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 3
■ 마산포 - 1
신시(新市)의 북쪽 약 2km 거리에 있는 본래의 마산이다.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 일본 해군성 수로부가 간행한 조선의 해안, 항로, 도서 등의 지리정보를 망라한 수로지로 동일 명칭으로 1894년, 1899년, 1907년 세 차례 발행되었다)에는 마산포읍이라 적었지만 한인(韓人)들은 모두 다 마포(馬浦) 혹은 신마포(新馬浦)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인은 구마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왜 구마산이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날마다 번성해가는 본래 마산에 낡은 구(舊) 자를 붙이는 이유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각국 거류지를 신시라고 칭하는 것에 대하여 붙인 구 자일테지만.
각국거류지를 신시라고 부르는 것은 과거에 새 시장을 연 데에서 기인한 이름이며 결코 본래의 마산에 구 자를 붙여 신구(新舊)로 구별함은 그 뜻이 틀린 것이다. 마산의 옛터는 산호동이며 한인들은 현재 이곳을 구마산, 구마포(舊馬浦), 구강(舊江) 혹은 고관(古館)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본 마산포는 본마산(本馬山)이라 함이 지당하리라 생각한다. 사물의 본말시종(本末始終)을 잃지 않도록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원칙에 기초하여 보통 불려지고 있는 마산포라고 적기로 했다. 이는 곧 한국 정부가 일컫는 창원항(昌原港)이고 항내(港內)는 6개 동으로 나눈다.
성산(城山), 성호(城湖), 오산(午山), 중성(中城), 동성(東城), 서성(西城)
위의 6개 동을 합쳐서 한인의 호수가 약 천호, 인구는 사천구백 명이며 영남 굴지의 대도회이다. 이곳은 옛날 합포군(合浦郡)의 항구였으며 몽고가 일본을 침략할 때 정동행영(征東行營)을 설치하고 일본 정복을 위한 몽고 대군이 출범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두 전쟁에서 패배로 끝나서 합포란 이름이 좋지 않다 해서 새로 이름을 고안하더니 누워 있는 작은 산의 모습이 누운 말과 같다고 오산(午山)이라고 개창하게 된 것이다.
이 산의 동남 아랫목에 바다에 면한 작은 마을은 오산포(午山浦)라 불리었다. 그곳이 바로 오늘의 산호동인데 조선 왕조 초기, 지방에서의 세공미 집적지로 삼아 창고들을 만드니 관민이 점점 모여들게 되어 대도회를 이루게 된다. 그 후 역병(疫病)이 유행하여 날마다 많은 사람이 죽게 되어 무당을 불러 점을 치니 오산의 오자가 흉하다고 했다.
미신에 빠지기 쉬운 한인들은 이름을 마산으로 고쳤다고 전해 온다. 몇 차례에 걸친 지방제도 개정의 결과 산호동과 마산포는 그 지역을 달리하게 되었지만 옛적에는 산호동은 마산포 안에 있었으며 잡초가 무성한 큰 모래벌판이었다.
지금은 지구(地區)를 달리하고 있지만 시장이 열리는 날은 서로 연관되어 산호동은 5일이, 마산포에서는 10일로 교대로 열린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마산포 5, 10일 장이라 부르고 손님은 4, 5리 사방에서 모여 들어 경남에서는 진주에 다음 가며 통영과 백중세를 이루는 장인 셈이다. 거류 일본인 상인이며 청나라 상인도 온다. 이 시장에 의존하여 편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1901년 산호동. 삼각형으로 틔어나온 부분이 오동교 아래쯤이다. 오른쪽이 돝섬>
□ 산호동(山湖洞)
옛날의 오산진(午山津)이며 이곳을 구마산, 구마포, 구강, 혹은 고관이라 부른다. 뒤로는 마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바다에 면한, 마산의 이름이 기인한 곳이다. 일본인 거류자는 아무도 없다.
□ 상남동(上南洞)
마산포의 북쪽 수백 미터 거리에 있으며 일본인은 한 사람도 거류하지 않는다.
□ 교방동(校坊洞)
마산포의 서쪽 산과 경계에 있고 여기에도 일본인은 한 사람도 거류하지 않는다.
□ 척산동(尺山洞, 현 자산동)
마산포의 서남쪽 수 킬로의 거리에 있으며 길에서 서쪽으로 백 미터 가량 들어간 곳에 일본인 호구가 몇 개 있고 그 동네 안의 길을 일본인들은 척산가(尺山街)라고 부른다.
□ 신월동(新月洞)
신월계곡을 사이 두고 신시 북쪽에 인접하여 길에서 산기슭 쪽으로 뻗어 있다. 길가에는 한일인(韓日人)이 뒤섞여 살고 있으나 앞으로는 일본 사람들이 매수하여 한인의 모습은 점점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이 동네는 원래 한국 우체사(郵遞司)가 있던 곳으로 그 토지와 가옥은 우편 사무가 일본 정부에 위탁함에 따라 마산우편국이 보관하게 되었고 현재는 우편국 직원들의 숙소로 충당하고 있다.
뒤쪽에 보이는 높은 양식건물은 마산포의 전 해관장인 모 독일인(개항기 우리나라 해관에서 활동한 독일인 아르노스-H.G. Arnous. 그는 1889년경부터 부산해관에서 근무하다가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마산해관의 책임자로 있었다)의 소유였다가 그 후 오랫동안 일본인 마산해관지서장의 숙소로 빌려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다섯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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