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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번창기(1908) - 17 - 제8장 호구(戶口)

by 운무허정도 2021. 12. 13.

제8장 호구(戶口)

 

본 항구의 일본인은 개항 당시 모두가 한국인 집을 빌려서 살기 시작했으며 신시(新市)에 열 몇 명의 러시아인과 한두 명의 영국, 프랑스인이 거류할 뿐이었다.

다음 해 신시에 일본인 가옥이 두세 채 나오게 되고 광무 7년 즉 1903년에 이르러 그 인구가 많이 늘었지만 신시는 여전히 러시아가 독점하다시피 하여 러시아 군함의 출입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기생이 러시아 수병에 의해 욕을 당한 사건도 터져 영사관의 유시(諭示)는 있었지만 일본인들은 다 신시에 이사해 오는 것을 꺼리며 청국(淸國) 사람과 함께 마산포에서 같이 살며 서로 상업에서 경쟁하고 있었다.

그 당시 경찰관이란 오직 영사관을 지킨다는 직무를 수행할 뿐 일반인들에게 대해서는 아주 오만불손하며 뇌물이나 주지 않으면 그들을 지켜 준다는 일은 거의 바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테지만 거류 일본인은 거류민회란 자위(自衛) 자치기관을 만들어 각자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다.

그러던 중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여파로 보호국의 생산력 증진 쪽으로 무게의 중심이 옮겨지자 인구는 날로 달로 늘어나게 되었다.

특히 영사관을 폐지하고 이사청을 두게 되고 경찰의 방침도 역시 인민보호주의로 되돌아와 이주민의 수도 격증해서 아래와 같은 결말을 불러오게 하였다.

다만 1907년 6월 말 현재의 수치이니 조사에서 누락한 자, 치바마을(千葉村)과 일본전관지에 그 후에 새로이 이주한 자 등을 합치면 80호 이상, 300명은 더 늘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1905년 4월의 호수는 겨우 340호, 인구는 1,248명이며 그중 남자가 717명, 여자가 531명이다. 1906년 1월 이후의 증감표는 다음과 같다. 작포리(鵲浦里)는 중포병영의 사격장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한인들은 현재 퇴거 중이다 얼마 안 가서 이전하고 나면 호구는 아예 없을 것이다. 또한 월영동의 일부도 병사 건축을 위해 퇴거 중이라 호구 수에 큰 변동이 있을 것이다.

 

위 인구 중에서 제일 많은 것이 야마구치(山口) 현 출신자들이다. 그 다음으로 에히메(愛媛), 히로시마(廣島), 오카야마(岡山), 시마네(島根), 오오이타(大分), 후쿠오카(福岡)의 각 현이다. 오사카부(大阪府), 효고(兵庫), 시가(滋賀), 가고시마(鹿兒島), 구마모토(熊本) 현 등의 출신도 있기는 하나 전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오사카 이동 지역은 아주 적고 관동지방, 동복지방인 니이카타(新瀉) 현, 나가노(長野) 현 등과 북해도 출신을 합친 동복인회 출석자는 60명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일곱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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