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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번창기(1908) - 6 - 제1장 마산의 대관

by 운무허정도 2021. 9. 27.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 4

 

■ 마산포 - 2

□ 월영동(月影洞)

신시의 서쪽부터 남쪽 일대를 포함하는 큰 마을이다. 그 일부는 일본의 전관지(專管地)이기 때문에 1908년(명치 41년) 7월 퇴거령으로 인해 서쪽의 산 위로 이전하게 되고 까치나루 고개(鵲峴)의 근위(近衛, 메이지 시대의 화족이자 정치인이었던 고노에 아쓰마로-近衛篤麿, 근위독마 1863~1904. 월영동과 자복포 사이의 언덕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언덕 아래에는 웅장한 중포병 영소(營所)가 건축될 것인지라 원래 일본인의 모습이 없었던 이 마을에 점점 일본 가옥이 건축 중에 있고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곳이다.

□ 자복포(滋福浦)

깊은 산과 청송이 우거진 이곳은 물아일체의 경지를 자아내는 곳으로 월영동의 일부와 같이 일본 전관지였기에 퇴거령이 내려져 이미 가옥을 뜯어내는 경우도 있다. 또한 그 폐가에 일본인이 임시 거주하기도 한다. 이 마을은 연병장에 붙은 사격장으로 사용될 것이니 1년도 못가서 그 모습을 달리할 것으로 보인다.

□ 율구미포(栗仇味浦)

원래 러시아의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로 면적은 삼십만여 평에 이른다. 러일전쟁 개시 전에 러시아의 동양함대가 여기에 임시사령부와 병사(兵舍)를 건축했다. 신시에는 여관이나 잡화점을 경영하고 전축자재인 벽동 제조 가마를 만드는 등 위세가 왕성했으나 개전(開戰)이 되자마자 그 사령부는 일본 해군에 점령되어 진해 방비대(防備隊)의 사령관실로 되었고 지금은 거제 송진만(松眞灣)의 들머리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1900년 신마산 일대. 오른쪽에 길게 나온 곶이 이심이산(以深山)이다>

 

이상의 각 마을은 현재 일본 민단(民團) 행정이 미치는 곳인데 이밖에 일본전관거류지라고 하는 곳이 있다. 이는 전기한 월영동 일부와 자복포 전부를 가리키는바 북으로는 마산만 해안 근위(近衛) 언덕 꼭대기부터 남으로는 구산산맥의 중복까지 이른다.

동쪽으로는 이심이산(以深山)의 정상을 구획하니 전에 러시아 전관거류지였던 땅과 경계로 한 그곳의 면적은 십만 평에 불과하다.

그러나 앞면이 해상을 엄호하는 보루로서 마산만 중앙에 월영도(月影島, 돝섬)가 가로 누웠고 이와 마주한 칠원반도(漆原半島) 사이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곳으로 요새지라 불리기에 족하다. 이곳은 개항 당시 일본 상인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박간방태란, 1860~1943, 일제강점기 부산과 마산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일본 경제인이자 정치인)의 명의로 이미 매수된 것이었다.

1900년(명치 33년) 5월, 주한 러시아공사 파블로프(1860~1923, 러시아 외교관으로 1899년~1904년 주한 러시아 공사를 역임하였다)가 자국의 동양함대사령관과 마산에서 만나 마산주재 러시아 영사 소코프(생몰미상, 마산포 개항 이후 마산포에 설치된 러시아 영사관 부영사. 1900년 6월 대한제국 외부外部 통상국장 정대유와 율구미호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율구미 일대 30여만 평의 부지가 러시아 단독 조계로 설정되었다)와 함께 제멋대로 답사, 측량하고 6만여 평의 주위에 표지를 세워 이 땅을 점거하려 했다. 사카다(坂田重次郞, 판전중차랑, 사카타 주지로,, 1869~?, 일본의 외교관. 부산 일본영사관 마산분관이 마산영사관으로 승격된 이후에 초대 마산영사로 발령받아 1902년 11월 후임 미우라 미고로-三浦彌五郞 가 부임할 때까지 근무했다) 영사는 그 불법행위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분쟁이 생기게 된 것이다.

