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마산의 관공서 - 2
□ 러시아 영사관(露國領事館)-신시 다이마치(臺町) 소재
마산이사청의 구청사를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붉은 벽돌 벽에 유리창이 있는 건물이 나온다. 이것이 러시아 영사관이고 지금은 영사 대리인 한 명과 한인 주방장이 있을 뿐이다.
1901년에 지어졌는데 당시는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했으나 지금은 찾아올 사람도 별로 없고 사무도 뜸하여 찬적하기가 이를 데 없다. 경내에는 소나무가 우거지고 초록이 깊어서인지 냉랭한 분위기조차 감돌고 있다.
<러시아 영사관>
□ 창원부청(昌原府廳)-마산포 소재
왕년에 조창 건물로 사용하던 것을 수리해서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가 쓰고 있던 곳이다.
<창원부청으로 사용된 조창 건물의 유정당>
감리서는 광무 2년 즉 1898년(명치 32년) 2월 마산개항 칙재(勅裁)에 의해 설치되어 주로 개항 준비를 위한 사무를 보던 곳이며 그 우두머리를 서리(署理)라고 불렀다. 감리서의 서리는 창원군수를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군내의 사법, 행정 사무가 같이 처리되었다.
그러다가 광무 10년 즉 1906년(명치 39년) 말에 폐지되었다. 동시에 창원군은 창원부(府)로 승격하여 부윤(府尹)을 두게 되었고 마산이사청을 상대로 한인(韓人) 및 한일인(韓日人) 관계의 행정사무를 보게 했다.
또한 창원항재판소를 두고 법무보좌관보로서 이토(伊藤)한 사람이 그 임무를 맡게 되고 주로 한인의 민형사 사무를 종사케 했다.
당시의 부윤은 이기(李琦, 1855~?.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친일관료. 1906년에 창원부 감리 겸 창원항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이어 경주군 군수가 되었고 1908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이후 조선총독부 체제에서 충청남도 평택군 군수와 은진군 군수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씨인데 1908년(명치 41년) 이 부윤은 경주군수로 전근하고 웅천군수 신석린(申錫麟, 1865~1948. 일제강점기 경남 참여관, 충남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친일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1906년 경상남도 진해만 군항지 조사위원을 시작으로 1906년 웅천군수에 임명되었으며 1908년 창원부윤을 지내다가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 10월 경상남도 참여관이 되었다.) 씨가 후임으로 승진해 왔다.
같은 해 7월까지 재판권은 모두 진주구재판소(晉州區裁判所)로 이관되어 지금은 행정사무만을 본다. 웅천, 진해(구 진해현 지역)의 양 군수도 겸하고 있어서 신 부윤은 다망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다.
신 부윤은 경기도의 인간 개진주의(改進主義)의 인맥으로 친일파에 가까워 일본인들의 평도 좋다. 일본 말도 다소 아는가 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여덟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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