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 종전(종전) 당시까지 시내에서 일인들이 출고한 청주 상표로 대표될만한 것을 한 가지씩만 들어보기로 하자.

寒牧丹(原田), 艶綠(紫崎), 鷄林(西田), 鶴正宗(永武), 井筒平(淸水), 櫻正京(山邑), 一新(理硏酒 - 富和), 醉香(平井), 大典(石橋), 彌生(千島園 - 上野), 朝乃灘(井手) 이상인 바

양조량은 매 공장에서 평균 1년에 500석 이쪽저쪽이며, 술 상호는 기억할 수 없으나 지금 관광센터 푸른 집 자리에 오반전(五反田)이라는 사람과 법원 뒤 정문 앞에 등전(藤田)이라는 양조장은 그 당시 사입(仕入)에 부주의한 탓으로 당장에 파산하고 말았다. 그대 자금이 4만원이라 했다.

 

 

사입(仕入)에 정혼(精魂)을 경주(傾注)할 것

 

우리나라 주부들은 가을 장대미의 호불호가 일년 운세를 점치는 모양인데 일인들도 양조 때 일본서 두() 씨와 공장들은 목욕재계하고 외부인의 일정 출입을 엄히 금하고 전 정혼(精魂)을 기울여서 조심조심 제를 올렸다.

생각컨데 이것은 미신이라기보다 불결을 방어하는 위생문제가 아신가 싶은데,

이 사람들은 일년에 한 차례씩 공동 제사를 올리는 곳이, 신사 옆에 사당을 짓고 송미(松尾)라는 주신(酒神)을 모시고 대자(代子)가 제복(祭服) 제모(祭帽)를 쓴 신주가 제문을 낭랑히 읽으며 엄숙히 제사를 집행해야 하는데도,

소화주류(昭和酒類)에서는 자기 공장 내에 설단(設壇)한 곳에 아침저녁 제반(祭飯)은 물론 일 년에 한 번 있는 연중행사를 망각함으로써 송미(松尾) 주신(酒神)의 격노를 받아서 공장과 창고 일부가 소실됐으니 신에 불손한 최과를 받았다고 야유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한인 최초의 청주공장

 

해방 직전만 해도 국내에서 일본 술 즉 청주공장을 설치해 볼 생각조차 한 사람은 한인으로서 언감생심 이런 때에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에 공장을 운영해서 일인 업자와 판로 경쟁을 한 한인이 있었다면 이것은 장한 일이 아닐까?

그 장한 일을 거사한 분이 지방의 선각자 김치(金致) 씨였다.

그 분은 개화인으로 말하면 모든 일상생활을 현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실천한 분인데,

일본 주조업자도 포화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는 와중에서 전 빈전주조장(濱田酒造場, 현 중앙극장 우측 내림 길)이 생기기앞서 빈약치 않는 주조장을 설치, 상당히 은진(殷賑)하여 내일에 촉망을 걸었엇다.

원인 미상의 화마(火魔)의 변고로 창고에 저장한 수백 석의 청주가 급한 홍수처럼 흘러 큰 내를 이루고 건물은 삽시에 오유화(烏有化)하고 말았다. 실로 통탄할 일이었다. <<<

 

<1920년대 마산의 일본인 양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