소코프는 공사 파블로프가 경성 정부와 미리 선정하여 매수에 관해 조회 중이라 주장하며 이 땅을 완강하게 점거하려 들었다. 사카타 영사는 끝까지 납득할 수가 없었고 이 분쟁은 다음 해인 1901년까지 이어져 기어코 소코프를 굴복시켜서 포기하게 하고 러시아로 하여금 새 터를 율구미포 일대로 선택할 수밖에 없게 하였으니 참으로 통쾌한 일이다.

이 분쟁은 세상에서 마산포사건으로 불리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분쟁의 진상을 캐보면 양측이 조선해협에서 제해권을 얻고 그 근거지를 만들어 보자는 의도와 다름 아니다. 당시 일본인 사이에서 유행했던 노래가 있다.

비분강개하며 내려다보는 러시아의 배

마산포사건에 분개하여 사카타 영사는 결심했네

그래서 소코프가 울고 간다

흐린 날의 구름이 가고 햇빛이 찬란하네

이슬이 마르기 전 늦은 아침에 애석하게 떠난다니

소코프 눈물 흘리네

이때부터 이 지역에는 대일본전광거류지란 간판이 세워졌으나 지상권 매매가 없어서 일본인 거류지는 한 명도 거류를 허가받지 못하는 군사 전용지였다.

다만 한인 마을인 월영동과 자복동의 인민들이 세상 물정을 모르고 거주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중포병영과 요새포병영 건설 때문에 한인 마을은 퇴거 명령을 받게 되었다. 월영동 마을은 이미 서쪽의 산에 이전하게 되고 자복동도 그와 같이 현재 이전 준비 중이다.

그 구역 안의 근위 언덕 동쪽 끝머리에는 까치마루곶(鵲峴末) 일명 근위곶(近衛岬)이 있다. 바다 멀리 등대가 해상에 솟아나 있는데 그 주변은 편탄한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때 진해만을 근거지로 삼은 도고(東鄕) 사령관이 이끄는 주력 함대가 사용한 저수조(貯水槽)와 저탄고가 있었다.

그 후 이 시설들은 제거되었고 등대도 파도에 파손되어 이 부근은 볼품없이 되었다가 병영 공사가 시작되면서 등대는 복원되고 해안가에 뻗어지는 평탄한 도로가 등대 쪽으로 개통되니 그 면목을 일신한 셈이다.

마산항이란 민단제도(民團制度)로 된 구역은 전기한 바와 같으나 마산만의 월영도는 어떤 내용일까?

월영도는 의친왕의 영지(월영도가 의친왕가의 영지였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1906년을 전후한 이 시기 의친왕가는 가덕도에서 통영에 이르는 방대한 연안어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일본인 어업자 카시이 겐타로-香推源太郞에게 임대한 상태였다.

이 해역은 대구 청어 멸치 등이 풍어를 이루는 황금어장이었다)로 알려졌는데 개방 혹은 대여가 되고 일본인 거주지가 있으면 민단구역이 되겠지만, 전항민(全港民)의 여망은 대여가 이루어져 전체 섬에 벚꽃을 심은 공원을 만들어 마산만 내의 경치를 돋보이게 하자는 데에 있으니 아마도 앞으로 실행에 옮겨지지 않을까 한다.

월영도 주위는 1km도 되지 않으며 제일 높은 곳이 50m 정도로 그 산을 돼지산(猪山)이라 부른다. 고려조 때에 이 섬에 돼지가 있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여러 가지 요괴를 저지르곤 했으나 마침내 당시 합포와 문창 두 군의 군수인 대유학자 최덕린(최치원)의 파마궁(破魔弓, 일본 풍속으로 잡신을 쫓기 위하여 설에 사내아이가 쏘며 놀던 활)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활을 쏜 그 자리에 혼을 모신 사당을 짓고 그곳을 월영대(月影臺)라 불렀다.

월영도는 그 괴담으로도 유명한 섬이다. 이 섬 기슭에는 한인 가옥이 일곱 채가 있으며 어업과 농업을 겸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면서 월영동장의 지배를 받는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여섯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